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출항과 동시에 사나운 폭풍에 밀려다니다가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같은 자리를 빙빙 표류했다고 해서, 그 선원을 긴 항해를 마친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긴 항해를 한 것이 아니라 그저 오랜 시간을 수면 위에 떠 있었을 뿐이다.”
기원전 1세기,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가 남긴 말이다. 그는 잔인하게 덧붙인다.
“그렇기에 노년의 무성한 백발과 깊은 주름을 보고 그가 오랜 인생을
살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 백발의 노인은 오랜 인생을 산 것이 아니라 다만 오래 생존한
것일지 모른다."
(15)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첫 번째는 익숙한 책을 선택하는 사람이다. 하나의 책을 읽고 그 세계에 동감하면, 다음에는 그와 관련된 좀
더 심도 있는 책을 선택한다. 이 과정을 반복함으로써 하나의 분야를 깊이 있게 파고드는 사람이 있다.
두 번째는 불편한 책을 선택하는 사람이다. 하나의 책을 읽고 그 세계에
동감하면, 다음에는 그 세계를 무너뜨리는 전혀 다른 세계관의 책을 선택한다. 이 과정을 반복함으로써 자기 세계의 지평을 점차 넓혀가는 사람이 있다.
두 가지의 방법이 있는 것이다. 익숙한 세계의 깊이를 더하는 방법과
불편한 세계의 지평을 넓히는 방법.
(20~21)
추상적인 상상을 해보자. 방금 하나의 어린 정신이 태어났다. 이 정신은 완벽한 하나의 세계로서 결함 없이 정상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이
정신의 이름은 ‘정(正)’이다. ‘정’은 평화롭고
고요하게 존재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이 어린 정신은 스스로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자기 안에서 자라난 질문들, 모순된 결론들과 대면하는 것이다. 이제는 공존할 수 없다. 정상적인 자기 자신과 모순된 자아상을 분리할
때가 되었다. 이러한 반대되는 자아상을 이제부터 ‘반(反)’이라 이름 붙이고, 자아로부터 떼어내자. 이제 나이면서 동시에 내가 아닌 것과 대면하게 되었다. 자아와 반자아의
투쟁이 시작된다. 치열한 투쟁 결과 어린 정신은 모순된 자아상을 수용한다. 이제는 ‘정’도 아니고
‘반’도 아닌 새로운 성숙한 정신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이렇게 성숙한 정신의 이름은 ‘합(合)’이다. ‘합’은 완벽한
하나의 세계로서 결함 없이 정상적으로 존재한다. 그래서 이제 ‘합’은 동시에 ‘정’이 된다. 이 과정은 끝없이 반복되며 하나의 정신을 성장하게 된다.
(41)
성숙하고 똑똑한 학생일수록, 주체적이고 심오한 학생일수록 현행 교육
시스템에 적응할 수가 없다. 반면 지금의 교육 시스템은 변태를 길러주기에 적합한 구조를 갖고 있다. 건강하고 생명력 넘치는 나이에 자신의 욕구를 억제할 줄 알고, 친구나
가족의 안타까운 삶에 무관심할 정도로 자신의 좋은 성적을 위해 반복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기형적인 학생만이 더 건강하고 정상적인 학생일지도 모른다.
(64)
구약은 신과 인간이 맺은 오래된 약속을 뜻하고, 신약은 새로운 약속을
뜻한다. 구체적으로 예숙 그리스도가 기준이 된다. 구약은
예수 그리스도 탄생 이전의 기록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수난과 구원의 약속이 역사적 사건과 연결되어 종교적
시각으로 해석되어 있다.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 탄생 이후의 기록이다.
총 27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구성은 복음서, 사도행전 서신 그리고 묵시록이다. 복음서는 4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사도행전은 1편으로, 사도들의
활동이 기록되어 있다. 서신은 총 21편으로, 사도들의 편지다. 마지막 1편은
묵시록으로, 요한이 계시에 의해 기록하였다.
(92)
이 질문은 대학 시절 내내 나를 괴롭혔다. 답을 찾기 위해서 나는
도서관에 앉아 철학과 과학 서적을 뒤적였다. 하지만 만족할 만한 해답을 얻을 수는 없었다. 그러다가 붓다에 관한 책들을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붓다의 삶과
가르침 속에서 그렇게 듣고 싶었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타자로부터의 구원이 아닌,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구원에 대한 이야기를 말이다.
