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34)

1940년의 뉴욕이란!

그런 뉴욕은 다시 없을 것이다. 그 이전이나 이후의 뉴욕을 폄하할 생각은 물론 없다. 언제라고 뉴욕이 중요하지 않았겠니. 하지만 그때의 뉴욕은 그 도시에 첫발을 내딛는 젊은이들에게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바로 그 도시, 오직 내 눈에만 새롭게 창조된 뉴욕은 다시 존재하지 못하겠지. 그 뉴욕은 책 사이에 끼워 말린 나뭇잎 책갈피처럼, 나만의 완벽한 뉴욕으로 기억 속에 영원히 남아 있단다. 너에게 너만의 완벽한 뉴욕이 있겠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겠지만, 그때의 뉴욕은 언제나 나만의 뉴욕이란다.


(357)

네가 너에 대해 모르는 게 하나 있어. 비비안. 너는 절대 흥미로운 사람이 아니라는 거야. 그래, 물론 예쁘긴 하지. 하지만 그건 오직 젊기 때문이란다. 아름다움은 곧 사라져. 하지만 넌 결코 흥미로운 사람이 될 수 없어. 내가 이 말을 해주는 이유는, 네가 스스로 흥미로운 사람이라고 착각하면서, 네 삶도 중요하다고 착각하면서 살고 있기 때문이야. 하지만 넌 전혀 흥미롭지도 않고, 네 삶도 전혀 중요하지 않아. 한때는 나도 네가 흥미로운 사람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틀렸어. 네 고모 페그가 바로 흥미로운 사람이야. 올리브 톰슨도 흥미로운 사람이고, 나 역시 마찬가지야. 하지만 넌 전혀 흥미롭지 않아. 무슨 말인지 알겠니?”


(498)

아무나 쉽게 어른이 되지 못해.” 올리브는 페그의 말을 못 들은 것처럼 다시 입을 열었다. “어렸을 때 아빠가 해주신 말씀이지. 어른의 세상은 어린이의 세상과 다르다고. 너도 알다시피 아이들은 고통을 견딜 필요가 없지. 그런 기대를 받지도 않고. 너무 어려운 일이니까. 하지만 어른이 되려면 어른의 자리에 서야 해. 당연히 그런 기대도 받게 되고. 자기만의 원칙과 신념도 지켜야 하고. 희생도 필요하단다. 사람들은 널 판단하겠지. 실수를 하면 해결해야 하고. 어름이 되지 못한 사람보다 충동을 자제하고 더 고상한 입장을 취해야 할 때가 있을 거야. 물론 많이 아프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어른의 자리가 힘든 거란다. 이해하겠니?”


(529)

나에 대해 이렇게 솔직하게 털어놓아본 적은 없었다. 내 경험을 말로 표현해본 것도 처음이었다. 하지만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 것 같았다. 내가 말한 어둠이 나 사악함이 아니라는 걸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내 마음속 깊고 깊은 곳에 세상의 빛이 결코 닿을 수 없는 곳이 존재한다는 뜻이었다. 오직 섹스만 그곳에 가닿을 수 있었다. 태곳적부터 내 안에 존재하는 곳, 문명의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곳, 말이 가닿을 수 없는 곳이었다. 우정으로도 불가능했다. 창의적 노력으로도, 경외와 기쁨으로도 건드릴 수 없는 곳이었다. 내 안의 그 어둠은 오직 섹스를 통해서만 가닿을 수 있었다. 남자들이 그 어둡고 은밀한 공간에 도달하면 나는 마침내 나라는 인간의 기원에 내려섰다고 느꼈다.


(548)

잘 들어요, 프랭크 그레코. 당신이 겁쟁이라면 그래요, 당신 말대로 그렇다고 쳐요. 그래도 그건 아무 의미도 없어요. 내 고모 페그는 알코올 중독이에요. 고모는 술을 절제하지 못해요. 그래서 인생이 엉망진창 꼬였죠. 그게 무슨 뜻일까요? 아무 뜻도 없어요. 그렇다고 고모가 나쁜 사람일까요? 술을 조절하지 못한다고 실패한 사람일까요? 당연히 아니에요. 고모는 그저 그런 사람인 거예요. 어쩌다 알코올 중독이 된 것뿐이에요, 프랭크. 누구나 그런 일을 겪을 수 있어요. 그래도 우리는 우리예요. 그 사실을 바꿀 수 있는 건 없어요. 빌리 삼촌은 약속을 밥 먹듯 어기고, 여자에게 충실하지 못해요. 그것 역시 아무 의미 없는 일이에요. 빌리는 멋진 사람이면서 믿을 수 없는 사람이에요. 삼촌은 그저 그런 사람인 거예요. 그뿐이지 아무 뜻도 없어요. 그래도 우린 그를 사랑해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6)

3 23일 스티븐스(일본 통감부 외교고문)는 샌프란시스코 오클랜드 역 구내에서 장인환, 전명운 두 애국지사의 총격을 받았다. 두 사람은 처음부터 같이 행동한 게 아니라 서로 모른 채 각각 거사에 나섰다. 먼저 전명운이 권총을 쏘았으나 불발되자, 장인환이 다시 3발을 쏘아 2발은 스티븐스의 가슴과 허리를 관통했고 나머지 한 발은 전명운의 어깨에 맞았다. 스티븐스는 병원에 옮겨진 후 사망했다. 그는 보호조약을 강제로 맺게 함으로써 나의 강토를 빼앗았고, 나의 종족을 학살했기에 이를 통분히 여기어 그를 쏜 것이다라고 말했다.


(42-43)

(베델)는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나는 죽더라도 신보는 앵생케 해 한국 민족을 구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베델의 그런 한국 사랑은 그가 강한 민족주의 정서를 갖고 있는 웨일스 출신이라는 사실과 관련이 있는 걸까? 베델의 한국 사랑과 반일정신은 매우 투철해 한때 미국의 <워싱턴 포스트>“<대한매일신보>의 통감부에 대한 공격을 중지시킬 수 있는 방법이란 베델을 암살하는 길밖에 없을 것이라고 쓰기도 했다. 베델의 장례식은 동대문 밖 영도사에서 수천 명이 모인 가운데 성대히 거행되었으며 그의 시신은 양화진(서울 합정동) 외국인 묘지에 묻혔고 그의 공적을 기리는 사람들의 성금에 의해 1910년 묘비가 세워졌다.


(132-133)

1910 2 7일 오전 9시 뤼순 법정. 당시 15만 부를 발간하던 영국 최대의 주간지 <그래픽>의 기자 찰스 모리머는 재판 참관기를 통해 세기적인 재판의 승리자는 안중근이었다. 그는 영웅의 월계관을 거머쥔 채 자랑스레 법정을 떠났다. 그의 입을 통해 이토 히로부미는 한낱 파렴치한 독재자로 전락했다고 썼다. 모리머는 재판을 참관하던 많은 일본인들조차 안중근에게 지극한 존경심을 가졌으며 그들에게서는 살해된 정치인의 추억보다 안중근의 명성이 더럽혀지도록 내버려둘 수 없다는 분위기가 형성됐다고 말했다. 또 그는 안중근에 대해 그는 삶의 포기를 열렬히 염원했다이 사건으로 인해 재판에 오른 건 다음 아닌 일본의 현대문명이었다고 말했다.


