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00)

그렇다. 이따금 정말이지 이상한 생각이, 얼른 보기에는 전혀 가능하지 않은 생각이 머릿속에 거머리처럼 달라붙어서 결국에는 그런 생각이 실현될 수도 있다고 받아들이게 된다…… 뿐만 아니라 만일 그런 생각이 강렬하고 열정적인 소망과 합쳐지게 되면 때로는 그것을 숙명적이고 피할 수 없는 어떤 것, 예정된 어떤 것으로, 또 반드시 있어야 하고, 일어나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거기에는 또 다른 무언가가 있는지도 모른다. 어떤 예감의 결합이라든지, 예사롭지 않은 의지의 강화, 그리고 자신의 상상에 의한 중독이나 아니면 또 다른 어떤 것이, 모르겠다. 어쨌든 오늘 밤(나는 평생토록 이 밤을 잊지 못할 것이다) 내게는 기적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비록 그 사건이 산술에 의해 완전히 증명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내게는 아직까지도 기적적인 사건으로 남아 있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해서 그런 믿음이 내게 그토록 단단하고 뿌리 깊이 박혀 있었던 것일까? 그것도 아주 오래전부터? 여러분에게 되풀이해서 말하는 것이지만, 아마도 나는 그것을 수많은 것들 중에서 일어날 수 있는(그러니까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경우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도저히 일어나지 않고서는 안 되는 어떤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206-207)

그런데 나는 빨간색이 연이어 일곱 번씩이나 나왔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상한 오기가 생겨서 일부러 빨간색을 물고 늘어졌다. 내가 그렇게 한 데에는 자존심도 절반쯤 작용했다고 보는데, 정말이지 나는 앞뒤 가리지 않는 모험으로 구경꾼들을 놀라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상야릇한 느낌이다- 내가 분명히 기억하는 것은, 전혀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았는데도 별안간 모험에 대한 강한 열망이 나를 사로잡아 버렸다는 것이다. 어쩌면 내 영혼은 수많은 느낌들을 거쳐 왔으면서도 그것들에 의해 충만되는 것이 아니라 자극만을 받은 채 완전히 진이 빠질 때까지 더 많은 느낌들, 더욱더 강렬한 느낌들을 요구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건 거짓이 아니라 정말인데, 만일 게임의 규칙상 한꺼번에 5만 플로렌까지 거는 것이 허용되기만 한다면 나는 분명히 5만 플로렌을 걸었을 것이다. 주위에서는 어리석은 짓이라고 난리들이었다. 빨간색이 벌써 열네 번이나 나왔다고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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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에센셜 한강 (무선 보급판)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디 에센셜 The essential 1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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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전에도 이야기했듯이 한강 작가님이 우리나라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을 때 기념으로 책 두어 권을 샀다고 했잖아. 그 중에 한 권이 <디 에센셜 한강>이라는 책이란다. 디 에센셜 시리즈는 문학동네 출판사에서 기획한 시리즈는 유명한 작가들의 작품들을 엮은 시리즈란다. 당연한 거겠지만, 문학동네 출판사에서는 이미 한강을 높이 평가한 듯 하구나.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한강 작가님의 대부분의 책이 베스트셀러에 올라갔는데, 물론 이 책도 베스트셀러 한 자리를 차지했지. 이 책을 2023년에 미리 기획한 사람은 문학동네에서 보너스 좀 받았으려나?^^ 이런 생각도 문들 들었단다.

책이 예쁘게 잘 디자인되었단다. 디 에센셜 시리즈는 모든 책들이 작가마다 한 가지 색상으로 표지 디자인을 했단다. 아무래도 출판사에서 작가들의 색을 정하지 않았을까 싶구나. 버지니아 울프는 빨간색, 조지 오웰은 밝은 파란색, 김수영은 녹색등등. 한강 작가님은 흰색이었단다. 작품 자체가 순수해서 그럴 수도 있고, 한강 작가님 소설 중에 <>이란 작품이 있어서도 그렇게 정하지 않았을까 싶구나. 아무튼 디 에센셜 시리즈는 책 디자인이 예뻐서 다른 시리즈들도 다 모아놓으면 인테리어로 좋을 것 같더구나.

이제 <디 에센셜 한강> 책 이야기를 해보자. 이 책에는 장편 소설 <희랍어 시간>과 단편 <회복하는 인간><파란 돌> 두 편과 시 5, 산문 8편이 실려 있었단다. 아빠는 그 동안 한강 작가님의 작품은 장편 소설들만 읽었는데, 이 책을 통해 다양한 장르와 산문들을 읽을 수 있어 좋았단다. 모든 작품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못할 것 같고, 몇몇 작품들에 대해 이야기를 해줄게.

 

1.

장편 <희랍어 시간>은 단행본으로도 많은 사람들한테 사랑 받은 작품이란다. 한강 작가님의 노벨문학상 선정 이유를 보면 역사적 트라우마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강렬하고 시적인 산문이라고 했는데, 위 선정 이유 중에 한 부분인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강렬하고 시적인 산문이라는 부분이 소설 <희랍어 시간>에 아주 잘 어울리는 평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특히 시적인 산문이라는 부분소설이긴 한데, 시와 같은 소설이었어. 소설의 형식으로 쓴 시라고 할까, 시의 형식으로 쓴 소설이라고 할까. 함축적이고 은유적인 표현들도 많이 있어서 읽기는 쉽지 않았어. 하지만 중간중간 언어를 가지고 마법을 부린 듯한 문장들이 영혼까지 닿았단다. 그래서 아빠가 발췌한 문장들도 많은 책이란다.

15살 때 식구들과 함께 독일로 이민간 남자. 17살 때 눈이 불편해서 안과에서 갔는데, 유전병 때문에 앞으로 시력이 계속 안 좋아지다가 마흔 살 즈음에는 결국 실명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그 어린 나이에 얼마다 마음의 상처를 입었을까. 그 이후 남자의 안경은 점점 두꺼워져 갔단다. 그런데 그 남자는 그 안과 의사의 딸을 사랑하게 되었어. 그 안과 의사의 딸은 청력을 잃어 말을 들을 수 없었어. 하지만 입술 모양으로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 수 있었단다. 그 소녀는 어렸을 때부터 몸도 허약해서 늘 병원에서 지냈어. 그렇다 보니 그 남자가 소녀가 만난 첫 남자라고 할 수도 있었어. 남자는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고, 남자는 그 소녀에게 고백을 했는데 그만 퇴짜를 맞고 말았지. 소녀는 자신이 건강하지 못해 사랑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건 아닐까 싶어. 소녀는 결국 죽고 말았단다.

그리고 20대 때 그는 독일에서 친구와 등산을 갔다가 사고로 친구가 죽었어. 이렇게 젊었을 때 두 번의 큰 죽음은 그에게 큰 마음의 상처가 되었어. 이후 방황하다가 남자는 31살에 한국으로 왔단다. 그는 대학에서 희랍 철학 학위를 받아서, 문화센터 같은 곳에서 희랍어 교양 강좌를 가르쳤단다. 희랍어를 배우는 사람은 당연히 적었어. 희랍어는 그리스어란다. 예전에 읽은 <그리스인 조르바>를 어떤 출판사에서는 <희랍인 조르바>로 출간하기도 했단다. ‘희랍이라는 말은 그리스를 한자식으로 표기한 것이라고 하는구나. 남자가 한국에 들어온 지도 어느덧 6년이 되었고, 그의 시력은 점점 더 나빠졌단다. 학생들은 그가 두꺼운 안경을 쓰고 있지만, 거의 아무것도 안 보일 정도로 나쁘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어. 그의 수강생 중에 한 여자가 있었단다.

