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
인기 있는 대중 신문들은 뉴스를 팔기보다는 부정적인 감정을,
다시 말해 고통체의 먹이를 파는 것에 중점을 둔다. 커다란 활자의 헤드라인에서 폭력과 범죄의
단어들이 난무하는 것이 다반사이다. 영국의 황색 타블로이드 신문들은 이 점에서 탁월하다. 뉴스를 싣기보다는 부정적인 감정을 부채질하는 편이 신문 판매에 훨씬 유리하다는 것을 그 관계자들은 잘 알고
있다. 텔레비전을 포함한 뉴스 매체 전체가 부정적인 뉴스를 먹고 사는 경향이 있다. 사태가 악화되면 될수록 아나운서와 사회자는 더 흥분하고, 언론 매체
자체가 종종 부정적인 흥분을 부채질한다. 고통체들은 그것을 매우 좋아한다.
(213)
당신이 무엇을 말하고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얼굴을 세상에 보여주려고 하든 관계없이, 당신의 마음 상태와 감정 상태를 숨길 수는 없다. 인간은 누구든지
자신의 내면 상태에 해당하는 에너지 장을 내뿜는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록 무의식적으로만 느낄는지
몰라도 상대방이 내뿜는 에너지를 감지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자신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것을 감지하지만, 상대방을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반응하는가가 그것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 어떤
사람들은 누군가를 처음 만났을 때, 대화를 나누기도 전에 매우 분명하게 그것을 알아차린다. 하지만 잠시 후에는 말과 언어들이 그 관계를 점령하고, 말과 함께
그들이 연기하는 역할들이 등장한다. 그렇게 되면 관심이 생각의 영역으로 옮겨 가서, 상대방의 에너지 장을 감지하는 능력을 급격히 줄어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의식 차원에서는 여전히 느낀다.
(223)
아이가 고통체의 공격을 받는 동안은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이 순간에 깨어 있으면서 감정적인
반응에 말려들지 않도록 하는 것 외에는 별로 없다. 아이의 고통체는 감정적인 반응을 먹고 더 커질 것이다. 고통체들은 매우 극단적으로 드라마틱하다. 그러므로 그 드라마에 말려들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아야 한다. 원하는
것을 방해받아 고통체가 활성화된 경우에는 아이의 요구에 불복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는 ‘내가 더 불행해질수록 갖고 싶은 것을 더 많이 얻게 된다.’는 것을
배운다. 이것은 훗날 삶의 기능장애를 초래한다. 당신의 무반응에
아이의 고통체는 좌절하고 잠시 후 더욱 격렬해질지 모르지만 머지않아 진정된다. 다행히 아이들의 고통체는
어른보다 대개 활동 시간이 짧다.
(235)
고통체에 사로잡힐 때마다, 그리고 고통체를 고통체로
알아볼 수 없을 때마다 고통체가 당신 에고의 일부가 된다. 당신이 동일화되는 대상은 무엇이든 에고로
바뀐다. 고통체는 에고가 동일화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것 중 하나이며, 고통체 또한 먹이를 얻고 자신을 재생시키기 위해 에고를 필요를 한다. 그러나
이 불건강한 동맹 관계는 이윽고 고통체가 너무 무거워져서 에고의 마음 구조로는 견딜 수 없을 때 끝장이 난다. 에고는
고통체에 의해 강화되기는커녕 그 강한 에너지의 맹공격에 손상된다. 전기 기구가 전류에 의해 힘을 얻고
작동하지만, 전압이 너무 높아지면 파괴되는 것과 같다.
(250)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의 내용물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가를 정의 내린다. 지각하고, 경험하고, 행동하고, 생각하고, 느끼는 모든 것이 내용물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내용물이 관심을 완전히 차지해 버리며, 그들이
동일화되는 것이 그것이다. ‘나의 삶’이라고 생각하거나 말할
때 당신은 ‘당신 자신인 삶’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혹은 가진 것처럼 보이는 삶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내용물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정신 상태와 감정 상태는 물론 나이, 건강, 관계, 경제력, 일, 생활환경 등을. 사건들, 즉
일어나는 모든 일들과 마찬가지로 당신 삶의 외부 환경과 마음의 환경, 당신의 과거와 미래 모두가 이
내용물의 영역에 속한다.
