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소년은 딱 한 줄만큼의 일기를 매일 적어 나간다.
첫 시작은 청량하고 더운 여름이었다.
7월 15일 동생과 선생님과 함께 시냇가에 갔다.
7월 27일 차를 타고 소풍을 갔다.
7월 28일 아름다운 딱따구리를 보았다.
페이지를 넘기는 사이 소년은 애벌레를 발견하고 하늘의 비행기를 바라본다.
아빠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그러나 여름을 지난가을로 접어들 때 심상치 않은 기운이 감지된다.
9월 1일 전쟁이 시작되었다.
9월 7일 독일 사람들이 XXXX를 점령했다.
그리고 다시 일주일 뒤 적힌 글씨는 9월 14일 바르샤바는 용감하게 싸우고 있다.
1939년 폴란드에서 8살 소년이 연필로 쓴 일기는 긴 시간이 지나 한 권의 책으로 세상에 나온다. 다행인 것 하나는 저자 소개에 적힌 바로 이 문장이다. 지금은 고요한 노인으로 오늘을 살고 있다. 미하우 스키빈스키의 아름다운 딱따구리를 보았습니다. 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다.
봄과 함께 찾아온 전쟁 소식을 실시간으로 접하게 되면서 암담하고 불안한 마음이 봄을 장식하고 있다. 이전 두 번의 봄은 코로나와 함께 맞이했는데 이번에는 거기에 전쟁 소식까지 접하게 되었다. 나와는 상관없는 나라의 전쟁이라 나는 나 할 일을 하며 그저 평소처럼 지내면 되는데 컴퓨터 우측 하단에 습관적으로 우크라이나의 영상을 틀어 놓으니 어쩔 수 없이 전쟁 속 그들의 모습을 매일, 매 시간 보게 된다. 거기에는 우크라이나에 포로로 잡힌 러시아 군인들에게 빵과 물을 주는 우크라이나 주민들의 모습에 눈물을 흘리는 러시아 군인들 모습이 비쳤다. 전쟁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전쟁은 무엇을 위해서 하는 것일까.
평온하고 고요한 날 속에 봄을 알리는 햇살이 비치고 있다. 봄이란 무엇인가. 봄이면 나는 늘 그렇듯 무력감을 느낀다. 생명이 동트는, 세상이 온통 멍들기 시작하는 봄이면 나는 걷잡을 수 없는 무력감에 시달린다. 봄이 오는 걸 막을 수 없다. 한 인간이 계절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 무력감은 대단하다. 텅 비어 있는 소리를 듣는다. 텅 비어 있는 소리가 나를 괴롭힌다. 점점, 조금씩 텅 빈 소리는 나의 몸으로 파고 들어온다. 텅 빈 소리는 텅 비어 있기에 진짜다. 하지만 정말 괴로울 때는 텅 빈 소리가 깨지는 소리다. 그건 이를테면 진실을 마주하는 것보다 진실을 알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다.
리처드 막스의 노래를 틀었다. 리처드 막스의 노래는 사랑에 관한 노래가 많다. 리처드 막스에 관해서는 저 앞에서 한 번 했었다. 리처드 막스는 아내를 무지막지하게 사랑했다. 그래서 아내를 위해 만든 곡들이 있다.
아내는 배우였다. 아내가 영화 촬영을 위해 남아프리카로 떠나고 그곳에서 몇 개월이나 영화를 촬영해야 했다. 리처드 막스는 그 기간을 참을 수 없었다. 미치도록 보고 싶었다. 기다릴 것을 생각하니 혼자 있는 시간이 지옥 같이 느껴졌다. 그리고 불안함이 들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엇이 자신과 아내를 갈라놓을 것만 같은 불안. 불안은 끝내 리처드 막스를 아내가 있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가게 만들었다. 하지만 비자를 신청했는데 나오지 않았다. 몇 날 며칠을 비자를 신청하고 기다렸지만 비자가 발급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만든 곡이 ‘Right Here Waiting’이다.
바다만큼이나 멀어져 가요.
매일매일 그리고 난 서서히 미쳐가고 있죠.
전화로 당신의 목소리를 듣지만 이 고통을 멈추진 못하는군요.
내가 당신을 거의 볼 수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영원하다고 말할 수 있겠어요.
이 노래는 그저 혼자서만 부른 곡인데 친구가 앨범에 넣자고 했고, 리처드 막스가 받아들여서 지금 우리가 듣게 되었다. 리처드 막스와 아내의 사랑은 유명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세상엔 ‘영원’이란 실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두 사람의 애절한 사랑은 2014년에 막을 내리게 된다.
우리가 이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가야 할 곳은 어디일까.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서 꽃을 피우는 것. 그리고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렸던 것들에게 다녀왔다고 인사를 하는 것.
Right Here Waiting https://youtu.be/S_E2EHVxNA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