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계획의 철학 - 미루는 본성을 부정하지 않고 필요한 일만 룰루랄라 제때 해내기 위한 조언
카트린 파시히.사샤 로보 지음, 배명자 옮김 / 와이즈베리 / 2015년 9월
평점 :
절판


자제력은 전기톱을 닮았다. 전기톱은 나무를 쉽게 베어내지만 자칫 잘못하면 벌목꾼의 다리까지 날려버릴 수 있다. 자제력이라는 말에 넘어가 자기 본성이나 라이프스타일에 맞지 않는 인생설계를 세웠다가는 크게 불행해질 수도 있다. 물론,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할 때도 있다. 하지만 첫째 꼭 그래야 하는지 아직 증명된 바가 없고, 둘째 이런 경우가 적을수록 더 행복해진다. 요컨대, 우리는 끊임없이 계획하지 않아도 되는 삶을 계획하고자 한다. - '서문' 중에서

 

 

오늘 꼭 해야만 하나?

 

모든 시작에는 망설임이 있다. 지금 서울 강남의 가로수길을 활보하면서 이곳저곳 쇼윈도우를 기웃거리는 젊은 여성들, 거실 소파에 앉아 인기 TV 드라마를 뚫어져라 시청하고 있는 중년 여성들, 그리고 서울 근교의 산행을 마치고 등산 동호회 회원들과 산 입구 음식점에서 부어라 마셔라 여흥을 즐기는 남성들은 아직 쓰레기 봉투를 내놓지 않았거나, 빨래를 마치지 못했거나, 우편함의 쌓인 우편물을 수거하지 않은 등 눈앞에 놓인 과제나 프로젝트를 미루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고 이들을 비난까지 할 필요는 없으며 그리고 그래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이들이 무조건 게으르고 나쁜 사람들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단지 이들은 그 일을 잠시 지연시키고 있을 뿐이다. 사실 '미룬다'와 '지연'이라는 말은 같은 뜻임에도 불구하고 '지연'시킨다는 말이 왠지 듣기엔 편하다.

 

이 책의 공저자인 카르린 파시히사샤 로보는 당장 할 일을 '내일을 위해 남겨두는' 생활방식에 대해 'LOBO(Lifestyle Of Bad Organization)'이라고 명명했다. 즉 조직화에 형편없는 생활방식이라는 뜻이다. 지연행동은 특정 업무나 과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일상의 모든 일이 미뤄지고, 도저히 미룰 수 없어 보이는 일도 쉽게 지연된다.

 

여자든 남자든 똑같이 미룬다. 기혼자든 미혼자든 똑같이 미룬다. 일반인도 학자도 똑같이 미룬다. 특히, 직장인들은 자영업자보다 더 많이 미룬다. 미루는 성향은 일단 생기면 콧물감기처럼 지나가지 않고 견고하게 남아 성격적 특성이 되는 것 같다. 어느 연구에서 같은 피험자에게 지연행동에 대한 똑같은 설문조사를 몇 년 간격으로 두 번 실시했는데, 그 결과가 거의 똑같았다.

 

2003년 발표된 쌍둥이 연구에 따르면, 유전자 구성이 지연행동과 관련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연행동의 유형을 봤을 때 일란성 쌍둥이가 이란성 쌍둥이보다 확실히 더 많이 닮았기 때문이다. 안 좋은 조건에서(이를테면 대학에 다니며 시험을 치르고 과제를 내야 할 때) 더 많이 미루게 되지만, 세월이 흘러도 미루는 태도는 크게 변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다른 보상거리로 지연행동을 상쇄하는 능력이 발달할 뿐이다.

 

책은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를 미루고 딴짓을 하는 과정에서 세계적인 작품을 탄생시킨 사례들은 미루기, 게으름, 무계획과 같은 부정적인 행동이 인간에게 초인적인 집중력을 발휘하게 해 창의성의 원동력을 만들어 준다고 알려준다. 독일의 소설가이자 칼럼니스트인 카트린 파시히와 광고, 상품 기획자인 사샤 로보는 이같은 인간의 미루는 습성을 부정하거나 쓸데없이 자책하거나 강박에 사로잡히지 말고, 자신의 의지와 선호도에 따라 할 수 있는 일만 제때 해내라고 충고한다.

 

 

환경이 만들어내는 부담

 

사무직과 연구직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직업군에서 업무와 요구사항이 점점 더 복잡해지고 있다. 이는 경제 및 산업의 전문화와 기술화가 확대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이들에게 부담을 주고 그들로 하여금 인위적 압박을 피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이 꼭 기술 발전 때문만은 아니다. 이보다 더 피하기 어려운 사회적 '노동열의'라는 문제가 있다.

