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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 - 인간의 아름다운 소멸을 말하다 ㅣ 플라톤 아카데미 총서
강영안 외 지음 / 21세기북스 / 2015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인문학은 '인간에 대한 공부'입니다. 인간이라면 반드시 묻고 답해야 할 질문을 다루는 것이 인문학의 기본적인 과제입니다. 이 질문들은 어떤 대상에 대한 분석이나 무엇에 대한 질문에서 출발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과학이나 공학이 제기하는 질문입니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우주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은 과학자들의 질문입니다. 인문학은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에서 출발해서 어떻게로 이어지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멋진 삶은 어떻게 가능하고, 우아한 죽음은 어떻게 맞이할 수 있는가? - '발간사' 중에서
인간이라면 피할 수 없는 일,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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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멋진 삶을 살아야 할 것이라는 막연한 짐작이 우리를 미美의 추구로 이끌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죽음의 실체를 완전하게 파악한 사람은 없기에, 이런 짐작만 가능했을 뿐이다. 그래도 한 가지, 마지막 순간이 아름다워야 할 것이라는 당연한 요구가 수반됐다. 아름다운 최후를 맞으려면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지금 바로 이 순간이 아름다운 삶의 연속이어야 하지 않을까 짐작해본다.
생태학자, 공학자, 철학자, 건축가, 신학자, 종교학자, 의학자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섬세한 시각을 발휘하는 최고 학자 8인은 죽음을 냉철하면서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이를 통해 우리는 삶과 죽음이 그리 멀리 있지 않으며, 죽음에 대한 물음이 도달하는 자리가 결국 삶이라는 점을 깨닫게 된다. 어느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생태학자 최재천 교수는 죽음이야말로 생명의 가장 보편적인 속성이라고 말한다. 유전자의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는 DNA가 복제를 통해 만들어낸 우연의 결과물이기에 모든 생명은 태초에 하나로부터 나뉘는 일원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즉 원래 하나였던 자연과 공생하는 법을 알고 평안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아름다운 삶과 죽음을 맞이하는 자세임을 전한다.
"오랫동안 생명에 대해 공부하면서 깨달은 점 중 하나는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은 하나의 공통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것은 '죽음'입니다. 생명의 가장 보편적인 속성이 바로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태초에 생명의 늪에서 우연치 않게 자기를 복제할 줄 아는 어떤 화학 물질, 예를 들어 DNA나 RNA가 탄생해 지금까지 계속적으로 화학 물질을 복제해냄으로써 그것이 오늘날 이 어마어마한 생명계를 만들어냈다고 한다면, 태초의 DNA는 지금도 죽지 않고 계속 이어져 온 것이다. 박테리아를 만들고, 오징어를 만들고, 늑대를 만들고, 사람을 만드는 등 모습만 바꿔서 다른 종을 만들어 복제 실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지구 생명의 역사는 DNA 혹은 RNA의 일대기에 불과하다. 우리는 일정 시간이 지나면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한계성을 지닌 개체이지만, 인간인 우리를 만들어낸 유전 물질은 계속해서 이어질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공학자 황농문 교수는 죽음을 삶을 위한 필요조건이라 본다. 우리 모두는 죽음을 의식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꺼려하지만 이를 온전히 의식하는 것이야말로 성숙한 삶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죽음에 직면하는 순간 진실로 중요한 것만 남으며 살아 있음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기 때문이다.
죽음을 망각한 생활과 죽음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옴을 의식한 생활은 두 개가 서로 완전히 다른 상태다. 전자는 동물의 상태에 가깝고, 후자는 신의 상태에 가깝다. - 톨스토이, <인생의 길> 중에서
고故 스티브 잡스도 생전에 스탠퍼드대학교 졸업식에서 졸업생들에게 죽음에 대해 얘기했다. 왜 하필 죽음에 대해 얘기했을까? 그는 항상 죽음에 직면해 있음을 의식함으로써 자신의 인생을 바꿔놓았기 때문이다. 그의 말처럼 죽음을 직면하면 온갖 자부심과 자만심, 수치스러움과 실패에 대한 두려움, 외부의 기대들이 모두 떨어져나간다. 그리고 진실로 중요한 것들만이 남는다. 살아 있음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김애령 교수는 죽음 앞에서 철학자의 역할을 고민한다. 죽음이란 존재론적인 결함이자 유한有限한 자가 가지고 있는 무한한 슬픔이기에 우리 모두는 결국 죽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으며, 아름답게 사는 것이야말로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하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그늘과 고통으로 얼룩진 삶이라도 이를 이야기로 만들어 스스로를 관조하고 이를 함께 나눌 친구가 있다면 좋은 삶은 가능하다는 것이다.