여자는 십대 때 갑자기 말이 안 나오는 증세를 겪었어. 그 일로 정신과 진료도 받았지. 나중에 이상한 외래어 발음을 보고 이걸 읽으면서 다시 말문이 트였다고 했어. 그 이력 때문에 나중에 이혼할 때도 아홉 살 아들의 양육권을 남편한테 빼앗기고 말았어. 세 번의 재판을 했지만, 남편은 여자의 정신과 진료 이력을 문제 삼았고, 결국 여자는 아들의 양육권을 빼앗기도 만 거야. 그런 여자는 또 다시 말이 안 나오는 증상이 찾아왔단다. 무슨 수를 쓰려고 해도 말이 나오지 않았어. 오래 전에 이상한 외래어를 읽으면서 말문이 트였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것을 기대하고 이상한 외래어인 희랍어 수업을 듣게 된 거야.

….

어느날 남자가 자신이 일하는 아카데미 건물에서 새를 쫓아가다가 어두운 지하 계단에서 넘어지고 다치고 말았는데, 안경도 떨어지면서 깨져서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단다. 도와달라는 목소리를 듣고 온 여자가 그를 집까지 데려다 주었단다. 눈을 잃어가는 남자. 말을 잃어버린 여자. 둘은 그렇게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 가는 소설이란다.

 

2.

단편 <희복하는 인간>당신이 주인공이야. 당신에게는 언니가 한 명 있었어. 언니는 당신에게 열등감을 가졌어. 당신은 고집 세고 서른 넘게 연애도 못하고, 부모와 관계가 안 좋아 경제적인 도움도 받지 못해서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당신을 부러워했어. 언니는 결혼하여 안정적이고 경제적으로 넉넉한 가정을 가졌는데 말이야. 당신과 언니는 이런 상황이다 보니 소원했었는데 어느 날 언니가 당신과 함께 병원에 가자고 해서 갔어. 그런데 무서운 병에 걸린 언니그리고 투병하다가 언니는 그만 세상을 등지고 말았어. 당신은 발목을 겹질려 한의원에서 쑥찜을 받다가 화상을 입고 며칠 방치했다가 덧나서 병원에 가서 화상 치료를 받았어. 그러면서 아팠던 언니를 생각하며 언니와 있었던 일을 떠올리고병원에서는 화상을 입고 왜 이렇게 늦게 왔냐고 핀잔을 주고, 수술이 필요해 보이지만, 새 살이 나는지 지켜보자고 했어. 다행히 상처에서 새살이 나긴 했지만 아주 더디게 진행되었어.. 그래도 당신은 언젠가는 다 회복하게 될 거야

<파란돌>이라는 단편은 짝사랑했던 당신에게 이야기를 하는 형식의 소설이란다. 오랜만에 당신에게 안부를 전하는 내용이었어. 17살 때 먹으로 그린 그림을 보고 당신은 평가를 해주었어. 그러면서 그림을 그리고 싶으면 당신의 화실에 와서 그려도 좋다고 했어. 당신은 친구의 삼촌이었어. 당신은 병을 앓고 있었는데, 상처가 나면 안 아무는 병을 앓아서 조심하면 지내야 했지. 그 병 때문에 술과 담배가도 안 했어. 혼자 조용히 그림 그리는 화가가 잘 어울리는 직업인 것 같았어. 매일 당신의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당신을 사랑하게 되고, 첫키스도 당신과 하고당신은 얼른 얼른 크라고 했지. 하지만 당신은 결국 그 병으로 인해 죽고 말았어. 이후 주인공은 자라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을까. 결혼 생황도 순탄치 않았고,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 때문에 불행했고, 자살을 생각하기도 했어. 그런 상처 입은 영혼의 이야기가 짧게 이어졌단다.

….

아빠가 게을러서 읽고 나서 바로 독서 편지를 써야 하는데, 두어 주 지난 다음에 쓰다 보니... 메모를 해두었지만 위 두 편의 단편 소설들은 제대로 된 이야기가 잘 생각나지 않는구나. 위 내용이 소설과 다를 지라도 이해해 주길 바래.

….

이 책을 통해 한강 작가님의 산문들도 처음 읽어보았다는데, 소설보다 산문이 더 읽기 편했단다. 붓 가는 대로 쓰신 것 같아서 읽기 편했고, 한강 작가님의 어린 시절 삶과 가족과 일상과 생각을 엿볼 수 있어서 좋았던 것 같아. 가난하여 진짜 피아노는 못치고 피아노 학원도 가지 못하고 종이 피아노를 치면서 연습했다고부모님도 얼마나 가슴 아파했을까. 중학교 3학년이 되어서야 뒤늦게 학원을 보내주셔서 가게 되었다는 이야기.. 따뜻한 부모님의 사랑이 여기까지 느껴지는 것 같았어. 한강 작가 님의 아버지도 유명한 작가님이란다. 한승원 작가님으로 아빠는 한강 작가님 책보다 한승원 작가님의 책을 더 많이 읽은 것 같구나. <아버지가 지금, 책상 앞에 앉아 계신다>라는 산문은 작가인 아버지에 관한 글인데, 공감 가는 문장이 있어 발췌해 보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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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8)

어느 순간, 갑자기 아버지의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 자식에게 찾아온다. 그것이 자식의 운명이다. 인생은 꼭 그렇게 힘들어야 하는 건가, 하는 의문 없이. 불만도 연민도 없이. 말도 논리도 없이. 글썽거리는 눈물 따위 없이. 단 한 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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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를 통해서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가 어떻게 쓰여졌는지 많이 알려져 있는데, 이 책에도 그 소설들을 어떻게 쓰게 되었는지 실려 있는데, <소년이 온다>를 쓸 때 작가님의 심정이 담긴 글이 좋았단다. 다시는 이런 인간이 인간에게 가하는 폭력이 없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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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1)

2012년 겨울부터 <소년이 온다>를 쓰기 위한 자료를 읽으면서 나는 내면의 투쟁을 치르고 있었다. 인간의 잔혹함을 증거하는 자료들과, 다른 한편으로 인간의 존엄을 증거하는 자료들 사이에서 나는 분열을 겪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나에게 광주는 더 이상 하나의 도시를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인간의 폭력과 존엄이 극단적으로 공존한 시간을 가리키는 보통명사가 되어 있었다. 신대륙의 학살, 아우슈비츠, 보스니아, 관동과 난징의 학살을 가로지르는 인간의 잔혹함과, 그럼에도 필사적으로 그 폭력 앞에서 무엇인가를 하려고 했던 연약한 몸짓들에 대해 내가 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이 소설을 쓰는 일을 거의 포기하려 했던 어느 날, 5 27일 새벽 군인들이 돌아와 모두를 죽일 것임을 알면서 광주의 도청에 남았던 한 시민군, 섬세한 성격의 야학 교사였던 스물여섯 살 청년의 마지막 일기를 읽었다. 기도의 형식을 한 그 일기의 앞부분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하느님, 왜 저에게는 양심이 있어 이토록 저를 찌르고 아프게 하는 것입니까? 저는 살고 싶습니다.” 그 순간 내가 쓰려는 소설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깨닫게 되었다. 어떻게든 폭력에서 존엄으로, 그 절벽들 사이로 난 허공의 길을 기어서 나아가는 일만이 남아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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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이렇게 이 책에 실린 몇 편의 작품을 소개해주면서 마칠게. 한강 작가님의 다른 책을 또 읽게 되면 이야기해줄게.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우리 사이에 칼이 있었네, 라고 자신의 묘비명을 써달라고 보르헤스는 유언했다.