 

노동열의 때문에 힘든 것은 자영업자들도 마찬가지다. 사실 이들은 너무 많이 일한다. 여러 프로젝트가 무질서하게 쌓이고, 재정 압박이 과도한 업무로 이어진다. 실제로 독일에서는 변호사나 건축가 같은 대표적인 자영업자들의 업무 시간이 가장 긴 편이다. 변호사협회와 건축가협회의 발표에 따르면, 주 70시간 근무도 흔하다고 한다. 자영업자가 누릴 수 있는 자유로운 시간 안배라고 해봐야, 딱 하루 어느 요일에 야근을 하지 않을지 정할 수 있는 게 전부다.

 

전문지식과 과학기술뿐만 아니라 적응력에 대한 요구 역시 커지고 있다. 점점 더 다양한 과제, 요구 조건, 상황에 맞게 대처하는 능력이 요구되는 것이다. 적응력을 발휘하지 못할 경우, 자칫 자책에 빠질 수도 있다. "비슷한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은 다들 잘 해내고 있잖아!" 이렇게 자신을 남과 비교하게 되는데, 이때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내적인 감정 상태가 완전히 다를 수도 있다는 사실은 무시된다. 그러나 완벽해 보이는 사람들도 저녁에 이불 속에서 남몰래 괴로워하며 뒤척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LOBO들은 어떤 과제에 부담을 느끼고 뒤로 미루는 것이 모두 자기 탓이라고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고 쉽게 좌절한다. 그들의 능력에 비해 요구 사항이 너무 과한 경우에도 말이다. 널리 만연돼 있는 이런 자책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LOBO들이 책임감을 느껴야 하는 일은 하나뿐이다. LOBO들에게는 자기 능력에 맞는 환경을 찾거나 만들어야 할 책임이 있다.

 

노련한 미루기를 위한 조언

 

더 늦기 전에 지연행동 연습하기

늦잠 자기

너무 적게 계획하지 않기

모든 걸 동시에 시작하기

그냥 놔두기

생산성 향상 방법을 조언하는 블로그 멀리하기

 

합리적 이성의 소유자라고 자부하는 자기계발서 저자들은 한 가지 일에 집중하라고 조언한다. 특정한 한 가지 일에 들어가는 '비용', 즉 그 일을 준비하고 착수하는 데 필요한 시간은 정해져 있고, 일에 따라 그 비용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것 이다. 이 설명을 곧이곧대로 믿고 식사 때 먼저 밥을 다 먹고, 그 다음에 채소 반찬을 다 먹고, 그다음 고기 반찬을 다 먹어야 할까? 수영장에서 한 시간 동안 다이빙만 하고 그다음 한 시간 동안 아이스크림만 먹어야 할까?

 

로버트 레빈<시간은 어떻게 인간을 지배하는가>에서 설명한 바에 따르면, 모노태스킹은 과제의 마무리를 중시하는 대부분의 서구문화권, 즉 '시각 문화time culture'에서 생긴 특별한 습관이다. 반면 과제의 시작을 중시하는 '사건시 문화event-time culture'에서는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진행하는 다중시간형 계획을 선호한다.

 

"다중시간형 계획을 세우면, 우선 한 가지 일에 집중하다가 다른 일에 관심이나 호감이 생기면 그 일을 하고 다시 다른 일에 흥미가 생기면 그 일을 한다. 중간에 갑자기 쉬게 될 수도 있고 계획에 없던 새로운 일이 등장하기도 하는데, 그러다 보면 처음에 집중했던 일에 다시 흥미가 생길 수도 있다. 다중시간형 계획에서는 모든 일이 각 각 조금씩만 진행된다"

 

심리학자 로버트 레빈은 다중시간형 계획과 단일시간형 계획을 유연하게 변환하라고 조언했다.

 

 

일에서의 문제

 

스위스 종교개혁가 울리히 츠핑글리는 긴 시간의 고단한 노동을 신에 대한 공경이라 여겼고, 프랑스 종교개혁가 장 칼뱅은 한 술 더 떠 이 신앙의 전제조건으로 자본주의가 막강한 성공을 거둘 수 있다고 했다. 저자는 이렇게 출발한 이념들이 현대인의 노동 업무뿐만 아니라, 가사노동, 개인의 사생활까지로 확장돼 많은 압박을 주고 있다고 주장한다. 결국 현대인은 회사나 집에서 일을 덜 해 최선을 다하지 못한 것 같은 양심의 가책을 받고 불안한 심리와 자괴감, 자책감까지 느끼게 된다는 설명이다.