(256)
일어나는 일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신의 내면이 일어나는 일들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일어나는 일’이란 물론 이 순간의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가리키며, 그것은 이미 그러하게 그곳에 존재하고 있다. ‘일어나는 일’은 내용물, 즉 이 순간이 취하는 형태이다. 그리고 유일하게 존재하는 순간은 이 순간뿐이다. 이 순간의 있는
그대로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은 일어나는 일에 대해 내면적으로 무저항의 상태라는 뜻이다. 마음속에서
좋다거나 나쁘다는 분류표를 붙이지 않고 그것이 있는 그대로 있게 함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삶에
변화를 가져오기 위한 행동을 더 이상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 반대로, 지금이라는 순간과의 내적인 조화를 기초로 행동할
때 그 행동에는 삶 그 자체의 지성의 힘이 작용한다.
(263)
현재의 순간은 표면적으로는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일어나는 것은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에 삶의 매일매일은
서로 다른 일들이 일어나는 수많은 순간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시간은 순간들의 끝없는 연속이고, 그 순간에는 ‘좋은’ 순간도
있고 ‘나쁜’ 순간도 있다고 생각될 것이다. 그러나 잘 관찰해 보면, 즉 자신의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보면, 그렇게 많은 순간들이 있는 것이 전혀 아님을 발견하게 된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지금 이 순간’뿐이다. 삶은 언제나 ‘지금’이다. 당신 삶의 모든 것이 이 끝없는 ‘지금’에서 펼쳐지고 있다. 과거나 미래의 순간들도 당신이 기억하거나 기대할
때만 존재하며, 그것도 유일하게 존재하는 순간인 지금 이 순간에 당신이 그것들에 대해 생각할 때 가능하다.
(270)
누구나의 삶에는 형상 차원에서의 성장과 확장을 추구하는 시기가 있다. 신체적인 허약함과 금전적인 부족 같은 한계를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때이며, 새로운
기술과 지식을 획득하거나 창조적인 활동을 통해 자신을 위해서도 타인을 위해서도 삶의 질을 높이는 새로운 무엇인가를 이 세상에 가져오는 시기이다. 그것은 음악이나 미술 작품일 수도 있고, 책이 될 수도 있으며, 당신이 제공하는 서비스와 수행하는 기능, 세상에 결정적 기여를 하는
사업체나 조직이 될 수도 있다.
(279)
눈이 아무것도 볼 것이 없을 때, 그 ‘아무것도 없음’이 공간으로 지각된다.
귀가 아무것도 들을 것이 없을 때, 그 아무것도 없음이 고요로 인식된다. 형상을 인식하도록 만들어진 감각들이 형상의 부재를 만났을 때, 감각적
인식 뒤에서 모든 인식과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형상 없는 의식은 더 이상 형상에 의해 흐려지지 않는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우주 공간을 명상 속에 응시하거나 태양이 떠오르기 직전 이른 새벽의 고요에 귀를 기울일 때, 당신
안에서 무엇인가가 서로를 알아본 것처럼 그것과 공명한다. 그러면 당신은 공간의 무한한 깊이를 자신의
깊이로 감지하고, 형상 없는 소중한 고요가 당신 삶의 내용물을 채우고 있는 그 어떤 사물이나 사건들보다
훨씬 자기 자신임을 알게 된다.
(287)
형상과 더 이상 완전히 동일화되지 않을 때, 진정한
당신인 ‘의식’은 형상의 감옥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이 자유는 내적 공간의 등장이다. 설명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는
것처럼 보일 때조차 이 공간은 내면 깊은 곳에 있는 하나의 고요, 알아차리기 힘든 평화로 다가온다. 겉으로 보기에 좋지 않은 상황에 처할 때조차도 그 고요와 평화가 그곳에 있다.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일어나는 사건들 주위에 갑자기 공간이 생겨난다. 또한 오르내리는 감정 주위에도, 심지어 고통 주위에도 공간이 생긴다. 무엇보다도 당신의 생각 주변에 공간이 생겨난다. 그 공간으로부터
‘이 세상의 것’이 아닌 평화가 발산된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형상이고, 그 평화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신의 평화이다.
