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끼고, 훔치고, 창조하라 - 모방에서 창조를 이뤄낸 세상의 모든 사례들
김종춘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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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란 말이 있다. 모방을 거치지 않은 새 것은 없다. 기존의 제품을 분해해서 파악한다면, 더 좋은 하이브리드 제품을 생산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모방은 창조로 가는 필수과정이다. 제품뿐만 아니라 시인 푸쉬킨도, 화가 피카소도 모두 모방의 천재였다. 고수는 남의 것을 베끼고, 하수는 자기의 것을 쥐어짠다. 그 결과, 고수는 창조하고 하수는 제자리걸음이다.

 



 

이 책에 나오는 창조의 사례들은 정말 다양하다. 우리가 어떤 영역에서 일을 하든, 주부이든, 학생이든, 직장인이든, 기업가이든, 예술가이든, 운동선수이든, 공무원이든, 정치인이든 간에 이와 같은 사례 하나 하나를 모방해서 우리의 현안에 연결시킨다면 또 다른 창조의 사례를 추가하는 창조자가 될 것이다.

 

모방이 창조다

 

3D 돌풍을 몰고온 영화 <아바타>는 모방과 창조의 대표적인 케이스이다. 영화의 스토리는 기존의 영화 <늑대와 춤을>과 유사하다. 이울러, 주인공이 자신의 분신인 아바타에 접속하는 장면은 영화 <매트릭스>를 연상시킨다. 도한,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천공의 섬 라퓨타>와 <미래소년 코난>의 흔적도 곳곳에 나타난다. 그러나, 우리는 <아바타>를 모방의 아류로 폄하하지 않는다. 3D 영화의 신기원을 창조했다고 칭찬 일색이었다.

 



 



 

러시아인의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러시아 시인 알렉산드르 푸쉬킨은 러시아 곳곳에 그의 숨결을 남겼다. 그의 동상과 그의 이름을 딴 거리, 박물관, 학교들이 즐비하다. 심지어 러시아 술의 대명사 보드카에도 그의 이름이 붙어 있다. 그는 러시아 문학의 대표적인 브랜드이며 또한 러시아 국가 자체의 브랜드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는 창작의 천재라기보다 모방의 천재이다. 그의 서정시는 서유럽 낭만주의 시들을 토대로 했고, 서사시도 영국의 시인 바이런의 작품을 베낀 것처럼 보인다. 그는 남의 것을 조금씩 변형하고 보완해서 자기 것으로 창작했다. 가히 모방의 천재이다.

 

일본인 오모 씨는 우체국에서 우표 연결 종잇장에 구멍이 똟린 것을 보고 칼날에 자름선을 넣어 특허등록을 했다. 이후 이것이 카터칼로 만들어졌다. 그는 얇은 가공지를 생산하는 회사에서 종이를 알맞는 크기로 잘라내는 단순한 업무를 수행하면서 칼날이 금새 무뎌지고 칼날에 자주 손을 다치는 경험을 했다. '칼날을 쉽게 자를 수는 없을까?'란 생각이 결국 문제를 해결하는 창조로 이어졌던 것이다. 문제를 만나면 기뻐하라. 문제는 창조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110년간 타자기 시장 1위를 지켰던 '스미스 코로나'는 1995년 파산신청을 했다. 이 회사는 타자기가 영원할 것으로 오판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물결을 만들든지, 아니면 새로움에 올라타야 한다. 제록스도 대형 복사기 시장을 지키려다 데스크톱 복사기 시장을 놓쳤고, IBM도 메인프레임 컴퓨터에 치중하다가 미니컴퓨터 시장에 후발로 진입했다. 변신은 무죄다. 아니다, 오히려 창조다.

 

창조는 쉽다

 

어렵다고 생각하면 엄청 어렵고, 쉽다고 생각하면 한 없이 쉬운 것이 창조다. 머리가 뛰어나야만 창조하는 것이 아니다. 창조는 특정인의 전유물이 아니라 누구나 할 수 있는 행위이다. 또한 이것은 쉽다. 더하든지, 빼든지, 섞든지 어떤 변화를 통해 새로운 가치가 발생하면 창조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치약처럼 짜는 튜브형 고추장은 남제천농협의 유병기 고추장 공장장이 만들어냈다. 해외여행시 비행기를 타면 기내식 때 미니 튜브형 고추장을 만난다. 고추장 없이 해외로 여행가면 식사할 때 불편하다. 그러나, 이를 챙겨가기에도 여간 성가시지 않다. 그는 이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한 셈이다. 이제 튜브형 고추장은 해외여행의 휴대품이 되었고, 덩달아 고추농가도 소득이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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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함평군은 무관광, 무산업, 무소득의 고장이었다. 1998년 방송국 PD출신의 이석형 군수가 취임하면서 바뀌기 시작했다. 그는 이곳이 공장도 없는 청정지역이라는 점에 착안하여 희귀나비로 관광객을 유치하려고 '함평 나비축제'를 기획했다. 나비공원과 생태학습장을 만들어 첫 축제를 개최하여 무려 19만 명이나 오더니 이후 꾸준히 늘어 2004년에는 300만 명으로 늘었다. 

 

1980년 한국에 괴외금지 조치가 내렸다. 일본 구몬수학 교재를 한국식으로 가공해 학생들에게 그룹과외를 하던 강영중(현, 대교회장)씨는 눈앞이 캄캄했다. 과외방을 닫고 3개월을 고민하며 주변을 살펴보니 답이 나왔다. '기다리지 말고 찾아가자'였다. 무리한 로열티를 요구하는 구몬측과 이별하고 '눈높이'브랜드로 승부를 걸었다. 관찰은 경영이고 리더십이며, 창조이다.

 

변화 맞춤형 창조

 

아놀드 슈왈제네거는 오스트리아에서 미국으로 건너갔지만 가난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그러나, 그는 소원 3가지를 늘 머리맡에 적어두었다. '영화배우가 되겠다', 케네디 가문의 여성과 결혼하겠다', '2005년 캘리포니아 주지사가 되겠다'

그는 할리우드 액션배우가 되었고, 케네디 대통령의 조카인 마리아 슈라이버와 결혼했고, 2003년 보궐선거를 통해 캘리포니아 주지사가 되었다. 

