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이 한 장의 사진을 담기 위해 같은 곳을 매일, 두 달 동안 비슷한 시간에 고양이 먹이를 들고 찾아갔던 적이 있었다. 그때는 나도 부지런하여 카메라를 들고 영차영차 열심히 사진을 담고 있었다.
내가 들고 다니는 카메라는 렌즈 찰탁식이 아니고 망원렌즈도 아니기 때문에 피사체를 자세히 담으려면 피사체 가까이 가야 한다. 움직이는 피사체라면 그 피사체와 어떻게든 친밀해져야 하고 친근해지면 움직이는 피사체를 담을 수 있다. 좋은 카메라로, 좋은 망원 랜즈를 달고 뒷 배경의 보케가 몽글몽글 날아가는 사진은 쳐다보지도 않았던 때였다. 자존심이 강했던 때였다.
고양이는 수천 년 동안 인간의 곁에서 인간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지지만 인간과 늘 이만큼의 거리를 두는 요물단지 존재다. 강아지처럼 헤실헤실 오로지 주인의 눈만 보며 24시간이 모자라는 것도 아니며, 포기했다 싶으면 어느새 손을 내밀어 친밀함을 표현하는 기묘한 존재가 고양이다.
그래서 길고양이는 더더욱 가까이 다가가기가 어렵다. 조깅을 그동안 하면서 만난 길고양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 번 올린 적이 있었다. https://brunch.co.kr/@drillmasteer/1269
고양이는 다가가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한 번 친밀해지면 그들 나름대로 그 친밀함을 표현하는 것에 인간의 마음은 또 녹아버리고 만다.
길고양이와 최고의 인연?이라고 해야 할까, 나와 길고양이에 관한 이야기는 차에 치어서 이제 막 죽음으로 간, 그래서 몸이 아직 뜨근 뜨근했던 어미 고양이를 수건에 돌돌 말아서 저수지 근처에 묻어준 일이었다. 이 이야기도 어디선가 풀어놨는데 어딘지 기억이 없다. 그런 것을 보면 나는 머리가 나쁘다, 이렇게 정의할 수 있다.
어미 고양이라는 걸 알 수 있었던 건 죽은 어미 고양이 주위에 이제 태어난 지 며칠 되지 않을 것만 같은 새끼 고양이들이 앙앙 거리고 있었다. 눈망울이 만화에 나오는 그, 그런 눈망울을 한 채 4마리인가 도로에 죽은 어미 고양이 주위에 모여 앉아 있었다. 그 시각이 새벽이었다. 새벽 2시나 3시쯤.
그때 나는 술을 마시고 대리운전을 해서 집으로 가는 중이었다. 대리기사님이 도로에 뭐가 있는데요?라고 하기에 잠깐 내려서 보니 그런 모습이었다. 도로는 아파트 밑의 4차선으로 저녁이 되면 차선 양옆으로 자동차들이 죽 주차를 해서 2 차선 되어버리는 도로였다. 그리고 그 아파트에 내가 산다. 집에 거의 다 와서 그 모습을 발견했다. 그래서 근처에 주차를 시켜달라 하고 대리기사는 가버리고, 나는 술이 좀 취한 상태로 어미 고양이를 들었다. 그때 고양이의 몸이 뜨근뜨근 해서 놀랐다.
아마 맨 정신이었으면 나는 그대로 집으로 갔을 것이다. 순전히 술 때문이다. 술 때문에 새끼 고양이들이 새벽에 다니는 차에 치일까 봐 어미 고양이를 묻어야겠다 생각이 들었다. 단지 그랬을 뿐이다. 조깅을 하니까 수건이 있었고, 그때는 도시락을 싸 다녔다. 숟가락을 주머니에 꽂고 수건으로 고양이를 말아서 아파트 단지 뒤의 저수지 쪽으로 갔다. 만약 비가 왔다면 나는 영화 사이코처럼 보이지 않았을까. 비를 추적추적 맞고 주머니에 숟가락을 꽂고(이건 좀 웃기지만) 힘든 발걸음으로(술 때문에) 고양이를 수건으로 감싼 채 저수지로 오르는 모습.
그리고 숟가락으로 적당한 곳을 찾아서(비교적 사람이 다니지 않을 것 같은, 그리고 나무 뒤에, 그리고 비가 와도 괜찮을 정도의 땅의 굳기 등) 열심히 숟가락으로 땅을 팠다. 정말 미친 듯이 팠다. 술 때문이었다. 술 때문에 그런 약간은 초인적인 땅파기를 할 수 있었다. 수건에 싼 채 고양이를 묻고 흙을 덮고 잘 밟아 주었다. 누가 봐도 원래 땅인 것처럼.
이제 흩어졌던 새끼 고양이들이 이 험한 세상에서 잘 헤쳐 나가기를 바랄 뿐이었다. 하루키의 일큐팔사 2권에 고양이 마을이 나온다. 꼭 저 사진 속의 고양이들을 따라가면 고양이 마을로 들어갈 것 같다. 고양이 마을로 들어가면 상실이 가득한 고양이 마을보다는 고양이의 보은에 나오는 그런 기분 좋은 마을로 이어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