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

사실이라는 건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 같아.

그게 그렇게 무서우니까 세상엔 그렇게 많은 거짓말들이 있는 거겠지.

나는 거짓말하는 사람들을 다 이해해. 너무너무 이해해.

나는 지금도 거짓말을 하고 싶어서 미치겠거든.

 

(225)

나는 시현이를 세상 그 누구보다 사랑했지만, 그 아이를 이해할 수는 없었어. 자꾸 내 어린 시절의 모습이 시현이에게 겹쳐 보였거든. 내 아버지는 술주정뱅이였고 어머니는 허드렛일을 하며 나를 키웠지. 스무 살이 되기 전부터 내 학비를 내 손으로 벌면서 살았어. 사는 시현이를 사랑하면서도 한편으론 참을 수 없이 답답한 거야. 저 아이는 좋은 학교에 다니고 과외 선생님까지 있는데 이렇게 쉬운 수학 문제를 틀리다니. 제 방 가득히 책이 있는데 읽지 않다니. 외국에서 온 원어민 선생님에게 영어를 배우는 데 영어가 싫다니. 나는 그 모든 걸 혼자 힘으로 다 해냈는데, 이 아이는 이렇게 서투르다니!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단다. 그래서 나는 화가 났고, 그 아이가 점점 미워졌던 거야. 그래, 나는 그 아이를 사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렇게 미워했단다.”

 

(244)

시현이 이모네 집에서 살아보면 어떨까. 나는 시현이네 집에서 살아보았지만 시현이는 이모네에서 산다는 게 어떤 것인지 모른다. 허름함의 첫 충격을 극복하기만 하면 시현은 스마트폰 아니라 그 무엇이라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이곳을 좋아할 것이다. 하루 종일 유튜브를 들여다보며 춤동작을 연구할지도 모른다. 곽은태 선생님 부부가 꿈꾸는 시현의 미래와는 전혀 다른 길로 가게 될지도 모르고, 나는 그런 시현의 미래에 대해 아무 책임도 질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이 달콤한 무심함을 시현에게 한 숟갈만 떠먹여주고 싶었다. 내가 가진 가장 좋은 것, 최고의 가정에서 자란 시현이 단 하나 가지지 못한 바로 그것, 허술하고 허점투성이인 부모 밑에서 누리는 내 마음대로의 씩씩한 삶 말이다.

 

(269-270)

만약 고양이를 키워도 된다면 나는 시현의 집에서 살 것이다라는 문장은 잠시 다녔던 영어 학원에서 늘 들었던 지겨운 조건법 시험 문제를 떠올리게 한다. If는 최고로 골칫덩어리라서 일단 그것이 달리면 문장의 시제는 4차원 시공간처럼 마구 뒤틀리고 아이들의 미간은 고통스럽게 찡그려진다. 삶에서도 마찬가지다. ‘만일 수학 공부를 열심히 한다면 시현은 강아지를 키울 수 있을 것이다같은 문장이 성립되고 강아지의 이름은 벡터가 되며 약속이 깨지는 순간 강아지는 쫓겨난다. 강아지는 수학과 아무 관계가 없다는 걸 아버지학교가 곽은태 선생님에게 단단히 가르쳐주었을까? 호랑이 같은 눈을 가질 내 고양이에게 나는 결코 그런 이름을 지어주지 않을 것이다.

 

(270)

곽은태 선생님의 반석 같은 어깨 위에서 엉덩이춤을 추며 자랐을 시현을 한없이 부러워한 시간이 있었다. 그곳에서는 도깨비방망이처럼 뚝딱 두드리기만 하면 무엇이든 이루어지는 줄 알았다. 하지만 부모의 어깨 위도 알고 보니 멀미 나게 흔들리는 곳이었다. 이 세상에 흔들리지 않는 어깨는 없다. 그렇게 당연한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 한때 시현이 악마처럼 사악한 아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그 아이도 나처럼 격렬한 어지러움에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 나서 더 이상 시현을 미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타인의 부러워하는 시선 속에서, 남들은 모르는 어깨 위의 흔들림을 견뎌야 했던 시현이 나보다 더 외로웠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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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아옌데는 시대를 통해 만들어졌다. 새로운 사회계급이 국가경제에서 제 몫을 요구하기 위해 싸우고, 자기 사회를 어떻게 운영해나갈 것인지에 대해 목소리를 높여 투쟁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이념에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이던 시대였고, 혁명은 이룰 수 이 없는 꿈이 아니라 분명한 가능성이었다. 지구촌의 다른 수많은 사람들처럼, 아옌데의 생각도 그 시대의 거대한 이념을 바탕으로 꼴을 갖추었다. 그것은 바로 마르크스주의였다. 이를 통해 아옌데는 역사를 해석하는 수단을 얻었고, 절대다수의 인간들이 고통받고 있는 소외를 끝낼 수 있는 방법을 배웠다. 착취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킴으로써, 사회주의는 또한 압제자들을 자유롭게 하는 길도 제시했다. 말 그대로 아메리카혁명과 프랑스혁명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길이었다. 아옌데는 바로 이런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삶을 살았다. 그가 권력을 추구했다면, 그것은 이런 이상이 실현되는 나라와 세상을 만드는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서였다. 그 과정을 통해 그는 칠레를 변혁했고, 이를 통해 칠레 인민과 역사 속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40)

