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저씨 5화 초반에 박기훈이 박동훈에게 그런 말을 한다. 가진 것 없어도 팬티는 오만 원 이상 짜리를 입어야 한다고. 그래야 죽어서 쪽팔리지 않는다. 죽고 나면 쪽팔리는 것도 알 수 없어서 몇 천 원짜리 입고 죽으면 그게 얼마나 쪽팔리는 일이냐는 것이다. 그러니 살아있는 동안 쪽팔리지 않아야 하고 내가 하는 일이 쪽팔리는 게 아니다, 우리 쪽팔리지 말자. 같은 말을 한다. 그리고 3분의 2 정도에 박동훈이 고깃집에서 그 소동이 있은 후 눈이 오는 길에 미끄러져 넘어졌을 때, 지금은 죽을 수 없다, 팬티가 오만 원짜리가 아니라 죽을 수 없다며 겨우 겨우 일어나서 몸을 추스른다.
죽고 난 후의 팬티 따위가 뭐가 그리 중요할까 싶지만 절대 아니다. 지금은 고인 된 오규원 시인의 ‘죽고 난 뒤의 팬티’라는 시가 있다.
[가벼운 교통사고를 세 번 겪고 난 뒤 나는 겁쟁이가 되었습니다. 시속 80킬로만 가까워져도 앞 좌석의 등받이를 움켜쥐고 언제 팬티를 갈아입었는지 어떤지를 확인하기 위하야 재빨리 눈동자를 굴립니다. 산 자도 아닌 죽은 자의 죽고 난 뒤의 부끄러움, 죽고 난 뒤에 팬티가 깨끗한지 아닌지에 왜 신경이 쓰이는지 그게 뭐가 중요하다고 신경이 쓰이는지 정말 우습기만 합니다. 세상이 우스운 일로 가득 하니 그것이라고 아니 우스울 이유가 없기는 하지만. ]
오규원 시인은 시인들의 시인으로 유명한 시가 많다. 시 '칸나'를 통해서 사랑을 이렇게 표현을 하다니 정말 놀라웠고, 시인들의 값을 매긴 메뉴판의 시로도 유명하고 시선집도 아주 유명하다. 오규원 시인은 또 괴짜다. 친구들이 먼저 가 버린 수목장 자리들 옆에 한 자리를 비워 놓고 여기가 내 자리라고 했는데 결국 그 자리에 들어갔다.
죽고 난 뒤의 모습에 왜 신경을 쓰냐고 할 사람이 많겠지만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을 본 사람은 잘 안다. 죽고 나면 수의를 입히는데 그 과정에서 죽었을 때 입은 속옷을 벗겨내야 한다. 깨끗하고 좀 더 비싼 걸 입을 걸, 하는 생각이 든다. 정말. 절실하고 진실하게 그런 생각이 든다. 코로나로 인해 작년에 수많은 사람들이 어? 하는 사이에 죽고 말았다. 오규원 시인의 시선을 따라갈 수 없을지는 몰라도 나의 아저씨에서 박기훈이 말한 것은 생각해 볼만하다.
나의 아저씨 극본을 쓴 박해영 작가는 아마도 시인들을 무척이나 좋아하지 않았을까. 정확하게는 시인의 깊이 있는 시선을 좋아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지안의 할머니가 달이 보고 싶어서 지안이 친구에게 부탁해서 그 부분의 방바닥이 추운데도 그곳에 누워 벽에 붙은 작은 창으로 악착같이 달을 보려고 했다. 그 모습은 윤동주가 떠오른다. 윤동주의 산문시 ‘달을 쏘다’가 떠오른다.
윤동주의 달을 쏘다는 아름다운 서정시다. 너무 아름다워서 읽고 있으면 그 정경이 눈에 선하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시를 쓴 곳이 일본의 감방이라고 알고 있다. 감방에 붙어 있는 저 작은 창으로 매일 몇 분 정도 보이는 달이 최고의 선물이었다. 고문으로 인해 몸은 점점 행려병자처럼 되어가고 고통스럽지만 창으로 보이는 달을 보며 아름다운 것을 생각했다. 죽어가며 아름다운 것을 본 윤동주를 깊게 생각하면 가슴이 울렁울렁한다. 그때 윤동주가 가물거리며 본 그 고통스럽지만 아름다운 달을 지금 우리가 보는 저 달이기도 하다. 그리고 지안이 할머니가 그토록 보고 싶은 달이기도 하다.
나는 눈물이 없었다. 아니 눈물을 잘 흘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꽤 오해를 받기도 했다. 아버지 장례식장에서도 눈물이 나지 않았다. 사실 가까이 있던 사람이 죽는다는 것에 눈물이 잘 나오지는 않는다. 시간이 지나 그 사람과의 추억이나 기억 같은 것들이 눈물을 만들어 낼 뿐이다. 책을 봐도, 영화를 봐도, 시를 읽어도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노래를 듣고 약간 글썽일 뿐 눈물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지. 그런데 2018년에 본 나의 아저씨가 굳건하던 내 눈물샘을 터트리고 말았다. 내민 손을 그만 덥석 잡았을 뿐인데 그 뒤로는 뭔가가 조금만 뭔가 싶으면 눈물이 난다. 그것이 싫지만 또 좋다.