(184-185)

한국은 종교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활기찬 나라이나 어떤 단일 종교도 한국인들의 종교생활을 지배하고 있지 않고 있는 다종교 국가이다. 종교적 갈등을 겪고 있는 많은 동구, 중동, 아프리카 국가들과 달리 한국에서는 기독교(개신교), 천주교, 불교, 유교, 천도교가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종교적 다원주의는 동아시아 국가들에게 종교적 평화의 모델이 될 것이다. 또한 한국은 유교의 문화적 전통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나라이면서도 아시아적 가치를 변용하여 서구의 자유주의, 합리주의를 수용하는 데 가장 개방적인 나라이다. 한국은 아시아적 가치와 서구의 가치가 화해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아니 어쩌면 한국은 새무얼 헌팅턴이 역설한 문명의 충돌에 대한 해답까지 제공해줄 수 있는 나라일지도 모르겠다. 이는 한국의 극단주의는 신바람특성과 맞물린 것으로 늘 잠재돼 있긴 하지만 오래 지속되긴 어렵다는 걸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정리해볼 수도 있겠다. 한국인은 단기적으로 극단주의적이지만, 장기적으론 중용 지향적이다.


(189)

<독립신문> 1898 2 8일자 논설에 따르면, “사람이 시계를 살 때마다 기계 속을 모른즉 시계 좋고 아니 좋은 것을 아는 도리는 다만 전면에 비늘 둘이 시간과 분과 각을 옳게 가리키는지 아니 가리키는지 하는 것을 가지고 아는지라. 그것과 같이 사람을 옳고 그른 것을 아는 것은 그 사람의 하는 행사를 가지고 알기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는 것이라. 설령 시계가 보기에 훌륭하고 금과 보석으로 꾸민 시계나 그 시계가 시를 맞추지 아니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시계가 아니라 일개 값진 물건이라. 금과 보석을 팔면 돈은 생길지언정 시계로 쓸 것은 못 되지 그것과 같이 사람도 외양이 좋고 의복을 잘 입어 보기에는 좋은 사람 같이 보이나 자기 맡은 직무를 못 할 지경이면 무용지안이라. 그러하기에 시계 살 때에 외양과 모양은 어떠하였든지 시만 잘 맞추면 그 물건이 쓸데 있는 물건이요 사람도 지체가 없고 오양도 준수치 않더라도 맡은 직무만 착락 없이 할 것 같으면 그 사람이 보배로운 사람이라.”


(288)

조선은 당파싸움 때문에 망했다는 일본인들의 주장이 많은 한국인들에게도 먹혀 들어갔다면, 그건 조선이 망해 일본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는 명백한 사실의 힘 때문일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왜 조선이 망했는가? 이에 대한 만족스러운 답을 우리 스스로 내놓지 못한 채 당파싸움 때문에 망한 건 아니댜라고 주장하는 건 매우 옹색하다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관리자들 오늘의 젊은 작가 32
이혁진 지음 / 민음사 / 2021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얼마 전에 소설 <누운 배>를 재미있게 읽고 나서, 그 소설을 쓴 이혁진 님의 다른 책들을 찾아 보았단다. 그렇게 알게 된 책이 이번에 읽은 <관리자들>이라는 책이란다. 지난 번에 읽은 <누운 배>라는 책은 조선업 회사의 리얼한 현장감이 돋보이는 책이었다면, 이번 <관리자들>이라는 책은 토목건설의 공사 현장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 했단다. 그리고 그곳에서 드러나는 인간들의 욕심과 야욕도 볼 수 있고, 반대로 따뜻한 인간애도 볼 수 있었단다. 그리고 현실에서는 실현 가능성이 낮을 것 같은 시원한 복수극도 볼 수 있었단다. 그리 길지 않은 소설이지만, 전해주려는 주제가 뚜렷하고 짜임새도 좋은 소설이라서 재미있게 읽었단다.

소설가 이혁진 님의 소설은 이번에 두 번째였는데 두 권 모두 좋았단다. 그의 또 다른 소설을 찾아보게 만들었고, 그의 신간을 기다리게 되었구나. , 그럼 소설의 줄거리는 간단히 이야기해줄게.


1.

주인공은 굴착기 기사를 직업으로 하는 서현경이라는 사람이란다. 현경이라고 하면 보통 여자 이름이라서, 여자 이름을 가진 남자라고 생각했어. 굴착기 기사라고 하니 당연히 남자라고 생각하는 아빠의 못된 선입견. 읽다 보니 여자 굴착기 기사더구나. 현경은 도로 건설을 하는 현장에서 일하고 있었어. 현장에서 일하는 인부들을 위한 숙소는 근처에 있는 모텔을 통째로 빌렸어.

같이 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남자들이었어. 경력도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데, 이쪽 일과 맞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어. 그 중에 선길이라는 사람이 있었단다. 선길은 7살이 된 어린 아들이 있는데, 그 어린 아들이 뇌종양으로 두 번이나 수술을 받았고, 세 번째 수술을 준비 중이라고 했어. 아들의 병 때문에 병원을 자주 가야 했고, 그러다 보니 직장을 제대로 갖지 못했어. 원래 하던 일은 회계 업무였는데, 아들의 병 때문에 그 전에 다니던 회사도 그만 두어야 했어. 돈을 벌어야겠으니 이런 막노동 현장까지 오게 된 것이지. 이곳에 와서도 막일에 적응을 잘 하지 못했어. 적성에 안 맞는 것보다 여전히 아들 때문에 자주 자리를 비워야 했기 때문이었어.

...

현장 근로자들이 이용하는 곳을 함바식당이라고 하는데, 이 소설 속 근로자들도 함바식당을 이용해. 그런데 그 함바식당 근처에 멧돼지가 나타난다는 소문이 있었어. 어느날 식자재를 보관하는 비닐하우스가 다 찢어지고 그랬거든... 나중에 알려졌지만 현장소장의 짓이긴 했지만, 처음에는 다들 멧돼지의 소행이라고 했어. 그래서 멧돼지를 감시하자고 했어. 그것도 밤에... 그런데 그 일을 선길에게 시키려고 했어. 그가 현장 업무에 잘 적응하지 못하니까 멧돼지라도 지키라는 것이었어. 옆에서 보고 있던 현경은 부당하다고 생각하여 관리자 중에 직급이 낮아 현장 노동자들을 직접 만나고 있는 한대리에게 이야기했어. 굴착기로 비닐하우스 주변을 깊게 파서 해자처럼 만들면 멧돼지가 접근하지 못할 거라고.. 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고, 선길은 야밤에 혼자 숲 속에서 보초를 서기 시작했어.

산 속에서 오는 온갖 짐승의 소리도 무서울 텐데, 한 겨울에 난방도 안 되는 사무실에게 근무를 서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야. 원래는 밤에 멧돼지를 감시하면서 전에 했던 회계사 공부를 다시 하려고 했지만, 그럴 환경이 아니었어. 고통과 추위와 두려움과 싸우다 보니 몸은 점점 초췌해졌어. 현경과 동료인 목 씨는 왠지 모를 미안함을 느꼈단다. 그들만 그렇지, 다른 인부들은 자신의 일이 아니니 나 몰라라 했단다.

현경은 현장소장을 직접 찾아가서 선길에게 멧돼지 감시일을 그만하게 해 달라고 건의했지만,  거절 당했단다. 한 달 넘게 오지도 않는 멧돼지 감시를 한 선길은 거의 폐인이 되었어. 그 중에 아들의 세 번째 뇌종양 수술 때문에 잠시 자리를 비우게 되었단다. 현경은 다시 한번 굴착기로 해자를 만들자는 제안을 현장소장을 찾아가서 이야기했어. 현장소장도 돈 드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그 제안에 오케이를 했단다. 생각보다 쉬운 작업은 아니었지만 현경은 굴착지로 비닐하우스 주변을 다 파내었단다. 이제 선길이 돌아와도 멧돼지 감시를 안해도 될 것 같았어.

