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침없는 세계사의 썬킴 참조
제주 4.3 사건이라고 하는데 이름에 의미가 들어있는 경우가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 당시 제주도민이 30만 명인데 10분의 1, 3만 명이 죽음을 당했다. 공식적으로는 그렇게 나와 있지만 최대 제주도민 10만 명이 죽었다는 것이 비공식적인 수치다. 3명에 1명 꼴로 죽었다. 그대로 죽음을 당한 것이다. 당시에는 남로당 좌익이 죽었다고 했지만 그런 사람들이 3만 명이나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사건은 비극 중에서 가장 큰 비극의 끝에 서있는 사건이다. 그래서 제주도에서는 한 날 한시에 제사를 지낸다는 슬픈 이야기다.
제주도라는 섬은 조선시대에도 내내 아픈 섬이었다. 왜냐하면 유배를 전부 제주도로 보냈다. 광해군도 제주도로 유배를 갔다. 한 번 들어가면 못 나오니까 제주도는 그렇게 슬픈 섬이었다. 제주도민은 일제강점기 때 정말 무지막지한 고생을 많이 했다. 일단 제주도가 일본에서 제일 가까우니까 징용, 징병으로 가장 많이 끌려갔다. 조선 팔도에서도 끌려갔지만 특히 제주도에서 가장 많이 일본으로 끌려갔다. 일본과 가장 가깝다는 이유였다. 지금 현재 오사카에 가면 코리아타운 비슷한 마을이 있는데 거기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제주도민이다. 지금도 제주도 방언도 통하고, 제주도민들이 주로 살고 있다.
태평양 전쟁 말기, 일제 침략이 극에 달했을 때 1945년 원자폭탄을 맞고 패망을 하는데 그전에 최고의 결전을 준비한다. 그 준비를 제주도에서 한다. 밑에서부터 미군이 쳐들어 올라오니까 사이판이 무너졌고, 오키나와도 무너졌다. 일본 본토를 지키기 위해 최후의 방어선이 제주도였다. 그 당시 가미가제 특공대가 있었는데 자살 어뢰정도 있었다. 사람이 타서 끌고 가서 박아버리는 자살 어뢰정을 준비했는데 그 기지를 제주도에 만들었다. 지금도 제주도 해안가에는 그 구멍이 아직 남아있는 곳이 있다. 미군이 올라오면 이렇게 보고 있다가 자살 어뢰정을 타고 출발을 하는데 그 자살 어뢰정의 운전을 제주도민들이 했다. 이렇게 일제강점기에 엄청난 고생을 하면서 버티다가 드디어 1945년에 해방이 된다. 대한독립만세!라고 힘껏 불러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내륙에는 미군이 바로 들어왔지만 제주도에는 한 달 후에 미군이 들어오게 된다. 그 한 달의 공백기 동안 일본군이 그대로 제주도에 남아있는 상태가 된다. 제주도민들은, 해방이 되어서 육지에서는 만세를 부르고 기분 좋게 난리 났지만 제주도에서는 아직 남아있는 일본군 때문에 만세도 부르지 못했다. 제주도민들은 마음 놓고 대한독립만세도 부르지 못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패망해서 돌아가는 거니까 곱게 돌아가지 않았다. 회가 많이 난 일본군은 일본이 전쟁에 진 것에 대해서 분풀이를 제주도민에게 하게 된다. 제주도는 조선시대부터 공물이라고 해서 제주도에서 나는 곡물 내지는 특산물을 중앙정부에 세금으로 보냈다. 그래서 먹을 게 늘 부족했다. 일본군은 패망하여 일본으로 돌아가기 전에 제주도민의 식량을 전부 끌어 모은 다음 거기에 불을 질러 버린다. 제주도민에게 다 굵어 죽으라며 제주도민이 먹을 식량에 전부 불을 지른다.