(102)
젊은 나의 생각은 옳았다. 그때 이후로 단 한 번도 완전함 혹은 충만함의
느낌을 가져본 적이 없다. 그리고 앞으로도 없을 것임을 안다. 왜냐하면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완전함과 충만함이란 아이러니하게도 미숙함의 다른 표현이라는 것을 말이다. 현실에서 멀어질수록, 세계의 복잡성을 이해하지 못할수록 세상은 단순하고
명쾌하게 보인다. 문제는 세상을 그렇게 단순하게 파악할 때에만 우리가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어른이 된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어른으로 성숙해간다는 것은
세계의 복잡성을 초연하게 받아들임을 의미한다. 세계의 복잡성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우리가 완전함과 충만함의
허구성을 이해했음을 의미한다. 완전함과 충만함을 내려놓은 사람에게 행복은 없다.
(122)
물론 이런 대답은 어떤 사람들을 화나게 할 수 있다. 평생 하나의
관점이 옳다고 믿어온 사람에게 이런 불분명한 선택은 불경하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이렇게 묻고
싶다. 왜 하나의 길을 고집스럽게 걸어가야 하는가? 왜 하나의
길을 선택하는 것을 서둘러야 하는 것인가? 물론 세상에는 제한된 시간 내에 빠르게 결정해야 하는 문제도
존재한다. 하지만 아무리 곰곰이 생각해봐도 이건 그런 종류의 문제가 아니다.
(146)
정리해 보자. 무엇이 문제인가? 플라톤주의가
절반의 세계를 억압한 것이 문제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형이상학적 이념, 사유, 종교, 도덕만을
추구한 나머지 구체적인 현실을 망각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하늘의 가치만을 추구하다가 대지를
더럽히고 말았다.
더 이상은 안 된다. 건강하고 생명력 넘치는 새로운 시대정신이 필요하다. 니체는 근대를 끝내려고 한다. 플라톤주의를, 그리스도교를, 이성중심주의를, 형이상학적
이분법을 끝내려는 것이다. 그래서 니체는 이렇게 선언한다. “신은
죽었다.”
(149)
그렇다면 신의 죽음을 선언하는 것. 다시 말해서 플라톤주의의 형이상학적
이분법의 종언을 선언하는 것은 오늘날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것은 내가 발 딛고 있는 구체적
현실로 돌아오라는 니체의 제안이다. 이상적이고 불변하는 본질의 세계 같은 것은 없다. 초월적 세계의 잡히지 않는 그 무엇만을 추구하다가 현실의 건강함을 짓밟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그래서 니체는 신의 죽음을 선언한 것이다. 신의 죽음은 필요하다.
(155)
여기에는 어떠한 이유나 목적도 없다. 성장도 없고, 휴식이나 끝도 없다. 다만 영원히 같은 삶을 반복할 뿐이다. 어떤가? 당신은 영원회귀의 진실이 어떻게 받아들여지는가? 끔찍한가?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당신의 삶을 긍정할 수
있는가?
이런 영원회귀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허무주의의 최고 형태다. 이러한
극단적인 허무를 인정하고 나의 삶을 끌어안을 수 있는 존재. “이것이 인생이라면 그래, 한 번 더!”라고 외치며 허무의 깊은 심연 속으로 뛰어들 수 있는
존재. 그가 바로 초인이다.
(166)
하지만 나는 당신이 여행하는 영혼을 가졌으면 좋겠다. 여행하는 영혼들은
대체로 숨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우물을 파는 영혼은 비교적 사회에서 환영받는다. 그래서 여행하는
영혼의 소유자도, 우물 파는 영혼의 소유자도, 모두 자신이
우물을 파는 영혼인 것처럼 행동한다. 실제로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전문가가 되려고 한다. 평생을 거쳐 하나의 분야를 파내려가고자 한다.
당신의 부모도, 사회도, 국가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당신이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라고 충고한다. 그러나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왜 누구나 전문가가 되어야 하는지, 왜
평생을 소진하여 하나의 전문 분야를 가져야만 하는지를 말이다.