사람들은 슬픔을 강요한다. 나는 이만큼 슬픈데 너는 왜 나만큼 슬퍼하지 않냐. 슬퍼야 하는 장소에서 마땅히 슬퍼해야 하는 건데 너는 왜 그렇지? 슬픔의 증거로 눈물을 흘리기까지 강요한다. 눈물은 그렇게 나오지 않는다. 눈물은 그렇게 해서 흐르는 물이 아니다. 눈물은 짜다. 그래서 사람의 몸에는 바다가 하나씩 있다. 그리하여 눈물을 아무리 흘려도 계속 짠 물이 흐른다. 이렇게 짠 물이 슬플 때가 되었다고 해서 흐르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인간은 좋거나 감동을 받아서 훨씬 많은 눈물을 흘린다. 음식에서도 짠맛은 적당해야 그 음식이 맛이 좋다. 기분이 너무 좋을 때 흐르는 눈물을 맛을 보라. 적당하게 짜다. 그래야 몸속에 있는 바다가 요동을 치지 않고 기쁨과 조화를 이루니까. 그래야 하니까.
달을 쏘다
오랜만에 만난 김은 자신의 집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집은 요즘 보기 드물게 연탄아궁이가 있고 방바닥의 장판은 아랫목 쪽이 쭈글쭈글해 있었다. 김은 라면 하나를 끓여 왔다. 큰 냄비에 물을 잔뜩 부어 끓였다. 멋쩍게 웃으며 먹을 게 라면 하나밖에 없다며 밥을 가득 말아서 먹자고 했다. 다행히 아직 추위가 지붕을 덮지 않아서 라면을 나눠먹고 밥을 말아먹으니 땀이 났다. 겨울이 걱정되었지만 묻지 않았다. 라면은 물이 많아서 스프의 맛이 살짝 날 정도였지만 김치를 걸쳐 먹으니 어쩐지 맛있었다. 어떻든 먹어야 하고 어떻게든 먹게 된다고 김은 말했다. 다른 가족과는 떨어져 사는 모양이었다. 가족과 지낼 때도 서러운 단어 가난이 악착같이 붙어있었다. 가난에서 겨우 벗어나는가 싶더니 김은 절망의 크레바스로 빠지고 말았다. 그것이 6년 전의 일이었다. 그리고 연락이 되지 않았다. 직장을 잃었을 때 지옥이라고 했다. 그렇게 맛있게 먹었던 라면도 목구멍을 통과하지 못하고 햇살이 싫었고 행복하게 웃는 사람들을 죽이고 싶었다고 했다. 잠들 어도 거기까지 따라오는 채권자들과 눈을 뜨면 보이는 빚은 자살의 유혹으로 가게 되었다고 했다. 지옥이라는 건 멀쩡한 건물이지만 그 속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고 그 일이라는 건 생존이 불가능하게 되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 중심에 김이 있었다. 김은 나에게 오천 원을 달라고 했다. 나는 주머니에서 만원을 꺼내 주었다. 김은 소주를 사 오겠다며 만원을 들고나갔다. 나는 현금을 털어 오만 원짜리 한 장과 만 원짜리 3장을 냄비 받침으로 썼던 책 사이에 끼워 넣었다. 라면 받침으로 썼던 책은 윤동주의 시집이었다. 십오 년 전에 내가 선물로 준 책이었다. 김은 모든 걸 다 잃어버리고 이 책 한 권이 남았다. 김은 소주를 한 잔 마시고 나에게도 한잔 권했다. 책 사이에서 돈이 수줍게 비어져 나온 것을 보고 김은 고맙다며 라면 사 먹겠다고 했다. 김은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호의를 거절하지도 않았다. 김은 소주를 한 병 비웠다. 가난은 부끄러운 건 아니지만 불편하다. 생활이 불편한 것보다 마음이 불편하다. 새로 잡은 직장에서는 누구나 돈을 좇지 말고 돈이 따라오게 돈 그 이상의 것을 바라보라고 한다. 정말 개좆 같은 말이다. 가난한 자에게 필요한 건 돈이다. 돈 이외에 따라오는 이상은 돈이 깔려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자살을 결심했을 때 절에 갔는데 할머니가 엎드렸다 일어났다, 집에서는 죽어도 움직이기 싫어하면서 절에서는 옆 사람에게 질세라 절을 하는 거였다. 무엇이 할머니를 저렇게 절을 하게 하는 것일까. 절을 하면서 자신의 안위를 돌봐달라는 할머니들은 없었다. 전부 가족들을 위해 기도를 하는 것이다. 문득 하늘을 올려다봤는데 이곳의 하늘과 저 멀리 떨어져 있는 하늘도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만 가면 그곳을 갈 수 있는데 내 입장이 그곳으로 갈 수 없게 만든다. 윤동주의 글이 떠올랐다. 윤동주의 '눈'을 읽으며 이렇게 맑은 사람이 그 더러운 곳에서 죽어가는 것과 지금 이 방처럼 비루하고 좁은 방에서 저 작은 창문 밖으로 보이는 저 달을 쏘고 싶어 하면서 죽어가는 그 모든 것들을 사랑했던 윤동주의 글이 떠올라서 이를 악 물고 싶었다. 절망의 끝에 가면 통통하게 살이 찐 희망이 있다. 삶에 내 살갗을 가차 없이 갉아대는 것이다. 살면서 처절한 가난까지 경험했는데 내 감정과 정직하게 맞서는 것을 피해왔다. 내 감정을 고스란히 마주하는 것, 그러면 삶이 내 몸으로 스며들게 된다는 걸 알아 가고 있다. 김은 그렇게 말을 하며 그대로 잠이 들었다. 얼굴에 조금 미소가 파고들어 있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달은 그 옛날 감옥에 난 창으로 보였던 그 달이었을 것이다. 겨울의 모퉁이에서 윤동주의 글을 읽고 내내 눈물들 흘렸던 그 기억들은 전부 추억에서 살고 있다. 거리가 추울까 봐 이불처럼 눈이 내린다고 한 윤동주의 글을 그동안 잊고 지냈다. 김은 꿈에서 윤동주와 조우했을 것이다. 저리도 웃고 있는 것을 보면.
- 윤동주의 달을 쏘다를 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