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는 까는 리뷰이기에 한국판 리틀 포레스트를 흡족하게 봤다거나 영화를 보고 힐링을 얻었다거나 마음의 치유가 됐다거나 하는 사람은 읽지 말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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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재미있게 봤다는 김태리의 리틀 포레스트. 하지만 나는 그렇게만 볼 수 없었다. 이 영화는 현실성에서 너무 동떨어져 버렸고 힐링과의 거리를 좁힐 수가 없는 영화였다. 리틀 포레스트는 이가라시 다이스케의 원작이 있고 하시모토 아이 주연의 일본의 영화가 있다. 그 영화는 느리고 과하지 않고 농촌의 생활을 잘 보여준다. 영화는 거기서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라는 말에 걸맞게 치유의 맹점을 놓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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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의 생활. 김태리표 영화 속, 이 농촌의 생활이라는 것이 원작과 그리고 현실과 너무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영화 내용은 간단하다. 도시의 복잡함과 임용고시의 탈락을 맛본 혜원은 지치고 힐링을 얻고자 시골로 내려가서 편의점 도시락이 아닌 느리고 제대로 된 음식을 해 먹으며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며 신선한 채소를 가꾸며 일탈적인 일상에서 마음의 안정을 얻고 치유를 받는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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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원은 초반 편의점 알바를 하며 편의점 도시락을 먹다 밥을 뱉어내고 쓰레기통에 버린다. 도시생활의 은유적 작법이다. 편의점 도시락을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사람이 편의점 도시락을 먹어본 사람보다 압도적으로 많다. 편의점 도시락은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먹어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건 포르노를 좋아서 보는 것과는 다르다. 청춘들에게는 애증의 기호, 싫어하지만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음식이다. 청춘들에게 또는 사회 초년생들에게 싸고 맛있고 알찬 편의점 도시락을 쟁탈하기 위한 경쟁이 있는지 기성사회, 기득권들은 절대 알지 못한다. 아마 청춘들 중에, 편의점 도시락을 싫든 좋든 먹는 사람들 중에 밥을 그대로 뱉어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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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에서 낙지볶음을 먹다가 옆에 있는 쓰레기통에 버린다면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 어떤 누군가에겐 편의점 도시락이 식당에서 먹는 낙지볶음과 같을지도 모른다. 누구도 쳐다보지 않을 것 같은 편의점 도시락이지만 누군가에게 편의점 도시락은 삶을 지탱하고 유지시키는 생존에 흡착된 음식일지도 모른다. 여기서 감독의 청춘에 대한 이해도에 의심이 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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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되는 삶, 그 속의 빠듯한 인간관계에서 현대인은 힐링을 무엇보다 강하게 원한다. 현대인인 혜원은 시골로 가서 요리에 최선을 다하며 영화는 혜원의 치유를 보여준다. 친구들과의 충만함과 술자리, 땀을 흘리며 직접 재배한 채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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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포레스트는 실제 농촌의 생활을 농촌의 아름다움으로만 덮어 버렸다. 방향이나 생활의 방식이 다를 뿐이지 하루를 버티고 살아낸다는 것, 살아가는 것은 도시나 농촌이나 다를 바 없이 어렵고 힘들다. 여기에서 영화가 혜원을 대하는 태도에 문제가 있다. 혜원이 농촌 생활에 적응을 하며 상처를 입체적으로 이겨가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영화는 혜원보다 김태리의 예쁜 얼굴에 초점을 두고 있다. 자전거를 타고 환하게 나오면서 부터 어? 어? 하게 되는데 혜원은 농촌에서 하는 노동을 무시하게끔 하는 태도를 취하게 만든다. 농촌에서의 노동이라는 것이 단순히 허리가 아픈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도시생활에서의 힘듦의 몇 배, 아니 몇 십 배 더하다. 특히 농번기의 농사라면 말이다. 농사짓는 부모들이 얼마나 이를 악물고 농촌 생활에 적응을 하고 농사를 짓고 있는지 혜원은 알지 못하게끔 영화는 그런 태도를 보인다. 입체적인 혜원보다 평면적인 김태리에 조명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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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리틀 포레스트가 탄생된 배경에는 이런 면이 작용을 했을 수 있다. 일본에도 농촌을 빠져나가는 젊은 층이 심해지면서 농사 인구가 극심하게 가물었다. 이에 일본 정부는 젊은 층에게 귀농하여 농사를 지으면 집과 농업방식과 터전을 지원해주었다. 무엇보다 그 결과에 대해서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농사를 망해도 정부가 지원해주는데 이러쿵저러쿵하지 않는 것이다. 귀농 그 자체에 의미를 두고 정부는 귀농한 젊은 층에게 감사한 태도를 취했다. 그것이 벌써 15년 전이었다. 그렇기에 이치코가 농촌의 생활에 대한 태도를 보이는 리틀 포레스트는 개연성이 있고 설득력이 있다. 그렇지만 임순례표 리틀 포레스트는 그렇지 않다. 과연 청춘과 마주한 적이 있나 할 정도로 청춘에 대해서 너무 모르는 것이 아닌가? 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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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음식, 농촌으로 가서 만들어 먹는 음식이 마음에 안 든다. 혜원은 오코노미야키를 만들어 먹는 것부터 별로다. 꼭 한국 음식을 만들어 먹을 필요는 없지만, 일본에서의 오코노미야키야 서로를 이어주고 힐링푸드일지 모르나 한국의 청춘들에게 오코노미야키나 타코야키는 패스트푸드, 로드푸드의 개념이 강하다. 편의점 도시락과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농촌으로 갔으면 솥뚜껑을 뒤집어서 들기름을 부어 부추 전이라도 만들어 먹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영화를 보면서 계속 의심스러운 부분, 감독은 정말 청춘을 이해를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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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청춘을 다룬 이창동의 버닝을 보면, 이창동이 감독 이전에 소설가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영화 속 주인공도 소설을 쓰려고 하고, 종수와 해미가 술집에서 리틀 헝거의 이야기를 하면서 술집 주위를 비춰준다. 화면에 보이는 청춘들의 모습이 현실의 청춘들이라 할 수 있다. 이창동은 소설의 문체를 영화의 문채로 끌어와서 종수의 이미지는 자연광으로만 촬영을 하여 늘 어둡고, 소설적인 인물 밴은 인공조명으로 종수와 그 반대의 개념적 인물로 묘사를 한다. 이창동의 영화는 화면을 보는 것이 아니라 소설을 읽는 것처럼, 공백과 여백이 가득하고 공백과 여백 사이에 메타포를 한없이 심어놔서 보는 이들이 그 메타포를 느끼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을 한다. 그에 반해 리틀 포레스트는 머리로 계속 계산을 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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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순례 감독은 청춘에게 애잔한 치유를 보내고 싶었다 하는데, 이 영화는 일정 청춘보다는 포괄적으로 사람들에게 보내는 시골판타지 래플리카 영화였다고 본다. 그럼에도 영화의 괜찮은 점을 찾아야 했다. 그러다 보니 찾을 수 있었다. 한국의 사계절이 아름답게 펼쳐진다. 다큐가 아닌 상업영화에서 이렇게 한국의 사계절을 환하게 담아낸 것은 참 괜찮은 점이었다. 그리고 류준열의 연기는 아주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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