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 2 - 1차 십자군과 보에몽, 개정판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 2
김태권 글.그림 / 비아북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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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5년 서유럽, 은자 피에로가 출현하여 이교도로부터 예루살렘을 탈환해야 한다고 외치고 다녔다. 이슬람과의 전쟁을 통해 우위를 확보하려는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피에르를 불러들인다. 교황청의 허수아비가 된 이후 군중십자군의 리더가 된 피에르와 주변 인물들은 무지와 편견에서 비롯된 가당치도 않은 전쟁을 벌인다. 이름하여 십자군 전쟁이다. 유럽은 피에르가 주도한 이 전쟁으로 어처구니 없는 학살이 자행되고,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학살자가 되는지를 1권에서 살펴 볼 수 있었다.

 



 

군중십자군이 휩쓸고 간 지도 어언 1년. 다시 평화를 찾은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은 밤마다 울려 퍼지는 소리가 있었다. 바로 은자 피에로의 콧소리였다. 얼마 후면 1차 십자군의 본대가 도착하므로 좋은 시절도 이게 마지막이라는 비아냥이었다. 이번 십자군은 서방의 강력한 세 명의 기사가 이끌고 있었다. 이들은 바로 로렌의 공작 고드프루아, 툴루즈의 백작 레몽, 그리고 보에몽이었다.

 

보에몽과 알렉시오스 황제 간에는 이런 일화가 있다. 1081년 보에몽의 아버지 로베르가 동로마 제국을 침공했다. 당시 동로마 최강의 장군이 젊은 시절의 알렉시오스였다. 열세로 어쩔 수 없이 꽁무니를 빼는 로베르의 뒤를 쫓던 알렉시오스 앞을 왠 낭자가 가로 막았다. 로베르의 젊은 새 부인 시켈가이타가 큰 목소리로 병사들에게 전투를 독려했다. 이후 아들 보에몽이 원군을 이끌고 오는 바람에 전세가 오히려 불리하게 뒤집어졌다. 동로마의 전열이 완전히 무너지고 퇴각하는 알렉시오스에게 보에몽이 칼 끝이 이마로 향했다. 가까스로 피했지만 이마에 부상을 입었던 것이다. 투르크 용병을 고용하여 제국을 지키던 알렉시오스에게 보에몽은 여간 부담이 아니었다.

 

1097년 1차 십자군이 도착하여 니케아를 점령하다

1097~1098년 안티오키아를 둘러싼 엎치락뒤치락 공방전

1098년 십자군 지휘관들의 갈등과 마라트안누만의 학살

1099~1104년 예루살렘 함락에서 하란 전투까지

 

1096년 12월, 십자군 지휘관 고드프루아가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다. 동로마에서 환영을 하지 않자  이들은 동로마 군대와 일전을 벌였다. 1차 십자군의 첫 번째 전투였다. 1097년 4월, 레몽도 동로마에 발을 들여놓았지만 아무도 환영하지 않자 약탈과 파괴를 일삼았다. 또한, 4월에 보에몽도 동로마에 얼굴을 비친다.

 

"사실 나는 옛날 당신의 적이자 원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나의 자유의지에 따라 폐하의 친구로 왔습니다"

 -보에몽/안나 콤니니의 <알렉시아스>중에서 (99쪽)

 

아버지 로베르가 죽자 새 어머니 시켈가이타가 권력을 차지하면서 찬밥 신세로 전락하여 빈둥거리던 보에몽이 십자군 모집 광고를 보고서 새로운 기회를 찾아서 동로마로 왔던 것이다. 동로마에 막대한 이익을 남길테니 십자군 원정을 지원해달라고 요청한다. 아울러, 알렉시오스 황제에게 충성 서약까지 했다.

 

동로마의 지원을 얻어낸 십자군은 보르포로스 해협 너머 무슬림 땅으로 진격했다. 투르크의 젊은 술탄 킬리치 아르슬란은 이들 십자군을 졸로 여겼다. 십자군은 수도 니케아를 단숨에 점령해버렸다.1097년 6월 19일의 일이다. 만삭인 아내에게 성을 맡기고 킬리치 아르슬란은 원정을 떠나고 없었다고 한다. 한편, 복수를 다짐하는 투르크 전사들은 도릴레온 협곡에서 매복하여 십자군이 지나가길 기다리고 있었다. 화살로 공격을 감행하였지만 용맹한 보에몽의 기병에 의해 투르크는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패배의 소식은 이슬람 세계로 퍼져 나갔다. 십자군은 다음 목적지 안티오키아로 향했다.

