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왕별희를 다시 봤다. 패왕별희는 다시 보기가 참 힘들다. 보다 보면 도즈의 감정에 휩쓸려가기 때문이고, 도즈의 모습이 장국영의 모습 같아서 보기가 참 힘이 든다.
나는 장국영의 영화보다 노래를 먼저 들었다. 그래서 앨범이 몇 장 있다. 요즘도 장국영의 노래를 들으며 출퇴근을 한다. 내 차에는 아직 카세트 플레이어가 붙어 있고 수동기어라서 장국영의 노래와 잘 어울린다.
학창 시절에도 장국영의 노래를 헤드셋으로 들으며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가고 집으로 왔다. 그 앨범을 지금도 듣고 있다. 장국영의 가유희사를 보며 언제나 장국영은 이런 모습으로 죽 나왔으면 하는 생각이 있었다.
한국을 꽤 찾았던 장국영은 손바닥에 한글을 적어 이선희와 함께 노래를 부르고, 이소라의 프러포즈에도 나와서 나왔다. 그때 같이 찍은 사진을 이소라는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고 했다.
재키림과 티키타카하는 재미를 보여주었고, 투유를 불러 우리에게 초콜릿을 좋아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러다 패왕별희를 보면 너무나 아프다.
인간의 체온이 따뜻하다고, 사람의 온도가 온화하다는 걸 시토에게서 도즈는 느낀다. 데이와 우희의 삶을 갈라놓는 것이 힘들고 어려운 도즈는 결국 꿈과 현실의 경계를 없애려 한다.
경극 분장이 짙어질수록 도즈의 삶은 가려지고 우희의 삶으로 환생하는 도즈. 이는 영화와 아티스트 속으로 들어갈수록 비애의 장국영보다 팬들이 기다리는 예술가로 환생하는 모습처럼 보인다.
우희로의 삶은 패왕의 온도를 느끼는 일생이라 영원히 우희로서 살아간다면 더 바랄 것이 없었던 도즈는 그야말로 장국영의 모습처럼 아프게만 보였다.
변혁과 전통의 경계도 사라지면서 두려운 병처럼 퍼지는 집단적 사고의 사람들. 그러나 정작 무서운 건 내 속에 있는 또 다른 나.
나라를 침략한 자들이 아니라 침략당한 자들 속에 껴 있던 선동하는 자들에 좌지우지되는 무지의 인간들이 바로 괴물의 모습이었다.
도즈는 우희로 살기 위해 미쳐가고 그런 도즈를 보는 우리는 도즈의 감정에 휩쓸려 가는 물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