(292)
그렇다면 텔레비전 시청이 내적 공간을 가져다주는가? 그럼으로써
이 순간에 존재할 수 있는가? 불행하게도 그렇지 않다. 당신의
마음은 오랜 시간 어떤 생각도 만들어 내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 대신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사고 활동과 연결되어 있다. 텔레비전 속의 집단 무의식과 연결되어 그 생각을 생각하고 있다. 생각을
만들어 내지 않는다는 의미에서만 마음이 활동을 정지하고 있을 뿐이지, 실제로는 텔레비전 화면으로부터
생각과 이미지를 끊임없이 흡수하고 있다. 이것은 최면 상태와 다르지 않게, 넋을 잃은 상태에서의 수동적인 깨어 있음이다. 그래서 텔레비전이
‘여론’ 조작에 이용되는 것이다. 텔레비전이 사람을 멍청하게 하는 수동 상태를 만들 수 있음을 알고 있으며, 그
때문에 많은 돈을 지불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당신에게 심으려고 하며 대부분은 성공한다.
(294-295)
오랫동안 텔레비전을 보면 무의식적이 될 뿐 아니라 수동적이 되고 에너지가 고갈된다. 그러므로 무작위적으로 시청하는 대신 프로그램을 선택해야 한다. 때로는
텔레비전을 보면서 자기 몸 안의 생명력을 느끼는 것이 좋다. 혹은 때로는 자신의 호흡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 또한 시각이 완전히 텔레비전에 점령되지 않도록 때때로 텔레비전 화면에서 눈을 떼어야 한다. 청각이 압도되지 않도록 음량을 필요 이상으로 크게 하지 않는다. 상업
광고시간에는 음을 소거한다. 또한 텔레비전을 끄자마자 잠들지 않는 것이 좋다. 켜 놓은 채 자는 것은 더 나쁘다.
(296)
만약 낮 동안의 삶을 불만, 불안, 걱정, 우울, 절망, 그 밖의 부정적인 상태로 보내지 않을 수 있다면, 만약 빗소리나
바람소리를 듣는 일 같은 단순한 일들을 즐길 수 있다면, 만약 하늘에 흘러가는 구름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거나, 때로는 오락과 같은 정신적인 자극을 필요로 하지 않고도 외로움을 느끼지 않고 홀로 있을
수 있다면, 만약 완전히 낯선 사람을 아무것도 바라는 것 없이 마음에서 우러난 친절로 대할 수 있다면, 그때 평소 같으면 끊임없는 생각의 흐름에 점령당하고 있을 마음에 짧은 순간이긴 해도 순수 공간이 열린다. 비록 설명하기 힘든 미묘한 것일지라도 생생한 평화와 행복이 느껴진다. 그
평화와 행복의 느낌은, 거의 눈치채지 못할 만큼 작은 만족감에서부터 고대 인도의 현자들이 ‘아난다’라고 부른 존재의 지복 상태까지 다양할 것이다. 오직 형상에만 관심을 향하도록 조건 지어져 있으면 간접적으로밖에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 아름다움을 이해하고, 단순한 것들의 가치를 알고, 혼자 있는 즐거워하고, 애정을 가지고 친절하게 사람들을 대하는 능력
속에는 공통된 요소가 있다. 이 공통된 요소는 배후에서 이것들의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충만감, 평화, 그리고 생동감이다.
(298)
왜 ‘더할 나위 없이 작은 것’이 ‘최고의 행복’에 이르게
해 주는가? 왜냐하면 사실 진정한 행복은 사물이나 사건이 원인이 되어 일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록 처음에는 그렇게 보일지라도. 사물이나 사건이 지극히 미묘하고
지나치게 야단스럽지 않으면, 그것들은 당신의 의식의 작은 부분밖에 차지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머지는 내적 공간이, 즉 형상에 의해 가로막히지 않은 의식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내면의 의식 공간과 당신의 본질은 하나이며 같다.