 

물이 나오는 우물이 있고, 안 나오는 우물이 있다. 돈이 만들어 지는 비즈니스가 있고 돈이 안 만들어지는 비즈니스도 있다. 너무 복잡하면 기회가 안 보인다. 머리가 단순하고 눈이 맑으면 상황이 파악되고 상대방이 제대로 보인다. 완전한 창조는 없다. 이는 창조주만의 영역이다. 작은 생각의 차이가 손에 잡히는 창조를 가능케 한다. 그저 일하지만 말고 생각하라.





기존의 것을 뒤집으면 승산이 있다. 비타민은 과립이나 알약의 형태였다. 이것을 액체로 만들어 마시는 비타민 C '비타 500'을 출시하면서 광동제약은 파죽지세로 성장했다. 뒤집기 전략은 종종 꼴지를 선두로 만든다. 거북이는 토끼와 대결하되 육지가 아니라 바다에서 대결해야 한다. 똑같이 맞불로 대결하지 말고 물로 뒤집어 승기를 잡았다.

 

기득권층은 시대를 고정시키려 하지만 시대는 늘 변하며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낸다.  요즘 시대는 3가지 흐름에 의해 주도된다. 이러한 변화의 흐름을 잘 타면 생존을 넘어 창조하는 삶을 살 수 있겠다. 개인화, 사회화, 녹색화의 추세를 어떻게 따라잡고 적용하며 장악할 것인가? 새로운 변화, 사회의 새로운 변화에 맞추고 적응하는 개체는 생존하고 번성할 것이다. 새로운 변화는 새로운 과제를 낳고 새로운 승자를 낳는다.

 

더 아름다운 창조

 

존 우드는 마이크로소프트의 아시아 지역 마케팅 책임자였다. 1998년 여름 네팔을 여행하다가 네팔의 교육부 관리를 만났다. 이 중년 관리의 제안에 따라 그는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이웃마을의 학교를 찾았다. 20명이 정원인 공간에 80명의 아이들이 우글거렸다. 그는 고액 연봉과 스톡옵션을 버리고 마이크로소프트를 사직했다. 1999년, 가난한 나라의 빈곤 지역에 도서관을 짓는 비영리단체 '룸 투 리드(Room to Read)'를 창립했다. 이후 2008년까지 네팔, 베트남, 캄보디아, 인도, 라오스, 스리랑카, 남아공 등에 무려 7천 개의 도서관을 열었다.

 






"가난의 대물림을 끊으려면 책을 읽히는 교육부터 시켜야한다.

수백만 명의 개발도상국 아이들이 책을 읽을 수 있도록 도서관을 지어주자" (206 쪽)

 

1965년, 일본의 미라이공업이 4명의 직원으로 출범했을 때, 이미 마쓰시타전기 같은 대기업이 시장을 이미 장악하고 있었다. 미라이의 전략은 치밀하게 모방하고 조금만 다르게 바꾸자는 것이었다. 미라이공업은 색갈만 바꾸어 흰색 전깃줄을 시장에 내놓았고 곧 시장을 평정할 수 있었다. 2010년 현재 79세인 야마다 아키오 창업주는 바보같은 사람이라도 채용한다. 늘 창조적인 생각을 할 수 있도록 행복하고, 감동적인 직장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주력한다. 야마다 회장의 경영 노하우는 간단하다.

 

"끝없이 생각하도록 감동적인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게 리더십이다.

그러면 창조적인 제품이 나오게 되고 당연히 돈도 잘 벌게 된다" (249~250 쪽)

 



 

 

나폴레옹이 연전연승한 것은 그가 <전쟁사>를 열심히 탐독한 결과라고 한다. 그는 과거의 전쟁들을 연구해서 그 결과를 현재의 전쟁에 연결시킴으로써 승리를 거듭할 수 있었던 것이다. 스티브 잡스는 창조성이란 서로 다른 것들을 연결시키는 것이라했다. 베끼다 보면 어떤 맥이 잡히고 거기에다 자신만의 색갈을 입히면 바로 이것이 창조가 되는 것이다. 모방은 창조의 필수과정이다.

 

모방하라. 모방하되 합법적으로, 윤리적으로 모방하라. (254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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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극화 고령화 속의 한국, 제2의 일본 되나 NEAR 동아시아 시대 준비 보고서 2
NEAR재단 엮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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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국민소득 1만 달러 수준에서 개발경제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외환위기에 빠졌듯이 국민소득 2만 달러 수준에서 신자유주의적 경쟁체제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양극화.고령화라는 21세기적 현상에 직면해 있다.

 

특히, 한국 경제의 총량극대화가 민생 각 부문에서 나타나는 구성의 모순을 시정해주지 못하고 있으며, 수출과 무역 확대가 수출 채산성의 악화로 국내 총소득의 감소를 가져옴으로써 생산구조와 고용구조가 불일치하는 구조적 문제를 키워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며 다시 총량극대화.수출드라이브.국력신장에 주력하는 정책 노선으로 복귀했다. 이에 따라 양극화.고령화의 시정은 정책 우선순위에서 밀려날 수 밖에 없었다.

 

양극화.고령화의 문제는 오랜 기간에 걸쳐 축적된 현상이기 때문에 대통령 임기 내 일조일석에 그 답을 찾아 해소하기는 어려운 문제이다. 정부만의 과제가 아니라 정치권, 기업, 근로자 등 모든 국민이 이를 공유하고 각자의 위치에서 양보와 배려를 통해 합의에 이르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경제.사회정책의 틀을 바꿔가야 한다는 것이다. 경제문제와 사회문제의 교호성交互性을 인정하고 각종 사회 현상을 바탕으로 해법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미래지향적이고 지속가능한 방안이 제시되어야 한다. 양극화.고령화라는 21세기 현상을 20세기적 정책가가 19세기적 자유시장시장경제원리로 대응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책은 이러한 생각의 일단을 함께 한 많은 학자와 전문가들이 모여 1년여 동안 치열하게 토론하고 고뇌한 결과를 압축하고 정리한 것이다. 재정정책의 최우선 순위를 사회복지에 두고, 복지재정의 효율성 제고를 위한 개혁이 시급하다고 강조한다. 복지와 고용을 유기적으로 결합시킨 사회안전망이 중요하다. 또한, 공적연금체제에 대한 손질이 급선무라고 지적하고 있다.