아옌데는 부와 권력에 쉽게 다가설 수 있는 환경에서 자랐다. 그럼에도 발파라이소에서의 삶의 현실적 어려움을 익히 알고 있었고, 당시의 요동치는 정세는 아옌데를 부촌인 비냐델마르가 아니라 자랑스러운 프롤레타이아트의 항구도시에 걸맞게 했다. 1972년 레지스 드브레와의 인터뷰에서 아옌데는 스스로를 발파라이소 항구 출신을 일컫는 자랑스러운 포르테뇨이자, 포르테뇨 출신 첫 대통령이라고 표현했다.


.

(68)

지구촌 차원의 경제위기가 촉발한 혼란 속에 라틴아메리카 전역에서 압제가 시작되고 있었다. 브라질에서는 제툴리오 바르가스 독재체제가 들어섰다. 베네수엘라, 페루, 아르헨티나도 권위주의 정권이 수립됐다. 엘살바도르에서는 마르티네스 장군이 소규모 공산당을 짓밟고 3만여 농민을 학살했다. 니타라과에서는 1933년 소모사가 아우구스토 산디노를 암살하고 독재체제를 강화했으며, 도미니카 공화국에서는 트루히요가 집권했다. ‘볼셰비즘에 위협을 느낀 미국은 이들 정권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1930년 경제위기의 여파로 차관과 쌍무협정을 통한 간접 통제에 기반을 둔 경제체계가 형성됐다. 미국이 힘이 약한 라틴아메리카 국가를 11로 맞상태하면서 우위를 점하는 정치적 체제도 마련됐다.

(74)

현실적인 보탬이 되는 것과는 별개로 아옌데는 프리메이슨에 고결하고 숭고한 사명이 있다고 여겼다. 프리메이슨 회원은 현대적 기준을 활용해 자유, 평등, 박애의 원칙을 규정하고, 이를 통해 소외도 실업도 저임금도 없는 사회, 예방 가능한 질병으로 고통받지 않는 사회를 건설해내려 했다. 이를 위해 제대로 기능하는 효과적인 사회복지제도를 만들어 모든 이들에게 폭넓은 문화적 혜택의 문호를 열어젖혀야 한다는 것이다. 아옌데는 이 같은 내용을 프리메이슨의 사명으로 채택할 것을 줄기차게 요청했다. 또한 노동계급 출신과 청년 지식인 회원을 더 많이 받아들이고, 운영의 민주화에도 더욱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92)

라틴아메리카의 지지가 필요한 것은 신생 국제연합(유엔) 무대에서뿐만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필수 천연자원을 싼값에 조달해온 상황을 지속할 필요가 있었다. 미국이 전후 유럽 재건을 위해 마련한 마셜 플랜에 들어간 막대한 재원을 제공한 것도 결국 라틴아메리카 나라들이었다. 그러니 공산당에 대한 탄압이 재개된 것은 그리 놀랄 일도 아니었다. 칠레 소수 지배계급의 히스테리에 가까운 반공의식은 이제 미국 정부 및 미국계 다국적 기업과 공유됐다. 이때부터 이들 세 부류는 이른바 공산주의의 위협에 맞서 함께 싸우게 된다.


(94)

당시 연설에서 아옌데는 칠레의 기존 민주주의 체제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조목조목 거론했다. 그는 현재 칠레 사회 구성원들이 누리는 자유는 허울일 뿐이며, 권력과 생산수단을 손에 쥔 극소수만이 자유를 누리는 게 현실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그는 철저한 현실 인식에 기초에 지금으로서는칠레에서 사회주의 실현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사회당이 칠레의 부르주아 민주주의체제를 존중하고, 이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현행 민주주의 체제가 선거 결과와 노동조합, 사회적 권리를 존중하는 한, 그리고 사상의 자유, 결사의 자유, 언론의 자유라는 민주주의의 원칙을 보장하는 한 우리는 법체제 안에서 활동해나갈 것이다.”


(95)

그는 이렇게 목소리를 높였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불의에 항거할 수 있는 가능성을 뜻합니다. 부족한 것을 채울 수 있는 기회이며, 지속적으로 나아지기를 열망하는 정신적 태도이기도 합니다. 존경하는 의장님, 민주주의는 원칙과 사상, 이념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의식적 노력의 결과물이지, 단순히 정책을 통해 달성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96)

