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라면을 먹으며 질질 짜거나, 울컥하거나, 눈물을 흘려본 적은 없다. 라면을 먹다가 눈물이 나오는 경우는 매운 고추를 먹었거나, 매운 김치를 먹었거나, 라면이 맵거나 해서 눈물이 찔끔 나온 것이 아니라면 라면에 울컥한 사연 따위는 없다.
사람들은 맛있는 라면은 누가 끓여주는 라면이라는데 나는 그것도 별로다. 내가 끓여 먹는 게 나는 가장 맛있다. 학창 시절에 친구집에 놀러 가면 누나가 늘 라면을 끓여 줬는데 파를 엄청 많이 넣어서 끓여 줬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라면을 건져 먹으면 라면과 파가 일대 일 비율로 씹혔던 기억이 있다.
나에게 라면이란 학창 시절에는 불편한 어른들과 고기를 구워 먹는 것보다 친구들과 라면을 끓여 먹는 게 가장 맛있었고, 지금의 라면이란 라면은 전부 너무 맛있어서 자주 먹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라면만 하루 세끼 먹고 살아갈 수 있을 정도로 라면은 종류를 막론하고 전부 맛있어졌다. 그러나 매일 라면을 먹으면 안 된다. 사실 매일 라면만 먹어도 괜찮다. 집에서 해 먹는 갖은양념을 부어서 만든 찌개보다 라면이 훨씬 낫다. 그러나 라면은 국물을 마지막으로 끝을 내야 하기 때문에 면만 호로록 먹기에는 아직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영화 속에서도 라면은 캐릭터들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는 고마운 음식이다. 검색을 해보면 영화 속 라면 먹방만 모아놓은 영상이 있어서 보고 있으면 정말 맛있게 보인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라면이 슬픈 음식으로 나오는 경우도 많다.
봄날은 간다에 나오는 라면은 너무나 슬픈 음식이다. 상우와 은수의 첫 날밤의 팡파르는 라면과 함께 시작되었다. 소주와 몹시 어울리는 라면은 금방 식어 버리지만 또 금방 끓어오른다. 그 뜨거운 사랑을 상우는 은수와 한다. 화분의 꽃이 더디게 피듯 상우의 시간은 차근차근 흘러가지만 은수의 시간은 라면처럼 너무나 금방 끓어오른다. 후루룩 입으로 빨려 올라오는 라면은 어느 순간 바닥을 보이는 냄비의 허무를 나타낸다. “라면이나 끓여” 은수의 말에 이제 고작 라면이나 끓이는 놈이 된 상우.
누군가와 마주하고 먹으면 더없이 행복한 라면이지만 혼자 먹으면 더 맛있기에 라면은 슬픈 음식이다. 사랑하는 이가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을 때 끓이는 라면은 슬프다. 결국 상우는 은수에게 “내가 라면으로 보이냐고!” 소리를 지른다. 라면은 그렇게 슬프다. 라면이 끓어오르면 비로소 외로움과 마주하게 된다. 스프를 넣고 팔팔 끓일수록 자극은 극에 달한다. 라면은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없어서 젓가락으로 자꾸 휘젓게 된다.
https://youtu.be/vf6TWmxJZxY
몸부림을 바라는 라면은 외로워서 슬픈 음식이다. 라면의 많아진 종류만큼 슬픔도 전부 제각각이다. 오늘도 우리는 라면을 마주하며 슬픔을 젓가락질한다. 영화 속에서 라면이 그렇게도 슬프게 나온다. 표면적으로 슬프게 라면이 보이는 건 선생 김봉두에서다. 선생 김봉두에서 불쌍한 녀석 소석은 라면이 그렇게 좋다.