책의 끝 문장: 허락된다면 다음 소설은 이 마음에서 출발하고 싶다.



수년 전, 아이가 마음껏 놀게 하려고 일부러 맨 아래층에 얻은 집이었다. 하지만 아이는 좀처럼 발을 구르거나 뛰어다니려 하지 않았다. 거실에서 줄넘기 연습을 해도 된다고 그녀가 말하자 아이는 물었다. 지렁이랑 달팽이들이 시끄러워하지 않을까? - P25

그렇게 상상하며 사람들을 지켜보는 일이 지루해질 때쯤. 천천히 뒷산의 산책로를 오르기도 합니다. 연푸른 나무들은 한 덩어리로 일렁이고, 꽃들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색채로 번져 있습니다. 산기슭에 있는 작은 절의 대중방 마루에 앉아 나는 쉽니다. 무거운 안경을 벗어들고, 경계가 완전히 허물어진 흐릿한 세계를 둘러봅니다. 잘 보이지 않으면 가장 먼저 소리가 잘 들릴 거라고 사람들은 생각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가장 먼저 감각되는 것은 시간입니다. 거대한 물질의 느리고 가혹한 흐름 같은 시간이 시시각각 내 몸을 통과하는 감각에 나는 서서히 압도됩니다. - P42

진실이 어리석음을 파괴한다는 중간태의 희랍어 문장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진실이 어리석음을 파괴할 때, 진실 역시 어리석음에서 영향을 받아 변화할까요. 마찬가지로 어리석음이 진실을 파괴할 때, 어리석음에도 균열이 생겨 함께 부서질까요. 내 어리석음이 사랑을 파괴할 때, 그렇게 내 어리석음 역시 함께 부서졌다고 말하면 당신은 궤변이라고 말하겠습니까. 목소리. 당신의 목소리. 지난 이십 년 가까이 잊은 적 없는 소리. 내가 아직 그 목소리를 사랑하고 있다고 말하면, 당신은 다시 내 얼굴에 그 단단한 주먹을 날리겠습니까. - P49

사랑에 빠지는 것은 귀신에 홀리는 일과 비슷하다는 것을 그 무렵 나는 처음으로 깨닫고 있었습니다. 새벽에 눈을 뜨기 전에 이미 당신의 얼굴은 내 눈꺼풀 안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눈꺼풀을 열면 당신은 천장으로, 옷장으로, 창유리로, 거리로, 먼 하늘로 순식간에 자리를 옮겨 어른거렸습니다. 어떤 죽은 사람의 혼령이라도 그토록 집요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그 여름밤 내 책상 옆의 작은 거울 속에는 땀을 뻘뻘 흘리며 어설픈 수화를 연습하는 내 상반신이 비쳐 있었지만, 거기 어른을 나는 매 순간 알아보았습니다. - P50

그에 비하면 언어는 수십 배 육체적인 접촉이었다. 폐와 목구멍과 혀와 입술을 움직여, 공기를 흔들어 상대에게 날아간다. 혀가 마르고 침이 튀고 입술이 갈라진다. 그 육체적인 과정을 견디기 어렵다고 느낄 때 그녀는 오히려 말이 많아졌다. 긴 문어체의 문장으로, 유동하는 구어의 생명을 없애며 말을 이어갔다. 목소리도 평소보다 커졌다. 사람들이 자신의 말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일수록 점점 사변적으로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런 순간들이 반복되는 시기에는, 혼자 있는 시간에도 글을 쓰는 데 집중할 수 없었다. - P62

아름다운 사물들을 믿으면서 아름다움 자체를 믿지 않는 사람은 꿈을 꾸는 상태에 있는 거라고 플라톤은 생각했고, 그걸 누구에게든 논증을 통해 설득해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의 세계에선 그렇게 모든 것이 뒤집힙니다. 말하자면, 그는 자신이 오히려 모든 꿈에서 깨어난 상태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현실 속의 아름다운 사람들을 믿는 대신 아름다움 자체만-현실 속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절대적인 아름다움만을-믿는 자신이. - P105

그 순간, 불쑥 오래된 한 단어의 기억이 절반쯤 잘린 채 떠올라 그녀는 그것을 붙들려 한다. 오래전에는 해가 진 직후와 해가 뜨기 직전의 어스름을 호(呼)……로 시작하는 한자어로 불렀다고 했다. 멀리서 오는 사람을 알아볼 수 없어, 큰 소리로 불러 누구인지 물어야 한다는 뜻의 단어다. 개와 늑대의 시간이란 서양식 표현과 비슷한 연원을 가진, 호……로 시작되는, 끝끝내 완전해지지 않는 그 단어가 목구멍보다 깊은 곳에서 뒤척인다. - P176

지금 내 머릿속에 마지막으로 떠오른 이미지는, 펜촉 또는 송곳을 들고 자신이 뚫다 만 종이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의 어렴풋한 옆얼굴이다. 그들이 내쉬는 더운 숨이 구멍들을 통과해 가장 단순한 언어가 된다. 그들은 어떤 소리를 내지도 움직이지도 않는데, 간결한 부호 같은 언어들이 그 구멍들에서 새어나온다(들립니까, 나는 지금 온 힘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내 말을 듣고 있습니까). 실핏줄을 타고 흐르는 따뜻한 피 같은, 우리가 가진 생명의 가장 연한 부분, 또는 어떤 목소리의 이미지. - P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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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00)

하지만 어느 쪽 교육 방침도 공통의 가정을 깔고 있었으니 그것은 아이의 성장과 변화가 주어진 조건에 대한 반응이라는 견해였다. 그러나 우리는 거꾸로 아이에게 반응하는 것이 세상의 숙명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남다른 개성 때문이든, 악마적인 아름다움이나 길들여지지 않는 야성 때문이든, 아이들은 세상 속으로 아장아장 걸어 들어가 세상을 망쳐 버리고 아무것도 양보하지 않는다. 끝없이 양보하는 쪽은 오히려 세상이다. 세상은 그렇게 굴복함으로써 스스로를 갱신하고 쇄신한다. 바로 여기에 비밀이 있다. 살기 위해 죽는 것.