그러니 혁명은 다른 정치세력과 함께 추진할 수 있는 일이다. 그들 역시 일정한 형태의 혁명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인민전선 정보는 종말을 고했지만, 인민전선이 거둔 성과는 아옌데에게 평화적 혁명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우쳐주었다. 칠레 국가 기구는 정책 목표를 바꿔 급격한 변혁을 추진하더라도 그 과정을 견뎌낼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유연하다는 점을 확인했다. 아옌데는 이런 관점을 남은 삶 동안 확고하게 유지했다. 인민전선은 비록 막을 내렸지만, 그 실험은 1973년은 물론 그 이후까지도 칠레 사회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는 중요한 유산을 남겼다. 평화적 방식을 통해서도 혁명적 성과를 낼 수 있다는 점을 생생하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110)

아옌데는 구리 업계가 막대한 이익을 내고 있는 사이, 칠레 정부가 차관을 얻기 위해 외국 정부에 고개를 숙여야 하는 현실에 대해서도 분개했다. 또 정부 내 어느 누구도 미국과 칠레 간 불평등한 구리협정이 체결됐다거나, 미국계 구리 업계와도 별도의 협정을 맺었다는 점에 대해 관심이 없다는 점에 대해서도 분노를 금치 못했다. 그는 이런 현실은 칠레를 먹여 살리고 있다는 구리 업계의 오만한 태도와도 모순되며, 칠레의 국가적 자존심에도 먹칠을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구리 재벌 6명이 쥐락펴락하고 있는 칠레를 포함한 국제 구리 시장은 제국주의의 전형적인 사례라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아옌데는 구리 생산을 감독하고, 생산된 구리를 국제시장에 수출하는 업무를 총괄할 국영 구리 기업 창설을 추진했다. 이를 통해 구리 생산원가를 파악함으로써, 칠레 경제의 중요한 부문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도록 하자는 주장이었다.


(141)

칠레 언론의 선동 공작은 아옌데를 악마로 만드는 데 집중됐다. 미국은 아옌데의 정적을 적극 지원했다. 필요한 공작금은 아낌없이 투입했다. 오랜 세월 칠레 언론에 영향력을 행사하기는 했지만, 미국이 이 정도 규모로 개입한 것은 칠레 선거 사상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CIA 칠레 지부는 1953년부터 우파 뉴스통신사와 교양 잡지, 주간 신문들을 지원해왔다. 1961년부터는 주요 정당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한편, 반공 선동전을 확산하기 위한 장치를 마련하기에 이른다. 이른바 선거관리위원회가 워싱턴과 산티아고에 설치되어, 칠레의 민주적 선거 절차를 전복하기 위한 미국의 개입 방식을 조율했다.


(176-7)

아옌데의 집권은 칠레에서 마르크스주의 정부가 들어서는 것을 막으려 했던 미국의 노력이 실패했음을 뜻했다. 아옌데 취임 이틀 뒤인 11 6일 닉슨 미 대통령은 국가안보회의를 소집해 아옌데 정부를 붕괴시킬 방안을 논의했다. 닉슨에게는 라틴아메리카 전체에 아옌데가 끼칠 영향이 위험천만해 보였다. “남아메리카의 잠재적 지도자들이 칠레와 유사한 시도를 하거나,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내버려두면 심각한 문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라틴아메리카가 아예 우리 손에서 떠나간 것은 아니다. 라틴아메리카를 미국 수중에 유지하기를 원한다.” 닉슨은 이런 식으로 말을 이었다. 이날 회의에 따라 결정된 사항은 표면상 냉정하고 적절한입장을 이해하고, 칠레에 맞서기 위한 미국의 노력에 협조할 수 있도록 하며, 칠레의 모든 대외경제, 금융 분야 협력을 봉쇄하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이기로 했다.


(180)

칠레에서 복지제도는 사람들의 행동과, 스스로에 대해 느끼는 사고체계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과 연계돼 있었다. 칠레 국민들은 그저 국가의 관대한 복지 혜택을 수동적으로 받는 존재가 아니라, 존엄한 삶을 누리기 위해 복지정책 입안하는 과정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복지제도 운영 전반에 대한 참여를 요구할 수 있게 했다. 복지정책 입안과 집행에 이르는 모든 과정에서 참여가 필요했다. 또 노동자는 기업 경영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고, 노동조합과 시민단체도 기업 운영과 계획과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집권 후 인민연합 정부가 취한 첫 번째 조치는 칠레노동조합총연맹을 창립 약 20주년 만에 처음으로 법적으로 인정하는 합의서에 서명하는 것이었다. 이런 내용은 앞서 노동조합 총회 등에서 논의됐던 것으로, 아옌데 정부 아래서 노동자들이 정치에 참여하는 첫걸음이었다.

(229)

쿠데타가 일어났습니다. 군부 절대다수가 반란에 가담했습니다. 이 어두운 시기에, 지난 1971년 제가 드렸던 말씀을 여러분께 상기시키고자 합니다. 차분하고 평정심을 유지한 채 말입니다. 저는 사도도 아니고 메시아도 아닙니다. 저는 순교자의 자질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저는 인민이 제게 부여한 과업을 완수하려는 사회적 투사일 뿐입니다. 하지만 역사를 되돌리는 세력, 칠레 절대다수 인민의 의지를 무시하려는 세력이 깨닫도록 할 것입니다. 순교자가 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저는 여기서 단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겠습니다. 반역의 무리에게 알리겠습니다. 듣게 하겠습니다. 깊이 새기도록 하겠습니다. 칠레 인민들이 제게 부여한 사명을 완수한 뒤에야 저는 모네다궁을 떠날 것입니다.