.....

어느날 깐깐하기로 소문난 소장이 돼지 두 마리를 잡아와서 회식 자리를 마련해주었어. 인부들은 다들 즐겁게 참여했지만, 목 씨는 이 일이 의심스러워 조사를 해보니, 인근 지역에 돼지열병 때문에 살처분된 돼지를 두 마리 싸게 사가지고 큰 덕 쓰는 것처럼 회식 자리를 만든 거였어. 목 씨는 이를 현경에게 미리 이야기하고 먹지 말라고 했단다.


2.

선길에 예상날짜보다 늦게 돌아왔단다. 선길은 얼굴이 밝았어. 아들의 수술이 잘 끝났다고 했어. 그리고 선길은 개 두 마리를 데리고 왔단다. 그 개들로 하여금 멧돼지를 감시하게 하려고 말이야. 현경이 해자를 만들어 놓은 것을 몰랐던 것이지.

...

선길은 이제 다시 현장에 투입했어. 이제 아들 일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자, 선길은 일을 제대로 배우기로 마음 먹었단다. 그렇게 마음을 먹었더니 선길은 업무 능력은 금방 쭉 올라갔단다. 회계사 경험이 있다 보니 현장에서 수치 계산하는 것도 금방 하고, 다른 일들도 똑 부러지게 해서 다른 인부들에게 인정을 받았어. 선길이 있는 조는 실적도 좋아서 십장들은 선길과 함께 일하려고도 했어.

현장소장은 다른 업체의 일까지 가지고 왔단다. 그 다른 업체에서 안전사고가 발생해서 짤렸다고 했거든. 현장소장은 일을 할 때 불도저 같은 스타일이었어. 일정 단축을 위해서 현장 인력들을 쥐어짰어. 일정을 단축하기 위해서는 작업절차도 무시하고 흙막이 같은 안전장치도 미설치하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어. 겨울철에 눈이 오면 공치니까 눈이 오지 않는다면 주말에도 일을 하라고 했고, 눈이 오면 쉬라고 했어. 하지만 그해 겨울은 춥기만 하고 눈은 오지 않았어. 쉬지도 못하면서 일하게 되자 인부들은 하나둘 공사현장에서 몰래 술자리를 벌이기도 했어. 목 씨, 선길, 현경은 술자리에 참여하지 않았고, 한대리는 모른 척 했단다.

....

이렇게 엉망이 된 현장에서 안전사고가 안 난다면 천운이겠지만, 결국 안전사고가 터졌단다. 그것도 착하고 성실하고 불쌍한 선길이 그만 안전 사고로 현장에서 즉사하고 말았어. 안전장치만 제대로 설치했어도 죽을 사고는 아니었으니 이것은 명백한 인재였단다. 이 일의 충격으로 현경도 며칠 동안 일을 나가지 못했어.

....

며칠 뒤 현경은 선길의 유품을 챙기러 모텔에 온 선길의 아내를 만났어. 선길의 아내가 이야기하기를, 선길이 술 먹고 작업장 분위기를 흐트러뜨리고, 다른 이들에게 술도 권했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자신이 반장이 된다고 떠들고 다녔다는 거야. 그러다가 술 취한 상태에서 안전사고를 당했다니... 그래도 현장소장이 적지 않은 보상금을 주었다고 했어.

현경은 분노가 치솟았어. 이것은 소장의 각본이었던 거야. 그런 잔머리를 세계최고니까.... 현경은 선길의 아내에게 그 이야기를 듣고 현장에 있던 굴착기의 블랙박스의 메모리 카드를 가지러 갔어. 그런데 이미 그 메모리 카드는 사라지고 없었단다. 이미 소장의 측근들이 처리를 한 것 같았어. 하지만 그들이 모르고 있던 것이 있었지. 액션캠으로도 녹화를 하고 있었는데, 굴착기 운전석 바닥에 떨어진 액션캠은 가져가지 못했단다.

현경이 그 액션캠을 확인해 보니... 거기에는 모든 것이 다 담겨 있었어. 소장이 일을 조작하는 것까지 말이야. 이것을 선길의 아내에 주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했단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길고 긴, 힘든 재판을 해야 하니까 말이야. 돈도 많이 들어갈 테고 말이야. 하지만 진실을 그렇게 묻어 둘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편지와 메모리 카드를 선길의 아내에게 보냈단다.

....


3.

사고 발생 후 현장 인부들의 쳐진 분위기를 바꿔보기 위해 현장소장은 또 회식을 한다고 했어. 이번에도 돼지 두 마리.. 이번 역시 그 돼지열병에 살처분된 돼지들... 그리고 거기에 추가된 것이 개고기..... 선길이 데리고 왔던 개를 잡은 거야.. 두 마리 중에 한 마리를 도망가고 한 마리를 잡았다고 했어. 그 개들을 보살피고 정을 주었던 한대리는 울면서 현경에게 전화를 했어. 현경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어. 죽은 동료의 개를 잡아 먹는 인간들.... 현경은 굴착기를 가지고 가서 인부들이 먹고 마시고 떠들고 있는 함바식당을 부셔버렸단다.

대경실색을 한 사람들은 도망가기 정신 없고.... 그 곳에 목 씨가 나타나 너희들이 먹은 돼지 고기는 돼지열병으로 살처분한 돼지라고 일갈했어. 당황한 현장소장에게 현경은 굴착기로 묵은 짬통을 들어 부어주었단다. 그리고 나서 굴착기를 몰고 그곳을 떠났단다. 그렇게 소설은 끝이 났단다. 마지막 장면은 영화 <불도저를 타는 소녀>의 마지막 장면을 연상케 했단다. 중장비를 몰고 가셔 건물을 통째로 부셔버리는 복수 씬.

우리 사회는 여전히 약자가 제대로 대우 받지 못하는 사회란다. 법이라는 것도 약자와 강자에게 공평한지 모르겠고 말이야. 온갖 불법을 저지르면서 법을 피해가는 관리자들도 많고... 책임지려고 관리자들은 적고... 그렇다 보니 말도 안 되는 사건사고들이 많이 발생하고 말이야. 소설 속 일들이 실재에서도 일어나고 있어서 더욱 답답함을 느끼는구나.

...

이 책에는 아빠가 이야기한 내용 이외에 좋은 글들도 많이 담겨 있단다. 그런 내용을 찾으면서 읽어봐도 좋을 것 같구나. , 그럼은 여기까지...


PS,

책의 첫 문장: 현경의 굴착기가 어둑한 현장 식당 옆에 멈춰 섰다.

책의 끝 문장: 얇은 보드라운 살갗이 따스했다.