 

(466)

소리 멋지지. 미래를 읽을 줄 아는 자는 아주 드물어. 너는 캔들이 현재를 읽을 줄 안다고 말했지. 하지만 과거를 읽는 것도 재주는 재주야. 과거를 느끼고 과거에서 새로운 힘과 지식을 얻는 거지. 언제나 과거로부터 배우는 것이라고나 할까. 내 생각으로는 이름 없는 신이 너에 대해 알게 되면 그것도 인간의 커다란 힘이 될 거야. 슬프게도 다른 많은 좋은 생각들처럼 아직까지는 현실에서 실현되지 않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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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6 - 제2부 유형시대 조정래 대하소설
조정래 지음 / 해냄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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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은 조정래 님의 <한강> 6권의 이야기란다. <한강> 시리즈를 아빠가 20여 년 만에 다시 읽는 거잖아. 아빠의 기억력이 좋지 않는 것이 장점이 되기도 하는구나. 이번에 읽는 것이 새로 읽는 기분이거든…^^ 물론 아주 굵직한 내용이나 사건들에 대해서는 어렴풋이 기억나지만 말이야. , 그럼 <한강> 6권의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김광자는 서독에서 간호사 일을 하면서 틈틈이 의대 시험 준비를 했단다. 서독에 오기 전부터 의사의 꿈을 가지고 왔기 때문에 정말 열심히 했어. 김광자를 비롯한 우리나라에서 간 간호사들의 일상 생활을 소설을 통해 알 수 있었단다. 고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돈을 조금이라도 더 보내려고 대부분 주말에도 아르바이트를 했단다. 그들이 하는 일이 주로 치매 환자들을 돌보는 무척 힘들고 고된 일이었어. 그들이 성심 성의껏 일하다 보니, 서독에서는 한국 출신 간호사들에 인정을 해주고  우리나라에 대해서 좋은 이미지도 만들어졌단다.

하지만 간혹 안 좋은 일도 있었단다. 의대 유학생들에게 사기 당하고 버림 받은 간호사들도 있었단다. 간호사들은 광부들과 연애들을 하는 경우도 종종 있는데, 결혼한 광부가 결혼한 사실을 속이고 연애를 하는 경우도 있었어. 사람들이 많다 보니 이런 저런 일도 생기는가 보구나. 그래도 변하지 않는 사실은 서독에 파견된 간호사들이나 광부들의 성실한 노력으로 국가 이미지도 높아졌고, 우리나라 경제 발전에도 도움이 되었다는 것. 그들의 이야기를 좀 더 하자면, 광부 중에 박갑동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김치를 잘 담궈서 사람들에게 인기가 좋았단다. 그 먼 타지에서 매일 독일 음식만 먹다 보니 한식 특히 김치가 얼마나 그리웠겠냐. 그런 김치를 잘 담그는 사람이 인기가 좋은 것은 당연했을 거야. 박갑동은 자신의 김치 솜씨로 짝사랑하던 간호사 서미향과 사귀게 되기도 했단다.

5권에서도 등장한 전태일에 관한 이야기도 또 나온단다. 그의 결말을 알고 있기에 너무 가슴 아팠단다. 전태일은 동료 재단사들과 함께 바보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근로기준법을 공부하여 노동운동을 계속했단다. 피복공장들의 불법 노동의 실태를 알리는데 애를 썼지만 정부 기관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으려고 했어. 5권에서 이야기했지만 오히려 그들은 블랙리스트에 올라가서 회사에서 잘리고 다른 곳에 취직도 어렵게 되었어. 그러다가 선거 기간이 다가오자 협력하는 모습을 보였고, 전태일과 바보회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정치인들의 말을 믿어보기로 했어. 하지만 선거가 끝나자마자 역시 안면몰수로 그들을 무시했단다.

전태일은 노동자들과 함께 몇 번의 시위를 했지만, 경찰의 강제 진압에 의해 제대로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단다. 결국 그는 최후의 방법을 선택했단다.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는 극단의 방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 그는 자신의 온몸에 휘발유를 뿌리고 분신 자살을 하고 말았단다. 그는 죽기 전에 근로 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마라. 라고 외치면서 하늘의 별이 되고 말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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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전태일은 두 손에 이마를 대고 차가운 방바닥에 엎드렸다.

주여, 약한 저에게 용기와 확신을 주소서. 제가 저의 죽음을 넘어설 수 있는 용기를 주시고, 저의 죽음이 절대 헛되지 않을 것이란 확신을 주소서.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돈 많고 권력 가진 자들의 서로 작당해서 속이고 또 속이고, 거기에 정부까지 한통속이 되어 있습니다. 그 벽은 높고 높으며, 두껍고 두껍습니다. 그 벽을 어찌해야 깰 수 있겠나이까. 그 벽을 깨고 모든 사람끼리 빈부도, 강약도, 귀천도 없는 세상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이 한 몸을 육탄으로 날리는 길뿐이라고 여겨지옵니다. 이 미천한 몸 하나 육탄으로 날아가 산산이 부서져서 천대받고 억눌려 사는 모든 노동자들이 눈 똑바로 뜨고 자기들을 보게 하고자 하옵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다함께 뭉쳐 일어나 그 벽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인간다운 세상을 이룩해 내는 데 한 톨 불씨이고자 하나이다. 이 결심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번뇌하였으나 이 길이 가장 옳은 길이라 여겨지옵니다. 주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심은 2천 년 동안 끝없이 부활하시기 위함이었나이다. 이 나약한 자 감히 주님의 가르침을 한 중 거름이 거고자 하오니 주여, 부축하여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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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천두만은 여전히 가발용 머리카락을 사러 산골 마을을 돌아다녔단다. 이제는 나복남도 함께 다녔어. 나복남은 스테인리스 공장에서 사고로 손가락이 잘리고 쫓겨나고 말았잖아. 그런데 가발용 머리카락을 구하는 것이 예전만 못했단다. 워낙 경쟁이 심하다 보니 웬만한 시골 구석까지 다 쓸어들 갔거든. 가발 공장도 이제는 인조 머리카락으로 많이 바뀌기도 했고 말이야. 그래도 천두만은 조금만 더 돈을 모으면 딸과 함께 가발 하청공장을 차릴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단다.

나복남은 천두만 아저씨와 시골 원정을 다녀온 후 집에 와서 피복공장에 다니는 동생 나윤자로부터 전태일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았단다. 전태일의 이야기는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놀라운 이야기뿐이었어. 자신은 근로기준법이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고, 전태일은 22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그런 노동 운동을 했다는 것이 놀라웠고, 자신은 충분히 먹고 살수 있는데 다른 노동자들을 위해 노동 운동을 한 것에 놀라웠고, 사업주의 불법 노동 실태를 알리기 위해 자신의 몸에 불을 질렀다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어.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 하면서 말이야. 자신은 자신의 억울한 일에 대해 복수할 생각만 했지, 그렇게 법으로 해결할 생각은 못했는데 말이야. 그래서 나복남은 그때부터 근로기준법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단다.

….