(236)

조국의 노동자 여러분, 저는 칠레와 칠레의 운명에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반역이 우리에게 강요한 이 잿빛의 쓰디쓴 순간도, 누군가는 반드시 이겨낼 것입니다. 그 점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그리 머지않은 장래에, 자유로운 인간이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당당하게 걸어갈 드넓은 길을 열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칠레 만세! 인민 만세! 노동자 만세! 이것이 제가 여러분께 드리는 마지막 말입니다. 제 희생이 헛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적어도 제 희생을 통해 범죄자와 비겁한 자, 반역자는 반드시 처벌받아야 한다는 도적적 교훈을 얻게 될 것입니다.



(269)

아옌데 정부의 붕괴를 지켜보면서, 라틴아메리카는 물론 전세계 좌파 진영이 인민연합 정부의 패배에서 교훈을 얻고자 했다. 아옌데의 패배는 제국주의가 어떠한 좌파 정부에게라도 활용할 수 있는 대응방식이 무엇인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전세계 좌파는 칠레의 민주적 사회주의에서 여전히 영감을 얻고 있다. 칠레의 사례는 한편으로 선거를 통한 혁명 세력의 집권이 가능하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다른 한편으로 칠레의 경험은 혁명적 과정을 효과적으로 방어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점을 강조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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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미쳤습니까? 처음으로 돌아간다고요? 그딴 일은 일어나질 않습니다. 봄여름가을겨울 지나 다시 봄이 와도 그 봄은 작년의 봄이 아닙죠. 마음에 품은 정인을 10년이 지난 뒤 다시 만나더라도, 그건 첫 만남과 완전히 다른 겁니다. 성진은 성진이고 양소유는 양소윱니다. 성진이 양소유의 삶에 감 놔라 대추 놔라 할 권한이 없어요. 그렇게 양소유의 삶이 마음에 안 들면, 성진과 양소유가 수표교에서라도 만나 맞짱을 뜨든가 해야죠. 양소유 입장에선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두 눈 시퍼렇게 뜬 채 코 베인 꼴입니다. <구운몽>이라 했던가요? 그 소설에서 가장 시시한 대목이 바로 거깁니다. 다 된 밥에 코 빠뜨렸네요. 이걸 쓴 매설가가 누굽니까?”

서포 김만중 선생이시네.”


(50)

제목이 구운몽이니까, 꿈을 꿨다가 깨어나는 것으로 소설을 마무리 짓는 게 자연스럽지 않겠어?”

, 정말, 몽몽 몽몽몽거리는 말씀만 하십니다. 깨어나긴 뭘 깨어납니까. 현실이 낮에 꾸는 꿈같고 꿈이 밤에 찾아드는 현실 같으니, 밤이든 낮이든 현실이든 꿈이든 어디서나 행복하면 그만입지요. 뒤늦게 깨어나면 뭘 하겠습니까? 욕심입니다 그건, 지금 누리는 행복보다 더 나은 행복이 있을 거라는 황당한 욕심!”


(88)

평범한 날들이 쌓여 오늘 이 모양이 된 거니까요. 사람이 사람이 되고 삼이 삼이 되려면 특별함이라곤 전혀 없는 하루하루가 필요한 법입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315)

그렇군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저는 다릅니다. 책임 없이 사랑하는 게 훨씬 더 깊고 넓게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할 땐 사랑만 해야 합니다. 사랑에 책임이든 뭐든 딴 걸 덧붙이면 안됩니다. 그래야 사랑이 변하거나 사라질 때, 엉뚱한 걸 사랑이라 붙들고 세월을 낭비하지 않습니다.”


(341)

충격은 받겠지만 돈을 위해 각자의 삶을 헛되이 쓰는 것보단 훨씬 낫습니다. 도성에 사는 대부분의 백성이 돈 없인 하루도 못살겠다고 하지만, 상평통보가 없던 시절에도 그들은 잘만 살았습니다. 그게 세상에 나온 지 아직 70년도 되지 않았잖습니까?”


(560)