그렇게 한 달 후에 미군이 제주도에 들어오게 된다. 그때 제주도민은 들떠있는 상태였다. 해방되었으니까. 지금까지의 핍박에서 벗어나는구나. 이렇게 생각했다. 미군이 들어와서 이제 자유로운 세상이 되었다고 여기고 있었다. 미군정이 들어와서 우리나라를 미군이 통치를 하는데 보니까 제주도가 굉장히 큰 섬인 것이다. 당시에는 제주도는 전라남도에 속해 있었다. 전라남도 제주군, 이렇게 되어 있었는데 미군이 제주도에, 이렇게 큰 섬을 왜 전라남도의 섬으로 하느냐, 별개의 ‘도’로 만들자. 그렇게 해서 제주도로 승격을 하는데 이때부터 문제가 터진다. 전라남도 소속일 때에는 전라남도에서 제주도에 지원을 해주었지만 제주도로 승격이 된 후에는 지원이 끊기고 만다. 독립된 도가 되었기에 알아서 각자도생 하라며 지원이 끊어진다. 더 문제는 독립된 도가 되었기 때문에 중앙정부에 세금을 더 내야 했다. 제주도민들은 제주도로 승격이 되면 좋을 줄 알았는데 이게 이상하게 되었다고 생각이 들었다.
미군정이 봤을 때, 당시에 크나큰 전라도를 통치하는 경찰이 몇 백 명 밖에 되지 않았다. 미군정이 보니까 제주도가 전라도와 경상도 같은 도가 되었는데 제주도에 경찰이 너무 없다고 판단하여 미군정이 경찰을 왕창 제주도로 보낸다. 당시에는 경찰을 새로 뽑을 수가 없어서 친일파 경찰들을 긁어모아서 제주도로 내려보냈다. 그 경찰들을 응원경찰이라 했다. 응원경찰 수천 명을 제주도로 내려 보내는데 모두가 친일파 경찰들이었다.
제주도민들은 어이가 없었다. 세금 더 내지, 전라남도에서 지원 끊겼지, 새로 치안 담당하러 내려온 경찰들은 친일 파지. 제주도민들은 미칠 지경이었다. 친일파 경찰들이 내려오니까 제주도민들과 말이 통하지 않았다. 제주도 방언과 서울에서 내려온 친일파 경찰들과의 의사소통이 너무 어려웠다. 이 사람들은 무슨 외국어를 쓰는 거지?라고 응원경찰들이 생각했다. 그래서 제주도 친일파 경찰들과 제주도민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어로 의사소통을 했다. 일본어로는 대화가 되었다.
그 당시 친일파 경찰들도 제주도민을 굉장히 괴롭혔다. 그러면서 2년이 지났다. 1947년 3월 1일. 3.1절에 제주도에서도 독립기념식을 당연히 하고 있었다. 만세, 만세, 만세. 근데 한 장소에 사람들이 우르르 모여 있으니까 친일파 경찰들이 겁을 먹게 되었다. 저것들이 저렇게 모여 있다가 우리를 어떻게 하려는 것이 아닐까. 하며 친일파 경찰들은 두려움을 느낀다. 그래서 모여있는 제주도민들을 감사하라고 기마경찰들을 보냈다. 신나게 제주도민들이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고 있는데 한쪽에서 기마경찰들이 지키고 있었다. 혹시라도 도민들이 소요를 일으키면 조치를 취하라고 기마경찰들에게 대기를 시켰다. 그때 일이 터지고 만다. 한 기마경찰이 말을 타고 코너를 도는데 6살짜리 애를 말의 발굽에 차이고 만다. 그 기마경찰이 그 아이를 데리고 병원을 가거나 조치를 취하면 괜찮았지만 그대로 아이를 밟고 지나가버린다. 만세 운동을 하고 있던 제주도민들이 그 장면을 목격한 것이다. 6살짜리 아이가 말에 밟혀서 저러고 있다. 말을 타고 가는 기마경찰을 따라가게 된다. 사과를 해라! 사과를 해라! 아이가 다친 거 사과를 해라!
