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박열은 내가 내민 쪽지를 받아들고 중얼중얼 읽었다.

첫째, 동지로서 함께 살 것.

둘째, 내가 여성이라는 관념을 반드시 제거할 것.

셋째, 둘 중 하나가 사상적으로 타락하여 권력자와 악수하는 일이 생길 경우에는 즉시 공동생활을 그만둘 것.


(229)
요구사항은 모두 네 가지였다.

첫째, 공판정에서는 일절 죄인 대우를 하지 않아야 하며 피고라고 부르지도 말 것

둘째, 공판정에서 조선 예복 착용을 허락할 것

셋째, 자리도 재판장과 동일한 좌석을 마련할 것

넷째, 공판 전에 자기의 선언문 낭독을 허락할 것.

다섯째, 만일 이상의 요구에 응하지 않을 때에는 입을 닫고 일절 신문에 응하지 않을 것임을 결심한다.


(233)

가네코도 당당한 응답으로 재판정을 흔들었다.

피고는 국가에 해가 되는 사상을 가지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어 보이는데 어떠한가?”

방금 그 질문은 상당히 모욕적이다. 내가 무적자로 태어나 어려서 친척들로부터 학대를 받았다는 것은 내가 국가와 대척점에 서는 이유가 될 수 없다. 오히려 학대한 사람들에 대해서 나는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만일 그들이 나를 편안하게 해주었다면 나도 고분고분하게 순응하는 머저리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국가와 사회에 어째서 대적하는가? 그럴 만한 계기가 있었는가?”

국가와 개인은 어떤 계기가 있지 않아도 대척점에 있을 수밖에 없다. 국가는 힘으로 개인을 억누르고 자기들이 만들어놓은 틀에 맞춰서 순응하도록 하기 때문에 개인들은 자신들의 자유를 억압받을 수밖에 없다.”


(234)

박열은 미리 약속한대로 자기 선언문을 낭독했다.

국가는 개인의 신체와 생명과 자유를 끝없이 침해하면서 자기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강도들 중에 대강도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국가의 편에 선 재판관이 공정한 판결을 할 리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다만 내가 이 법정에 선 것은 재판을 받자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의 입장을 정확하게 선언하기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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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독도와 울릉도는 조선의 것이란 말이다!”

나는 독도와 울릉도가 나의 것이라 말하지 않았다. 조선의 것이라 말했다. 우리를 끌고 왔던 어부가 몽둥이로 나의 등짝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진실 아닌 것을 진실이라 꾸미려면 언제나 폭력이 필요하다는 걸 그들은 여실히 보여주었다. 나는 한 차례 더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의 섬이며, 그 섬의 바다는 조선의 바다라고 소리를 질렀다. 일본인의 매는 가리지 않고 사방에서 쏟아졌다.


(103)

갑작스럽게 나는 조선의 입장을 대변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내가 원하던 바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들 앞에서 기죽고 싶지는 않았다. 조선에 대한 원망이 깊었다. 그럼에도 나는 결국 조선인이었다. 무엇보다 스스로 지키지 못하면 모든 걸 빼앗긴다는 것도 알았다. 우리에게 힘이 있었다면 전국을 뒤져 가져온 산삼을 그렇게 헐값에 넘기진 않았을 터였다. 초량 왜관에 머무는 일본인들에 대한 나의 감정은 날카로웠다. 그들에 대한 선입견에 휩싸여 엉덩이를 의자에 붙이고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194)

조선은 몇몇의 나라가 아니라 다수 백성의 나라여야 했다. 나라는 내게 목숨까지 버리라 말하면서도 사방이 막힌 이 순간에는 나를 더욱 깊은 나락으로 밀어 넣었다. 눈물마저 새카맣게 타버려 흐를 줄 몰랐다. 나는 버려졌다. 그 점은 억울하지 않았다. 나라가 내게 기대한 일이 없으며, 나 역시 나라에게 기대할 일이 없으니 억울할 것도 없었다. 내가 마음이 아픈 건 살아남아도 우리가 의지할 곳이 없다는 걸 확인했다는 사실이었다.


(285)

우리가 가는 건 우리의 섬이고 우리의 땅임을 분명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일본은 울릉도나 독도를 소유했던 번이 없었습니다. 오래전부터 우리의 울진에 속해 있었지만, 저들은 근래에 와서 지들의 번에 속해 있다고 억지 주장을 하고 있지요. 게다가 독도든, 울릉도든 우리와 달리 일본 백성들이 거주했던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일본의 지난 쇼군 시절에 요나고 사람들이 울릉도에 와서 고기를 잡을 수 있도록 도해 허가를 해준 일을 두고 자신들의 섬이라 우기고 있는 겁니다. 도해 허가를 내주었다는 사실도 웃긴 일이지만, 그런 사실을 파악했으면 강하게 항의를 했어야 하는데, 우리 조정에서는 그리 못했지요.”


