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시감이라는 건 정말 묘한 감정이다. 기시감이 들 때면 온 몸에 있는 힘이 죽 다 빠져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다. 그러나 기시감은 찰나적이기 때문에 몸의 기운도 찰나적으로 빠져나갔다가 다시 원상태로 돌아온다. 기시감이 강하게 드는 때가 있다. 옅게 들 때는 괜찮은데 강하게 들 때면 그 자리에 서서 언젠가 오래전에 들었던 그 감정을 떠올리려 애써보지만 금방, 순식간에 가버리기 때문에 떠오르지 않는다. 그때의 감정보다 그때의 희미한 장면이 떠오른다. 지금의 기시감이 가리키는 그곳의 장면, 그때의 분위기가 미미하게 남아서 지금 이전까지의 세계와는 다른 세계에 서 있는 기분이 들게 한다. 기시감이 강하게 들 때가 그렇다.  


어제 조깅을 돌아오는 길에 보이는 하늘과 부는 바람이 마치 여름의 끝나갈 때의 하늘과 바람과 같았다. 내가 사는 바닷가는 내륙과는 아무래도 다른 계절의 변동을 맞이하게 된다. 여름의 시작에 여름의 끝자락의 하늘과 바람을 만났다. 매년, 거의 매일 달리고 있지만 이런 경우는 드물다. 아니 없었다. 그리고 기시감이 강하게 들었다. 강하게 강타한 기시감은 꼭 제비가 물을 스치듯 훑고 그대로 사라진다. 찰나로 왔다가 가버린다. 기시감의 감각으로 그때의 장면, 그때의 장소를 떠올리려고 하면 어느 순간 다른 생각과 감각이 들어와 버린다. 기시감의 9할은 어린 시절이다. 그 미묘한 냄새와 느낌이 몹시 희미하게 코끝에 맴돌고 있다가 그때의 하늘과 바람을 만난 것일까.  알 수는 없다


본격적인 여름 전이니까 가스층이 퍼지지 않은 하늘과 시원한 바람을 만날 수 있지만 여름의 끝자락과는 다르다. 끝자락에서는 대기에 가득 묻어있는 뜨거움이 서서히 밀려가는 것이 색감으로 눈에 보인다. 아직 대지에 한 여름의 뜨거움이 내려앉기 전의 하늘과 바람은 끝자락과는 분명하지만 다르다. 그러나 어제의 하늘과 바람은 끝자락의 그것이었다. 어째서 시작점에서 끝자락의 하늘과 바람이 나왔을까. 그건 내 속의 알 수 없는 감각의 기관이 그 방향으로 자꾸 틀어서 그렇게 보였을까. 그건 아닐 것이다. 적어도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이런 기시감이 들지 않았으니까. 365일은 아니지만 300일은 밖으로 나와서 비슷한 곳을 조깅을 하고 있으니까.  


그렇다면 무엇일까. 아마도 과학적이고 기후적으로 본다면 올해 5월은 다른 해에 비해서 무더위가 일찍 바닷가를 덮쳤다. 5월에 해수욕장에 사람들이 나왔고 서퍼들이 파도에 몸을 실었고 보트를 타고 신나는 아이들이 있었다. 아무래도 5월에 이렇게 무더웠다는 건 어떻게 봐도 조금 이상한 일이다. 자연적인 현상 – 기후변화 때문일지도 모른다. 온도의 상승과 더불어 녹아내리는 빙하, 그리고 오존층의 파괴와 더불어 미세먼지의 침공 같은 것들 때문에 기후가 이상하게 변해버렸다. 그래서 한여름에 덮쳤던 더위가 물러갈 때 보였던 하늘과 바람이 시작도 하기 전에 나타났을지도 모른다. 여름이 가는 모습을 매년 안타까워하기 때문에 신이 나타나서 여름을 마치 카펫을 둘둘 말아서 가버리는 것처럼 잡을 수도 없다.


기시감이 강하게 든 것은 어쩌면 지구의 기후변화가 사람들, 나에게 알게 모르게 미친 영향 때문일지도 모른다. 기시감이라는 건 정말 도대체 어떠한 감각일까. 기시감을 자주, 강하게 느낀다면 그건 좀 잘못된 것일까. 마음이 불안정하고 불안한 사람에게 더 강하게 자주 나타나는 것일까. 어떻든 기시감이 강하게 들면 찰나적이지만 몸의 기운이 힘 좋은 누군가에 의해 쑥 뽑혀 나가는 기분이 든다. 그리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지만 이미 이전의 나는 아닌 것이다.


집에서 나오는데 화단에 노란 꽃들이 가득한데 빨간 꽃이 위로 위로 솟아올라 피어있었다. 손바닥으로 차양막을 만들어 눈썹 위에 대고 한참을 서서 보고 있었다. 지나다니는 아파트 주민들은 내가 꽃들이 예뻐서 보고 있는 줄 알겠지만 기시감 때문이다. 언젠가 한 번 들었던 지금과 같은 그 감각, 그 기분. 알 수 없는 이 기묘함을 기시감이라 한다면 나는 기시감을 좀 더 길게 느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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