(308-309)
자신의 호흡을 의식해 보라. 호흡의 감촉에 주목하라. 공기가 움직이면서 몸 안으로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느껴 보라. 들숨과
날숨과 더불어 가슴과 배가 조금 팽창했다가 수축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한 번의 의식적인 호흡만으로도
그 전까지 생각에서 생각으로 방해받지 않은 연속적인 흐름이 이어지던 자리에 약간의 공간을 만들기에 충분하다. 한
번의 의식적인 호흡을, 두세 번이라면 더욱 좋지만, 하루에
가능한 한 여러 번 반복한다. 이것은 당신의 삶에 내적 공간을 만드는 훌륭한 방법이다. 설령 어떤 사람들이 하듯이 두 시간 이상씩 호흡 명상을 할지라도, 한
번의 호흡이 당신이 알아차릴 필요가 있는 전부이며, 당신이 진정으로 알아차릴 수 있는 전부이다. 나머지는 기억과 기대이다. 즉, 생각이다. 사실 호흡은 당신이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자연스러운 일어남이고, 당신은
그것을 관찰할 뿐이다. 호흡은 저절로 일어난다. 몸 안의
지성이 그 일을 하고 있다. 강신이 해야만 하는 것이 그것이 일어나는 것을 지켜보는 일이다. 긴장도 노력도 개입하지 않는다. 또한 호흡 사이의 짧은 멈춤을 주목하라. 특히 숨을 다 내쉬고 난 뒤 다시 들이쉬기 전의 고요한 지점을.
(310)
호흡의 자각은 당신을 현재의 순간으로 오게 한다. 이것이
모든 내적 변화의 열쇠이다. 호흡을 의식할 때마다 당신은 절대적으로 현재의 순간에 존재한다. 또한 생각하는 동시에 호흡을 알아차릴 수는 없음을 당신은 눈치챌지 모른다. 호흡에
의식을 집중하면 마음의 활동이 정지된다. 그러나 이것은 최면에 걸리거나 반쯤 조는 상태와는 매우 다르며, 당신은 완전히 깨어 있고 고도로 민감하다. 생각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생각 위로 올라가는 것이다. 그리고 더 자세히 들여다본다면, 완전히 현재의 순간 속으로 들어오는 것과 의식의 잃음 없이 생각을 멈추는 이 두 가지가 사실은 하나이며 같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공간 의식이 등장한 것이다.
(316)
생각과 단어는 형상의 세계에 속한다. 그것들은 형상
없음을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나는 나의 내부의
몸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생각이 만들어 낸 오해이다. 실제로
일어난 것은 육체로 나타난 의식, 즉 ‘나는 있다.’고 하는 의식이 그 자신을 의식하는 것이다. 진정한 자신과 일시적인
형상인 ‘나’를 혼동하지 않으면, 그 무한하고 영원한 것, 즉 신의 차원이 ‘나’를 통해 스스로를 표현할 수 있고 ‘나’를 인도할 수 있다. 또한
형상에 대한 의존으로부터 자유롭게 해 준다. 그러나 ‘나는
이 형상이 아니다.’라고 머리로만 인식하거나 믿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지금 이 순간, 나는 내적 공간의 존재를 감지할 수 있는가? 이 말의 진정한 의미는
이것이다. 나는 나 자신의 ‘현존’을,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나의
있음’인 현존을 감지할 수 있는가?
(332-333)
예를 들어, 아이를 키우는 것이 당신의 삶에 의미를
준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런데 아이가 더 이상 당신을 필요로 하지 않거나 혹은 당신 말에 더 이상 귀
기울지 않는다면 그 의미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만약 다른 이들을 돕는 것이 당신의 삶에 의미를 준다면, 당신의 삶이 계속 의미 있는 것이 되고 스스로에 대해 좋은 느낌을 갖기 위해서는 당신보다 상황이 나빠지는 사람들에게
의존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어떤 일에 뛰어나거나 승리하거나 성공하려는 욕망이 당신에게 의미를 준다면, 결코 승리하지 못하거나 어느 날 연속적인 성공이 막을 내린다면 어떻게 됩니까?
언젠가는 분명히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당신은 상상이나 기억에 의존해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곳은 당신의 삶에 무미건조한 의미만을 가져다주는 매우 불만족스러운 장소입니다. 어떤 분야에서든 ‘성공’이
의미가 있는 것은 다른 수백 수천만 명이 실패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따라서 당신의 삶이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의 ‘실패’가 필요하게 됩니다.