이게 다 누구 잘못이오? 봄부터 가을까지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은 잘못, 산 넘고 물 건너 돌림병이 돌고 돈 잘못, 죽은 남편과 이제 갓 돌 지난 아들 군포 못 낸 잘못, 관아에서 빌린 보리 한 말을 쌀 백 섬으로 못 갚은 잘못, 조세 낼 돈이 없어 달아난 잘못, 달아나 산에 불을 지르고 밭을 일군 잘못, 섬으로 건너가 몰래 물고기를 잡은 잘못, 산과 섬에 숨어든 백성들 잡으려고 달려드는 관군과 싸운 잘못, 하늘과 조상과 나라님을 감히 원망한 잘못, 이 나라엔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단정한 잘못, 이게 다 말뚝이 잘못이오? 아니면 여기 구경 나온 여러분 잘못이오? 잘못을 따지려 들면, 꼬리에 꼬리가 줄줄줄 줄줄줄 매달려 나오는구나. 수만 나졸의 잘못을 댕기면 수천 아전의 잘못이고, 수천 아전의 잘못을 댕기면 수백 사또의 잘못이고, 수백 사또의 잘못을 댕기면 육판의 잘못이고, 육판서의 잘못을 훅 잡아당기면 삼정승의 잘못이고, 손에 침 탁탁 뱉은 뒤에 삼정승의 잘못을 화악 젖 먹던 힘까지 다해서 잡아당기면 누구냐? , , 나는 차마 말 못 하겠네. 말뚝이가 씨부리지 않아도 다들 누군지 알겠지? , , 나는 말한 적 없지만, 이 모든 잘못을 저지른 삼정승보다 더 크고 높은 단 한 사람은 누구겠어? 확실한 것 하나는 나, 나 말뚝이는 아니라고. 아니고말고.”


(578)

왜 안했느냐?”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으로 살고자 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것도 가져선 안 됩니다. 돈도 집도 사람도!”

예법에 어긋나지 않느냐?”

예법을 모릅니다. 제가 아는 것은 하나뿐입니다.”

무엇이냐, 그것이?”

달문이 고개를 돌려 나를 봤다. 또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려 자근만을 봤다. 그리고 답했다.

사람을 믿어야 한다는 겁니다.”

과인을 믿느냐?”

믿습니다.”

과인은 지금 당장 너를 죽일 수도 있다. 그래도 믿느냐?”

사람을 믿는 것은 그 사람이 어떤 말을 하고 행동을 하는가를 보고 나서 정하는 게 아닙니다. 먼저 믿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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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1930년대 알렉산더 플레밍이 페니실린을 발견하기 전까지, 인간은 장미 가시에 찔리기만 해도 일가친척을 불러 유언을 전해야 했습니다. 사소한 상처로 인해 감염이 발생하면 사망으로 이어졌던 것이죠. 페니실린으로 시작해 각종 항생제들이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아마 근교 지역에서 흔히 열리는 장미축제에 가기가 쉽지 않았을 겁니다. 유명한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사인이 바로 장미 가시에 찔려서 발생한 감염이었으니까요.

(22)

1991년 알프산을 오르던 독일인 부부가 얼음 속에서 엎드려 있던 시체를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했다. 냉동된 덕분에 시체는 잘 보존되어 있었다. 처음에 경찰은 이 사람이 혹시 실종됐다던 학교 선생이 아닌가 의심했지만, 이상한 점이 많았다. 시체에 도끼며 화살 같은 것들이 매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학자들은 그가 기원젼 3400년경에 죽은 신석기시대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발견된 곳이 외치계곡이어서 이름을 외치라고 했다. 얼음에 갇혀 있었는지라 아이스맨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현재를 기준으로 하면 5000년 전 인간이 원형 그대로 보존됐다니, 한바탕 난리가 났다.

(51-52)

그를 의학의 아버지라 부르는 이유가 선서 때문만은 아니다. 히포크라테스 이전의 의학은 주술적인 차원을 벗어나지 못했다. ‘질병=신이 내린 징벌로 여기던 시대였으니, 마법사가 병을 치료한다고 나선 것도 무리는 아니다. 히포크라테스(기원전 460?~기원전 377?)는 모든 질병에는 원인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 원인을 찾아내기 위해 환자의 소변을 맛보기도 하고, 폐에서 나는 소리를 들어보기도 했으며, 환자가 호흡하는 모습과 안색 등을 살피기도 했다. 질병의 원인을 알아내고 제거해야 치료가 가능하다고 생각한 점에서, 히포크라테스야말로 의학을 과학으로 만든 일등공신이다.

(96-97)

이븐 시나는 뛰어난 의학자이기도 했지만, 그의 지식은 철학과 논리학, 종교학, 형이상학까지 뻗어 있었다. 때문에 그를 아리스토텔레스와 비교하기도 한다. ‘그게 말이 되느냐는 생각이 든다면, 우리가 이슬람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봐야 한다.

(168-169)

콜레라뿐 아니라 나쁜 대장균, 장티푸스, A형 간염, 소아마비 등 수많은 질병이 물을 통해 전파된다. 가난한 나라들에서 이런 질병들이 쉽게 유행하고, 사망자도 많이 나오는 이유도 상하수도 시설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탓이다. 선진국이라고 해서 늘 안전한 건 아니다. 1993년 미국 밀워키에서 발생한 와포자충이라는 기생충 질환은 40만 명의 감염자를 낳았고, 그중 69명이 죽었다. 이 사태의 원인은 밀워키에 물을 공급하던 물탱크 둘 중 하나가 오염된 탓이었다. 그렇게 본다면 물 관리야말로 국가가 신경 써야 하는 중요한 일이다. 법적 토대를 마련한 채드웍도 큰일을 했지만, 집집마다 다니면서 콜레라 역학조사를 했던 존 스노가 아니었다면 인류는 훨씬 더 큰 희생을 치렀어야 했으리라. 그가 공중보건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유다.