김봉두가 김치 없는 라면이 맛없어서 먹지 않을 때 소석은 그 맛없다는 라면을 맛있게 허겁지겁 먹는다. 이 장면은 잘 보면 라면을 먹는 것처럼 보이지 실제로 먹지는 않는다. 황비홍 1편을 너무나 재미있게 봤지만 지금 보면 이연걸의 대역의 티가 너무나 심하게 나는 것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소석은 비가 쏟아지는 날에 김봉두에게 바칠 삼을 캐다가 들어와서 부뚜막에서 쭈그리고 앉아 라면을 끓여 먹는다. 라면은 소석의 삶을 파고든 곰팡이와 같다. 한 번 꽃을 피우면 걷잡을 수 없다. 라면은 슬픈 음식이다. https://youtu.be/yKDQz_v1VDQ
천하의 나쁜 노무 새끼 필제는 화를 내도 웃기고, 짜증을 내면 더 웃기고, 웃기면 대책 없이 웃겼다. 세상 무서울 것 없고 껄렁해 보이는 그 역시 그럴수록 더 슬프다. 그런 필제가 좋아하는 건 왕뚜껑 라면. 필제가 기가 찬 동네에 왔지만 기똥찬 동네라는 것을 알게 되고 거기서 어떻게 해야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지 알게 된다.
그 중심에 슬픈 라면이 있었다. 라면은 필제의 슬픔을 같이 했다. 하지만 필제에게 라면이 없었다면 해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절망의 끝에서 날개를 달고 날아가면 희망이 보인다는 것을 이 영화가 보여줬는데, 실제의 임창정은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일까. https://youtu.be/1FuzcwV3AN4
한 청년이 라면을 끓여 밥상 위에 올려놓다 밥상 다리가 힘이 없어 기울면서 라면이 전부 방바닥에 쏟아졌다.
그저 멍하게 바라봐야만 했다.
그저 멍하게.
5시에는 일어나야 한다.
아침밥은 고사하고 씻고 옷을 입고 마을버스를 타고 대로변까지 나가서 다시 416 버스를 타야 한다. 늘 그 버스를 그 시각에 타지만 언제나 사람들로 터져 나간다. 양보라든가 친정을 찾다가는 버스를 타지 못한다. 버스를 놓치면 그다음을 상상하기도 두렵다. 버스 문에 매달리는 한이 있어도 어떻게든 올라타야 지하철을 탈 수 있다. 비라도 오는 날이면 버스 속은 사람들이 뿜어내는 숨 냄새와 비 비린내로 먹은 것도 없는데 구토가 인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 지옥철에 오르는 순간 전혀 다른 세계가 되어 버린다. 보이는 건 사람들의 등과 길고 짧은 머리카락이 달린 머리통뿐이다. 고개를 꺾어 천장을 바라보며 오늘도 무사히 회사에 도착하기를 빈다. 이렇게 난리를 피워야 회사에 제대로 출근할 수 있다. 소변이 마려워도 참아야 하고 앞사람의 머리에서 냄새가 나도 참아야 한다.
이렇게 모든 걸 참아가며 서울에서 생활한 지도 벌써 7년째다.
하지만 변한 건 아무것도 없다.
나에게 편지를 쓰며, 힘없이 서 있던 나를 안아주며 나의 길을 두려움 없이 상경했지만 현실은 나의 발끝을 벼랑 끝으로 몰고 가기만 한다.
눈을 감으면 보이는 것이 미래인 현재에 오직 희망 하나만 믿고 달려왔다.
하지만 희망이라는 것이 세상에서 배신을 잘한다는 것을 알아버린 순간 이 세계에서 홀로 되어 버렸다.
언제부턴가 세상은 점점 빨리 변해가기만 하는데 나만 같은 곳에 머물러 있다.
레이먼드 카버의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에서 아들을 잃어버린 하워드와 앤이 된 느낌이다.
마음의 심한 공백이 생기면 마왕의 노래를 들었다.
고흐의 불꽃같은 삶도,
니체의 상처 입은 분노도 스스로의 현실에 더 이상 도움 될 것이 없다고 마왕이 말했다.
전망 좋은 직장과 가족 안에서의 안정과
은행구좌의 잔고 액수가 모든 가치 척도인가
돈, 큰 집, 빠른 차, 여자, 명성, 사회적 지휘
그런 것들에 과연 우리의 행복이 있을까, 라며 늘 나의 등을 토닥여 주었는데.
마왕도 가 버리고 남은 것이 없다.
이젠 지친다.
라면이 쏟아졌다.
밥상 위에서 흐르는 라면 국물이 바닥으로 퍼지는 꼴이
마치 머리가 터져 뇌하수체가 흐르는 모습처럼 보인다.
오늘의 선곡은 신해철의 나에게 쓰는 편지
https://youtu.be/HRlwPwqC-Y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