시간은 결코 머물지 않는다. 시간은 많은 것을 피어나게 하고 성장하게 하고 탄생하게 하고 변화하게 한다. 또 많은 것을 파괴하고 해체하고 늙게 하고 낡게 하고 저물게 하고 죽게 한다. 인간의 시간은 존재론적인 결함이기도 하고, 유한한 자가 가지고 있는 무한한 슬픔이기도 하다.
아름다운 삶은 고통이나 슬픔을 경험하지 않는 삶이 아니라 그 고통이나 슬픔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하고 이해하느냐를 통해 만들어가는 것이다. 아름다운 삶은 결코 확신이나 확실성으로 가득 찬 삶이 아니다. 오히려 삶이 가지고 있는 그늘, 고통, 눈물, 불확실성, 연약함을 끌어안고 나아가는 것, 그것이 진정 아름다운 삶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오디세우스와 세이렌들>
건축가 김종성은 건축이 언뜻 죽음과 어울리지 않는 조합 같지만 건축이야말로 삶을 오롯이 담고 있는 공간이며, 그렇기에 건축의 미학을 살펴보는 것은 우리의 삶과 그 완성이라고 할 수 있는 죽음을 들여다보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비잔틴 양식부터 신고전주의 양식에 이르는 건축의 역사를 통해 건축에 담긴 우리의 모습을 찾아본다.
오랫동안 건축 일에 종사하면서 그가 공감하고 확신하게 된 두 가지 요소는 비례와 재료이다. <무량수전>을 아름답게 보이게 하는 것은 숨어 있는 비례미美 때문일 것이다. 이런 요소들이 갖춰질 때 건축물로서의 아름다움이 완성되어 제대로 빛을 발하게 된다. 우리의 삶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죽음 또한 우리 삶의 일부라고 말하고 싶다. 아름다운 삶이 있어야 아름다운 죽음이 있고, 그때 비로소 하나의 인생이 완성되는 것일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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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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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자 김상근 교수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존재의 성찰에서 시작한 인문학적 사유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공공 이익에 대한 실천으로 발전되었음을 짚고 넘어간다. 그리고 이제 인문학에 남겨진 마지막 과제는 '아름다운 삶을 살고 우아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그레코-로만과 히브리 전통에서 죽음의 의미를 찾는다. 이와 함께 죽음은 '벽이 아닌 평화Shalom의 세계로 나아가는 문'이라는 희망의 이야기를 담아낸다.
우연의 연속에 불과한 사다리 같은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 그리고 그 운명이 다하면 우리 모두 죽음이라는 미지의 세계로 뛰어들어야 한다. 죽음을 맞이한 우리는 그 미지의 세계를 향해 몸을 날려야 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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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인식하고 그것을 문화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인류는 특이한 생물이다. 잘났든 못났든, 잘살든 못살든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그러나 현실에서 정말 '모두 죽음 앞에 평등한가?'라고 묻는다면 아마도 고개를 젓게 될 것이다.
화가들은 죽음을 어떻게 표현했을까? 16세기 북유럽 르네상스를 이끈 독일 화가 한스 발둥(1484~1545년)은 죽음을 묘사할 때 주로 음산한 분위기와 해골을 소재로 활용했다. 1510년에 그린 이 그림 <인생의 세 시기와 죽음>은 한 인간이 늙어가는 모습을 세 시기로 나눠 죽음을 잡아냈다.
화면에는 젊은 시절의 화려함과 죽음의 불안감이 어지럽게 공존한다. 삭막한 들녘과 스산한 하늘은 암울한 분위기를 더한다. 모래시계를 든 해골이 늙은 여인과 팔짱을 낀 모습이 무척 이채롭다. 죽음을 제대로 바라봄으로써 삶의 어떤 순간도 낭비해선 안 된다는 걸 깨닫게 해주는 그림이다.
십자가에 매달렷던 예수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상처를 보여준다. 그러자 의심 많은 제자 도마는 예수의 상처에 손가락을 집어넣어본다. 그러나 예수는 분노하거나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에게 평화를 기원한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샬롬"이라고 외친다. 예수에게 죽음은 벽도 문도 아니었다. 후회와 분노를 넘어서는 평화의 길이었다.
종교철학자 정재현 교수는 오늘날 삶 밖으로 내몰린 죽음을 삶 안으로 다시 회복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본래 우리 몸을 이루고 있는 세포들은 끊임없는 생성과 소멸 과정에 있으며 죽음으로써 몸 전체가 살아가는 생명의 역설이 우리 몸 자체에 반영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죽음을 숙명과 해방의 대립 구도로 보는 것을 떠나 '유한한 초월', 즉 삶 안에서 죽음을 발견해 남은 삶인 자신의 현재를 사랑하라고 말한다.