 



 
[정범구 NEAR재단 이사장 '동아시아 시대 준비 보고서' 출간]

 

양극화, 고령화 현상

 

양극화는 양극화 자체 문제보다 중산층 또는 중간소득계층의 붕괴현상 때문에 건전한 사회 발전의 버팀목이 흔들리게 되어 사회안정을 해치게 된다. 튼튼한 중산층의 육성이 양극화 해소의 지름길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산업구조. 기업구조. 고용구조. 소득구조의 변화를 통해 이룩할 수 있는 것이므로 시간이 걸릴 수 밖에 없다.

 

국세청 통계에 따르면 1999년부터 2009년까지 기간 중 종합소득 상위 20%의 평균소득은 55.2% 증가한 반면, 최하위 20%의 평균소득은 53.8% 감소한 것으로 나타난다. 종합소득의 비중이나 근로소득의 비중에 있어서도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원인이 자영업자의 급속한 도산이 이루어지고 두 차례의 금융위기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부와 소득의 원천이 집중되는 현상에 기인한 것이다.

 

고령화문제가 제기된 것은 상당히 오래 전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많은 다른 문제들을 해결해야 했기에 고령화문제는 정책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 논의가 시작된지 10년 이상 경과했지만 이 문제에 접근하는 현재의 태도는 장기적 안목에서 본 지속 가능 경제발전과제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 단기적으로 4대강 사업이나 동서고속전철사업보다도 그 중요성이 낮게 취급받고 있는 듯하다. 양극화와 고령화에 잘 대응할 수 있는 사회보장체계를 정립해야 한다. 

 

첫째, 최우선 과제는 사회안전망의 사각지대를 해소하는 것이다.

둘째, 복지제도의 효율적인 운영과 복지전달체계의 획기적인 개선이 필요하다.

셋째, 사회보험 재정의 지속 가능성을 제고해야 한다.

넷째, 시장과 민간의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

 

복지개혁

 

사회안전망 구축은 국가 간 경쟁에 나서는 국민에게 어떠한 위험이 닥치더라도 본인과 가족에 대해서국가가 책임지고 보장할 것을 약속한다. 동아시아 시대의 사회안전망 정책은  단순히 경쟁에서 살아야한다는 것보다는 동아시아 시대에서 참여하고 있는 모든 국민이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고, 더불어 발전하도록 하는 공영의 기본 틀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고령화, 양극화 시대의 고용

 

고용을 함께 고려하는 성장.고용 복합전략이 구사되어야 한다. 노동시장에 연계되지 않은 대학교육은 경쟁력이 없으며 일자리를 만들지 못하는 복지는 지속 가능하지 않으므로 '교육-고용-복지'의 융합전략이 필요하다. 향후 5년간 녹색기술과 창의산업 분야에서 대대적인 창업붐과 함께 공공 부문의 적극적인 청년고용 촉진이 필요하다. 자영업 구조조정의 속도를 조절해야 한다. 기업의 사회공헌활동 차원에서 이공계 청년들에게 '교육기부'를 적극 시행할 필요가 있다. 고학력 여성의 고용을 촉진하기 위해 양질의 보육서비스와 기혼여성 친화적 근무제도를 확산시키고, 근무제도를 유연화 시키자. 공무원과 공공 부문의 임금결정체계를 투명하고 합리적으로 개편해야 한다. 임금을 줄이더라도 일자리를 늘려야 한다. 직무형 임금체계로 개편하자. 노사관계도 고용친화적인 방향으로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해야 한다. 

 

재정개혁

 

저출산과 고령화가 다른 어떤 OECD 국가보다 늦게 시작되었으면서 가장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서 앞으로의 재정건전성 문제가 더욱 심각하게 다가올 것이다. 먼저 재정에 관하여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재정을 건전하고 생산성 있게 유지하려면 정부.국회.시민단체는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한편 서로 보완해야 한다. 한편, 국회는 이유 없는 추경 편성을 억제하고, 재정 관련 법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 또한, 정부는 효율적인 재정 운영을 위해 공공기관과 조세정책을 조정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조세정책의 일관성이 매우 중요하다.

 

“우리나라는 그동안 참 운이 좋았다. 선진국에 비해 고령화가 한참 늦게 시작됐고,

그동안 잘 관리한 국가재정 덕분에 외환위기와 글로벌 경제위기를 잘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운도 여기까지다." (294 쪽)


 




 

 

재단법인 NEAR(North East Asia Research)는 동아시아 문제에 특화된 연구재단이다.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해양세력과 대륙세력과의 균형있고 조화로운 관계를 도모하여 한국의 지속 성장과 선진국화를 이룩하는 데 필요한 연구역량을 결집하기 위하여 2007년 1월에 설립되었다. 비록 짧지만 4년여에 걸쳐 격동하는 동아시아 시대를 겪으며 한국의 독자적인 생존 방안에 대하여 깊이 있게 연구해 왔다. 특히, 지난 1년 동안 '동아시아 시대의 준비' 프로젝트를 통해 새로운 시대정신에 입각한 미래전략을 꾸준히 제시해 왔다. 양극화와 고령화 현상은 한국 경제의 성장통이다. 우리 모두의 지혜를 모아 이를 극복하는 합리적 대안을 만들고 지속적으로 실행해야 할 것이다. 이 책도 이러한 고민의 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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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 2 - 1차 십자군과 보에몽, 개정판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 2
김태권 글.그림 / 비아북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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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5년 서유럽, 은자 피에로가 출현하여 이교도로부터 예루살렘을 탈환해야 한다고 외치고 다녔다. 이슬람과의 전쟁을 통해 우위를 확보하려는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피에르를 불러들인다. 교황청의 허수아비가 된 이후 군중십자군의 리더가 된 피에르와 주변 인물들은 무지와 편견에서 비롯된 가당치도 않은 전쟁을 벌인다. 이름하여 십자군 전쟁이다. 유럽은 피에르가 주도한 이 전쟁으로 어처구니 없는 학살이 자행되고,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학살자가 되는지를 1권에서 살펴 볼 수 있었다.