(339)
일터에서나 어디에서든 사람들과 만날 때 상대방에게 모든 관심을 기울이십시오. 당신은 개인으로서 그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알아차림의 장으로서, 깨어
있는 ‘현존’으로서 그곳에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상호작용하는 애초의 이유, 즉 물건 사고팔기와 정보
교류 등은 이차원적인 것이 됩니다.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알아차림의 장, 그것이 만남과 교류의 첫째 목적이 됩니다. 그 알아차림의 공간이
당신들이 나누는 대화보다 더 중요하고, 물질적인 대상이 할 필요가 있는 일들을 무시해도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사실 ‘순수한 있음’의 차원을 알고 그것이 주된 것이 되었을 때, 행동은 더 쉬워지고
더 강력해집니다. 새로운 지구에서는 인간 존재들 사이에 그 알아차림의 통일장이 나타나나는 것이 관계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341)
당신이 사업가라고 합시다. 2년 동안 스트레스와
긴장을 힘들게 견뎌 내어 마침내 잘 팔리는 상품이나 일의 결과를 갖게 되고 돈도 벌게 됩니다. 이것은
성공인가요?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하는 말로는 성공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2년 동안 자신의 몸뿐 아니라 지구도 부정적인 에너지로 오염시켰습니다. 자기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했으며, 만난 적도 없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런 행동 배후에 있는 무의식적인 가정은, 성공은 미래의 일이고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목적과 수단은 하나입니다. 그리고 만약 수단이 인간의 행복에 기여하지 않는다면 목적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과는 거기에 도달하는 행동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이 행동에
의해 이미 오염되었다면 미래의 더 많은 불행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이것은 업을 쌓는 행위로, 불행을 무의식적으로 지속시킵니다.
(349)
자연은 무의식중에 전체와 하나가 된 상태로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2004년 쓰나미 재난(30만 명의 사망자를 낳은 동남아시아의
지진 해일)에서도 야생동물에게는 사실상 피해가 없었던 이유가 그것입니다. 인간들보다는 전체성과 더 많이 접촉하고 있기 때문에 동물들은 보거나 듣기 훨씬 전에 쓰나미의 접근을 감지할
수 있었고 더 높은 지역으로 이동했을 뿐인지도 모릅니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이러저러하게 행동한다는 것은
마음이 실체를 분해하는 방식입니다. 반면에 자연은 전체와의 무의식적인 하나됨 속에서 살아갑니다. 전체와 의식적으로 하나가 되고, 우주의 지성과 의식적인 일치를 이룸으로써
이 세상 속으로 새로운 차원을 가져오는 것, 그것이 인간의 목적이자 운명입니다.
(354)
상대적인 진리와 절대적인 진리의 예로서 일출과 일몰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리가 아침에 태양이 떠오르고 저녁에 태양이 진다고 말할 때 그것은 진리이지만 오직 상대적으로만 진리이다. 절대적인 관점에서는 틀린 말이다. 땅 위나 지표면에 가까운 장소에서
관찰하는 사람의 제한된 시야에서는 태양은 떠오르거나 진다. 그러나 우주로 나가면 태양은 뜨는 것도 지는
것도 아니고 항상 빛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안다고 해도, 그것이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라 상대적인 진리임을 알고 있어도, 우리는 일출이라고 말하고 일몰이라고 말하며, 여전히 그 아름다움에 감동하고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쓸 수 있다.
(358)
죽음은 단지 추상적인 개념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형상의
소멸에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죽음이 가까이 왔을 때는 충격을 받고 이해할 수 없으며 절망하고
큰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이제 모든 것이 의미가 없으며 절망하고 큰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이제 모든 것이 의미가 없어진다. 그동안 삶이 그들을 위해 가지고
있던 모든 의미와 목적은 축적, 성공, 세움, 보호, 그리고 감각적인 만족과 관련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외부적인 운동이고 형상과의 동일화, 즉 에고와 관계된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삶과 그들의 세계가 무너지고 있을 때 그것으로부터 어떤 의미도 발견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외부적인 운동보다도 더 깊은 의미가 잠재되어 있다.
(361)
한 개인의 삶에서 에고가 회귀 운동과 자신을 더 이상 동일시하지 않으면 늙음이나 다가오는 죽음은
본래의 의미를 되찾는다. 영적 차원으로의 문이 되는 것이다. 나는
이 과정을 실현하며 살아가는 노인들을 만나 보았다. 그들은 늙어 가면서도 빛이 나고 있었다. 그들의 쇠약해져 가는 형상들은 투명해져서 의식의 빛이 비쳐 나오고 있었다.