우리의 본능은 죽음에 저항하며 삶과 죽음의 관계를 가능한 한 멀리 떼어놓으려 한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심각한 것은 무엇보다도 삶의 바깥으로 내몰린 죽음이 오히려 삶을 일그러뜨린다는 점이다. 그 문제를 극복하려는 노력은 곧 우리의 몫이다. 그래서 바깥으로 내몰렸던 죽음을 삶 속으로 끌고 들어오는 새로운 시도가 필요하다.
죽음과 관련해선 본능이나 욕망 모두 비슷하게 작동한다. 그래서 가능한 한 멀리멀리 밀어낸다. 욕망으로 죽음을 덮어버리면 삶이 일그러지고 만다. 덮어버린 사실을 잊어버리면 그 일그러진 삶을 되돌아볼 기회 또한 잃어버리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죽음에 대한 생각은 삶을 더 풍요롭고 가치 있게 엮어내려는 노력이다. 그래서 건강한 삶을 위해서는 삶에서 죽음을 보아야 한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밀어냈던 죽음을 삶과 함께 엮어낼 수 있을지에 대해 지혜를 모아야 한다.
우리의 몸을 이루고 있는 모든 세포들은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거친다. 태어나 활동하다가 어느 순간 다시 소멸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몸은 죽음을 받아들이면서 죽음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몸을 이루고 있는 모든 세포들이 끊임없이 죽음으로써 몸 전체가 살아가는 생명의 역설을 우리 몸은 이미 실천해오고 있다.
"너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리라"
- '성서' 중에서
죽지 않을 것처럼, 아직 죽지 않은 것처럼 살지 말고 이미 죽은 사람으로 살라는 것이다.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는 말씀이 바로 이를 가리킨다. 그렇게 되면 지금 사는 삶은 덤으로 사는 것이다. 덤의 시간들, 순간들, 그것이 바로 지금이다. 그래서 한마디로 추리자면, "자신의 현재를 사랑하라! Carpe diem!"
원로 철학자 강영안 교수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현상학, 그 의미를 살펴보는 해석학, 관계를 생각하는 윤리학을 통해 죽음을 분석한 뒤, 선물과 같은 삶을 '감사(Eucharist)'라고 표현한다. 소크라테스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이어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생각했고 플라톤은 철학의 가장 중요한 임무를 멜레테 타나투, 즉 죽음에 대한 수련이라고 했다. 이는 죽음에 대한 철학의 분석에 우리가 귀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하이데거는 "그 끝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내가 나 자신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끝이 있으므로 해서 너와 나 구별도 없이 군중 속에 무리지어 사는 그런 삶이 아니라 비로소 누구와도 혼돈되지 않는 나 자신, 존재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죽음은 누구의 죽음도 아닌 나의 죽음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진심으로 우리의 삶 자체를 내게 주어진 값진 선물이라 생각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죽음은 결코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삶이 정말로 살 만한 것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중학교 1학년 때 누나의 죽음을 겪으면서 의사의 길을 결심한 윤영호 교수는 죽음을 절망이 아닌 희망의 순간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의미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삶은 선택으로 주어진 것이기에 건강한 목표와 새로운 관점으로 세상을 믿고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아름다운 삶이며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하는 자세라는 것이다.
만약에 우리가 우주라는 하나의 몸에 존재하는 세포라고 가정한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는 각자의 이기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라는 몸을 위해 서로 조화를 이루며 봉사하는 존재가 될 것이다. 남을 믿지 않는다면, 그리고 세상을 믿지 않는다면 누군가를 배려하고 봉사하는 삶은 불가능하다. 서로 믿고 조화를 이루며 봉사하는 삶, 바로 이것이 의미 있는 삶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결국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이다. 우리는 죽지 않기 위해 사는 것도 아니고, 죽지 못해 사는 것도 아니다. 죽기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다. 의미 있는 삶을 살다가 아름답게 죽음을 마무리하는 것까지가 인생의 완성이다. 나무는 죽어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난다. 다시 대지로 돌아간 우리 역시 어디선가 다른 생명으로 이어진다. 죽음은 자연으로의 회귀이며 또 다른 시작이다.
"나는 쓰러져 죽을 때까지 자연의 길을 여행하겠다. 그리하여 내가 매일 들이마시던 대기 속으로 나의 마지막 호흡을 반환할 것이며, 나의 아버지가 씨를 얻고, 어머니가 피를 얻고, 유모가 우유를 얻었던 대지에 깊이 묻히리라"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