이 시절 월남, 그러니까 베트남에 많은 사람들이 파병 가기도 하고 일하러 갔다고 했잖아. 문태복이라는 사람은 도박에 빠져서 돈을 제대로 못 모으고 있다고 했지. 그는 잃은 돈을 도박에서 벌겠다는 마음으로 계속 도박을 했지만 그에게 늘어난 것은 빚뿐이었단다. 나중에 알고 보니 도박 일행 중에 사기를 치는 일당이 있었어. 그들은 돈을 벌 만큼 번 다음에 서로 다투는 쇼를 하고 그 벌로 추방되어 귀국을 하게 되었는데, 이 모든 것이 다 계획된 것이었다는 것이 그들이 떠난 후에 알려졌단다. 문태복만 빚이 너무 많아서 월급을 받는 족족 빚을 갚느라 한 푼도 남지 않았단다. 택시를 사겠다는 그의 꿈은 점점 멀어져만 갔지.

김명숙은 차장 일을 그만두고 가발공장에서 일했어. 어느덧 가출한 지 십 년이 거의 다 되었어. 이제 마음을 새로 잡고 미안한 마음을 갖고 고향집에 가 보았단다. 그런 그를 어머니는 여전히 따뜻한 마음으로 받아주셨어. 다른 형제들의 소식도 들을 수 있었단다. 큰 오빠 김선오는 검사가 되어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지만, 가족과 점점 멀리하려는 것을 알게 되었어. 큰 언니 김광자는 서독에서 간호사가 되었고 언니가 보내주는 돈으로 생활하고 있다고 했어. 남동생 김선태도 법대를 졸업하고 사법 고시 공부를 하고 있고, 여동생 김금숙은 사법대에 입학해서 공부를 하고 있고, 막내 김선진은 어느덧 고등학생이 되었어. 다른 식구들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자신만 초라하다고 생각했단다.

그런데 김선태는 고등고시에 또 떨어지고 말았단다. 떨어질 때마다 형 선오에게 무시를 받았어. 누나 김광자가 멀리 독일에서 그를 지지해주었고, 돌아온 김명숙도 그를 응원해 주어 다시 한번 도전하기로 했단다. 명숙도 선태와 함께 지내면서 뒷바라지를 해주고 자신은 양재(디자인) 학원을 다니면서 디자이너의 꿈을 키워갔어.

유일표와 친구들의 이야기를 해줄게. 그들도 어느덧 29살이 되었단다. 허진은 드디어 회사에 입사를 했고, 이상재는 신문기자가 되어 일을 했고 최주한도 입사하여 포항제철 관련된 을을 했어. 하지만 유일표는 여전히 아버지의 월북 이력 때문에 일반 회사에 취업을 할 수 없었어. 여전히 근로재건단에서 일하고 밤에는 아이들에게 야학을 가르치고 있었단다. 아이들이 사고를 치면 해결하는 일도 있어. 어느 날은 한 아이가 마약유통에 관여되어 경찰에 입건되었어. 재건단 단장인 이용진과 유일표가 경찰에 며칠씩 가서 선처를 구했지만 소용이 없었어. 유일표는 고민하다가 강숙자 누나 찬스를 썼단다. 강숙자는 유일표의 일이라면 늘 적극적으로 도와주었거든. 이번에는 강숙자는 남편 홍석주 판사에게 부탁을 했고, 그 아이는 바로 풀려날 수 있었단다.

이 시절 한강 넘어 강남이 처음 개발하기 시작을 했는데, 그 소식을 먼저 알게 된 정부 기관의 고위직의 부인들은 발 빠르게 움직였어. 강남의 땅들을 대거 사기 시작했단다. 한인곤의 동생이지만 오빠와 달리 돈 욕심이 많은 한정임도 그 대열에 끼어들었단다. 그때 그렇게 산 사람들의 땅은 그 이후 어마어마하게 큰 돈이 되어 강남 갑부가 되었고, 그 후세들은 여전히 그 돈의 영향력에 있을 거야.

박정희는 3선 개헌을 강행했단다. 원래 대통령은 2번까지만 가능했는데 그 법을 바꿔 세 번까지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3선 개헌이었어. 이 법에 대해 반대하는 분위기가 아주 강했단다. 지금이야 3선 개헌이겠지만, 또 대통령이 되면 4, 5선 계속 개헌할 수 있으니까 말이야. 이것은 나중에 이야기하겠지만, 더 이상 국민이 대통령을 뽑지 않고 죽을 때까지 대통령을 할 수 있는 유신 헌법이 만들어지는 최악의 상황이 된단다. 이 때 야당 대통령 후보로 젊은 김대중이 나서게 되는데 김대중의 기세가 만만치 않았단다. 그 때 박정희가 들고 나온 것이 지역 감정이었단다. 아주 노골적인 지역 감정 작전으로 경상도에서 몰표를 얻게 되는데 이것으로 박정희는 3선에 성공하였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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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156)

바로 그거요. 모든 신문들도 은근히 그런 냄새를 풍기고 있고, 세상 인심도 그리 돌아가고 있듯이 이번 선거는 분명 우리 경상도와 전라도의 싸움일 수밖에 없소. 여러분은 이 사실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유권자들에게 주지시켜야 해요. 우리끼리니까 터놓고 하는 얘긴데, 유권자 설득작전에서 그냥 막연하게 우리가 같은 경상도니까 경상도를 찍자 해서는 효과가 좋지 않아요. 특히 지식수준이 낮고 단순한 사람들일수록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이건 된장이고 간장이고 고추장이다 하는 식으로 꼭꼭 찍어서 쉽게 말해야 효과가 나요. 다시 말하면, 우리 경상도가 이렇게 잘살게 된 건 누구 덕이냐? 다 각하 덕이다. 왜냐하면 각하께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1, 2차 단행하시면서 덕을 제일 많이 입히신 데가 우리 경상도 아니냐. 부산, 대구를 양대 중심으로 해서 발전시키는 것은 더 말할 것 없고, 울산을 개발했고, 마산에 수출자유지역을 만들었고, 경부고속도로를 개통하지 않았느냐. 다 이런 혜택으로 딴 데보다 더 잘살게 된 것이니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폐일언하고 우리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똘똘 뭉쳐 또다시 각하를 찍어 대통령으로 받들어야 한다. 만약에 우리가 힘을 합치지 않아 불행한 사태가 벌어지면 어떻게 되느냐. 지금까지 누렸던 그 모든 혜택이 다 전라도땅으로 가버린다. 여러분, 이런 사실들을 명백하게 주지시켜야 한다 그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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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천두만 아저씨는 여전히 나복남에 대한 자책감을 가지고 있어. 나복남의 아버지 일도 그렇고 나복남의 취직자리도 자신이 알아봐 준 것이고 그곳에서 사고로 손가락이 잘려났으니까 말이야. 천두만은 고민하다가 서동철을 찾아가 나복남의 취직 자리를 부탁하려고 했어. 서동철은 나복남의 사연을 듣더니 그 억울함에 분개를 했어. 당장에 스테인리스 회사의 사장을 찾아가서 주먹으로 해결했단다. 서동철은 그 자리에서 거금의 보상금을 뜯어내서 나복남에게 주었단다. 법이 못한 일을 서동철이 한 방에 해결해 준 거야. 서동철이 한 행위가 비록 정당하지는 못했지만, 속은 다 시원하더구나. 어차피 당시 법이라는 것이 노동자의 편이 아니라 자본가의 편이니 법으로는 절대 해결할 수 없었으니 말이야. 나복남은 서동철의 도움으로 받은 보상금으로 가게를 차릴 수 있게 되었어.

