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 1 - 군중십자군과 은자 피에르, 개정판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 1
김태권 글.그림 / 비아북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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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테러로 미국 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이 무너지자, 미국의 부시 대통령은 '악의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아프카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했다. 11세기 말 십자군은 '이슬람으로부터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 900여 년의 시차를 두고 발발한 두 전쟁은 묘하게도 닮았다. 중세 유럽과 이슬람의 역사를 바로 보자는 의도에서 이 만화가 출간되었다.








옛날, 서쪽 사람들은 따뜻한 지중해 연안에 모여 살았다. 아프리카 북부의 카르타고, 이태리 반도의 로마, 헬레니즘 문화를 꽃피운 그리스 등은 모두 강대국으로 이름을 떨쳤다. 같은 하늘에 태양이 둘이 없는 법이다. 카르타고와 로마는 같은 시대에 지중해의 패권을 놓고서 싸움을 벌인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포에니 전쟁이다. 기원전 264년부터 기원전 146년까지 3차례의 격돌을 벌렸다.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의 공격에 로마가 패망 직전에 내몰리기도 했지만 결국 로마가 최후의 승자가 되었다.



포에니 전쟁 이후 로마 사회에는 커다란 변화를 맞게된다. 로마인들은 근처에서 생산된 농산물을 먹고 살았는데, 지중해 연안을 장악하자 값싼 농산물들이 배로 운송되어 로마 본토로 몰려 들었던 것이다. 1년 내내 바겐세일이었다. 그래서, 농민층이 몰락하고 말았다. 당초 로마인 대부분은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기에 이 현상은 로마의 위기였다. 로마 정치가들은 지혜를 짜냈다.



귀족들이 불법 취득한 토지를 빈자들에게 나눠 주자고 개혁을 제안한 그락쿠스 형제들이 귀족들에게 살해되고 이 모든 혼란이 전쟁 때문이므로 전쟁으로 해결하자는 논리에 휩싸여 로마는 끝나지 않는 전쟁의 늪에 빠져 들었다. 기원전 137년부터 기원전 71년까지 3차례의 노예전쟁이 이를 대변한다. 특히, 3차 노예전쟁에서 검투사 스파르타쿠스가 등장하여 한때 로마 정규군이 궁지에 몰리기도 했다. 전쟁의 천재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갈리아를 점령한 다음 군사독재 체제가 수립되었다. 군사독재자가 바로 로마 황제이고 이때가 로마 제국의 전성기였다.



달도 차면 기운다고 했다. 힘에 의존하던 로마도 시간이 갈수록 점점 그 힘이 약해졌다. 더 이상 게르만족의 이동을 감당할 재간이 없자 결국 동과 서로 제국을 나누고 서기 330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콘스탄티노플에 새로운 수도를 만들었다. 395년부터 동과 서는 아예 남남이 되어버렸다. 동로마 황제는 아르카디우스가, 서로마는 동생 호노리우스가 책임지게 되었다.



"야만인들의 침략이 성공했던 것은

제국 내부에서 소수의 부자들과 유력자들이 하층민들을 점점 더 압박했던

사회구조 때문이었다.

로마인들 사이에서 불공평과 잔악성을 당하고 사느니

차라리 낯선 관습을 가진 야만인과 함께 사는 것을 택하였다"

-자크 르 고프 (33 쪽)



한편, 사회 내부의 불만과 갈등이 증폭되자 로마의 하층민들은 오랫 동안 자신들을 괴롭혔던 로마 귀족보다 차라리 게르만족을 맞아들이기를 원했다. 하층민과 죽이 맞은 게르만족 침입자들은 쉽게 로마 영토로 이동할 수 있었다. 그들은 여기서 약탈과 파괴를 저질렀다. 서기 476년, 서로마 제국은 결국 멸망하고 만다. 이제 제국은 해체되었다.



로마 제국의 붕괴 후, 지중해의 세계는 게르만족 계열의 앵글로족, 색슨족, 프랑크족, 서고트족에 의해 고만고만한 나라들과 콘스탄티노플의 동로마 제국 그리고 유목민에 의한 아라비아 등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7세기에 이슬람 문명이 탄생하면서 이 모든 상황이 크게 변하고 만다. 신에 순종해야 한다는 마호메트의 설교를 듣고 많은 아랍인들이 무슬림이 되었다. 메카에 거주하던 세력들이 처음엔 이슬람교를 박해했지만, 무슬림의 세력이 점점 커지자 박해자들도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아라비아 반도가 짧은 시간에 이슬람화되었던 것이다. 모하메트 사후에는 칼리파들에 의해 이슬람 세계는 더욱 확장되었다.