 

1097년 10월, 안티오키아 주민들의 완강한 저항으로 십자군은 당황스러웠다. 레몽은 즉각 공격하자고 주장하나 보에몽의 결사적인 반대로 안티오키아를 포위하고 8개월이나 시간을 끌었다. 보에몽과 레몽의 대립각이 날카롭기만 했다. 보에몽이 안티오키아 스파이의 머리로 요리를 해먹었다는 소문이 나돌자 무슬림들은 공포에 떨게 되었다.

 

"보에몽 공작 진영의 주방에 잠입한 밀정들은 쇠꼬챙이에 꿰여

숯불 위에 돌아가고 있는 몇 구의 시신을 목격해야만 했다."

-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제 58장 중에서

 

마침내 보에몽의 속셈이 드러난다. 그는 육상과 해상의 교통 요충지인 안티오키아를 자신의 수중에 넣어 재기하겠다는 것이었다. 날이 밝자 보에몽이 비책을 얻었다는 소문이 빠르게 퍼져 나가고, 이 소식을 들은 십자군 지휘관들은 궁금해서 모두 보에몽에게 찾아왔다. 그는 그들에게 안티오키아를 점령하면 자신에게 양도할 것과 더 이상 토를 달지 않겠다는 두 가지 약속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후 안티오키아의 내부 밀고자 피루즈의 협조로 성벽을 차지한 십자군은 안티오키아를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이다.

 

1098년 6월 3일부터 성안에서는 대학살이 시작되었다. 이틀 후 카르부카가 출현하자 십자군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무슬림들은 기사회생의 기쁨을 누렸다. 권력을 유지하려고 적을 이용한 카르부카는 안티오키아를 탐냈다. 아무튼 십자군은 투르크 군에게 포위당해 아사 직전이었다. 굶주림과 죽음의 공포 때문에 많은 십자군들이 집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군대 용어로 대규모 탈영이었다. 한편, 안티오키아 대성당에 은자 피에로와 나귀가 숨어 들었다. 수도사 한 명이 메시아의 창이 안티오키아에 묻혀 있다고 장담했다. 보에몽은 일꾼들을 데리고 여기저기 파헤쳐서 '롱기누스의 창'을 찾아냈다.

 

"기뻐하시오, 승리는 분명 그대들 것이니!" (177 쪽)

 

성창과 성배의 전설은 그리스 신화 만큼이나 중요한 주제어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처형될 때 어느 군인이 예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더니 피와 물이 흘러 나왔다. 요셉이 예수의 시체를 모셔다가 유대인 장례 풍습대로 향료를 바르고 고운 베로 감았다. 이 때 사용된 창이 바로 '성창'이고, 군인의 이름을 따 '롱기누스의 창'이라고도 한다. 영국의 아서왕과 원탁의 기사들도 성창과 성배를 찾아 모험을 떠나기도 했으며, 히틀러도 성창의 신통력이 제3 제국의 승리를 가져다 준다고 믿었다고 한다.

 

피에르가 낡은 고철을 성창이라고 주장하자 십자군 사령관 아데마르 주교가 즉각 피에르에게 사기를 중단하라고 명하자, 이를 진짜라고 믿는 레몽 백작의 보증 때문에 더 이상 이를 문제 삼지 못했다. 1098년 6월 28일, 안티오키아 정문 앞 전투에 대해 십자군은 성창의 신통력 탓에 이룬 위대한 승리라고 기록하고 있다. 미심쩍은 이 전투에 대해 무슬림 측은 카르부카의 독재가 싫어 그를 배반하면서 발생한 일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보에몽이 안티오키아를 차지하려 하자, 레몽이 태클을 건다. 카르부카의 포위망을 뚫은 것은 성창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잘난 척하던 피에르에게 아데마르 주교가 1098년 8월 1일에 공개 토론회를 하자고 제안했다. 궁지에 몰린 피에르는 고민에 빠진다. 그런데, 그에게 또 다시 기적이 일어났다. 7월, 안티오키아에 심각한 전염병이 돌아 아데마르 주교가 죽고 만 것이다.