(335)

*1693 9월 초, 안용복과 박어둔은 돗토리 번에서 나가사키로 후송되었다고 한다. 당시 안용복과 박어둔을 납치한 내용은 오야 집안의 문서인 <죽도 도해 유래기 발서공, 이하 발서공>과 한자로는 백기로 적는 호키주의 일을 기록한 <이본 백기지>에도 실려 있다. <발서공>에는 안용복이 에도에 갔고, 무엇인지는 밝히지 않은 채, 에도 막부가 안용복에 대한 조사를 끝낸 뒤 안용복에게 무엇인가를 줘서 조선으로 귀국시켰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는 쇼군으로부터 받은 서계로 추측된다. 두 사람이 나가사키로 후송되었을 때 쓰시마 번 사람들이 두 사람을 맞이했는데, 이때 선물과 서계를 모두 강탈당했으며 이를 쓰시마 번에서 보관하고 있을 거라는 가정 하에 허구적 상상력을 가미해 재해석했다. 하지만 이 역시 어디까지나 사실에 기초하고 있음을 밝힌다.


(369)

안용복은 영웅호걸이다. 미천한 일개 군졸로서 만 번 죽음을 무릅쓰고 국가를 위하여 강적과 겨루어 간사한 마음을 꺾어버리고, 여러 대를 끌어온 분쟁을 그치게 했으며, 한 고을의 토지를 회복했으니, 부개자와 진탕에 비하여 그 일이 더욱 어려운 것이니, 영특한 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상을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전에는 형벌을 내리고 뒤에는 귀양을 보내어 꺾어버리기에 주저하지 않았으니, 참으로 애통한 일이다. 울르도와 독도가 비록 척박하다고 하나, 쓰시마도 또한 한 조각의 농토가 없는 곳으로서 왜인의 소굴이 되어 역대로 내려오면서 우환거리가 되고 있는데, 울릉도와 독도를 한 번 빼앗긴다면 이는 또 하나의 쓰시마가 불어나게 되는 것이니, 앞으로 오는 앙화를 어찌 말하겠는가? 안용복은 한 세대의 공적을 세운 것뿐이 아니었다. 고금에 장순왕의 화원노졸(花園老卒)을 호걸이라고 칭송하나, 그가 이룩한 일은 대상 거부에 지나지 않았으며, 국가의 큰 계책에는 도움이 없었던 것이다. 안용복과 같은 자는 국가의 위급한 때를 당하여 항오에서 발탁하여 장수급으로 등용하고 그 뜻을 행하게 했다면, 그 이룩한 바가 어찌 이에 그쳤겠는가? – 이익의 <성호사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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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사는 내내 즐거움을 누리며 웃도록 하십시오.

삶이란 그저 버텨내라고 있는 게 아니라,

즐기라고 있는 것입니다.

- 고든 B. 힝클리


(104)

일단 미술에 대해서만 말해보겠습니다. 서양미술사는 그리스 미술을 재해석해온 역사라고 해도 지나친 표현이 아닙니다. 문명의 한 단계를 거칠 때마다 서양의 미술가들은 그리스 미술을 새롭게 해석해나갔거든요. 예를 들어 15~16세기 유럽에는 르네상스라는 미술 흐름이 있었지요. 르네상스는 프랑스어로 부활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부활시킨다는 걸까요? 바로 고전의 부활을 뜻하는데 그 고전이 바로 그리스 미술입니다.


(199)

앞서 말했지만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끊임없는 전쟁이라는 치열한 현실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리스 남성의 육체는 나라가 쓸 수 있는 유일한 무기였어요. 그야말로 체력은 국력이었던 거죠. 그리스 사회가 남성 육체를 찬양했던 데는 이런 배경이 있었던 겁니다. 아테네를 비롯해 몇몇 도시에는 미남 선발대회를 열기도 했고, 미술도 튼튼하고 강한 육체를 미화하고 찬양하는 데 초점을 맞췄어요.