"봐라, 너부터 당장 그러고 있잖냐. 책임은 지는 게 아니야. 지우는 거지. 세상에 책임질 수 있는 일은 없거든. 어디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멍청한 것들이나 어설프게 책임을 지네 마네, 그런 소릴 하는 거야. 그러면 너나 할 것 없이 다들 자기 짐까지 떠넘기고 책임지라고 대가리부터 치켜들기나 하거든. 텔레비전에서 정치인들이 하는 게 다 그거야. 책임을 지는 게 아니라 지우는 거, 자기 책임이라는 걸 아예 안 만드는 거. 걔들도 관리자거든. 뭘 좀 아는." - P46

역시나 관리자에게 필요한 것은 갈라 세우고 갈라 세우고 오로지 어떻게든 갈라 세우는 일이었다. 줄을 세우고 편을 갈라서 저희끼리 알아서 치고받도록. 그러느라 뭐가 중요하고 누가 이득을 보는지 생각도 못 하도록. 인간이란 고작 그런 것이다. 서로 믿지 못하고 지기 싫어한다. 그 속성마저 남들만 그렇고 자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간이란 그래서 싸우고, 그렇게 싸우기 때문에 싸울수록 더 편향되고 나약해질 수밖에 없다. 스스로 그 불신을 극복하지도, 서로 이기거나 져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도 깨닫지 못한 채 진흙탕 밑바닥까지 서로 끌고 들어가기만 한다. 그러다 결국 자신들을 끄집어 올려 줄 관리자를 찾게 되는 것이다. 싸움은 끝나야 하고 누군가는 개처럼 물불 못 가리게 된, 자신들이 아니라 저것들을 따로 가둬야 하니까. - P94

그것이 중요했다. 이거 먹고 제발 입 좀 다물어 달라는 식이면 나중에 더 내놓으랄 수도, 또 어느 순간 죄책감에 혼자 미쳐 날뛸 수도 있다. 하지만 믿음의 힘은 늘 위대하다. 자신이 착한 사람이라는 믿음은 모든 믿음 중에서 가장 위대하다. 세상에서 제일 참혹한 일을 벌였던 사람들이 가진 공통점이 바로 자신은 착하고 항상 착하다는 믿음이었다. 그 사람들은 양면을 칼로 총으로 베고 쏴 죽이면서도 생각했다. 해방시켜 주는 것이라고, 오로지 선행을 베푸는 것뿐이라고. 오, 세상에 정말! - P15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5)

빅뱅 역시 하나의 거대한 폭발이었다. 따라서 에너지 외에도 수많은 것이 만들어져 주위로 퍼져나갔다. 물리학에서 관심 있게 지켜보는 여러 미립자의 이에 해당한다. 글루온과 쿼크, 입자와 반입자, 뮤온과 타우, 그리고 2013년 공식적으로 발표된 힉스 입자 같은 미립자들 말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몇몇 미립자가 자연계의 힘으로 뭉치면서 가장 작고 가벼우며 간단한 최초의 원소와 원자가 탄생했다. 원자번호 1이라는 숫자 자체로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는 수소가 그 주인공이다.


(66)

이후 시간이 흘러 히타이트와 힌두 지방에서 탄소가 함유된 철광석으로 강(steel)을 만들어내면서 진정한 철기 시대가 시작되었다. 철강은 청동과 마찬가지로 합금으로 구분되는데, 철이 대부분이고 다른 금속이나 비금속 원소가 소량 혼합된다. 이 시대를 우리는 철기시대라고 칭한다. 그러나 잠시 성행했다 사라진 구리 시대(BC 4000~BC 3000, 일명 동기 시대)보다 청동기를 더 중요한 시대로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엄밀하게는 철강 시대라고 표현하는 것이 화학과 물질 측면에서 더 정확하다.


(69)

이런 관점에서 현대 사회를 2의 석기 시대라고 부르는 빈도가 높아지고 있다. 생각해보면 지금 우리 삶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반도체다. 전자 기기를 기반으로 사회 전체 시스템과 고성능 정치들이 운영되고 있고 즉각적으로 효율적인 정보 교환과 습득도 이루어지는 만큼, 그것에 관여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 부품인 반도체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다. 실제로 지금 당장 반도체 기반의 모든 전자 기기가 사라진다면 인류는 농경 생활이나 목축 생활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집을 지어 생활하는 것 외에는 현대 삶의 이기와 관련 있는 차별화된 모든 체재를 잃고 철기 시대와 다를 바 없이 생활해야 할 수도 있다. 이 반도체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가 규소이며, 규소는 모래로부터 얻는다. 그래서 지금을 제2의 석기 시대라고 하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


(122-123)

수많은 수도관을 통해 분수대와 공중목욕탕은 물론, 로마 제국 전역에 물 공급을 가능하게 한 우수한 상수도 시설을 현재까지도 가치 있는 문화유산이다. 그런데 문제는 상수도 시설은 현재까지도 가치 있는 문화유산이다. 그런데 문제는 상수도 시설을 기다란 관 형태로 만들기 위해 금속으로 납을 선택했다는 점이다. 납은 소금처럼 빠르게 용해되는 염은 아니어서 매우 서서히, 적은 양만 상수를 통해 유출되었을 테고, 물이나 공기와 닿은 납에 산화 납으로 이루어진 막이 형성되어 추가 유출 도한 최소화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인체에 유입되어 쌓인 납이 중독 문제를 전혀 유발하지 않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131)

일반적으로 연금술이 발생하는 데는 두 가지 전제 조건이 필요했다. 바로 기후와 금 가치에 대한 사회적 합의다. 신화와 토속신앙이 성행한 핀란드나 노르웨이 같은 북유럽 지역에서는 연금술이 자연적으로 발생하지 않고 나중에 유입되는 방식으로 전해졌다. 북유럽 지역은 혹독한 추위와 가혹한 기후 탓에 식재료 확보가 언제나 우선순위였으며, 그만큼 사색과 연구에 시간을 투자하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철학이 성행한 고대 그리스의 연금술이 발달한 이집트의 경우 노예가 노동 인력을 대체하고 작업에도 숙달되어 시민들이 여가 시간을 충분히 누렸다는 점을 고려하면, 북유럽 지역에서 연금술이 발달하지 않은 이유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136)

진시황은 수은으로 된 연못을 만들어 놓았고, 수은을 먹거나 몸에 바르기도 한 것으로 전해진다. 수은을 몸에 바르면 피부에 일부 흡수되는데, 이것이 근육을 경직시켜 모세혈관의 혈류를 저해한다. 그러면 낯빛이 창백해지고 피부 주름이 부분적으로 펴지는 현상이 나타난다. 중금속의 체내 축적 원리를 알지 못한 채 단순히 현상만 본다면 변색되고 주름진 피부가 밝고 탄력 있게 바뀌는 느낌이 든다. 서양에서도 납과 수은이 함유된 화장품이 피부 미백에 흔히 사용되었으며,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처럼 납과 수은에 중독되어 여러 부작용을 겪은 사람이 많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진시황 또한 이런 단편적 변화에 만족해 수은에 중독되고 만 것이다. 진시황릉 주변 토양에서 높은 수치의 수은이 검출된 것도 수은에 대한 진시황의 병적인 집착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186-187)

과학혁명을 이끈 인물로는 프랑스 근대 철학자이자 수학자이며 과학자 르네 데카르트(1596~1650)와 영국 근대 철학자이자 정치인 프랜시스 베이컨이 대표적이다. 베이컨은 화학을 직접 연구하지는 않았지만 경험주의의 아버지로 불릴 만큼 근대 교육과 학습체계를 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저서 <노붐 오르가눔>(1620)에서 과학이 다른 분야들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그리고 과학의 목적에 도달하기 위한 근본 원리를 찾아내는 방법은 무엇인지 서술했다. 책 제목 노붐 오르가눔은 아리스토켈레스의 오르가논의 다음으로 넘어가고자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실험과 분석을 도구 삼아 자연과학을 연구하는 새로운 토대를 마련한 베이컨이 남긴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격언은 그의 사상을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베이컨이 강조한 과학적 방법론과 실험 철학에 대한 그의 기여는 18세기까지 계속해서 영향을 미쳤다.