이규백은 여전히 처가살이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어. 아내의 쌀쌀맞음과 처가 식구들의 멸시는 참을 수 없었지. 사고를 치고 다니는 처남이 오히려 고맙게 생각했단다. 처남이 사고를 치고 다니면 이규백이 처리를 해주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처가 식구들에게 보여줄 수 있으니 말이야.

한인곤을 야당 국회의원으로 쓴소리를 계속 하다가 결국 어디론가 끌려가 며칠 고문을 당하고 약점이 잡혀 그들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게 되었어.

이상재는 기자가 되었다고 했잖아. 사회의 어두운 면에 대한 기사를 많이 썼어. 서울 판자촌을 개발하면서 그곳에 살던 사람들은 성남으로 내쫓게 되는데 성남으로 내쫓긴 사람들의 생계를 위해 공장을 300개 짓기로 약속을 했단다. 하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어. 그렇다 보니 성남으로 쫓겨난 사람들은 생계 위협을 느꼈어. 당시만 해도 교통이 안 좋아서 서울로 출퇴근하는 것은 불가능했어. 성남 지역을 취재를 간 이상재는 충격을 받았어. 그곳은 그야말로 생지옥이었어. 돈을 벌기 위해 십대 소녀들이 몸을 팔기도 했고, 굶주리다 못해 아기를 삶아 먹었다는 소문도 있었어. 결국 폭동이 일어났지만 정부를 방관했어.

….

서동철은 옛 조폭 두목이 십 년 만에 감옥에서 출소를 했어. 그러면서 조폭간의 세력 다툼이 있었어. 서동철파가 이기긴 했지만 서동철도 칼에 등을 찔려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단다. 면회 간 유일민서동철이 다행히 큰 부상이 아니었어. 그 이유는 유일민에 예전에 방탄조끼를 선물한 적이 있는데, 서동철의 유일민의 말을 듣고 그 방탄조끼를 입었기 때문이란다. 조폭 서동철과 유일민. 서로 다른 영역에서 삶을 그려가지만 그들은 진정한 친구인 것 같구나.

….

6권까지의 이야기는 대략 이 정도란다. 6권으로 4권부터 이어진 제2부 유형시대가 끝이 났단다. 마지막 3부 불신시대는 7권부터 10권까지의 이야기인데, 이것도 조만간 이야기해줄게. 어느덧 4월이구나. 몇 주 전 탄핵도 인용되어 이제 진짜 봄이 찾아왔구나. 이 봄도 금방 지나가겠지만, 함께 이 봄을 즐기자꾸나.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비켜요, 난 독일사람이에요!”

책의 끝 문장: 수상하잖아?



"응, 나도 이번 사건으로 모든 걸 알게 된 건데, 우리 노동자들이 공장에서 일을 하면서 사람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나라에서 법을 만들었는데, 거기에 근로조건이라는 게 있어. 하루에 일은 여덟 시간만 한다. 야근을 시키면 야근 수당을 따로 지급해야 한다, 일요일과 공휴일은 쉬어야 한다. 공장 안의 작업환경은 건강을 해치게 해서는 안 된다, 하는 식으로 정해놓은 거야. 그밖에도 노동자들을 위한 법이 많은데, 그 법들을 다 합해놓은 게 근로기준법이라는 거야. 그런데 사장들은 그 법을 하나도 안 지키잖아. 그래서 그 사람은 모든 걸 법이 정한 대로 하게 하려고 우리 노동자들이 힘을 모아 들고일어나게 하는 일을 시작했어. 그걸 노동운동이라고 해." - P57

도대체 어떻게 된 사람일까…… 배운 것이 많은가…… 아니지, 스물두 살에 벌써 재단사 노릇을 했다면 아무리 짧아도 5년은 봉제공장밥을 먹었을 것 아닌가. 그럼 아무리 많이 배웠어야 중학교밖에 더 나왔겠는가. 그렇다면 많이 배웠다고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어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스텐공장은 일하는 모든 조건이 봉제공장에 비해 나빴으면 나빴지 좋을 것이 없었다. 그런데 자신은 막소주나 마시며 불평을 했을 뿐이지 그 사람 같은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다른 공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 어린 사람이 남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다니…… 그게 똑똑한 것인가…… 어리석은 것인가…… 이 야박하고 약아빠진 세상에서 그런 사람이 있다니…… - P60

월출산은 바위산의 아름다움이 더없이 빼어난 산이었다. 월출산의 신비스러움과 아름다움은 두 가지 사실이 합해져 이루어지고 있었다. 시방 그 어디를 둘러보아도 산줄기라고는 없이 질펀한 들녘일 뿐인데 어찌 그렇게 거대한 바위산이 솟을 수 있는 것인지. 그리고 바위산이 되 무작정 커서 위압적인 것이 아니라 수많은 작은 봉우리들이 모여 산을 이루고, 그 산들은 겹겹이 큰 산을 이루어내며 아기자기하고 오밀조밀하게 조화되어 있었다. 넓은 들판 가운데 솟아 더욱 우람해 보이고, 그러면서 수많은 봉우리들이 어우러져 섬세한 아름다움을 자아내는 월출산은 바위산의 극치를 이루고 있었다. 그 겹겹의 봉우리에 안개가 감겨 있을 때는 범접하기 어렵게 신령스럽기 그지없었고, 눈이 하얗게 내려 있으면 신선의 세상이 저기가 아닌가 싶게 신비스러움은 절정을 이루었다. - P95

그 길을 따라 사나이의 젊은 꿈도 접고, 야속한 운명에 절망하며 절룩절룩 걸어가고 있는 한 남자의 외롭고 슬픈 모습이 영화의 라스트 씬처럼 떠올라 있었다. 그것은 지금의 영상이 아니라 그 시를 외웠던 중학생 때의 영상이었다. 그 영상은 변함이 없는데 왜 시는 떠오르지 않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야 간간하게 말하면 세월 따라 잊혀진 것이었다. 그런데 최주한은 야릇한 상실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을 마치 누구한테 빼앗겨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느낌의 배면에는, 그럼 나는 서울에서 얻은 것이 무엇인가, 하는 회의가 도사리고 있었다. 결국 그것을 빼앗아간 것은 서울이었다. 중학생 시절에 비해 서울에서 보낸 세월은 긴 세월이었다. 그 세월은 중학생인 어린 시절 한때 외웠던 시를 잊혀지게 할만도 했다. 그런데도 엉뚱하게 상실감이 드는 것은 자신이 처한 궁색한 처지 때문일 수도 있었다. - P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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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지조론>의 서두는 이렇게 시작된다.