(242)

그리스인들은 민주주의가 유지하려면 사회에서 특별히 인기 있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예를 들어 아테네에는 도편추방제라는 제도가 있었지요. 이 법에 따라 아테네 시민들은 가장 인기 있는 사람’, 즉 독재자가 될 위험성이 가장 높은 사람의 이름을 도자기 파편에 적어 냈습니다. 투표 결과 6000표 이상 받은 사람은 아테네 밖으로 추방당했어요. 그만큼 아테네인들은 독재자의 출현을 경계했습니다. 그리스인들이 살아 있는 사람의 초상을 새기지 않았던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268)

그런데 공교롭게도 아테네 사람들은 적인 페르시아의 영향을 크게 받았던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가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하면서 관계를 복구한 것처럼 아테네도 페르시아와 전쟁을 치르고 나서 외교 관계를 정상화시키는데, 그 과정에서 많은 예술가가 교류하게 됩니다. 그리스 예술가들은 페르시아 문화에 놀라워하고 영감을 얻었겠지요. 그리고 이전의 아테나 신전보다 훨씬 큰 신전을 짓겠다는 건축적 야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 야망이 바로 페르시아와의 교류에서 자극받아 생겼을 겁니다.


(273)

파르테논의 모든 곳에 휴머니즘이 녹아 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하고는 다르게, 이 건물에는 사실 직선이 없어요. 우리 눈은 둥글기 때문에 직선은 우리 눈에 들어오면 곡선이 됩니다. 우리 눈에 직선으로 보이려면 실제로는 어느 정도는 곡선이어야 한다는 말이죠. 파르테논 신전은 그런 착시까지 고려했습니다.

심지어는 바닥도 휘어 있습니다. 파르테논 신전 한쪽 끝에 서서 보면 맞은편 바닥이 안 보입니다. 바닥이 중간 부분에서 부풀어 올라갔다가 내려가기 때문이지요. 직선을 위한 곡선인 겁니다. 가장 높은 부분과 가장 낮은 부분을 비교해보면 바닥 표면의 높이 차이가 10센티미터 이상 납니다. 신전의 긴 축인 남북 면으로 보면 최대 12.3센티미터까지 올라갔다 내려와요. 동서 축도 중심에 최대 6센티미터 가까이 부풀어 올라 있습니다. 인간에 대한, 인간의 시야에 대한 그리스인의 이해도는 정말 놀랍다고 할 수 있죠.


(350)

로마가 성장할 때 마치 부모처럼 나란히 로마에 큰 영향을 준 두 세력이 있었습니다. 앞서 살펴본 그리스, 그리고 이제부터 설명드릴 에트루리아입니다. 로마 입장에서 보면 그리스는 외래 문화인 반면 에트루리아는 이탈리아 토착 문화에 가까워요. 로마는 관용과 다양성의 강자답게 두 세력으로부터 각각의 장점을 취해 자기 것으로 만들었죠.


(353)

로마인의 능력이란 이런 게 아닐까요?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그것의 가능성을 최대치로 끌어올리는 능력 말입니다. 이는 대단한 능력입니다. 모르면 배우면 되고, 배운 것을 더 잘 응용해 사용하면 되죠. 로마인은 이 점을 제대로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479)

콜로세움의 기둥 장식을 설명할 때 말씀드렸던 그리스 기둥의 형식도 비트루비우스가 정리해놓은 것입니다. 그는 세 가지 기둥 양식에 단순하고 땅딸막한 토스카나식과 복잡하고 늘씬한 콤포지트식까지 추가해 총 다섯 가지의 기둥을 로마 건축의 기본 요소로 정리합니다. 이 다섯 가지의 기둥은 각각 직경과 기둥 높이의 비례도 정해져 있는데, 일반적으로 기둥머리가 화려해질수록 비례가 길어집니다. ‘도리아식은 남성적이고 이오니아식은 여성적이라는 설명도 비트루비우스가 처음 한 것입니다.


(530)

최소한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476년 이후 서로마제국을 차지했던 게르만 용병대장은 결국 동로마제국 황제의 신하가 되었습니다. 일개 영주로 전락한 겁니다. 이후 서로마 옛 영토에서는 게르만족을 비롯해 수많은 야만족이 난립하며 조그만 영지를 이루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서로마 지역에 살고 있던 사람들도 명목상으로나마 자신이 로마제국에 살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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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0-10-20 2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웃다 보면 즐거워지기도 하더라고요. ^^

bookholic 2020-10-21 00:29   좋아요 0 | URL
미소 가득한, 멋진 시월의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20)