이에 저자는 끊임없는 노동 압박감의 실체를 냉정하게 분석해야 현실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고, 불필요한 양심의 가책과 업무를 걸러내 꼭 필요한 일에만 집중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의무라는 명칭으로 교묘히 포장된 것을 잘 가려내어 꼭 필요한 것 외에는 과감히 거부하고, 꼭 해야 하지만 능력이나 시간이 부족하다면 업무나 일상과 관계없이 남에게 위탁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가사家事 문제

 

옛날엔 참 살기 좋았다. 식탁보에 코만 안 풀어도 청결한 사람으로 통했다. 빨래는 1년에 한 번만 했다. 셔츠 한 장, 접시 하나, 나무상자 하나가 살림살이 전부인데 얼마나 많이 어질러놓을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아름답고 정돈된 집을 소개하는 잡지가 많아지면서, 비를 막고 온기를 주는 것이 본연의 임무였고 한때 동굴이면 족했던 집에 대한 기대가 한껏 높아졌다. 오늘날 사태는 더욱 심각해져서 무질서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기계발서는 한결같이 관리, 청소, 그리고 독일 가정들이 보유하고 있는 평균 1만 5000개나 되는 물건들의 상세한 정돈 방법을 소개한다.

 

LOBO라고 해서 모두가 난장판인 집 때문에 괴로워하는 게 아니다. 어떤 LOBO는 혼자 감당할 수 없음을 미리 깨닫고 청소부를 미리 고용한다. 또 어떤 LOBO는 업무만 미룰 뿐 집안 청소는 쉽게 끝낸다. 학술적으로 연구한 바에 따르면, LOBO의 90퍼센트가 정리정돈과 청소를 미룬다. 정리정돈과 청소는 딱히 급한 일도 아니고 재미도 없기 때문에 미루기에 좋다.

 

 

데드라인의 위대한 힘

 

영리한 프리랜서나 프로젝트 리더는 필요한 비용, 인원, 기간을 예상할 때 '2배수에 약간 더 추가하기' 방식을 취하는데, 현실적인 예상 수치에 2를 곱하고 여기에 다시 만약을 대비하여 약간을 더 추가한다. 그러면 관리자나 의뢰자는 후자의 방식을 취해 제시된 수치를 다시 반으로 줄인다. 이제 양측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협상안이 결정된다.

 

자신의 예상을 두 배로 늘려 제안할 생각을 하지 못한 왕초보의 경우만 아니라면 말이다. 직장이나 일상 곳곳에서 다양한 형태로 이런 협상 게임이 벌어진다. 의뢰하는 사람과 의뢰받는 사람이 데드라인을 결정할 때도 같은 원리로 합의에 이른다. 의뢰하는 사람은 아무리 늦어도 3월 1일까지 끝내야 한다고, 그게 지켜지지 않으면 회사가 망할 거라고 과장한다. 사실은 12월까지 끝내도 넉넉한데 말이다. 의뢰받는 사람은 알겠노라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인 후, 2월 말쯤 콜라를 쏟는 바람에 컴퓨터가 고장났다고 거짓말을 한다. 사실 왜곡은 어느 정도 민주주의와 비슷하게 기능한다. 즉, 특별히 좋지는 않지만 그래도 다른 것보단 낫다.

 

 

벼락치기가 집중력을 높여준다

 

화가이자 건축가인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기하학을 하느라 궁정 화가로서 맡은 <모나리자> 제작 업무를 주어진 시간 내 끝내지 못했다. 오페라 작곡가 로시니는 <도둑까치> 서곡을 최종 리허설 날 스칼라극장 계단에서 썼다고 고백하며 자신이 쓴 명곡들이 사실은 미루기와 벼락치기로 완성됐다고 토로한다. 세계적인 온라인 이미지 공유 사이트 '플리커'의 개발자는 당시 맡았던 게임 개발 업무가 너무 싫어 딴짓하다가 세계 어느 곳, 어떤 장치로도 사진을 업로드, 편집, 공유할 수 있는 플리커를 개발하게 됐다.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를 미루고 딴짓을 하는 과정에서 세계적인 작품을 탄생시킨 사례들은 미루기, 게으름, 무계획과 같은 부정적인 행동이 인간에게 초인적인 집중력을 발휘하게 해 창의성의 원동력을 만들어 준다고 알려준다.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마라"라는 금언에 지나치게 함몰되지 말자. 벼락치기가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인간의 미루는 습성을 부정하거나 자책하는 대신에 자신의 의지와 선호에 따라 할 수 있는 일만 제때 해내라는 것이 이 책을 관통하는 핵심이다.

 

'자신의 본성과 흥미'를 제대로 파악해 일의 우선순위를 정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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