(214)

블랙은 이 기체가 판 헬몬트 등이 연소나 호흡, 발효를 통해 얻은 기체와 동일한 종류가 분명하며 연소반응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는 무거운 기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를 고정된 공기(fixed air)’라고 명명했다. 명확히 규명되지 않은 상태의 이산화 탄소를 발견한 셈이다. 이와 같이 블랙이 생명 반응이나 연소가 아닌 화학반응으로 생성되는 이산화 탄소를 분리해냄으로써 후대 화학자들이 화학반응과 기체의 관계에 주목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216-217)

러더퍼드는 고정된 공기에 관한 실험과 마찬가지로, 확보한 질소가 담긴 용기에 쥐를 넣은 뒤 생존 여부를 관찰했다. 그 결과 질소 역시 해로운 기체라는 판단을 내렸다. 질소의 영어 명칭 나이트로젠(nitrogen)탄산 소듐을 의미하는 그리어서 니트론(nitron)만들다라는 뜻을 가진 접미어 제네스(-genes)의 합성어에서 유래했다. 질소가 초석을 비롯한 질소 함유 물질의 주성분이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은 것이다. 이에 반해 우리말 명칭인 질소(窒素)호흡에 사용할 수 없다는 러더퍼드의 결론에서 유래해 질식(窒息)과 같이 숨이 막힌다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228)

당시 연구에 필요한 산화 수은 등을 구입하고자 유럽을 방문한 프리스틀리는 라부아지에에게 새롭게 발견한 탈플로지스톤화 공기의 특징을 알려주고 심도 있는 토론을 이어갔다. 이후 라부아지에는 탈플로지스톤화 공기를 금속 등 여러 물질과 반응시키면 나중에 밝혀질 산화반응을 통해 각각 무게가 증가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를 연구 논문으로 보고하는 과정에서 화학 혁명의 큰 시작과 도전이 이루어졌다. 바로 당시 학계의 주류 이론이던 플로지스톤설을 전혀 인용하지 않은 채 반응을 거친 물질은 무게가 증가한다는 사실을 논한 것이다. 탈플로지스톤화 공기와 비금속 원소의 반응을 통해 형성된 물질들은 모두 무게가 증가한다는 점 외에도, 물에 용해되어 산성을 보인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플로지스톤을 기반으로 명명이 이루어진 기체는 이제 (oxy)을 만든다(genes)’는 의미에서 산소(oxygen)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249)

전기(electricity)라는 단어는 나무 수지(樹脂)가 굳어서 된 보석의 일종인 호박(amber)’을 뜻하는 그리스어 일렉트론(elektron)에서 유래했다. 탈레스가 장식용 호박에 붙은 먼지를 양모로 털어내는 과정에서 정전기가 발생했고, 더 많은 먼지가 달라붙는 현상을 통해 전기를 발견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기의 실질적인 첫 포집은 1752년 미국 과학자 벤저민 프랭클린(1706~1790)이 비 오는 날 하늘에 연을 말려 라이덴병(하전된 입자를 축적해 방전 실험을 하는 장치)에 전기를 모음으로써 성공했다. 이로부터 전기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었다.


(271)

(패러데이)는 또한 용액 속에서 이동하며 전기를 옮기는 물질을 설명하기 위해 그리스어로 방랑자를 뜻하는 이온(ion)이라는 단어를 생각해냈으며, 마찬가지로 양과 음의 전하를 갖는 이온을 구분해 각각 양이온(anion)과 음이온(cation)이라고 지칭했다.


(330)

켈빈은 1848년 여러 종류의 기체를 일정한 양으로 고정한 후 온도에 따라 변하는 거동을 분석해 그래프로 그렸다. 그리고 그 결과를 가지고 관측된 값으로 한계점 이상의 값을 추정하는 외삽을 했을 때 모두 동일한 온도에서 압력이 0으로 수렴하는 현상을 관찰했다. 그는 이 온도를 절대 영(0)도로 간주하고, 이를 기준으로 다른 모든 온도를 양수로 만들 것을 제안했다. 그리고 1851년 그는 열 엔진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열역학(Thermodynamics)’이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했다. 이후 열과 일을 포함한 에너지 전환에 대해 설명할 때 이 용어가 쓰이기 시작했다.


(343)

물리화학은 물리학 이론과 실험 결과를 활용해 물질의 화학적 성질 및 반응을 연구하는 분야다. 돌턴의 원자론과 맥스웰의 통계적 분자 에너지 분포, 기브스의 자유 에너지 개념이 맞물리면서 탄생했다. 초기 물리화학 형성 과정에서 누구보다 물리화학의 가치를 기대하고 확신한 인물은 독일 물리학자 프리드리히 빌헬름 오스트발트(1853~1932). 학창 시절 그는 곤충 채집이나 목공예 등 잡다한 취미 활동에 시간을 보내느라 학업에는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경고를 받은 이후 학업에 전념했으며, 화학교수가 되어 열역학과 상변화 등을 주 관심사로 삼아 물리화학 발전에 기여했다. 그는 1880년대 후반 물리화학 분야의 첫 번째 저널인 <독일 물리화학 저널>을 만들기도 했다.


(396-397)

그런데 그가 노벨상과 노벨재단 설립을 추진한 이유는 형 루드비그 임마누엘 노벨의 사망에서 비롯된 해프닝 때문이었다. 사망 소식을 접한 신문사들은 알프레드 노벨이 죽은 것으로 오해하고 부고 기사를 서둘러 인쇄해 발행했다. 거기에는 산업 분야에서 거둔 성공과 기여는 무시한 채 전쟁용 폭발물을 만든 죽음의 상인이라는 모욕적인 기사만 가득했다. 이 기사들은 본 노벨을 자신이 죽은 후 모두가 자신을 부정적으로 기억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자산의 94퍼센트에 해당하는 약 3,100만 크로나(스웨덴 화폐 단위)를 노벨재단 자금으로 할당했다. 이는 현시점으로 약 17 200만 크로나( 2,244억원)에 해당하는 금액으로 매년 노벨상 수상자에게 수여하는 상금과 메달 비용으로 사용되고 있다.


(491-492)

화학은 실체가 있는 물질을 중점적으로 탐구하면서 발전을 거듭해왔다. 그리고 그 발전 과정에서 가장 흔하게 반복된 부분이 기능과 특징, 가치의 재발견이다. 탄소의 아주 일부분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이 점을 이해할 수 있다. 선사 시대에 탄소는 주로 불을 피우는 재료나 벽, 바닥, 몸에 그림을 그리는 검은색 안료로 쓰였다. 화학반응인 연소가 규명되고 화학이 형성된 후에는 숯 또는 석탄 형태로 산업 전반에 활용되었다. 이후 분석화학 기술이 진보하고 질량 분석 기술이 도입되면서 1985년 육각형과 오각형 형태로 배열된 탄소들이 축구공 모양의 입체 분자 구조를 이루는 풀러렌이 발견되었다. 곧이어 1991년에는 더욱 특징적인 튜브 형태의 탄소가 확인됨으로써 전도성과 강도가 높은 탄소 나노튜브 시대가 열렸다. 2004년 흑연의 판상 구조를 얇은 한 겹 단위로 분리 혹은 생성한 탄소 구조체인 그래핀이 확보되면서 탄소는 이제 단순한 연료나 필기도구가 아닌, 신소재로 주목받고 있다. 탄소 신소재들은 플레서블 디스플레이나 스마트 기기, 태양관 발전, 촉매 등 다양한 분야에 적용되고 있으며, 관련 연구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국 근대사 산책 2권 - 개화기편, 개신교 입국에서 을미사변까지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7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강준만 님의 <한국 근대사 산책> 2권을 읽었단다. 2권의 부제는 <개신교 입국에서 을미사변까지>란다. 1권이 갑신정변이 일어난 1884년에 끝이 났고, 2권이 을미사변이 일어난 1895년에 끝이 나니 2권의 이야기는 약 11년간의 이야기를 해주겠구나.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역사적 사건에 육십갑자가 있는데, 갑으로 시작하면 OOO4년에 일어난 일이고, 을로 시작하면 OOO5년이라는 것, 기억해보자, 그럼 바로 이야기를 해보자.