 



 

군중십자군이 휩쓸고 간 지도 어언 1년. 다시 평화를 찾은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은 밤마다 울려 퍼지는 소리가 있었다. 바로 은자 피에로의 콧소리였다. 얼마 후면 1차 십자군의 본대가 도착하므로 좋은 시절도 이게 마지막이라는 비아냥이었다. 이번 십자군은 서방의 강력한 세 명의 기사가 이끌고 있었다. 이들은 바로 로렌의 공작 고드프루아, 툴루즈의 백작 레몽, 그리고 보에몽이었다.

 

보에몽과 알렉시오스 황제 간에는 이런 일화가 있다. 1081년 보에몽의 아버지 로베르가 동로마 제국을 침공했다. 당시 동로마 최강의 장군이 젊은 시절의 알렉시오스였다. 열세로 어쩔 수 없이 꽁무니를 빼는 로베르의 뒤를 쫓던 알렉시오스 앞을 왠 낭자가 가로 막았다. 로베르의 젊은 새 부인 시켈가이타가 큰 목소리로 병사들에게 전투를 독려했다. 이후 아들 보에몽이 원군을 이끌고 오는 바람에 전세가 오히려 불리하게 뒤집어졌다. 동로마의 전열이 완전히 무너지고 퇴각하는 알렉시오스에게 보에몽이 칼 끝이 이마로 향했다. 가까스로 피했지만 이마에 부상을 입었던 것이다. 투르크 용병을 고용하여 제국을 지키던 알렉시오스에게 보에몽은 여간 부담이 아니었다.

 

1097년 1차 십자군이 도착하여 니케아를 점령하다

1097~1098년 안티오키아를 둘러싼 엎치락뒤치락 공방전

1098년 십자군 지휘관들의 갈등과 마라트안누만의 학살

1099~1104년 예루살렘 함락에서 하란 전투까지

 

1096년 12월, 십자군 지휘관 고드프루아가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다. 동로마에서 환영을 하지 않자  이들은 동로마 군대와 일전을 벌였다. 1차 십자군의 첫 번째 전투였다. 1097년 4월, 레몽도 동로마에 발을 들여놓았지만 아무도 환영하지 않자 약탈과 파괴를 일삼았다. 또한, 4월에 보에몽도 동로마에 얼굴을 비친다.

 

"사실 나는 옛날 당신의 적이자 원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나의 자유의지에 따라 폐하의 친구로 왔습니다"

 -보에몽/안나 콤니니의 <알렉시아스>중에서 (99쪽)

 

아버지 로베르가 죽자 새 어머니 시켈가이타가 권력을 차지하면서 찬밥 신세로 전락하여 빈둥거리던 보에몽이 십자군 모집 광고를 보고서 새로운 기회를 찾아서 동로마로 왔던 것이다. 동로마에 막대한 이익을 남길테니 십자군 원정을 지원해달라고 요청한다. 아울러, 알렉시오스 황제에게 충성 서약까지 했다.

 

동로마의 지원을 얻어낸 십자군은 보르포로스 해협 너머 무슬림 땅으로 진격했다. 투르크의 젊은 술탄 킬리치 아르슬란은 이들 십자군을 졸로 여겼다. 십자군은 수도 니케아를 단숨에 점령해버렸다.1097년 6월 19일의 일이다. 만삭인 아내에게 성을 맡기고 킬리치 아르슬란은 원정을 떠나고 없었다고 한다. 한편, 복수를 다짐하는 투르크 전사들은 도릴레온 협곡에서 매복하여 십자군이 지나가길 기다리고 있었다. 화살로 공격을 감행하였지만 용맹한 보에몽의 기병에 의해 투르크는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패배의 소식은 이슬람 세계로 퍼져 나갔다. 십자군은 다음 목적지 안티오키아로 향했다.

 

1097년 10월, 안티오키아 주민들의 완강한 저항으로 십자군은 당황스러웠다. 레몽은 즉각 공격하자고 주장하나 보에몽의 결사적인 반대로 안티오키아를 포위하고 8개월이나 시간을 끌었다. 보에몽과 레몽의 대립각이 날카롭기만 했다. 보에몽이 안티오키아 스파이의 머리로 요리를 해먹었다는 소문이 나돌자 무슬림들은 공포에 떨게 되었다.

 

"보에몽 공작 진영의 주방에 잠입한 밀정들은 쇠꼬챙이에 꿰여

숯불 위에 돌아가고 있는 몇 구의 시신을 목격해야만 했다."

-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제 58장 중에서

 

마침내 보에몽의 속셈이 드러난다. 그는 육상과 해상의 교통 요충지인 안티오키아를 자신의 수중에 넣어 재기하겠다는 것이었다. 날이 밝자 보에몽이 비책을 얻었다는 소문이 빠르게 퍼져 나가고, 이 소식을 들은 십자군 지휘관들은 궁금해서 모두 보에몽에게 찾아왔다. 그는 그들에게 안티오키아를 점령하면 자신에게 양도할 것과 더 이상 토를 달지 않겠다는 두 가지 약속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후 안티오키아의 내부 밀고자 피루즈의 협조로 성벽을 차지한 십자군은 안티오키아를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이다.

 

1098년 6월 3일부터 성안에서는 대학살이 시작되었다. 이틀 후 카르부카가 출현하자 십자군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무슬림들은 기사회생의 기쁨을 누렸다. 권력을 유지하려고 적을 이용한 카르부카는 안티오키아를 탐냈다. 아무튼 십자군은 투르크 군에게 포위당해 아사 직전이었다. 굶주림과 죽음의 공포 때문에 많은 십자군들이 집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군대 용어로 대규모 탈영이었다. 한편, 안티오키아 대성당에 은자 피에로와 나귀가 숨어 들었다. 수도사 한 명이 메시아의 창이 안티오키아에 묻혀 있다고 장담했다. 보에몽은 일꾼들을 데리고 여기저기 파헤쳐서 '롱기누스의 창'을 찾아냈다.

 

"기뻐하시오, 승리는 분명 그대들 것이니!" (177 쪽)

 

성창과 성배의 전설은 그리스 신화 만큼이나 중요한 주제어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처형될 때 어느 군인이 예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더니 피와 물이 흘러 나왔다. 요셉이 예수의 시체를 모셔다가 유대인 장례 풍습대로 향료를 바르고 고운 베로 감았다. 이 때 사용된 창이 바로 '성창'이고, 군인의 이름을 따 '롱기누스의 창'이라고도 한다. 영국의 아서왕과 원탁의 기사들도 성창과 성배를 찾아 모험을 떠나기도 했으며, 히틀러도 성창의 신통력이 제3 제국의 승리를 가져다 준다고 믿었다고 한다.