지조란 것은 순일(純一)한 정신을 지키기 위한 불타는 신념이요, 눈물겨운 정성이며, 냉철한 확집이요. 고귀한 투쟁이기까지 하다. 지조가 교양인의 위의(威儀)를 위하여 얼마나 값지고 그것이 국민의 교화에 미치는 힘이 얼마나 크며 따라서 지조를 지키기 위한 괴로움이 얼마나 가혹한가를 헤아리는 사람들은 한나라의 지도자를 평가하는 기준으로써 먼저 그 지조의 강도를 살피려 한다. 지조가 없는 지도자는 믿음 수 없고 믿을 수 없는 지도자는 따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자기의 영리만을 위하여 그 동지와 지지자와 추종자를 일조(一朝)에 함정에 빠뜨리고 달아나는 지조 없는 지도자의 무절제와 배신 앞에 우리는 얼마나 많이 실망하였는가.”

 

(63)

최승호 교수는 <청록집>에 실린 조지훈의 시를 분석한다.

조지훈은 우주를 보편생명의 흐름으로 보고 있다. 이 보편생명의 흐름 속에서 진선미를 구하고, 거기서 시정신을 건져 올리려 하고 있다. 또한 인간 자신을 보편생명 속에 잘 조화되어 있는 개별생명으로 보고 있다. 보편생명의 일부로서의 개별생명은 절대적으로 선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절대적으로 선한 개별생명과 보편생명 사이의 교감으로 미가 발생한다는 것에 대한 믿음이 그의 서정시학의 정수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파시즘이 이 나라를 점령한 시점에서는 하나의 방법적 대응전략일 수가 있었다. 이는 마치 2차대전 전후에 생명사상을 가지고 나와서 그것으로써 파시즘과 대결하려고 했던 중국의 동방미(東方美)와 유사한 모습을 보여준다.

파시즘이 지닌 가공할 만한 파괴력에 맞서서, 인간이 자신을 지키는 유일한 길은 모든 생명의 고향인 자연으로 돌아가는 길밖에 없다는 인식에 이른 것이다. 바로 이러한 지점에서 조지훈의 초기시학이 출발하는 것이다.”

 

(74)

조지훈은 반대편이었다. 일제말기 수많은 문인이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귀축영미를 저주할 때, 그는 침묵하거나 순수시를 통해 조선의 전통과 불교적 선()에 심취하였다. 그리고 해방공간에서 너도나도 인민과 조국, 계급을 주창할 때도 자신의 패턴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111)

다시 시란 무엇인가. 지난 번에는 자연과 인생을 통해서 보는 시전통의 생명적 본질에 대해서 생각한 나머지 나는 시를 하나의 도()라고 보고 인간의식과 우주의식의 완전일치의 체험이라고 말하였다.

다시 말하면 이러한 시의 생명을 체험하는 자로서 시인은 자연의 사랑을 인생의 괴로움에 통하게 하고 인생의 괴로움을 자연의 사랑에 통하게 하는 창조적 계기를 찾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러면 시인은 무엇으로 시를 창조하는 것인가. 창조는 형수(亨受)와 구현의 합치된 개념이다.

바꿔 말하면 내용과 형식이 융합된 상태이다. 그러면 무엇이 시인의 안에서 시를 형수하고 시를 구현하는 것인가. 나는 먼저 보람 있는 인간이 되기 위하여 저 자신의 사상을 가질 것과 시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저 자신의 사상을 재편성해야 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시를 위한 사상의 재편성이란 말은 다시 말하면 사상의 감성화라는 말임을 미리 말해 둔다.

 

(127)

고루거각이 어찌 나의 멋이 될 수 있겠는가. 다만 멋 아닌 멋으로 멋을 삼아 법당을 돌고 싶으면 법당을 돌고, 염주를 세고 싶으면 염주를 세고, ()을 읽고 싶으면 경을 읽으며, 때로 눈을 들어 먼 신을 바라고 때로는 고개 숙여 짐짓 무엇을 생각나니 나의 선()은 곧 멋밖에 아무것도 없는가 보다. 오늘을 모르는 세상에 내일을 생각함은 어리석은 일일러라. 내일을 모른다 하여 오늘에 집착함은 더욱 어리석은 일일러라.

다만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며 나를 사랑하지 않으며 남을 도우려고도 않아 들녘에 피었다 사라지는 이름 모를 꽃과 같고자 하노라.

 

(135)

1950년대 고래대학교 국문과 제자들 사이에는 지다(知多)’ 선생으로 통하셨다는 이야기를 제자분들로부터 들었다. 워낙 박학다식이라서 지어 올린 별호였다고 한다. 그때도 아버지께서는 빙긋이 웃으시면서 그 위에다 내 성()을 올려놔 봐. ‘조지다가 되는군

좌중이 박장대소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168)

조지훈은 변절행위를 매섭게 질타한다.

변절이란 무엇인가. 절개를 바꾸는 것. 곧 자기가 심신으로 이미 신념하고 표방했던 자리에서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철이 들어서 세워놓은 주체의 자세를 뒤집은 것은 모두 다 넓은 의미의 변절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욕하는 변절은 개과천선의 변절이 아니고 좋고 바른 데서 나쁜 방향으로 바꾸는 변절을 변절이라 한다. 일제 때 경찰에 관계하다 독립운동으로 바꾼 이가 있거니와 그런 분을 변절이라 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독립운동을 하다가 친일파를 전향한 이는 변절자로 욕하였다.”

 

(189)

조지훈은 4월혁명의 불쏘시개 역할을 하고, 혁명 대열에 직접 참여하고, 혁명 후에는 이의 성공을 위해 다른 지식인들이 하기 어려운 발언을 쏟아냈다. 이 논설의 마지막 부분이다.

조용히 힘을 기르라. 먼저 황폐한 학원을 재건하고 출발전야의 제2공화국이 제군의 피를 헛되이 하지 못하도록 깨끗하고 거창한 압력을 주라. 반동세력의 대두를 막기 위하여 그들을 국민 앞에 고발하고 주권자의 위신을 회복하기 위하여 국민을 계몽하는 선두에 나서라. 무엇보다 먼저 제군들이 그것을 분별하는 눈을 마련해야 하고, 제군들이 먼저 그것을 실천해야 한다.

우리가 바라는 바는 아니지만, 제군들의 고귀한 피가 또 한 번 뿌려져야 할 때야 올런지도 모른다는 의구는 아직 해소되지 않았다. 그런 불행이 오지 않도록 막기 위해서는 제군의 발언권이 증대되어야 하고, 그 발언권은 제군들이 자중하는 위의와 단결과 정화 속에만 얻어질 수 있는 것이라고 우리는 믿는다.”

 

(191)

조지훈은 이 시기 누구 못지않은 영향력 있는 논객이었다.

혁명정신은 어디로 갔는가? 참으로 혁명정신은 지하에서 통곡하고 병원의 베드 위에서 저주하고, 학원의 캠퍼스 구석구석에서 침통한 우수와 뉘우침의 안개 속에 싸여 있다. 오직 순정과 의분으로 혁명에 임했던 학생들이 독재정권을 무너뜨림으로써 자족하고 물러설 때 식자들은 그것을 찬양하고, 그런 자세가 어쩌면 새로운 혁명의 전형으로서의 영예를 성취할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를 걸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기대는 마침내 바로 그대로 맹점이 되고 말았다. 혁명정신은 과연 어디로 갔는가?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되놈이 먹는다는 속담대로 피는 학생들이 흘리고 공은 정치가들이 따로, 민중의 신임은 혁명대변 세력이 받고, 칼자루는 반혁명 세력이 쥐었다는 이 어처구니없는 현실은 바로 인세무상(人世無常)의 그것을 다시 한번 깨우쳐 준다.”