곤충의 성공은 너무나 위대해서, 문자 그대로 지구를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의 알량한 자존심이 우리로 하여금 지구와 도시와 기술과 문명을 지배한다고 착각하게 하지만, 우리는 지구의 상태를 개선하기보다는 파괴하는 데 골몰하고 있는 듯하다. 인류는 지구상에서 패악질이나 일삼는 악종 정도로 간주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만약 인류가 멸종한다면, 대부분 종들의 생활 여건이 대폭 개선되러 것이다(머릿니, 몸니, 사면발이와 같은 몇 가지 종만이 예외다). 이와 반대로, 지구에서 모든 곤충이 멸종한다면 어떻게 될까? 하버드 대학교의 유명한 곤충학자 에드워드 O. 윌슨에 의하면, 그럴 경우 육상 환경이 붕괴되어 혼돈 속으로 빠져들 것이라고 한다. 인류의 문명은 고작해야 최근 수천 년 동안 형성된 것이지만, 곤충은 무려 4억 년 동안 육상 생태환경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며 성공적으로 공진화해 왔다. 곤충은 생태계의 필수 구성원으로서, 쓰레기를 청소하고 영양소를 순환시키고 토양을 비옥하게 하며, 사실상 모든 유기물을 섭취 활용한다. 다리가 여섯 개 달린 퇴적물 섭식자는 죽은 식물, 죽은 동물, 동물의 배설물을 소비하여 생분해 속도를 크게 상승시킨다. 곤충은 포식자인 동시에 포식기생자로서, 다른 곤충들(초식곤충, 청소부곤충)을 먹어 개체수를 감소시키기도 한다. 곤충의 가장 강력한 천적은 역시 곤충이어서, 대부분의 곤충집단은 다른 곤충집단에게 잡아먹힘으로써 개체수가 조절된다.


(28)

이 같은 조작적 정의(operational definition)에 대해 고생물학자인 데이빗 라우프는 언젠가 이렇게 비꼰 바 있다. “하나의 종이 탄생하려면, 영향력 있는 분류학자가 그렇다고 우기면 된다.”


(46-47)

만약에 외계의 관찰자가 지구의 생물학사를 다시 쓴다면 좀 더 간단명료하게 기술할 것이다. “처음 약 30억 년 정도의 시기는 세균의 시대였고, 그 나머지 시기(캄브리아기부터 현재까지는)절지동물의 시대였다.”라고 말이다. 다세포동물이 등장한 이래 다양성으로 보나 개체수로 보나 가장 성공적인 집단은 단연코 절지동물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곤충은 유구한 다양성의 역사를 갖고 있는 만큼, 지난 3억 년의 시기는 곤충의 시대라고 불러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다. 이에 비해 인간이 문화를 건설한 역사는 겨우 1만 년이다. 세균과 절치동물(특히 곤충)이 지구를 지배해 왔던 장구한 세월에 비하면 찰나에 불과하다.


(78)

동물의 육지 상륙은 인간의 달 착륙보다 훨씬 더 기념비적인 사건이다. 왜냐하면 최초의 동물들이 바다에서 나왔을 때, 건조한 육지에서는 매우 열악하고 험난한 환경이 줄지어 나왔을 때, 건조한 육지에서는 매우 열악하고 험난한 환경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육지에서 생활하려면 많은 도구들이 필요했다. 첫째, 육상환경의 스트레스를 견뎌내기 위한 골격계와 자유로운 이동을 위한 운동계가 필요했다. 둘째로, 자외선, 더위와 추위, 탈수로부터 몸을 지켜줄 표피계와 물과 공기 중에서 모두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호흡계가 필요했다. 셋째로, 무엇보다도 동기였다. 오랫동안 안락한 보금자리였던 바다를 뒤로하고 적대적 환경으로 진출하려면 뭔가 결정적인 동기가 필요했다.


(88-89)

지금까지 전갈에 대한 온갖 험담을 늘어놓았으니, 그들에게 사죄하는 뜻에서 이제 전갈의 매력을 하나 알려드리고자 한다 암컷 전갈은 매우 훌륭한 어머니다. 사실 암컷 전갈은 가장 오래된 자녀양육의 모범사례로 유명하다. 대부분의 암컷 절지동물들이 알을 낳은 다음 새끼들에게 각자도생의 길을 걷게 하는 것과는 달리 암컷 전갈은 수정란을 몸 안에 품고 다닌다. 암컷은 여러 달 후에 6~90마리의 새끼를 낳는데, 어미의 축소판처럼 생긴 새끼들은 태어나자마자 어미의 등 위에 올라타 일주일 이상 머문다. 새끼들은 첫 번째 탈바꿈을 마칠 때까지 어미의 보호를 받다가, 뿔뿔이 흩어져 각자 제 살길을 찾는다.