근데 기마경찰이 혼자여서 너무 겁을 먹고 말을 더 몰고 달렸다. 그러면서 제주도민들이 더 따라붙게 된다. 잡아라! 저 경찰을 잡아라! 뛰어가면서 외친다. 기마경찰은 잡히면 죽는다며 말을 더 몰았다. 그렇게 경찰서까지 오게 되었다. 근데 경찰서에 있는 경찰들이 상황을 모른 채 보니 기마경찰이 도망을 오는데 뒤에서 주민들이 소리를 치며 달려들고 오니까 이건 소요사태다!라고 판단을 한다. 그래서 바로 발포를 한다. 그때 6명이 죽는다. 그 6명은 길거리에 서 있다가 총에 맞아서 죽었다. 그 6명 안에는 초등학교 6학년 짜리 아이도 있었고, 젖먹이 애를 안고 있던 21살의 젊은 엄마도 있었다. 전부 등에 총을 맞아서 죽었다. 이때 제주도민들이 가만히 있을 수 없다며 전부 경찰서로 가서 책임자를 불렀다. 민간인 6명이 죽었으니 책임자를 나오라고 했다. 당장 진상조사를 하라! 하지만 제주도 경찰들이 경찰서 앞에 기관총을 설치하게 된다. 철커덕, 물러나라 그렇지 않으면 발포하겠다!
같은 민족끼리 해도 해도 너무 하다. 광복을 했는데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그래서 당시에 양심 있는 경찰들과 제주도민 전체가 파업을 하게 된다. 책임자를 찾아내라고. 점포, 식당, 모든 곳에서 생계보다 더 중요한 건 책임자를 찾아내는 것이라며 양심 있는 경찰들도 일을 하지 않고 파업에 동참하게 된다.
그런 소식을 들은 미군정에서는 제주도에 응원경찰을 더 보내고 서북청년단을 찾아간다. 서북청년단은 평안도 출신들인데 거기서 김일성 정권이 들어온 다음에 지주들, 기독교인들이 전부 땅도 빼앗기고 쫓겨났다. 남쪽으로 피난을 온 사람들이 서북청년단이었다. 서북청년단에게 최고의 적은 공산당 빨갱이인 것이다. 김일성 때문에 모든 것을 잃고 밑으로 밑으로 내려왔기 때문이다. 미군정은 서북청년단에게 지금 제주도에서 빨갱이들이 소요사태를 일으키고 있으니 가서 진압을 해라며 미군정은 서북청년단에게 경찰 타이틀까지 준다. 그래서 몇 백 명 서북청년단이 제주도로 내려가게 된다. 그래서 47년부터 서북청년단이 제주도에서 빨갱이 사회주의자로 보이는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들여서 고문을 한다. 말이 ‘빨갱이 사회주의자로 보이는 사람들’이지 눈으로 그게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그저 그렇게 보인다는 이유로 사람을 잡아서 고문을 하고 죽을 만큼 괴롭혔다.
이렇게 응원경찰, 서북청년단, 미군정에게 탄압을 받던 제주도민들이 1948년 4월 3일, 우리 이대로 못 살겠다며 우익 단체를 무장 공격을 하게 된다. 물론 제주도민들 사이에도 좌익이 있긴 있었다. 우익을 공격했던 좌익 남로당 세력도 반성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익 단체를 공격하다가 우익 쪽의 죄 없는 가족들도 죽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좌익과 우익의 무력대결이 발발하게 된다. 4월 3일에.
당시 제주도에는 조선경비대라는 군부대가 주도하고 있었다. 김익열 사령관이 데리고 있던 부대가 있었고 이 김익열이라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었다. 김익열 사령관이 보니 경찰과 주민들이 무력으로 대결을 하고 있는 모습에 좌익을 찾아간다. 찾아가서 지금 투항을 하면 아무 처벌도 받지 않게 하겠다, 내가 다 책임을 지겠다, 같은 민족끼리 왜 이렇게 서로 죽고 죽이느냐,라고 했다. 그러니까 좌익의 대장도 우리도 실수한 게 있으니 좋다, 우리도 무기를 내려놓고 투항을 하겠다, 그러니 우리의 신병을 보장해 달라. 김익열 사령관은 내가 군 책임자로서 당신들의 신병을 보장해줄 테니까 걱정 말고 총 놓고 한라산에서 내려오라고 했다. 그래서 좌익 사람들이 투항을 하고 내려오는데 느닷없이 우익의 서북청년단들이 민가에 불을 지른다. 공교롭게 불을 질렀는데 미군 정찰기가 그 위를 지나가면서 사진을 찍는다. 마치 서북청년단이 몇 월 며칠 몇 시에 거기에 불을 지른다는 걸 알았다는 식으로 하필 그 시간에 정확하게 미군 정찰기가 그 위에서 불 지르는 걸 공중에서 사진을 찍는다. 찰칵.