(365)
의식은 형상의 일어남 뒤에 있는 지성, 즉 조직화
원리이다. 의식은 형상들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수백만 년 동안 그 형상들을 준비해 왔다. 형상으로 나타나지 않은 의식의 영역은 다른 차원으로 여겨질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우주라는 형상의 차원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 형상의 세계와 형상 없는 세계는 서로 스며들어 있다. 형상으로 나타나지 않은 것은 알아차림, 내적 공간, ‘현존’으로서 이 차원 속으로 흘러들어 온다. 어떻게 그렇게 하는가? 의식이 깨어 있는, 그럼으로써 자신의 운명을 완성하는 인간 형상을 통해서이다. 이 높은
목적을 위해 인간이라는 형상이 창조되었으며, 수백만의 다른 형상들이 그것을 위한 토대를 준비해 왔다.
(366-367)
인간의 뇌는 고도로 차별화된 형상이며, 이 형상을
통해 의식이 이 세상의 차원으로 들어온다. 인간의 뇌에는 뉴런이란 불리는 약 천억 개의 신경 세포가
있다. 이것은 우주의 뇌라고 볼 수 있는 은하계에 있는 별들의 숫자와 같다. 뇌가 의식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의식이 그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지구에서 가장 복잡한 물질 형태인 뇌를 만들어 낸 것이다. 뇌가 손상되었다고 해서 의식을 잃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의식이 이 형상 차원으로 들어오기 위해 그 뇌를 사용할 수 없게 되었을 뿐이다. 당신은 의식을 잃어버릴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의식은 본질적으로 당신
자신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오직 자신이 소유한 것만을 잃을 수 있을 뿐이며, 당신 자신인 것을 잃을 수는 없다.
(369-370)
깨어 있는 행동의 세 가지 방식은 받아들임, 즐거움, 열정이다. 각각은 의식의 특정한 진동 주파수를 대표한다. 가장 단순한 일부터 매우 복잡한 일까지 당신이 어떤 행동을 할 때마다 그 셋 중 하나가 작동하도록 특별히 깨어
있어야 한다. 만일 당신이 받아들임, 즐거움, 열정의 어느 상태에도 있지 않다면, 자세히 살펴보면 당신은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 주고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374)
삶의 주된 목적은 의식의 빛을 이 세상 속으로 가지고 오는 것임을 깨닫고,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을 의식을 위한 매개체로 삼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새로운 지구가 탄생한다.
(377)
스트레스와 달리 열정은 에너지 진동 주파수가 높기 때문에 우주의 창조적 힘과 공명한다. 랄프 왈도 에머슨이 “열정 없이는 어떤 위대한 것도 이루어지지 않았다.”라고 말한 이유이다. 열정(enthusiasm)이라는
단어는 고대 희랍어의 ‘안’을 뜻하는 ‘엔(en)’과 ‘신’을 의미하는 ‘테오스(theos)’에서
유래한 말이다.(‘내재하는 신a Good within, 즉
‘내 안에 신을 둔다’). 그리고 그것과 관련된 단어 엔토우시아제인(enthousiazein, 신적 영감 상태)은 ‘신에 사로잡힌’의 의미이다. 열정에
불타고 있을 때는 자기 혼자서 모든 것을 해야만 할 필요가 없음을 발견하게 된다. 사실 자기 혼자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 열정은 창조적 에너지의 물결을 불러들이기 때문에 당신은 다만 그 ‘물결에 올라타기’만 하면 된다.
(380)
그 대신, 목표는 반드시 역동적이어야 한다. 자신이 참여하고 있는 활동을 통해 다른 인간 존재들뿐 아니라 전체와 연결될 수 있는 일에 초점을 향해야 한다. 유명한 배우나 작가 같은 모습으로 자신을 보는 대신, 자신의 작품을
통해 무수히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그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모습으로 자신을 보아야 한다. 그
활동이 자기 자신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하고 깊어지게 하는가를 느껴야 한다. 자신은
하나의 문이며, 형상으로 나타나지 않은 모든 생명의 원천에서 나온 에너지가 그 문을 통해 모두를 위해
흘러가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384)
미래의 사건으로서의 깨어남은 아무 의미가 없다. 깨어남은
‘현존’의 실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로운 하늘, 즉 깨어난 의식은 미래에 성취해야 할 상태가
아니다.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은 지금 이 순간 당신의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당시의 머릿속에 있는 하나의 생각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뭐라고 말했는가? “하느님의 나라는 지금 여기 너희 안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