(213)

1901년 뢴트겐은 엑스선의 발견으로 제1회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그는 상금을 뷔르츠부르크대에 과학 발전과 장학금을 위한 기금으로 기부했다. 이후에도 뢴트겐에게 엑스선으로 특허를 내자는 독일 기업의 제안도 거절했다. 엑스선은 자신이 발명한 게 아니라 원래 있던 것이니 모든 인류가 공유해야 한다고 말했다. 특허라는 제약이 사라지자 누구나 자유롭게 엑스선에 관해 연구를 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엑스선 관련 연구로 노벨상을 받은 사람들이 20명이 넘는다.

(217)

곰팡이에 의해 성장이 억제된 그 세균은 상처만 났다면 잽싸게 달려와 인명을 살상하던 포도상구균이었으니, 그 물질이 분리돼 약으로 만들어진다면 당시 40대 언저리에 머물던 인류의 평균수명을 20년쯤 늘려줄 터였다. 그러니 플레밍은 인류의 운명을 뒤바꿀 엄청난 발견을 한 셈이었다. 여기에는 운도 따랐다. 푸른곰팡이는 흔하게 볼 수 있는 곰팡이가 아니다. 그런데 아래층에 있던 동료 과학자가 푸른곰팡이를 가지고 실험을 하고 있었는데, 창문을 통해 날아와 플레밍이 키우던 세균의 배양접시로 들어간 것이다. 여기엔 배양접시를 배양기에 넣어두지 않고 휴가를 가버린 플레밍의 부주의도 한몫을 했다. 또다른 행운은 푸른곰팡이는 원래 낮은 온도에서 자라는데, 그해 여름 런던의 날씨가 그다지 덥지 않았던 것이다.

(235)

페니실린의 등장과 함께 인류의 평균수명은 1950년대 50대에서 현재 80대 이상으로 늘었다. 혹자는 페니실린이 없었다면 현재 인구 수가 절반 이하일 거라고도 말한다. 페니실린의 위력은 다음에서 알 수 있다. 영국문화원이 전 세계 1만 명을 대상으로 최근 80년간 세계를 바꾼 사건을 뽑아달라고 요청했는데, 1위는 ‘www’, 2위가 바로 페니실린 대량산산이었다. PC 보급, 원폭 투하, 소련 붕괴보다도 앞선 순위라니, 놀랍지 않은가?

(308)

루니의 예상과 달리 과학자들은 암과의 전쟁에서 참패했다. 1971년 이후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미국 정부는 220조 원을 쏟아부으며 암 연구를 독려했다. 하지만 2008년 미국에서 암으로 죽은 사람은 56만 명으로, 1971년보다 오히려 23만 명이 늘었다. 암과 싸우던 과학자들이 패배를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309)

신항록 개척시대 이후 인류의 기호품으로 소비되어온 담배와 건강의 상관관계가 밝혀진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막강한 자본력을 앞세운 다국적 담배회사는 과학자들과 비밀리에 계약을 맺었고, 과학자들은 담배가 건강을 해친다는 사실을 숨겼다. 1963년에 이미 흡연이 암을 유발하고 니코틴이 중독성이 있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면, 담배회사는 1990년대까지도 이를 부인했다.

(344)

그 뒤 오스트리아 출신의 미국 생화학자 어윈 샤가프는 DNA를 구성하는 물질인 A, G, T, C A T의 양이 똑같고, C G의 양이 똑같다는 이른바 샤가프 법칙을 발표한다. 이건 A T가 결합하고, C G가 결합한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암시하고 있다. 이쯤 되면 DNA의 구조를 밝히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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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김종철 : 그러니까 정치판에 단 한 사람도 농민의 대변자가 없는 셈이네요.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어요? 농사라는 게 우리들 모두의 존재의 기반 중에 기반인데 말이에요. 정말 한심한 현실입니다. 지금 중앙 언론의 간부들이나 기자들이 거의 전원이 도시 출신이고, 도시에서만 교육 받고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농촌에 대한 기억을 가진 언론인들은 이제 다 늙어서 은퇴했어요. 그리고 제가 지방에 있다가 서울로 옮긴 지도 15년이 넘었는데, 그동안 서울에서 만나본 지식인들 중에서 농촌에 대해서 관심을 표명하는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녹색평론> 지면에서라도 이야기를 해야겠다 싶어서, 이러다가는 책도 안 팔리고, 일반 독자들에게 인기가 없는 주제인 줄 알면서도, 계속 농사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31)

김종철 : 참으로 어리석은 단견이에요. 지금 기후위기 시대에 앞으로 전 세계 농작물이 작황이 아주 나빠질 거라고 계속 연구가 나오는데,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농산물을 수입해서 먹고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어요. 국내의 자급 기반을 넓힐 생각은 안하고, 엉뚱한 짓만 하려고 하니 기가 찹니다. 지금 우리가 얼마나 지속 불가능한 산업구조를 유지하고 있는지, 그게 얼마나 위험한지에 대해 인식이 없으니까요. 지금 쌀이 남아돈다고 하지만, 진짜 쌀농사를 많이 지어서 그런 게 아니잖아요. 외국에서 수입해온 다른 먹을거리들을 워낙 많이 소비하니까 그런 건데.