(198)
이러한 인류원리를 더 확장해보면 이런 생각으로 나아갈 수 있어. 20세기
미국의 물리학자 존 휠러는 우주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관찰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 이 말에 대해서
고전 물리학자들은 격렬하게 반대할 거야. 왜냐하면 고전 역학에서의 우주는 인간의 존재와 무관하게 이미
존재하는 실체니까. 하지만 생각해볼 만한 문제야. 지적인
존재들로부터 완벽하게 은폐된 동시에 자기 충족적이고, 그 안에 어떠한 지적인 생명체도 보유하지 않은
우주를 과연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도대체
그 대답을 할 수 있는 존재는 누구인가?
(230)
체의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은 그가 이상주의자이며, 특히 인간에 대한
기대가 컸다는 점이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의 이윤 때문에 일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의 신성한 의미를 깨달아
일하고,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이상적인 사회를 꿈꿨다.
노동과 헌신을 통해 유지되는 사회주의 낙원을 이룩하고자 했던 것이다.
(244~245)
군을 전역하고 현실세계에 던져졌을 때, 그래서 나는 그다지 불안하지
않았다. 지금의 어설픔과 실수들이 오래 가지 않을 것임을, 성숙한
나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먹고살기 위해 애쓰고 경쟁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낯설음을 나는 결국
극복할 것이다. 군대에서 적응했던 것처럼 현실에서도 나는 잘 적응할 것이다. 다짐했다. 그때까지 최선을 다하리라. 어떤 고민도 하지 않고, 어떤 책도 읽지 않으리라. 남들처럼 자본주의 시스템에 적응하고 말 것이다. 돈을 벌고, 경제적인 안정을 찾고,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낳고, 행복한 노후를 맞을 것이다.
하지만 종종 서글펐다. 열심히 일하고 노력하는 성실한 청년이 되었다고
느낄 때마다, 나의 영혼은 이미 늙어버린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292)
사고 이후에 알게 되어 매일 듣고 있는 노래가 있었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가수 메르세데스 소사가 부른 노래다. ‘그라시아스 아 라 비다{Gracias
la Vida}’. 당시에 내가 이 노래를 어떤 경로로 알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이
가수가 누구인지, 노래의 가사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이 되었다. 그것은 언어를 뛰어넘는 그녀의 깊고 낮은 음성 때문이었다. 그 깊은 목소리는 나를 항상 예민하고 몰고 가는 세상의 모든 소음으로부터 보호해주었다. 차 소리도, 사람 소리도, 모든
소리가 차단되었다. 나는 눈만 감으면 되었다. 그러면 불안한
세상 속에서 나만의 안전한 공간에 머무를 수 있었다. 그렇게 늦게까지 공원 벤치에 앉아 노래를 들었다
(315)
네 맞아요. 당신이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는 걸 잘 알아요. 사회 구조의 문제를 보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나약한 자신이
미운 거죠. 그래서 더 세속적인 사람이 되려고 발버둥 치는 거고요. 하지만
당신은 잘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삶을 용기 있게 살아가고 있는 중이에요. 그렇지만 반쪽짜리 삶이었지요. 굳이 이상을 저 멀리 내팽개칠 필요는
없었어요. 지금처럼 현실을 묵묵히 걸어가세요. 동시에 언젠가
필요할 때 쉽게 꺼낼 수 있도록 이상도 함께 품고 가세요. 아무도 당신에게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하라고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359)
[파드마삼바바] 허망해하지
마라. 너는 잘하고 있다. 좋은 생각을 하고, 좋은 행동을 해라. 미련과 아쉬움과 후회를 만들지 마라. 심판 받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다. 너를 심판하는 존재 같은 것은
없다. 삶과 죽음이 바로 너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401)
나의 경계도 이와 같지 않을까. 나에겐 경계가 없다. 나는 모든 것에서 이어져 있다. 삶과 죽음에서, 내면과 외부에서, 자아와 세계에서.
그래서 이것이 슬픔이 된다. 출구는 어디에 있는가? 나라면
구면의 밖으로는 어떻게 나가는 것인가? 하지만 그런 것은 없다. 우리는
이 의식의 지평을 떠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나를 벗어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