 

피에르가 낡은 고철을 성창이라고 주장하자 십자군 사령관 아데마르 주교가 즉각 피에르에게 사기를 중단하라고 명하자, 이를 진짜라고 믿는 레몽 백작의 보증 때문에 더 이상 이를 문제 삼지 못했다. 1098년 6월 28일, 안티오키아 정문 앞 전투에 대해 십자군은 성창의 신통력 탓에 이룬 위대한 승리라고 기록하고 있다. 미심쩍은 이 전투에 대해 무슬림 측은 카르부카의 독재가 싫어 그를 배반하면서 발생한 일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보에몽이 안티오키아를 차지하려 하자, 레몽이 태클을 건다. 카르부카의 포위망을 뚫은 것은 성창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잘난 척하던 피에르에게 아데마르 주교가 1098년 8월 1일에 공개 토론회를 하자고 제안했다. 궁지에 몰린 피에르는 고민에 빠진다. 그런데, 그에게 또 다시 기적이 일어났다. 7월, 안티오키아에 심각한 전염병이 돌아 아데마르 주교가 죽고 만 것이다.

 

모두 애도하는 가운데 기고만장한 피에르는 성창을 믿지 않은 아데마르가 벌을 받아 지옥으로 갔다고 비난성 망언을 서슴치 않았다. 이에 십자군들이 피에르의 말에 격분하여 여론이 들끓자 피에르는 다시 궁지에 몰리는 신세가 되었다. 성창을 믿는 레몽의 중재로 신명 재판을 하기로 했다. 불의 심판을 받게 된 피에르는 결국 화상 때문에 죽고 말았다. 피에르가 죽자 레몽도 타격을 입고, 마침내 안티오키아는 보에몽의 수중에 들어갔다.

 

한편, 십자군 지휘관들의 내분과 식량 부족으로 병사들의 사기가 바닥에 떨어졌다. 약한 적과 싸워서 승리하여 사기를 올리려는 대책이 마련되어 십자군은 작은 도시 마라트안누만을 공격했다. 격렬한 저항이 있었지만 결국 주민들은 항복했다. 이후 만여 명의 무슬림들이 잔혹하게 학살되었다. 다음의 행선지는 예루살렘이다. 보에몽은 안티오키아에 눌러 앉았다.

 

"마라트안누만에서 우리 십자군은 이교도 어른들을 커다란 솥에 넣어 삶았다.

또 아이들은 꼬챙이에 꿰어 불에 구웠다"

-십자군 병사 라울 드 카엥의 연대기 (231 쪽)

 

1099년 6월 15일, 십자군은 보에몽의 예상과 달리 예루살렘 점령에 성공했다. 그들은 이곳에서 엄청난 약탈과 살육을 자행했다. 피로 얼룩진 참상에 사람들은 경악했다. 보에몽도 충격을 받았다. 보에몽에게 교황의 특사로 새로이 다임베르트 주교가 파견되었다. 둘은 궁합이 잘 맞았다. 보에몽은 안티오키아에서 여론을 조성하고, 다임베르트는 예루살렘에 잠입하여 공작을 꾸미기로 둘은 손발이 척척 맞았다.

 

1100년의 성탄 전야, 다임베르트가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그는 고드프루아 공작에게 왜 예루살렘을 통치하느냐고 따지듯 물었다. 이후 노골적으로 통치권을 자신에게 넘기라고 요구했다. 그런데, 고드프루아 공작이 갑자기 사망했다. 한편, 빨리 예루살렘으로 오라는 다임베르트의 전갈이 레몽 백작때문에 전해지지 않고 보에몽은 평소대로 무슬림 마을로 노략질 나섰다가 오히려 체포되고 만다. 고드프루아의 동생 보두앵 백작이 통치권을 넘겨 받는다.

 

1101년의 십자군이 보에몽을 구출하러 오자 투르크의 칼리치 아르슬란의 기병대에 의해 전멸하고 만다. 그래도 여전히 보에몽은 자신의 조카 탕크레드가 구하러 온다고 믿었다. 그러나, 탕크레드는 안티오키아에 군침을 흘리고 오히려 석방이 안되도록 방해 공작을 벌이고 있었다. 수감생활에서 풀려난 보에몽은 일대의 복수전을 준비한다. 

 

1104년 하란 전투가 시작되었다. 무슬림 연합군은 후퇴하는 척하며 프랑크 군을 유인했다. 이후 곧장 에워싸고 섬멸하는 작전을 펼쳤다. 동로마 제국에 보에몽이 죽었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보에몽의 시신이 동로마 제국에 들어섰다. 송장 냄새를 풍기던 관에서 보에몽이 벌떡 일어나 앉았다.

 

1106년, 대단한 인기를 누리던 보에몽은 프랑스의 부마가 되었다. 다시 한 번 동로마 원정의 길에 나서는 보에몽의 소식에 콘스탄티노플은 발칵 뒤집어졌다. 과거에 아버지와 함께 공격했던 두라초가 공격 목표였다. 이 전쟁이 어떻게 전개될지 3권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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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 1 - 군중십자군과 은자 피에르, 개정판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 1
김태권 글.그림 / 비아북 / 2011년 7월
평점 :
품절


9.11테러로 미국 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이 무너지자, 미국의 부시 대통령은 '악의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아프카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했다. 11세기 말 십자군은 '이슬람으로부터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 900여 년의 시차를 두고 발발한 두 전쟁은 묘하게도 닮았다. 중세 유럽과 이슬람의 역사를 바로 보자는 의도에서 이 만화가 출간되었다.








옛날, 서쪽 사람들은 따뜻한 지중해 연안에 모여 살았다. 아프리카 북부의 카르타고, 이태리 반도의 로마, 헬레니즘 문화를 꽃피운 그리스 등은 모두 강대국으로 이름을 떨쳤다. 같은 하늘에 태양이 둘이 없는 법이다. 카르타고와 로마는 같은 시대에 지중해의 패권을 놓고서 싸움을 벌인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포에니 전쟁이다. 기원전 264년부터 기원전 146년까지 3차례의 격돌을 벌렸다.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의 공격에 로마가 패망 직전에 내몰리기도 했지만 결국 로마가 최후의 승자가 되었다.