그러면서 봐라, 이건 소요사태가 통제불능의 상태라고 미군정이 판단을 한다. 그래서 지금으로 치면 경찰청장인 조병옥이라는 사람이 제주도로 내려가게 된다. 조병옥과 미군정 관계자가 제주도로 내려가서 김익열 사령관에게 왜 빨갱이와 협상을 하느냐며 다그친다. 김익열은 아니다, 나에게 시간을 조금 더 달라, 그러면 사태는 일어나지 않게 설득을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랬더니 조병옥이 제주도 주민들은 싹 다 빨갱이기 때문에 다 죽여야 한다고 했다. 정확하게는 싹 쓸어버리자,라고 했다. 결국에 미군정은 ‘싹 쓸어버리자’에 손을 들어준다. 조병옥은 완전한 우익인 인물이었다.
미군정이 봤을 때 김익열이라는 사람은 자꾸 좌익을 옹해주니까 이상한 것이다. 그래서 해고를 해버린다. 그리고 그 자리에 박진경이라는 새로운 사령관을 데리고 와서 둔다. 박진경은 부임하자마자, 대한민국을 건국해야 하는데 제주도민 30만 명 죽는 건, 그 정도의 희생은 필요하다는 망언을 한다. 그래서 무지막지하게 탄압을 한다. 박진경 밑의 부하도 이게 너무 하다고 생각을 했다. 아니, 도대체 같은 민족을 이렇게 쏴 죽여도 되나 싶어서 갈등을 한다. 그러다가 박진경 사령관은 부하에게 암살을 당한다. 당신은 해도 해도 너무한다. 이렇게 같은 민족을 이렇게 쏴 죽일 수가 있나. 그래서 암살을 당하게 된다. 탕.
1948년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는 해인데 이때 4월 3일에 이 사달이 난 것이다. 그리고 한 달 후 5월 10일에 510 총선거가 이루어지는데 제주도만 이 선서를 하지 못했다. 4월 3일에 이 엄청난 사건 때문에 선거를 하지 못했는데 이 과정을 겪으면서 8월 15일에 미군정이 물러가고 이승만 정부가 들어선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다. 이승만은 전국이 선거를 했는데 제주도만 빨갱이들 때문에 선거를 하지 못했다며 가만 놔둘 수 없다고 해서 여수에 있는 14 연대에게 지금 제주도로 내려가서 제주도에 있는 빨갱이들을 다 죽여라고 명령을 내린다. 여수에 있던 14 연대는 이승만 정부의 연락을 받고, 아니 지금 위에서 내려온 명령이 같은 민족을 쏴 죽이라는 거야? 라며 의아해한다. 그러다가 14 연대가 탈영을 하면 했지 도저히 제주도로 내려가지 못하겠다며 들고일어난다. 아무리 빨갱이라고 해도 같은 국민인데 어떻게 무참히 총을 쏴 죽을 수 있나 우리는 못 간다. 여수의 군인들이 들고일어났다. 반란을 한다. 같은 국민에게 총을 못 쏜다며 순천까지 점령을 해버린다. 이것이 옛날 표현으로 여수반란사건이다. 지금은 반란이라는 말이 빠지고 여수사건으로 되어있다. 예전에는 국방군이 대한민국에게 반기를 들었다고 배웠다. 그러니까 여수사건을 잘못 배운 것이다. 이면을 보면 같은 민족에게 총을 쏘기 싫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승만 정부는 제주도에 다른 군대를 파견한다.