(141)

데본기 후기와 석탄기에 특별히 많은 식물자원이 축적되어 오늘날 우리에게 막대한 양의 석탄을 선사할 수 있었던 것은 습한 기후 조건 때문만도, 고농도의 이산화탄소로 인한 엄청난 식물 성장 때문만도 아니었다. 그런 요인에 더하여, 초식동물의 소화력을 능가하는 바이오매스가 수백만 년에 걸쳐 생성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최초의 중요한 나무 소비자인 갑옷바퀴가 등장한 것은 석탄기 후기 이후였고, 뒤를 이어 깍지벌레가 나타났다. 마루를 갉아먹는 딱정벌레들이 다양하고 출현한 것은 페름기에 이르러서였다.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더욱 복잡한 나무 소비자 집단이 진화했고, 이에 따라 석탄기에 이루어졌던 식물 자원의 전 지구적 대량 생산을 두 번 다시 되풀이되지 않았다.


(199)

마지막 남은 삼엽충 한 마리가 얕은 조수 웅덩이에서 먹잇감을 찾다가 맥없이 그 자리에서 고꾸라졌다. 잠시 후 그의 시신은 물 위로 떠올랐고, 다른 삼엽충 시신들과 함께 조수에 휩쓸려 해변 한 구석에 나동그라졌다. 잠시 후 조그만 다리를 가진 곤충들이 하나둘씩 나타났다. 아마도 최초의 바퀴벌레쯤 되는 것 같았다. 그들은 해변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진 삼엽충의 시신을 발견하고 우르르 달려들어 갉아먹기 시작했다. 때마침 근처의 고목에 걸터앉아 한가롭게 더듬이를 고르던 딱정벌레 한 마리가 이 장면을 목격하고, 잽싸게 날아와 잔칫상에 끼어들었다. 식사를 마친 딱정벌레는 날개를 펼치더니 숲 속으로 되돌아왔다.


(252)

첫 번째 특징은 성충기가 길어서 적어도 두 세대 이상의 공존한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대부분의 비사회적 곤충들은 성충이 알을 낳고 죽어 버리므로, 대부분의 부모들은 생전에 유충들을 공동으로 양육한다는 것이다. 즉 성충들은 다음 세대에게 먹이를 공급하고, 노폐물을 제거해 주며, 포식자와 기생충으로부터 보호해 준다. 성충들의 지극한 보살핌을 받은 유충들은 무럭무럭 자라 사회의 노동력을 구성하게 된다. 세 번째 특징은 구성원의 역할 분담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역할 분담은 엄격한 신분제로 이어진다. 대다수의 구성원들은 생식능력이 없는 노동자들은 둥지를 짓고, 먹이를 구하러 다니고, 자라나는 유충을 먹여 살린다. 한편 둥지를 지키는 일은 병정들의 몫이다. 병정들은 커다란 머리와 구기의 소유자로, 둥지를 지키는 일에 전념하고 먹이는 노동자들에게 의존한다. 병정들 역시 생식능력이 없다. 마지막으로 흰개미 사회에서 새끼를 낳을 수 있는 개체는 극소수의 왕과 여왕들뿐이다. 이들은 지구 역사상 최초로 등장한 왕족으로, 일단 왕국을 건설하여 1세대 노동자들을 양성해 놓은 다음, 평생 동안 노동자들을 착취한다.


(297-298)

적응방산은 신생대에만 나타난 현상이 아니다. 생명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자연선책이 적응방산을 추동한 사례와, 새로운 생명체들이 생태적 틈새를 차지하여 다양화한 사례를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선캄브리아기의 경우, 영양분이 풍부한 바다에서 미생물들이 크게 증가했다. 산소가 풍부한 캄브리아기에는 호흡을 하는 다세포생물들이 번성하여, 다양한 외골격 동물들이 바다를 메웠다. 실루리아기에는 풍부해진 오존이 유해한 태양 광선을 여과해준 덕분에 동식물들이 육지로 진출했다. 실루리아기의 동식물들은 해안지대의 틈새로 이주하여 성공적으로 정착해, 최초의 육상생태계를 건설했다. 데본기에는 육상식물들이 내륙과 고지대로 영역을 넓혔고, 식물과 곤충이 서로 상대방의 다양화를 촉진했다. 석탄기에는 날개 달린 곤충이 급속도로 증가하여 공중으로 진출했다. 페름기에는 완전변태를 하는 곤충들이 증가하여, 그때까지 아무도 밟아 보지 않았던 생태적 틈새를 개척했다. 페름기 말에는 최악의 대멸종 사건이 일어났지만 생명체, 특히 곤충들은 위기를 잘 극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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