(41)

하여간 재생 불가능한 화석연료 자원 대신에 재생 가능한 자연적인 자원을 활용한 새로운 에너지시스템을 만들고, 석유에 의존하지 않는 유기농 농사법을 통해서 식량 자급을 도모하는 일은 당장 해야 할 긴급한 과제들입니다. 어제까지 가능했으니 내일에도 가능할 것이다, 라는 안이한 생각을 가지고, 계속해서 석유에 기반한 구태의연한 산업과 경제성장을 지향하다가는 어느 날 갑자기 나라 전체가 멸망할지도 모릅니다. 국가나 지방 자체체는 물론이고, 언론, 학계, 시민들, 농민들이 지금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는지, 어떤 길로 가야 하는지 제대로 눈을 떠야 합니다.

(47)

사회에 끼친 객관적인 피해가 아니라 행위한 자의 주관적 의도를 기준으로 하는 재판은 법관의 양심에 따른 판결 원칙과 짝을 이루어 한국을 무법의 사법 마피아 왕국으로 전락시켰다. 양심에 따른 판결 원칙은 세상의 어떤 법치국가 헌법에도 규정되어 있지 않다. 21세기 한국에서는 18세기 베카리아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 채, 양심을 빌미로 법률로부터도 독립한 법관의 전제적 재판이 횡행하고 있다. 더욱이 기준 없는 봐주기식, 눈감아주기식 양심 판결의 오류에 대해 법관을 검증, 처벌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조차 갖추어져 있지 않다. 민중은 속수무책으로 신같이 무오류를 참칭하는 법관의 전횡 앞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벙어리 냉가슴 앓듯이 살아야 한다.

(53)

사법권력 분산의 차원에서 북한의 사법제도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공산당 독재체제라고 비난받는 북한의 사법제도를 보면 의뢰로 민주적인 데가 있다. 사법권력이 민중에게도 주어져 있는 참심제를 시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참심제는 용어부터 남쪽 한국에 사는 우리에게 낯선데, 그것은 배심제와 다르다. 배심제는 법조인 판사가 형량을 결정하기 전에 유무죄를 시민 재판관, 즉 배심원이 결정하는 것을 말한다. 참심제는 거기서 더 나아가 형량의 결정에도 시민이 참여하는 것이다. 북한에서는 재판관이 세 명으로 구성되는데, 한 명은 전문 법조인, 나머지 두 명은 민중이다. 이들 민중은 판사와 동등한 권리를 갖고 사건을 심리하고 판결하는 데 동참한다.

(63)

한국은 민주국가를 표방하면서도 민중의 권리와 동력을 인정하려 않고 관료 일변도의 권위주의 행정, 입법, 사법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그런 풍토가 지금까지도 만연하게 된 주요 원인은 목숨이 아까워 겁내고 저항하지 못한 우리 자신에게 있다.

(70)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들은 기후위기가 큰 딜레마라고 지적한다. 기후위기의 실상을 곧이곧대로 전달하면 사람들은 포기하거나 체념하고, 동기화된 망각기제를 발도시켜 끔찍한 메시지를 의식에서 밀어낸다. 자기중심적 위험 인식도 문제다. “설마내가 사는 동안은 괜찮겠지하는 식의 현재 편향과, 미래에 대한 과도한 가치폄하도 나타난다.

(71)

세대 간 정의의 문제도 있다. 기성세대의 행동(온실가스 누적) 및 무행동(온실가스 통제의 방임) 때문에 젊은 세대와 미래세대가 입을 피해를 누가 책임질 것인가. 그레타 툰베리가 유엔 연설에서 우리는 어른들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 말을 듣고 밤잠을 설친 어른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기성세대가 세대 간 연대의 정신으로 책임 있게 행동에 나서고, 기후위기의 고통을 더 오래 겪을 젊은 세대들의 말을 경청해야 한다. 청소년들의 참정권 확대 요구를 생명권-생존권 차원의 문제로까지 넓혀 인정해야 한다. 자녀들의 대학입시에 부모들이 퍼붓는 관심과 정성의 1%만 기후위기에 쏟아도 지금보다 상황이 나아질 것이다.