지금부터는 경찰, 서북청년단, 군대가 들어가서 대대적인 토벌을 감행한다. 해안가에서 5킬로미터의 선을 그은 다음 선 안에 있는 제주도민은 다 죽여라고 명령을 한다. 좌익세력은 한라산 쪽으로 다 숨어있기 때문에 5킬로미터 안의 해안가는 괜찮지만 이 선을 넘어 있는 사람들은 그냥 다 쏴 죽여라고 한다. 그래서 토벌작전에 들어간다. 숨어 들어간 사람도 있겠지만 그 안에서 대대로 농사를 짓던 어르신들은 뭔지도 모르고 내가 왜 해안으로 가야 하느냐? 나는 여기가 내 땅이니까 여기서 농사를 지으며 지낼 거야, 설마 같은 국민인데 총을 쏘겠냐.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해안가로 안 나갔던 사람들이 많았는데 어마 무시하게 토벌을 했다. 지금 여러 가지 기록들이 있는데, 그중에서 두 가지를 이야기하자면.
엄마가 있고 13살짜리 남자애가 있고 그 밑으로 10살, 7살, 4살 동생이 있었다. 13살짜리를 보며 너 빨갱이지? 아닌데요. 무슨 소리냐 너 딱 봐도 빨갱인데. 그래서 엄마와 함께 동생들까지 – 엄마, 13살, 10살, 7살, 4살 순으로 한꺼번에 묶어 버린다. 엄마가 토벌대에게 싹싹 빌었다. 제발 아이들만은 살려 달라고. 그래서 토벌대는 10살 이하는 풀어준다. 하지만 13살, 너는 빨갱이니까 묶는다. 묶자마자 드르륵 하며 총으로 갈기는데 엄마가 본능적으로 아들을 안고 몸을 돌렸다. 그러면서 엄마와 함께 쓰러졌는데 그때 엄마의 뜨거운 피가 입 안으로 왈칵 들어왔다고 한다. 이분이 최근까지 살아계셨다.
또, 부모가 3살짜리와 1살짜리 젖먹이를 데리고 도망을 갔다. 총을 쏘며 달려오니까 동굴 안으로 숨었다. 근데 1살짜리가 뭘 알겠어. 동굴 밖에서 빨갱이들이, 다 나와 드르르르륵 하니까 1살짜리가 울고 말았다. 토벌대는 그 안으로 수류탄을 까서 집어던지고 만다. 3살짜리, 1살짜리가 그 자리에서 조각이 나서 다 죽고 만다.
이런 일이 무려 7년 동안 이어졌다. 1948년부터 한국전쟁이 끝난 1954년까지. 이 4. 3 토벌을 7년이나 하면서 제주도민들이 무참히 죽고 말았다. 맨 위에서 말한 제주도민 30만 명 가운데 공식적으로 3만 명이 죽었다고 되어있고, 비공식적으로는 10만 명이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제주도는 4월 3일에 동시에 제사를 지낸다. 아직 살아 계신 분들이 있는데 이분들의 말로는 이 사건이 연극이나 영화로 만들어지면 볼 자신이 없다고 한다. 그만큼 제주도민들에게 7년이나 행해진 4. 3 토벌은 너무나 큰 상처다. 이렇게 큰 사건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516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은 박정희의 국시가 반공, 멸공이었다. 이후에 4. 3 사건이라는 말 자체가 금기어가 되었다. 그래서 역사 속에서 사람들의 입으로 알려지지가 않았다.
오늘 뉴스 기사에서 우크라이나에 간 폭스뉴스 기자가 두 다리와 한쪽 눈을 잃은 기사를 읽었다. 폭스뉴스 기자 벤저민 홀은 트위트에 포격을 받은 지 3주가 지나서 그 당시의 일에 공유를 하면서 이렇게 말을 했다. 나는 한쪽 다리의 반절을 잃었고, 다른 쪽은 발을 잃었다. 한쪽 눈은 시력을 잃었고, 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는다. 살아남게 된 것은 ‘빌어먹을 행운’이며, 이 자리에 있게 해 준 분들에게 감사를 표한다.
전쟁이란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일까. 그리고 이런 끔찍한 기사를 우리는 저녁 식사를 하면서 본다.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26073&cid=40942&categoryId=31778 <= 여수사건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384757&cid=47322&categoryId=47322 <<= 510 총선거
전쟁을 멈춘 노래로 잘 알려진 크렌베리스의 좀비
https://youtu.be/YPYS108N6x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