포에니 전쟁 이후 로마 사회에는 커다란 변화를 맞게된다. 로마인들은 근처에서 생산된 농산물을 먹고 살았는데, 지중해 연안을 장악하자 값싼 농산물들이 배로 운송되어 로마 본토로 몰려 들었던 것이다. 1년 내내 바겐세일이었다. 그래서, 농민층이 몰락하고 말았다. 당초 로마인 대부분은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기에 이 현상은 로마의 위기였다. 로마 정치가들은 지혜를 짜냈다.



귀족들이 불법 취득한 토지를 빈자들에게 나눠 주자고 개혁을 제안한 그락쿠스 형제들이 귀족들에게 살해되고 이 모든 혼란이 전쟁 때문이므로 전쟁으로 해결하자는 논리에 휩싸여 로마는 끝나지 않는 전쟁의 늪에 빠져 들었다. 기원전 137년부터 기원전 71년까지 3차례의 노예전쟁이 이를 대변한다. 특히, 3차 노예전쟁에서 검투사 스파르타쿠스가 등장하여 한때 로마 정규군이 궁지에 몰리기도 했다. 전쟁의 천재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갈리아를 점령한 다음 군사독재 체제가 수립되었다. 군사독재자가 바로 로마 황제이고 이때가 로마 제국의 전성기였다.



달도 차면 기운다고 했다. 힘에 의존하던 로마도 시간이 갈수록 점점 그 힘이 약해졌다. 더 이상 게르만족의 이동을 감당할 재간이 없자 결국 동과 서로 제국을 나누고 서기 330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콘스탄티노플에 새로운 수도를 만들었다. 395년부터 동과 서는 아예 남남이 되어버렸다. 동로마 황제는 아르카디우스가, 서로마는 동생 호노리우스가 책임지게 되었다.



"야만인들의 침략이 성공했던 것은

제국 내부에서 소수의 부자들과 유력자들이 하층민들을 점점 더 압박했던

사회구조 때문이었다.

로마인들 사이에서 불공평과 잔악성을 당하고 사느니

차라리 낯선 관습을 가진 야만인과 함께 사는 것을 택하였다"

-자크 르 고프 (33 쪽)



한편, 사회 내부의 불만과 갈등이 증폭되자 로마의 하층민들은 오랫 동안 자신들을 괴롭혔던 로마 귀족보다 차라리 게르만족을 맞아들이기를 원했다. 하층민과 죽이 맞은 게르만족 침입자들은 쉽게 로마 영토로 이동할 수 있었다. 그들은 여기서 약탈과 파괴를 저질렀다. 서기 476년, 서로마 제국은 결국 멸망하고 만다. 이제 제국은 해체되었다.



로마 제국의 붕괴 후, 지중해의 세계는 게르만족 계열의 앵글로족, 색슨족, 프랑크족, 서고트족에 의해 고만고만한 나라들과 콘스탄티노플의 동로마 제국 그리고 유목민에 의한 아라비아 등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7세기에 이슬람 문명이 탄생하면서 이 모든 상황이 크게 변하고 만다. 신에 순종해야 한다는 마호메트의 설교를 듣고 많은 아랍인들이 무슬림이 되었다. 메카에 거주하던 세력들이 처음엔 이슬람교를 박해했지만, 무슬림의 세력이 점점 커지자 박해자들도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아라비아 반도가 짧은 시간에 이슬람화되었던 것이다. 모하메트 사후에는 칼리파들에 의해 이슬람 세계는 더욱 확장되었다.



"'이슬람'이란 말은 본디 순종한다는 뜻이래요"

"무슬림이란 '복종하는 사람'이란 뜻이래요!" (37 쪽)



정복자 아랍인들의 동기는 너무도 세속적이었다. 그들은 돈이 필요했다. 정복지에서 세금을 받고 싶어서 정복을 감행했던 것이다. 세금만 내면 믿던 종교를 그대로 믿어도 괜찮았다. 로마에 정복당했던 그 땅의 주민들은 동로마 제국에서 거두던 세금보다 싸므로 부담이 없었다. 심지어 이슬람교로 개종하면 세금이 아예 면제였다. 그러자, 웃기는 촌극이 발생한다. 아랍인들은 세수가 격감하자 할인 혜택의 폐지를 검토한 것이다.



"아랍인들은 개종을 강요하지도 않았고 세금도 더 적게 거두었기에

피정복지 주민들은 종종 옛 지배자보다 새로운 지배자를 더 환영하곤 했다"

- E.M.번즈 (43 쪽)



결국 이슬람의 세계는 급격한 확장이 가능하여 지금의 중동은 물론 북아프리카로부터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 인도, 에스파니아 등 유럽까지 점령했던 것이다. 이는 이슬람이 칼에 의한 정복이 아니라 여러 나라의 사상과 문화를 수용코자하는 융화와 관용성의 자세를 취한 탓이다. 이슬람의 확장에도 제동이 걸린다. 동로마 제국의 레온 황제가 아랍의 수군을 격퇴한 것이다. 서기 717~718년에 걸친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에서 이슬람이 저지되면서 지중해의 세계는 서유럽, 이슬람, 동로마의 셋으로 나뉘어 발전하였다. 동로마가 이슬람 견제에 힘쓰는 동안 서유럽은 프랑크 왕국에 의해 새로운 문명이 태동하고 서기 800년 카를로스는 황제에 올라 서로마 제국의 부활을 선포한다. 그러나, 카를로스가 죽자 서유럽은 다시 군웅할거의 난세에 빠진다.



유럽의 전형적인 귀족은 이웃과 전쟁을 벌이거나, 자신을 지킬 힘조차 없는 약자들을 노략질하는 일에 주력했다. 또한, 기사들도 보호를 명분으로 농민들로부터 빵을 뜯었다. 기사와 농민 사이에 갈등의 골은 깊어지고, 서유럽 사회는 귀족과 하층민의 대립도 극에 달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교회가 이를 중재하면서 기도하는 사람, 싸우는 사람, 일하는 사람의 삼위계의 질서가 잡혔다.