"'이슬람'이란 말은 본디 순종한다는 뜻이래요"

"무슬림이란 '복종하는 사람'이란 뜻이래요!" (37 쪽)



정복자 아랍인들의 동기는 너무도 세속적이었다. 그들은 돈이 필요했다. 정복지에서 세금을 받고 싶어서 정복을 감행했던 것이다. 세금만 내면 믿던 종교를 그대로 믿어도 괜찮았다. 로마에 정복당했던 그 땅의 주민들은 동로마 제국에서 거두던 세금보다 싸므로 부담이 없었다. 심지어 이슬람교로 개종하면 세금이 아예 면제였다. 그러자, 웃기는 촌극이 발생한다. 아랍인들은 세수가 격감하자 할인 혜택의 폐지를 검토한 것이다.



"아랍인들은 개종을 강요하지도 않았고 세금도 더 적게 거두었기에

피정복지 주민들은 종종 옛 지배자보다 새로운 지배자를 더 환영하곤 했다"

- E.M.번즈 (43 쪽)



결국 이슬람의 세계는 급격한 확장이 가능하여 지금의 중동은 물론 북아프리카로부터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 인도, 에스파니아 등 유럽까지 점령했던 것이다. 이는 이슬람이 칼에 의한 정복이 아니라 여러 나라의 사상과 문화를 수용코자하는 융화와 관용성의 자세를 취한 탓이다. 이슬람의 확장에도 제동이 걸린다. 동로마 제국의 레온 황제가 아랍의 수군을 격퇴한 것이다. 서기 717~718년에 걸친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에서 이슬람이 저지되면서 지중해의 세계는 서유럽, 이슬람, 동로마의 셋으로 나뉘어 발전하였다. 동로마가 이슬람 견제에 힘쓰는 동안 서유럽은 프랑크 왕국에 의해 새로운 문명이 태동하고 서기 800년 카를로스는 황제에 올라 서로마 제국의 부활을 선포한다. 그러나, 카를로스가 죽자 서유럽은 다시 군웅할거의 난세에 빠진다.



유럽의 전형적인 귀족은 이웃과 전쟁을 벌이거나, 자신을 지킬 힘조차 없는 약자들을 노략질하는 일에 주력했다. 또한, 기사들도 보호를 명분으로 농민들로부터 빵을 뜯었다. 기사와 농민 사이에 갈등의 골은 깊어지고, 서유럽 사회는 귀족과 하층민의 대립도 극에 달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교회가 이를 중재하면서 기도하는 사람, 싸우는 사람, 일하는 사람의 삼위계의 질서가 잡혔다.



한편, 교회는 강력한 평화운동을 전개하였다. 사실상 기사집단은 오랫동안 혼란과 폭력이라는 부정적 요인이었다. 하지만 이 운동은 기사들의 반발로 이내 난관에 봉착하고 만다. 전사들의 야성을 길들이려고 노력하던 서유럽 교회는 이를 무마하기 위해 기사들이 서유럽 세계 밖에서 싸우도록 만들었다.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 간의 적대 관계를 조장한 셈이다. 서유럽도 처음엔 이슬람의 세계를 존중했다. 따라서, 누군가 주장하는 문명의 충돌이라는 얘기는 허무맹랑한 소리이다.



"신의 적들인 이교도에 대항하여 무기를 드는 것은 허용할 만한 일일 뿐만 아니라, 참으로 경건한 일로 생각되었다"

- 조르주 뒤비 (59 쪽)



1095년 서유럽, 당나귀를 탄 노인이 꿈 얘기를 하면서 돌아다녔다. 이 노인이 바로 은자 피에르다. 피에르는 바로 베드로의 프랑스식 발음이다. 그 노인은 '지난 꿈에 또 베드로 성인을 뵈었습니다'라고 말문을 열였다. 얘기의 골자는 이슬람의 손으로부터 예루살렘을 해방시키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곳은 무슬림의 수중에 들어간지 400년이 넘었던 성지였다. 이는 전쟁을 하자는 말과 같다.