..

1권의 마지막 이야기는 갑신정변이었잖아. 민영익이라는 사람이 있어. 원래 개화파로 미국까지 다녀왔던 그 사람, 기억나지? 그 사람이 귀국 후에 보수파가 되었고, 개화파에 밉보이게 되어 갑신정변 때 개화파들에 의해 칼까지 맞고 중상을 입었단다. 민영익을 치료한 사람은 의료선교사로 한국에 와있던 알렌이라는 사람이란다. 알렌의 치료로 민영익이 건강을 회복하게 되었고, 그 공으로 알렌은 1885 4월 광혜원이라는 근대식 병원을 최초로 개원하였단다. 광혜원은 나중에 제중원이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더 나중에는 세브란스 병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단다. 너희들도 알겠지만 세브란스 병원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단다.

갑신정변이 3일천하로 실패한 후 수구파는 개화파에 대한 보복을 했단다. 국내에 머무르고 있던 홍영식을 죽이고, 개화파가 운영했던 한성순보도 폐간시켰어. 외국으로 망명간 이들은 우리나라에 올 수가 없었지. 김옥균 같은 경우에는 계속 암살 시도가 있었고, 결국 1894년 그를 상하이로 유인하여 홍종우가 그를 암살하는데 성공했단다. 홍종우는 원래 개화파였는데 배신을 하고 김옥균을 죽인 것이란다. 아빠가 예전에 조재곤 님의 <그래서 나는 김옥균을 쏘았다>라는 책을 읽었는데 김옥균 죽음에 대해서는 그 책을 읽고 쓴 독서편지를 읽어보면 좀 도움이 될 수도 있겠구나. 그런데 먼 기억으로는 그 책이 썩 재미있지는 않았던 기억이구나. 김탁환 님의 소설 <리심>과 신경숙 님의 소설<리진>에도 홍종우와 김옥균의 이야기가 나왔던 기억이 있구나.

갑신정변 이후 조선과 일본 사이에 한성 조약을 맺었는데 일본이 입은 피해를 보상한다는 굴욕적인 조약이었단다. 알고 보면 일본이 개화파를 뒤에서 부추긴 것도 있는데 말이야. 또 청과 일본 사이에 텐진 조약을 맺었는데, 양군 모두 조선에서 철수하고 파병하게 되면 사전에 통보하자는 내용이란다. 전에는 청나라가 조선에 영향력이 컸는데 텐진 조약으로 인해 조선의 영향력에 있어 청나라와 일본이 동등한 조건이 된 거야. 그러니까 이 조약은 일본에 유리한 조약이 된 거지.

청나라는 상황 판단 능력이 떨어졌나? 이런 불리한 조약을 했을까. 갑신정변이 있었던 1884년에 있었던 일 한가지도 더 이야기하자면 그 해에 방곡령을 실시했단다. 당시 우리나라의 곡물이 무분별하게 일본으로 유출되고 있었는데 일부 지역의 곡물의 유출을 막는 제도였단다. 얼마나 큰 효과가 있었는지는 모르겠구나.


1.

해가 바뀌어 1885년이 되었단다. 1885년 언더우드를 비롯한 많은 개신교 선교사들이 입국을 했단다.  당시 천주교 신부들에 의한 선교가 많이 이루어졌는데, 개신교 선교들이 들어와서 비밀리에 선교를 했다고 하는구나. 그래서 천주교 측과 개신교 측간 갈등도 생겼대.

한편 1885 5월에는 영국이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거문도를 점령한 일이 일어났어. 당시 조선이 힘이 없다 보니 누군가 불법 점령을 한다고 해서 그들을 몰아낼 수 없으니 백성들만 고생을 하고 안타깝더구나. 더 답답한 것은 이런 사건을 정부에서는 전혀 모르고 있다는 사실. 조선 정부는 영국이 거문도를 점령한 지 한달 만에 청으로부터 알게 되었단다. 영국은 러시아가 이곳을 점령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무려 22개월간이나 거문도를 점령하였다가 철수했다고 한다. 이 지역이 해상 요충지로 만약 러시아가 거문도를 점령하게 되면 영국이 점령하고 있는 중국 남부 지역도 위협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어. 영국에 거문도 사건에 청나라가 깊숙이 개입하여 영국을 도와주었는데, 이런 이유로 조선은 청에서부터 벗어나 러시아에 의존하려고 했단다. 청에 대한 배신감을 느꼈을 수도 있겠구나. 조선 주변의 있는 강대국들이 다 지들 이익을 위해 움직이고 있는데 어디에 붇던 조선이 유리한 경우는 없을 것 같구나.

미국에서 공부하던 유길준은 갑신정변의 소식을 들었단다. 자신들과 친했던 사람들이 일으킨 갑신정변. 하지만 곧바로 귀국하지 않았어. 삼일천하로 끝났다는 소식도 들었겠지. 그는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고 5개월이 지난 후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길에 올랐단다. 바로 오지 않고 6개월간 유럽, 이집트, 싱가폴, 홍콩, 일본을 거쳐 귀국했단다. , 코스가 얼마 전에 읽은 쥘 베른의 <80일간의 세계일주>와 아주 흡사하구나. 그는 일본에서 김옥균을 만났고, 김옥균이 귀국을 만류했지만, 국내로 들어왔다고 하는구나.

====================

(53)

김옥균은 유길준에게 귀국을 만류했지만 유길준은 다음과 같은 답으로 거절하고 12 2일 일본을 떠났다.

형님께서 진심으로 걱정해주시는 생각은 정말로 고맙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는 아무래도 귀국을 해야 하겠어요. 물론 들어가서 장차 어떤 일을 당할지 그건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건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그걸 생각하면 들어갈 수가 없겠지요. 또 나는 살기 위해서 형님들과 관련이 없다고 변명하러 들어가려는 것도 아닙니다. 변명이 될 일도 아니고 형님이나 나나 내일의 일을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나는 지금 형님의 처지와는 좀 달라요. 형님들은 어떻게 됐든 한번 일을 했지만 나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지요. 그런데 까닭 없이 일본에 앉아서 나라의 불행한 현실만 바라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쨌든 들어가서 한번 부닥쳐볼 작정입니다. 요행히 살아남아 발붙일 곳이 마련된다면 나는 국민을 계몽하는 일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이렇게 해서라도 내가 국내에 교두보를 마련하는 것이 장차 형님에게도 재기하시는 데 절대 필요한 발판이 되지 않겠습니다.”

====================

김옥균이 만류한 이유가 있었단다. 유길준은 귀국하자마자 갑신정변을 일으킨 개화파의 측근이라는 이유로 7년간 연금생활을 했다는구나. 7년 동안 그가 미국과 세계여행을 경험한 것을 적은, 그 유명한 <서유견문>과 조선의 중립화를 주장한 <중립론>을 썼다고 하는구나.