한편, 교회는 강력한 평화운동을 전개하였다. 사실상 기사집단은 오랫동안 혼란과 폭력이라는 부정적 요인이었다. 하지만 이 운동은 기사들의 반발로 이내 난관에 봉착하고 만다. 전사들의 야성을 길들이려고 노력하던 서유럽 교회는 이를 무마하기 위해 기사들이 서유럽 세계 밖에서 싸우도록 만들었다.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 간의 적대 관계를 조장한 셈이다. 서유럽도 처음엔 이슬람의 세계를 존중했다. 따라서, 누군가 주장하는 문명의 충돌이라는 얘기는 허무맹랑한 소리이다.



"신의 적들인 이교도에 대항하여 무기를 드는 것은 허용할 만한 일일 뿐만 아니라, 참으로 경건한 일로 생각되었다"

- 조르주 뒤비 (59 쪽)



1095년 서유럽, 당나귀를 탄 노인이 꿈 얘기를 하면서 돌아다녔다. 이 노인이 바로 은자 피에르다. 피에르는 바로 베드로의 프랑스식 발음이다. 그 노인은 '지난 꿈에 또 베드로 성인을 뵈었습니다'라고 말문을 열였다. 얘기의 골자는 이슬람의 손으로부터 예루살렘을 해방시키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곳은 무슬림의 수중에 들어간지 400년이 넘었던 성지였다. 이는 전쟁을 하자는 말과 같다.



은자 피에르는 잘나가던 지식인이었다. 내로라는 명문 귀족의 가정 교사로 초빙되고, 고위 정치인의 밀사 업무를 수행하는 등 성공적인 인생을 누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예루살렘에 순례 여행을 갔다가 꿈에 성인을 본 후 그의 인생이 바뀌고 말았다. 정말로 베드로 성인이 꿈에 나타나 성지 탈환을 위한 전쟁을 명했을까? 아무튼 광신도의 꿈을 확인할 방법은 전혀 없다. 여행에서 유럽으로 돌아온 그는 이곳저곳을 떠돌며 낮에는 전쟁을 호소하고, 밤에는 노숙하는 생활을 하였다. 그의 기행은 이미 유럽의 명물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를 주시하고 있는 인물이 있었다. 서방의 실력자인 교황 우르바누스 2세와 그의 측근들이었다. 교황청은 그를 데려가 예루살렘의 침공을 위한 여론 몰이로 이용했다. 마침내 우르바누스 2세는 여론을 못이기는 척하면서 이슬람 세계로의 원정을 선언했다. 또한, 전쟁에 참여하는 사람은 모든 죄가 사면된다고 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자원하였던 것이다. 그 가운데에는 서방의 명성있는 기사들도 있었다. 한편, 모인 사람들의 의복에 십자가를 새기도록 하면서 이들은 십자군으로 불리게 되었다.



1095년 11월 교황 우르바누스 2세, 십자군 원정을 발표하다

1096년 5~6월 유럽 각지에서 군중십자군이 일어나 유대인 학살을 자행

1096년 8월 은자 피에르가 이끄는 군중십자군이 동로마 제국을 거쳐 바다를 건넘

1096년 10월 술탄 킬리치 아르슬란의 반격으로 군중십자군이 니케아 근교에서 전멸



1096년 봄, 공식 일정이 가을로 잡혔지만 은자 피에르와 가난한 사람들끼리 먼저 전쟁의 길로 출발했다. 일부 귀족들은 기마대를 이끌고 군중을 따라갔다. 모험심을 즐기는 기사들도 대열에 참여했다. 이런 식으로 흥분한 군중들의 행렬이 유럽을 가로질러 갔다. 그런데, 이들은 엉뚱한 방향인 독일로 갔다. 십자군은 독일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을 학살했다. 이후 헝가리 농촌 마을을 지나면서 식량을 확보하려고 약탈과 학살이 자행되었다. 분노한 헝가리 왕은 기병대를 보내어 십자군에게 화살을 퍼부어 보복했다. 전력이 반으로 줄고 말았다. 도나우 강 유역에서 주민 4천 명을 학살하고, 강 건너 텅 빈 베오그라드에 도착하여 모조리 약탈하고 니시로 향했다. 니시는 베오그라드 주민들이 피난간 곳이었다. 동로마의 자랑인 기병대에 의해 십자군은 막대한 사상자를 내고 도망치고 말았다.



1096년 8월, 은자 피에르와 생존자들이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 앞에 집결했다. 동로마는 골치아픈 십자군을 배에 태워 투르크 땅에 무단 투기하기로 결정한다. 십자군이 유럽과 아시아를 나누는 보스포로스 해협을 건너 니케아 근교를 쑥대밭으로 만들며 니케아로 진입했다. 투르크의 킬리치 아르슬란은 그들의 만행을 목격하고선 기병을 출정시켰지만 십자군의 수에 밀려 고전한다.



1096년 10월, 약탈로 수많은 전리품을 취하자 강경파 기사들이 은자 피에르를 왕따시키고 군중들을 대부분 흡수하여 크세리고르돈 요새로 향했다. 이곳에는 술과 고기, 곡물 등 온갖 물품이 풍족했다. 십자군들은 술에 취해 승리를 자축하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목마른 기사들이 샘으로 물마시러 갔다가 무장한 투르크인들에 의해 가는 길이 봉쇄되었다. 봉쇄는 8일이나 지속되었다. 물없이 오래 버틸 재간이 없다. 프랑크 원정대의 우두머리인 기사 라이날드가 투르크에 투항했다. 10월 21일, 대부분의 십자군들이 투르크의 매복에 걸려들어 끔찍한 최후를 당하고 말았다. 은자 피에로는 동로마 황제 알렉시오스의 구원군에 의해 목숨을 건진다.