 

모두 애도하는 가운데 기고만장한 피에르는 성창을 믿지 않은 아데마르가 벌을 받아 지옥으로 갔다고 비난성 망언을 서슴치 않았다. 이에 십자군들이 피에르의 말에 격분하여 여론이 들끓자 피에르는 다시 궁지에 몰리는 신세가 되었다. 성창을 믿는 레몽의 중재로 신명 재판을 하기로 했다. 불의 심판을 받게 된 피에르는 결국 화상 때문에 죽고 말았다. 피에르가 죽자 레몽도 타격을 입고, 마침내 안티오키아는 보에몽의 수중에 들어갔다.

 

한편, 십자군 지휘관들의 내분과 식량 부족으로 병사들의 사기가 바닥에 떨어졌다. 약한 적과 싸워서 승리하여 사기를 올리려는 대책이 마련되어 십자군은 작은 도시 마라트안누만을 공격했다. 격렬한 저항이 있었지만 결국 주민들은 항복했다. 이후 만여 명의 무슬림들이 잔혹하게 학살되었다. 다음의 행선지는 예루살렘이다. 보에몽은 안티오키아에 눌러 앉았다.

 

"마라트안누만에서 우리 십자군은 이교도 어른들을 커다란 솥에 넣어 삶았다.

또 아이들은 꼬챙이에 꿰어 불에 구웠다"

-십자군 병사 라울 드 카엥의 연대기 (231 쪽)

 

1099년 6월 15일, 십자군은 보에몽의 예상과 달리 예루살렘 점령에 성공했다. 그들은 이곳에서 엄청난 약탈과 살육을 자행했다. 피로 얼룩진 참상에 사람들은 경악했다. 보에몽도 충격을 받았다. 보에몽에게 교황의 특사로 새로이 다임베르트 주교가 파견되었다. 둘은 궁합이 잘 맞았다. 보에몽은 안티오키아에서 여론을 조성하고, 다임베르트는 예루살렘에 잠입하여 공작을 꾸미기로 둘은 손발이 척척 맞았다.

 

1100년의 성탄 전야, 다임베르트가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그는 고드프루아 공작에게 왜 예루살렘을 통치하느냐고 따지듯 물었다. 이후 노골적으로 통치권을 자신에게 넘기라고 요구했다. 그런데, 고드프루아 공작이 갑자기 사망했다. 한편, 빨리 예루살렘으로 오라는 다임베르트의 전갈이 레몽 백작때문에 전해지지 않고 보에몽은 평소대로 무슬림 마을로 노략질 나섰다가 오히려 체포되고 만다. 고드프루아의 동생 보두앵 백작이 통치권을 넘겨 받는다.

 

1101년의 십자군이 보에몽을 구출하러 오자 투르크의 칼리치 아르슬란의 기병대에 의해 전멸하고 만다. 그래도 여전히 보에몽은 자신의 조카 탕크레드가 구하러 온다고 믿었다. 그러나, 탕크레드는 안티오키아에 군침을 흘리고 오히려 석방이 안되도록 방해 공작을 벌이고 있었다. 수감생활에서 풀려난 보에몽은 일대의 복수전을 준비한다. 

 

1104년 하란 전투가 시작되었다. 무슬림 연합군은 후퇴하는 척하며 프랑크 군을 유인했다. 이후 곧장 에워싸고 섬멸하는 작전을 펼쳤다. 동로마 제국에 보에몽이 죽었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보에몽의 시신이 동로마 제국에 들어섰다. 송장 냄새를 풍기던 관에서 보에몽이 벌떡 일어나 앉았다.

 

1106년, 대단한 인기를 누리던 보에몽은 프랑스의 부마가 되었다. 다시 한 번 동로마 원정의 길에 나서는 보에몽의 소식에 콘스탄티노플은 발칵 뒤집어졌다. 과거에 아버지와 함께 공격했던 두라초가 공격 목표였다. 이 전쟁이 어떻게 전개될지 3권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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