1885년에 전선을 설치를 하여 1888년에 전신을 개통했다고 하는구나. 갑신정변 이후 폐간된 <한성순보>이후 신문이 없었는데 1886 <한성주보>를 창간했다고 한다. ‘순보() 10일을 뜻하는 한자로 10일에 한번씩 신문을 냈는데 한성주보는 주마다 한번씩 신문을 냈단다. 그리고 한성주보는 한성순보와 달리 국한문 혼용체로 출간했다고 하는구나.

….

개화기의 두드러진 특징은 근대식 교육기관이 생기기 시작한 것인데, 1886년 최초의 근대식 공립교육기간인 육영공원이 헐버트라는 사람에 의해 개교했고, 이후 배재학당, 이화학당 등이 뒤를 이었단다. 이때 조선에 처음으로 전기도 생겨났대. 주미 한국공관 설립을 위해 박정양 등이 미국을 가기도 했다는구나. 일반 백성들이 살기 힘들 때 종교가 널리 퍼지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1880년대 후반도 그런 이유로 개신교가 널리 퍼졌대. 관리들의 부정부패는 더욱 심해지고, 일본의 경제 수탈도 더욱 심해지니 백성들의 삶은 점점 팍팍해지고 종교의 의지하려고 했던 거야.

조선이 청나라와 거리를 두려고 했지만 청나라는 계속 간섭하려고 했어. 위안스카이가 계속 내정 간섭을 하고 외교 간섭도 했단다. 청나라 상인들도 계속 들어와서 우리나라 상인들과 대립하기도 했어. 명동 근처에 차이나 타운이 생긴 것도 이 즈음이란다.


2.

1권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최제우가 1860년에 동학을 창시했다고 했잖아. 1880년대에는 2대 교주 최시형을 중심으로 퍼져 나가던 시기였단다. 최시형은 충청도 보은을 중심으로 활동을 했는데 이를 북접이라고 했고, 전라도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동학 세력을 남접이라고 했단다. 전봉준의 동학 운동은 아빠가 다른 책을 이야기하면서 두어 번 이야기한 적이 있으니 오늘은 짧게 이야기를 할게.

전라도 고부 군수 조병갑의 학정과 만행이 심해져서 그를 몰아내달라고 민원을 올렸지만, 조병갑은 재임명되었고 그러자 농민들은 전봉준을 중심으로 봉기를 했고, 조병갑은 도망을 갔단다. 이때가 1894년이었어. 조사관으로 이용태라는 사람이 왔는데, 조사는 하지 않고, 농민군 주도자를 잡아 족치고 폭력을 진압했어. 어쩔 수 없이 지도부는 고창으로 도망을 갔단다. 1894 4월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등은 고창에서 동학농민군을 봉기해서 황토현 전투에서 대승을 하고 전주성을 점령했단다.

이에 당황한 고종은 큰 실수를 하게 된단다.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외세 세력을 끌어들인 거야. 대화로 풀어보거나 그것도 안되면 우리 관군으로 진압을 했어야지. 농민군의 봉기가 무서워 외세를 끌이다니쯧쯧결국 청나라와 일본군이 동시에 국내 진입하여 동학농민군을 퇴거시켰단다. 조선 정부의 입장에서는 동학 농민군을 진압했으니 청나라와 일본에게 다시 군대를 철수하라고 이야기했겠지. 하지만 엉덩이 무거운 이들은 말을 안 듣고 계속 주둔하고 있었단다. 기회만 엿보던 이들인데, 다시 돌아가겠니?

힘없는 조선이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어. 그 와중에 조선정부는 청나라에 의지하려고 했어. 그러자 일본은 청나라에게 물러가라고 했고, 조선은 일본에게 물러가라고 했단다. 이에 일본군은 경복궁을 공격하여 한 달 가까이 점령하다가 철수하는 일도 있었어. 고종과 명성황후가 청나라 편을 들자, 일본군은 운현궁에 머무르고 있는 흥선대원군을 만났고, 대원군은 일본군의 술책에 넘어가 그들과 손을 잡게 된단다. 대원군은 일단 명성황후의 반대세력과 손을 잡으려는 거지. 그리고 일본군의 무력으로 민씨세력을 몰아내고 대원군이 다시 집권을 하게 되는데 그의 나이 74세였단다. 일본을 등에 업은 개화파에 의해 자리에서 물러났던 대원군이 일본을 등에 업고 다시 권력을 잡은 아이러니한 사건이었단다.

====================

(199-200)

참으로 묘한 일이었다. “10년 전 개화파의 갑신정변에 밀려났던 대원군이 조선 역사상 가장 급진적인 정치 개혁의 얼굴 마담이 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1894 7 28(음력 6 26) 정오 74세의 노인인 대원군은 비상시국의 첫 번째 회의를 주재하면서 나는 완고한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나를 완고의 장본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나는 개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대원군은 이 회의에 군국기무처라는 이름을 부여하면서 개혁지지를 선언하고 김홍집을 영의정 겸 군국기무처 총재로 임명했다.

====================

하지만, 얼마 못 가 대원군은 이내 일본과 대립하게 되었대. 청군과 동학군에 밀지를 보냈다는 설도 있다는 구나. 동학군의 2차 봉기는 이런 대원군의 밀지를 통해 일어났다는 설도 있대. 그리고 대원군은 다시 개화파를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웠지만 실패했대. 계속된 청일 간의 갈등은 결국 전쟁까지 이어졌단다. 청일전쟁은 청나라와 일본이 겨룬 전쟁인데,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에서 전쟁을 벌였단다. 예상과 달리 전쟁은 일본의 일방적이 우세였고 평양 전투에서 일본이 대승을 거두면서 일본이 이겼어.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일본은 우리나라에 간섭이 심해졌단다. 청나라에 조공 중단할 것, 과거 시험 폐지할 것, 노비 제도 파타할 것, 조혼 금지, 과부재가 허용할 것, 일본의 제도와 화폐제를 도입하는 등 조선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들려고 했단다. 친일 세력인 김홍집, 어윤중, 유길준 등에 의해 위의 내용을 남은 갑오개혁을 하게 했단다. 대원군이 이에 반발하였고, 일본 공사로 와 있는 이노우에가 대원군에 압력을 행사하였어 그러자 대원군은 더 이상을 힘쓰지 못하고 대원군은 정계 은퇴를 하였단다. 이후 일본은 조선에서 각종 특권을 얻어냄으로써 조선에서 영향력을 높여갔어.

...

이 즈음 남쪽에서는 동학 농민군의 2차 봉기가 있었단다. 전봉준, 김개남의 부대에 김학진의 부대가 연합했어. 그들은 7일간의 우금치(오늘날 공주)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맞서 싸웠으나, 무기의 현저한 차이로 인해 대패했단다. 동학 농민군 2만명 중에 500 여명만 살아남았다고 했어. 전봉준이 장소를 이동하면서 끝까지 항전했지만 부하인 김경천의 배신으로 생포되고 말았단다. 그렇게 동학농민운동은 실패도 끝나고 말았어... 이때부터 일본은 더 본격적으로 조선에 대한 침략의 발톱을 드러내고 다녔단다.

====================

(231)

김용옥은 우금치에서 동학농민군 수십만 명이 목숨을 잃은 뒤부터 조선은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 상태에 들어갔으며 이때부터 일본제국주의는 조선을 집어먹기 시작했다우금치 전투 이후 일본의 조선 침탈은 가속됐고 일본은 식민통치 기간에 좌우 이념 대결, 6.25 동란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에 모든 죄악을 다 뿌려놓은 것입니다라고 주장했다.

