오스카와 엘리의 이야기는 유일하게 원작과 영화와 리메이크 영화가 모두 성공한 사례가 아닌가 싶다. 엘리는 오스카에게 잠시만 내가 되어 달라고 한다. 상대방이 한 번 되어 보라고 한다. 엘리는 생존을 위해서 인간을 죽여야만 한다. 그래야 살아갈 수 있으니까. 몇백 년 전부터 늘 그렇게 해왔으니까

 

하지만 인간은 자신의 생존과도 무관한데 사람을 괴롭히고 죽이기까지 한다.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고 사람은 단지 뱀이니까, 바퀴벌레니까, 그들이 인간에게 어떤 유해한 것들을 퍼트리는지 생각하기 전에 그게 바로 너 니까, 너의 모습이니까 공격을 한다

 

눈을 가리고 코끼리를 만져보게 하면 어떤 사람은 다리만 만지고 거대한 벽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코를 만지고 큰 뱀이라고 한다. 코끼리를 코끼리로 인식하지 않고 분리하여 판단을 하는 게 우리, 인간이다

 

아이가 친구들도 다 떠난 놀이터에서 혼자 신나게 놀고 있다. 혼자지만 아이는 따분해하지 않고 지루한 표정도 없다. 아이가 혼자서 놀다가 생각났다는 듯 벤치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엄마가 벤치에 앉아서 아이를 바라보고 있다 나를 봐주는 한 사람만 있다면 버틸 수 있다. 눈물이 여러 날 나겠지만 그 한 사람 덕분에 어떻게든 헤쳐나갈 수 있다. 존버. 존나게 버티면 어떻든 주저 안지 않을 수 있다

 

예전에 쉬웠던 버티는 것이 요즘은 쉽지 않다. 은호의 말처럼 일상은 고요한 물과도 같이 지루하지만 작은 파문이라도 일라치면 우리는 일상을 그리워하며 그 변화에 허덕인다. 우리의 삶은 너무도 약하여서 어느 날 문득 장난감처럼 망가지기도 한다. 버티는 것에 틈이 보이면 절망은 어김없이 틈으로 침투한다. 매일이 고난이고 힘듦의 연속이기에 버티는 것이 예전 같지 않다. 그렇지만 누군가 나를 바라봐 주는 한 사람이 있다면 힘든 하루도 어떻게든 버틸 수 있다

 

삶에서 누군가가 사라지다니 끔찍하지 않니. 어느 영화에서 대사였다. 모두에게서 외면당했다고 깊게 느껴지면 버티는 것이 어렵다. 버틸 수 없는 내일을 맞이하는 게 두렵고 겁이 난다. 그렇게 목숨을 끊어버린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자신을 바라봐 주지 않는다고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한 번 웃음을 짓기 위해 무엇인가를 걸레 짜듯 짜내야 했을 것이다. 더 이상 쥐어짜낼 수 있는 것이 없을 때 하얀 세상을 만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낮과 밤이 하얀 세상으로 불멸하는 세계 속으로 말이다

 

심심하다는 말은 생활이 안전하다는 말이다. 심심하다는 건 무료하다는 것이고 무료하다 이런 느낌이 나쁘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심심한 것은 테러블 한 것에 집어넣는다. 그 말은 생활이 안전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이다. 그건 어쩌면 하루를 버티기 위해 사력을 다해 애쓰고 있다는 말일지도 모른다

 

영화 속 엘리가 버틸 수 있는 건 자신을 바라봐 주는 오스카 덕분이다. 좋아하는 오스카가 바라보기 때문에 어떻게든 하루를 견디고 있다. 원작이 나오고 시간이 엄청 흐른 후 작가는 엘리가 오스카도 뱀파이어로 만들어서 불멸하는 결말로 마무리를 지었다고 한다

 

원작의 본문 중에 - 엘리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손가락을 눈꺼풀에 대고 누른다. 몸으로 느껴지는 근심처럼 엄습해오는 여명. 그는 속삭인다. “하느님, 하느님? 전 왜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거죠? 왜 저는...” 전부터 수없이 거듭해왔다. 이 질문을. 왜 저는 안 되는 건가요? 왜냐면 넌 죽어야 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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