은자 피에르는 잘나가던 지식인이었다. 내로라는 명문 귀족의 가정 교사로 초빙되고, 고위 정치인의 밀사 업무를 수행하는 등 성공적인 인생을 누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예루살렘에 순례 여행을 갔다가 꿈에 성인을 본 후 그의 인생이 바뀌고 말았다. 정말로 베드로 성인이 꿈에 나타나 성지 탈환을 위한 전쟁을 명했을까? 아무튼 광신도의 꿈을 확인할 방법은 전혀 없다. 여행에서 유럽으로 돌아온 그는 이곳저곳을 떠돌며 낮에는 전쟁을 호소하고, 밤에는 노숙하는 생활을 하였다. 그의 기행은 이미 유럽의 명물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를 주시하고 있는 인물이 있었다. 서방의 실력자인 교황 우르바누스 2세와 그의 측근들이었다. 교황청은 그를 데려가 예루살렘의 침공을 위한 여론 몰이로 이용했다. 마침내 우르바누스 2세는 여론을 못이기는 척하면서 이슬람 세계로의 원정을 선언했다. 또한, 전쟁에 참여하는 사람은 모든 죄가 사면된다고 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자원하였던 것이다. 그 가운데에는 서방의 명성있는 기사들도 있었다. 한편, 모인 사람들의 의복에 십자가를 새기도록 하면서 이들은 십자군으로 불리게 되었다.



1095년 11월 교황 우르바누스 2세, 십자군 원정을 발표하다

1096년 5~6월 유럽 각지에서 군중십자군이 일어나 유대인 학살을 자행

1096년 8월 은자 피에르가 이끄는 군중십자군이 동로마 제국을 거쳐 바다를 건넘

1096년 10월 술탄 킬리치 아르슬란의 반격으로 군중십자군이 니케아 근교에서 전멸



1096년 봄, 공식 일정이 가을로 잡혔지만 은자 피에르와 가난한 사람들끼리 먼저 전쟁의 길로 출발했다. 일부 귀족들은 기마대를 이끌고 군중을 따라갔다. 모험심을 즐기는 기사들도 대열에 참여했다. 이런 식으로 흥분한 군중들의 행렬이 유럽을 가로질러 갔다. 그런데, 이들은 엉뚱한 방향인 독일로 갔다. 십자군은 독일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을 학살했다. 이후 헝가리 농촌 마을을 지나면서 식량을 확보하려고 약탈과 학살이 자행되었다. 분노한 헝가리 왕은 기병대를 보내어 십자군에게 화살을 퍼부어 보복했다. 전력이 반으로 줄고 말았다. 도나우 강 유역에서 주민 4천 명을 학살하고, 강 건너 텅 빈 베오그라드에 도착하여 모조리 약탈하고 니시로 향했다. 니시는 베오그라드 주민들이 피난간 곳이었다. 동로마의 자랑인 기병대에 의해 십자군은 막대한 사상자를 내고 도망치고 말았다.



1096년 8월, 은자 피에르와 생존자들이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 앞에 집결했다. 동로마는 골치아픈 십자군을 배에 태워 투르크 땅에 무단 투기하기로 결정한다. 십자군이 유럽과 아시아를 나누는 보스포로스 해협을 건너 니케아 근교를 쑥대밭으로 만들며 니케아로 진입했다. 투르크의 킬리치 아르슬란은 그들의 만행을 목격하고선 기병을 출정시켰지만 십자군의 수에 밀려 고전한다.



1096년 10월, 약탈로 수많은 전리품을 취하자 강경파 기사들이 은자 피에르를 왕따시키고 군중들을 대부분 흡수하여 크세리고르돈 요새로 향했다. 이곳에는 술과 고기, 곡물 등 온갖 물품이 풍족했다. 십자군들은 술에 취해 승리를 자축하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목마른 기사들이 샘으로 물마시러 갔다가 무장한 투르크인들에 의해 가는 길이 봉쇄되었다. 봉쇄는 8일이나 지속되었다. 물없이 오래 버틸 재간이 없다. 프랑크 원정대의 우두머리인 기사 라이날드가 투르크에 투항했다. 10월 21일, 대부분의 십자군들이 투르크의 매복에 걸려들어 끔찍한 최후를 당하고 말았다. 은자 피에로는 동로마 황제 알렉시오스의 구원군에 의해 목숨을 건진다.



군중십자군이 전멸하자 알렉시오스는 불리해졌다. 그들의 패배는 분명 황제가 배신한 탓이라는 것이다. 알렉시오스의 개혁정책에 불만을 품은 세력들이 은자 피에르를 꼬드겨 동로마 제국의 정권 교체를 계획한다. 전쟁을 좋아하는 새로운 지도자를 황제로 추대하자는 의도였다. 이제 본격적인 1차 십자군 본대가 도착하게 된다. 기사들로 구성되었고, 이 중엔 보에몽 공작도 포함되어 있다. 2권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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