군중십자군이 전멸하자 알렉시오스는 불리해졌다. 그들의 패배는 분명 황제가 배신한 탓이라는 것이다. 알렉시오스의 개혁정책에 불만을 품은 세력들이 은자 피에르를 꼬드겨 동로마 제국의 정권 교체를 계획한다. 전쟁을 좋아하는 새로운 지도자를 황제로 추대하자는 의도였다. 이제 본격적인 1차 십자군 본대가 도착하게 된다. 기사들로 구성되었고, 이 중엔 보에몽 공작도 포함되어 있다. 2권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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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의 첫번째 컴퓨터 + 인터넷 책 - 윈도우 7
양재봉 지음 / 한빛미디어 / 2011년 6월
평점 :
절판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데 있어서 컴퓨터는 매우 편리하고 유용한 도구이다. 그래서 요즈음 아이들은 어릴 적부터 컴퓨터를 접하고 작동하는 법도 일찍 배우게 된다. 반면 어르신들은 이 문명의 이기利器를 새로이 접했기 때문에 컴퓨터 앞에 앉기만 해도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아파오는 증세가 나타난다. 왜냐하면, 작동법이 서툴고 혹시 잘못 만져 고장날까 조바심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어르신을 위한 컴퓨터 학습서로서 컴퓨터가 우리 생활에 많은 도움을 주는 존재임을 알도록 쉽게 가르쳐 준다. 그냥 편안한 마음으로 책에서 지시하는대로 따라하면 된다. 하다보면 왜 진작 컴퓨터와 친해지지 못했을까?라는 생각이 이내 들게 된다. TV 드라마에 나온 '야동 순재'를 따라하려고 컴퓨터를 배우는 어르신이 많이 늘었다는 우스개소리도 있었다. 굳이 야동이 아니더라도 생활에 필요한 상식과 정보 등 유익한 콘텐츠가 컴퓨터 속에 풍부하므로 쉽게 어르신의 친구가 될 것 같다.



컴퓨터를 켜고 끄는 방법, 마우스를 다루는 방법, 키보드를 사용하는 방법 등의 초보 과정에서부터 사진 또는 동영상 보기, 문서 출력하기 등의 중급 과정뿐만 아니라 인터넷 서핑, 이메일 보내는 방법, 인터넷 지도로 길을 찾는 법, 인터넷 뱅킹 등의 고급 과정에 이르기까지 학습에 유익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아울러, 메신저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가족과 문자로 대화를 하거나 화상 채팅을 하는 법 그리고 심심할 때 즐길 수 있는 컴퓨터 게임 등도 소개되어 있다.



컴퓨터는 모니터, 키보드, 마우스, 그리고 본체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인쇄를 하는 장치인 프린터와 소리를 들려주는 외장 스피커도 있다. 내부의 주요 부품으로는 CPU, 마더보드, 메모리, 하드디스크, 시디롬 드라이브 등이 있다. 전기 기계는 전원을 공급해야 작동을 하듯이 컴퓨터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먼저 모니터의 전원 버튼을 눌러서 켜고 본체의 전원을 켜면 모니터 화면에 글자 또는 그림이 나타난다. 이 과정을 '부팅'이라고 한다. 약간의 시간이 걸리므로 조금 기다려야 한다.









종료시에는 모니터 화면 왼쪽 하단의 윈도우 로고 위에 화살표를 올리고 마우스 왼쪽을 누르면 메뉴판과 비슷한 화면이 나타난다. 메뉴판 오른쪽 아래에 있는 '시스템종료'를 마우스 왼쪽 단추로 눌러서 끈다. 컴퓨터를 끌 때 절대로 전원 단추를 누르거나 전원 코드를 뽑는 식의 방법은 금물이다. 왜냐하면, 컴퓨터가 망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매일 사용하는 자신의 컴퓨터를 치장하는 방법을 알아보자. 윈도우 바탕화면을 자신이 좋아하는 사진이나 그림으로 바꿀 수 있다. 나도 이를 배워서 노트북 바탕화면에 내가 좋아하는 야생화 사진으로 바꾸었다. 바탕화면에서 마우스 오른쪽 단추를 클릭하면 메뉴판이 나타난다. 메뉴에서 [개인 설정]을 선택한다. 컴퓨터의 시각 효과및 소리 변경 창이 나타난다. 아래쪽에 있는 [바탕 화면 배경]아이콘을 클릭한다.



바탕 화면 배경 선택 창이 나타난다. 배경화면으로 지정할 사진을 불러오기 위해 '사진 위치'메뉴의 <찾아보기>단추를 클릭한다. 폴더 찾아보기 창이 나타나면 [사진]폴더를 클릭하고 <확인>단추를 클릭한다. [사진]폴더에 있는 모든 사진들이 선택된 상태이다. 원하는 사진만 선택하려면 <모두지우기>단추를 클릭한 후 원하는 사진만 클릭하고 <변경 내용 저장>단추를 클릭한다. 다시 컴퓨터의 시각 효과 및 소리 변경 창이 나타난다. 맨 위쪽에 있는 [X]단추를 클릭하면 창이 닫히고, 변경된 바탕화면이 나타난다. 멋진 바탕화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취미생활도 할 수 있다. 영화를 극장에서 대형 스크린에서 감상하는 것도 재미있지만, 자신의 컴퓨터에서 DVD로 감상하는 것도 별미이다. 또한, 인터넷을 통해 영화 파일을 다운로드받아 저렴하게 즐길 수도 있다. 윈도우 7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비디오 파일을 실행하는 방법을 살펴보자.



탐색기를 실행한 후 [라이브러리]-[비디오]-[비디오 샘플]폴더로 이동한다. '야생'이라는 샘플 비디오 파일이 있다. 이를 더블 클릭한다. 비디오 파일 재생 프로그램이 실행되면서 동영상이 재생된다. 멋진 동물의 모습들이 담긴 영상이다. 비디오 파일은 큰 화면으로 보는 것이 좋다. 오른쪽 아래에 있는 전체화면 보기 아이콘을 클릭한다. 한편. DVD를 컴퓨터에 넣으면 자동 실행 창이 나타난다. [DVD 동영상 재생]을 클릭한다. DVD타이틀이 재생되면 메뉴에서 [영화보기]를 클릭한다.









이 책은 컴퓨터를 처음 접하거나 이미 접했더라도 활용법을 잘 몰라서 주위 사람들에게 묻기가 창피해 그동안 제대로 이용하지 못했던 사람들을 위해서 쓰여졌다. 마치 컴퓨터 가정교사를 만난 기분이 든다. 따라하기를 하다보면 컴퓨터에 대한 지식이 늘고 활용하는 방법도 쉽게 배우게 되어 자신도 모르게 실력이 부쩍 늘어 달라진 자신의 모습을 만나게 될 것이다. 특히, 386세대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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