(77~78)

2013 8, 도쿄전력은 고농도 오염수 저장탱크와 인근 배수구에서 높은 방사선 수치가 측정되었다고 발표했다. 당시 측정된 수치는 시간당 96mSv였다. 자연 상태의 방사선량이 시간당 0.0001~0.0003mSv 정도임을 고려할 때 수십만 배 이상 높은 방사선량이었다. 조사 결과 오염수 저장 탱크 인근에서 물이 흐른 흔적이 발견되었다. 저장탱크의 오염수 양을 계산해보니 고농도 오염수 300t이 유출되었다. 오염수 저장탱크 불량으로 누수가 생긴 것이다. 추가 조사 결과 저장탱크뿐만 아니라 운영에도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오염수 저장탱크 주변에는 오염수를 차단하는 콘크리트 차단벽을 설치해 놓았는데, 빗물을 빼기 위해 차단벽의 밸브를 계속 열어두고 있었다. 그 결과 차단벽은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차단벽 밖의 토양으로 오염수가 스며들어 결국 바다로 오염수가 흘러간 것이다. 저장탱크와 바다는 직선거리로 500m 정도 떨어져 있었다. 이 사고로 유출된 방사성물질의 양은 24Bq로 추정되었다. 국제원자력기구(IEAE)는 이 사건이 심각한 사건이라는 입장을 발표했고, 일본 원자력규제위원회는 국제핵시설사고등급(INES) 3등급으로 이 사고를 평가했다.

(93)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올바른 기술을 가지게 되면, 우리의 자유로운 이동 습관을 줄이거나 에너지 소비를 줄일 필요가 없다고 믿는다. 그리하여 세계경제가 계속해서 성장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그런 믿음은 그냥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게 믿는 사람들은 아직도 기술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을 뿐이다. 전기 자동차나 기타 녹색제품들은 우리의 심리를 편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들은 따지고 보면 인권유린과 환경훼손이 우리의 시야에서 보이지 않도록-그리하여 불건강하고 임금이 싼 콩고나 내몽고 등의 광산으로-장소만 옮겨 놓는 음험한 책략이다. ‘녹색제품들은 그것들을 이용하는 부유한 자들에게는 지속가능하고 공정한 것으로 보이겠지만, 결국 그것들은 증기기관의 발명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근시안적 세계관을 영구화하는 도구들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이러한 환상을 기계물신주의라고 부르고 싶다.

(96)

오늘날 사람들이 맹목적으로 갖고 있는 기술에 대한 신앙은 우리를 구제해주지 못할 것이다. 지구상에서 생을 영위하는 우리들 모두에게 미래가 있으려면, 세계경제가 반드시 재설계되지 않으면 안된다. 문제는 자본주의나 성장논리보다 더 근원적인 데 있다. , 화폐와 그 화폐가 기술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 하는 것이 더욱 근원적인 문제인 것이다.

(108~109)

모든 형태의 에너지 생산은 그 나름의 난제를 갖고 있다. ‘깨끗하고 재생가능한 에너지는 깨끗하지도, 재생가능하지도 않다. 우리가 무한한 에너지의 성장이라는 목표를 포기한다면, 모든 사람이 좋은 삶을 살 수 있다. 우리가 지침으로 삼아야 할 원칙은 진정한 청정에너지는 에너지를 덜 사용하는 형태로밖에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이 되어야 한다.

(143)

여기서 꼭 기억할 게 있다. 한국 국회의원들(300명 정도)에겐 있지만 스웨덴 의원들(350)에겐 없는 것 다섯 가지다. 첫째, 전용차 기사나 유류비 지원이 없다. 둘째, 월 보수처럼 받는 세비 외에 특별수당이 없다. , 무노동 임금이다. 셋째, 개인 비서나 고용 직원이 없다. 한국은 의원 한 명이 보좌관을 아홉 명까지 거느리나 스웨덴은 네 명의 의원 곁에 한 명의 보좌관만 있다. 대부분의 일을 스스로 한다. 넷째, 지역구 의원이 없다. 스웨덴 총선은 정당에만 투표한다. 다서째, 면책특권이나 불체포특권이 없다. 그러니 언행에 신중을 기한다. 물론, 자기 양심과 철학에 따른 소신 발언은 자유롭다.

(159)

독일 축구의 간판이었던 터키계 독일 선수 메수트 외질이 국가대표팀을 탈퇴한 것은 인종차별 때문이었다. 거기에다가 인터넷을 통한 대중의 폭력까지 더해졌다. 외질은 2014년 월드컵에서 독일을 우승으로 이끈 공로자로서 소위 국민 영웅이다. 그런 그가 독일축구연맹과 언론이 내가 터키 혈통이라고 차별했다.”고 항의하며 대표팀을 탈퇴했다. 독일축구연맹 회장은 (자신을) “이기면 독일인, 지면 이민자로 취급했다.”고 말했다. 그 말들이 지닌 아픔을 나는 공감할 수 있다. 독일 태생인 외질의 이런 말들은 국경을 넘어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의 공통된 마음이라는 것을 주류에 속한 다수 사람들은 알아야 한다.

(171~172)

금요시위에 나선 젊은이들은 투표 연령을 16세까지 내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앞으로 몇 년밖에 생존해 있지 않은 80세의 고령자들이 투표를 통해서 지구의 환경조건을 결정하고 있는데도, 이 지구에서 앞으로 60년 이상을 살아간 다음 세대에게 투표권이 없는 것은 너무나 불공평하다는 것이다. 분명히 일리 있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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