 

(214-215)

조지훈이 5.16 초기에 군사쿠데타를 수용하고 재건국민운동의 요강을 작성하는 등의 활동에도 불구하고, 그의 인재론은 변함이 없었다. ‘요강 <혁명은 이 나라를 누구에게 맡겨야 하나?>에서 다섯 가지 인재의 자격론을 피력한다.

첫째, 지조가 굳고 신념이 있는 사람을 골라야 한다. 사상적으로나 행동적으로 변화의 재주가 넘치는 사람은 믿을 수가 없다.

둘째, 식견이 있고 경륜이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나라와 겨레를 위한 문제의 한 부분의 연구도 없는 사람과 자기의 포부를 실천할 경륜이 없는 사람은 백해무익이다.

셋째, 청렴결백하고 공명정대한 사람을 뽑아야 한다. 부패가 오늘의 위기를 조성한 것을 생각하면 그까짓 하찮은 권모술수를 가지고 정치적 역량인 듯이 자타가 공인하는 그런 부류는 소용이 없는 것이다.

넷째, 정성스럽고 삼가면서도 과단성이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정성이 모자라면 세밀하지 못하고 허술하다. 판단성이 없으면 잘라야 할 것을 자르지 못하고 시작해야 할 것을 때를 놓치고 만다. 망설이다가 망치지 않으려면 박력이 있어야 한다.

다섯째, 제 먹을 것을 가진 사람, 가난을 알면서도 가난에 포원이 지지 않은 사람을 뽑아야 한다. 무식하고 돈 없는 자들이 국회의원이 되자니 무슨 짓이든 해서 되어 가지고는 그 벌충으로 들인 밑천을 뽑아내자니 나쁜 짓을 하지 않고 무슨 수가 있는가. 가난을 모르면 백성의 마음을 모르기 쉽다. 그러나 너무 가난에 포원이 된 사람은 돈과 권력의 유혹에 약할 뿐 아니라 생각이 편벽된다.”

 

(239)

이 길이든 저 길이든, 우리가 찾는 길은 우리의 역사적 현실에 가장 적합한 길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 길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의 풍토에 맞추어 우리 손으로 닦은 길이 최선의 길이라는 것이 대원칙이지만, 이와 같은 길은 기성 이데올로기의 강력한 힘이 혐오하고 저해하고 봉쇄하고 파괴하려는 길이다. 그러나 우리는 조상이 닦아 놓은 길이든 외국 사람이 닦아 놓은 길이든 간에 그것을 오늘 우리가 가야 할 길로 선택할 때는 대폭으로 수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255)

<20세기의 한국>을 조감한다는 것은 곧 우리 근대문화의 거의 전 과정을 부관(俯觀)하는 일이다.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희랍 델피의 신전에 새겨진 경구로서 소크라테스를 통하여 알려진 교훈이거니와 오늘의 한국-우리들의 민족적 자아의 모습을 찾는데 일조가 될까하여 이 책을 엮었다. 제 눈으로 제 눈을 볼 수는 없다. 역사의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볼 수 있을 따름이다.

이 거울에 비친 20세기 세계사상의 한국의 모습이 과연 얼마나 정확한 지 우리는 아직 모른다. 자아는 각자가 체득할 수밖에 없으니 제 모습을 찾는 일깨우는 것만으로 이 책의 사명은 다한다고 할 수 있다.

 

(260)

이란 말이 미적인 것의 한 특수한 형상으로서 한국 민족의 예술적 생활의 표현 목표와 이념 또는 미가치의 한 표준을 의미하고 있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은 오랜 세월은 두고 우리 민족의 미적 체험속에 체득되고 제작과 행위에서 수련되어 왔기 때문에 에 대한 취미성과 감수성은 우리 민족의 민중생활 일반에 보편화되어 있다.

그러나 이렇게 이라는 특수한 미에 대한 감수성과 취미가 한국적 미의식의 중요한 특성을 이루고 있으면서도 미적개념으로서의 의 본질 내용은 지극히 불분명하고 더구나 그것의 한국적 미의식의 구조상의 위치와 관계 내지 의미에 대한 이론적 반성과 고구(考究)는 일찍이 있어 본 적이 없다. 그러므로 한국적 미의식의 구조를 밝힘으로써 의 위치를 찾고, 아울러 미적 범주로서 의 내용과 나아가서는 생활이념으로서의 멋의 지향을 밝혀보려는 것이 본고가 의도하는 바 주체이다.

 

(296-297)

절정

 

나는 어느새 천길 낭떠러지에 서 있었다. 이 벼랑 끝에 구름 속에 또 그리고 하늘가에

이름 모를 꽃 한 송이는 누가 피어 두었나

흐르는 물결이 바위에 부딪칠 때 튀어 오르는 물방울처럼 이내 공중에서 사라져 버리고 말 그런 꽃잎이 아니었다.

 

몇만 년을 울고 새운 별빛이기에 여기 한 송이 꽃으로 피단 말가

죄 지은 사람의 가슴에 솟아오르는 샘물이 눈가에 어리었다간 그만 불붙는 심장으로 염통 속으로 스며들어 작은 그늘을 이루듯이 이 작은 꽃잎에 이렇게도 크낙한 그늘이 있을 줄은 몰랐다.

 

한 점 그늘에 온 우주가 덮인다 잠자는 우주가 나의 한 방울 핏속에 안긴다 바람도 없는 곳에 꽃잎은 바람을 일으킨다 바람을 부르는 것은 날 오라 손짓하는 것 아 여기 먼 곳에서

지극히 가까운 곳에서 보이지 않는 꽃나무 가지에 심장이 찔린다.

무슨 야수의 체취와도 같이 전율할 향기가 옮겨 온다

 

나는 슬기로운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기에 한 송이 꽃에 영원을 찾는다. 나는 또 철모르는 어린애도 아니었다 영원한 환상을 위하여 절정의 꽃잎에 입맞추고 길이 잠들어버릴 자유를 포기한다

 

다시 산길을 내려온다 조약돌은 모두 태양을 호흡하기 위하여 비수처럼 빛나는데 내가 산길을 오를 때 쉬어가던 주막에는 옛 주인이 그대로 살고 있었다. 이마에 주름살이 몇 개 더 늘었을 뿐이었다. 울타리에 복사꽃만 구름같이 피어 있었다 청댓잎 잎새마다 새로운 피가 돌아 산새는 그저 울고만 있었다.

 

문득 한 마리 흰 나비! 나비! 나비! 나를 잡지 말아다오. 나의 인생은 나비 날개의 가루처럼 가루와 함께 절명(絶命)하기에 - 아 눈물에 젖은 한 마리 흰나비는 무엇이냐 절정의 꽃잎을 가슴에 물들이고 사()된 마음이 없이 죄 지은 참회에 내가 고요히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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