====================

...

일본공사 이노우에의 권력도 점점 강해지면서, 친일 세력인 박영효와 서광범을 복권시켰단다. 이들은 갑신정변 이후 조선정부로부터 쫓기던 사람들이었잖니... 잘 살아 버티다 보니 또 전세역전되는구나. 박영효가 내무대신, 서광범이 법무대신이 되었단다. 명성황후도 일본의 힘에 눌려 박영효와 전략적 화해를 했대. 일본을 등에 업고 내무대신이 된 박영효는 뜻밖에도 반일노선을 걸었다고 하는구나. 그리고 1895년에는 갑오개혁의 연장선에 있는 홍범14조를 제정하여 개혁을 추진하기도 했대.

...

청일전쟁 이후 청나라와 일본을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었는데, 이 조약에 조선의 독립을 보장한다는, 어처구니 없는 내용과 청나라의 랴오둥 반도를 일본이 차지한다는 내용이 있었단다. 일본의 랴오둥 반도 점령은 서양 열강에 충격을 주었고, 이내 러시아, 프랑스, 독일이 이 일에 간섭하게 되었고, 일본은 어쩔 수 없이 랴우둥 반도를 다시 청나라에 반환했단다. 하지만 조선에서 일본의 간섭은 더욱 심해졌어. 조선은 김홍집을 중심으로 친일 내각이 세워졌고 친러 인사는 모두 물러나게 되었대. 그리고 미우라 고로 일본 공사를 중심으로 일본에 척을 두고 있던 명성황후마저 시해하는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단다. 이것이 을미사변이라는 사건이란다. 조선은 왜 미리 준비하지 못했을까. 안타깝구나.


3.

여기까지가 2권의 이야기란다. 이 책을 통해서 당시 조선의 일반 백성들의 모습들도 엿볼 수 있었는데,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전해주고 마치련다. 조선시대에 1616년에 담배가 들어왔는데 그 담배가 들어선 이후 조선은 애연가의 나라, 골초의 나라가 되었다고 하는구나. 그 골초는 개화기까지 이어졌고, 개화기 때 외국에서 온 사람들이 보고 기록에 남길 정도로 골초였다고 하는구나. 그렇게 담배를 피면서 건강해 보인다는 말이 재미있기도 하구나. 그래도 최근에는 흡연율이 많이 떨어져서 다행이구나. 어디 가서 골초국가로 불리지 않을 거야.

====================

(26)

개화기에 조선을 방문한 서양인들은 이구동성으로 조선인들의 지극한 담배 사랑에 놀라곤 했다. 독일인 애쏜 써드는 1902년에 발표한 글에서 대한제국의 남자들이 얼마나 골초인가 하면 그들이 50여 년 일생 동안 피우는 담배연기만으로도 우리나라 베를린의 국립보건소 인원 전체를 그 자리에서 쓰러져서 죽게 할 만하다. 그런데도 조선 남자들은 모두가 괄괄하고 건강하게만 보인다고 썼다.

====================


PS,

책의 첫 문장: 1884 12 4일 일어난 갑신정변 시 수구파의 실력자인 민영익은 칼을 맞아 얼굴과 목 그리고 등에 치명적 상처를 입고 생명이 위독한 상태였다.

책의 끝 문장: 조선 스스로 그런 도임의 주체가 될 수 있게끔 조금만 더 일찍 눈을 뜨고 실천에 옮겼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갖게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조선을 세계에 알리는 데에 있어서 사진은 결코 우호적이거나 중립적이지 않았다. 카메라는 자주 폭력적이었다. 사진에 대한 민중의 저항에 그런 폭력성에 대한 자각이 작용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늘 피사체가 되어야만 하는 처지에선 사진을 결코 좋게 볼 수 없었으리라. 조선의 운명도 그와 같지 않았을까? - P15

사실 조선의 기독교야말로 전형적인 ‘역사적 상황의 산물’이었다. 물론 기독교가 조선인들에게 ‘출애굽기’만 가르친 건 아니었다. 1900년대 후반 일제의 압박이 강해지면서 정반대되는 메시지를 전파하기도 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서양을 대변하는 것으로 여겨진 기독교는 일부 조선 민중에게 하나의 대안 모델이었던 동시에 내외로 착취당하는 현실에 대한 보호막이나 방파제이기도 했다는 점이다. 보호받을 길 없는 ‘민족공동체’에서 보호와 위로가 주어지는 ‘교회공동체’로 발길을 돌렸다고나 할까? - P108

김옥균에 대한 평가는 양극을 치달린다. 개화파와 척사파의 견해가 다른 건 물론 개화파 내부의 견해도 다르다. 정변 동지 서재필은 김옥균을 "시대의 추이를 통찰하고 조선을 힘 있는 근대 국가로 만들기를 절실히 바란" 위인으로 평가했지만 정변에 불참한 윤치호는 "위로 나랏일을 실패하게 하고 아래로 민심을 흔들리게 한 경망스런" 인물로 폄하했다. - P146

민비 시해의 음모 단계에서부터 가담한 조선인이 한 명 있었는데 그는 훈련대 제2대대장으로 있던 우범선(1857~1903)이었다. 훈련대는 그해 4월 친일정권에 의해 창설되었는데 우범선은 민씨 정권의 훈련대 해산계획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주한일본공사 미우라 고로에게 포섭된 우범선이 이 사건에서 맡은 임무는 훈련대 병력동원과 민비의 시신 ‘처리’였다. 폭도들에 의해 시해된 후 불태워진 민비 시신의 타고 남은 재는 궁궐 내 우물에 버려졌고 유해 일부는 우범선의 지시로 휘하의 윤석우가 증거인멸을 위해 땅에 묻어버렸다. - P296

"쿵, 무거운 곡괭이가 검은 흑벽을 크게 찍어내자 돌연 반짝반짝 노랗게 빛나는 것이 보였다. ‘노 터치! 노 터치!" 즉각 미국인 채굴 감독의 고함이 광구 속을 쩡쩡 울렸다. 조선인 광부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또 금맥이 나왔구나. 땅속에서 금맥이 드러날 때마다 미국인들이 지르는 소리는 똑같았다. 노 터치(No touch, 손대지 마라)! 혹여 금을 훔칠까봐 소리치는 것인데 조선인 광부들의 귀에는 ‘노다지’로 들렸다. 그들은 ‘노다지’는 ‘금’을 가리키는 양인들 말이라고 믿었고 그래서 자신들도 금맥을 발견하면 즉각 소리쳐서 금이 나왔음을 알렸다. "노다지! 노다지!" 평안북도 운산 금광의 조선인 광부들에게 황금은 곧 노 터치였다. ‘노다지’라는 단어는 처음에는 ‘광물이 쏟아져나오는 광맥이 발견되었다’는 뜻의 광산 용어로 쓰이다 이내 ‘큰 횡재’를 뜻하는 말로 조선인의 일상생활 속에 들어갔고 이제 100여 년이 지난 지금은 어엿이 한국어사전에도 올랐다." - P349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초란공 2023-09-01 06: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구한말 한반도의 안타까운 정황을 정성껏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책 담아갑니다!

bookholic 2023-09-05 23:49   좋아요 1 | URL
네, 저도 읽을수록 답답함과 안타깝더라구요...
그런데 최근 뉴스를 보면 그 당시 친일파가 떠올라 또 한번 열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