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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공중부양 - 이외수가 처음으로 공개하는 실전적 문장비법
이외수 지음 / 해냄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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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가장 인기 있는 트위터리안 중 한 사람이라는 생각부터 떠올리게 하지만, 수많은 베스트셀러와 좋은 작품들을 끊임없이 세상에 내놓아온 작가 이외수가 소개하는 창작적 글쓰기의 비법은 과연 무엇일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공개한 비법의 핵심은 의외로 간단했다. 좋은 글을 쓰는 비법이란 좋은 인간이 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 데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좋은 인간이란 도대체 어떤 인간을 말하는가? 작가 이외수가 생각하는 좋은 인간이란 바로 만물을 사랑할줄 아는 감성을 가진 인간이다. 나쁜 사람은 자신 밖에 모르는 인간, 즉 '나뿐인 사람'이고. 사랑, 정의, 용기 등등 인간이 지녀야할 덕목 가운데 으뜸은 사랑이라는 예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그도 벗어나지 않는다.  


나쁜 놈은 좋은 글을 쓰지 못한다. 나쁜 놈은 바로 나뿐인 놈이다...남들이야 죽든말든 자기만 잘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부류들은 무조건 나쁜 놈에 속한다.(52쪽)


그런데 사랑은 아름다움을 느끼는데서 생겨나는 것이므로 모든 사물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감성을 키우는 것이 글을 쓰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가장 기본이 된다고 한다. 그래서 글을 쓰고자 하는 사람은 마음을 활짝 열고 대상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글은 쓰는 자의 인격을 그대로 반영한다. 사물의 속성을 파악하는 일은 사물과의 소통을 시도하는 일이며 사물과의 소통을 시도하는 일은 사물과의 사랑을 시도하는 일이다. 얼마나 거룩한 일인가. 나뿐인 놈들에게는 절대로 기대할 수 없는 일이다.(53쪽) 


(육안이 아니라 마음의 눈, 즉) 심안과 영안으로 보면 세상에 추악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사랑은 아름다움으로부터 출발한다.(56쪽) 


따라서 대상을 아름답게 바라보는 마음 공부가 가장 중요하다. 이렇게 지속적으로 사물을 사랑하고 사물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영적 수양을 게을리하지 않으면 누구라도 깨달음의 경지에 오르게 된다고 한다.저자에 따르면, 깨달은 자들은 가장 작고 하찮은 것들에 눈물겨워 한다고 한다. 그래서 깨달음을 얻으면 저절로 시가 터져 나오는데, 대부분 자연(달빛, 강, 산)을 노래한다.


그대가 만약 심안과 영안으로 사물을 바라볼 수만 있다면 천하만물들이 모두 보석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68쪽)


두번 째로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예술가가 되고 싶다면 창조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우선 저자는 모방이 창조를 낳는다는 널리 알려진 말을 믿지 말라고 한다. 창조적인 글을 쓰고 싶다면 창조적 시각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창조적 시각은 사물을 감각적으로 인식하는 훈련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한다. 사물을 감각적으로 인식한다는 것은 머리로 인식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으로, 상상력을 발휘하여 사물의 상태를 자유자재로 변화시켜 보는 시도에서부터 사물들(단어들)에 감성을 부여하려는 끊임없는 노력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예컨대 배꼽 달린 개구리를 상상한다던지, 위기감을 표현하는 단어들을 쭉 적어본다던지 하는 식으로. 저자는 또한, 스스로 달라지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내가 달라지기 이전에 세상이 달라지는 법은 없다. 내가 달라지면 반드시 세상도 달라진다. 그대는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대는 아직 달라져 본 적이 없는 하수다. 인격과 문장은 합일성을 가지고 있다. 문장이 달라지면 인격도 달라진다. 인격이 달라지면 문장도 달라진다. 그대가 조금이라도 격조 높은 인생을 살고 싶다면 현재의 자신에서 탈피하라.(97쪽)


셋째, 저자는 글쓰기의 필수요건으로 진실, 소망, 감성, 애증을 꼽는다. 글로써 타인을 감동시키거나 설득시키고 싶다면 끊임없이 자신의 내면을 갈고 닦아 진실하라는 것이다. 진실은 사실과 다른데, 사실을 통해 얻은 감정이 진실이다. 또 글에는 초자연적 힘이 들어 있기 때문에 꼭 미래일기를 쓰라고 권한다. 자기 영혼과의 약속은 의외로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며, 힘겨운 상황에 처할 때마다 굳건히 일어서게 만드는 힘이 되어줄 것이므로. 감성을 기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마음 바깥에 있는 것들과의 교감을 시도하라고 강조한다. 만약 어떤 대상을 사랑할 수 없다면 증오라도 하란다. 사랑이나 증오는 글을 쓰게 만드는 원동력이므로. 그러나 방관만은 금물이다. 방관은 인간의 모든 감성을 말라 죽게 만들고 모든 소망을 말라 죽게 만들기 때문이다. 저자는 아직도 세상에는 증오해야 마땅한 것들이 너무 많이 남아 있기에 열심히 증오하라고 충고한다. 


넷째, 문장의 치명적인 병폐들을 조심해야 한다고 한다. 가식, 욕심, 허영을 버리고 순수한 문장을 만들라는 것이다. 현학적인 문장, 미사여구가 가득한 문장, 본심과 반대인 문장 모두 감동을 주지 못하고 글쓴이의 정신적 빈곤만을 드러낼 뿐이므로, 오로지 진실에 입각해서 써야한다고. 


다섯째, 사물을 바라볼 때 관습적인 관점을 벗어나서 모든 오감을 동원해서 감각하라는 것이다. 즉, 대상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대상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라는 것이다. 사물들을 일상적이고 습관적으로 바라보면 대상이 전혀 글을 쓰고싶은 충동을 자극하지 못하므로. 


사물을 대하는 감각이 둔한 사람들은 언어에 대한 감각도 둔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쓰는 일에도 읽는 일에도 무관심한 것이다. 하지만 노력하면 둔감한 감각을 예민한 감각으로 얼마든지 되돌릴 수 있다. 사물을 온몸으로 감지하라. 모든 촉수를 곤두세우고 사물들이 간직하고 있는 진실을 탐지하는 습관을 기르라. 아무리 뛰어난 재담가라도 자신이 감동받지 않은 소재로 타인을 감동시킬 수는 없다. 진실하게 써라. 가슴으로 써라. 그러려면 사물에 대한 애정이 기본이다. 사물에 대한 거부감이나 혐오감부터 몰아내 버려라(139-140쪽)


 글쓰는 자로서 사물과 인간에 대한 그대의 편견은 일종의 죄악이다.(153쪽)   

  

여섯째, 글을 쓰기 위해서는 다양한 방식의 조사와 공부가 필수적이다. 


그대가 비록 천재라 하더라도 오로지 그대 자신이 현재 보유하고 있는 지식이나 재능만으로 글을 쓰겠다는 생각을 버려라. 인터넷 검색창을 이용하고 전문가들에게 조언을 구하고 관계서적을 찾아보는 행위와 그것들을 응용하는 요령까지가 그대의 능력이다.(194쪽)


지금까지 요약한 글쓰기의 기본 자세나 태도 외에도 저자는 단어와 문장, 수사법 등을 활용하는 구체적인 방식에 관해 많은 예문들을 곁들여 상세하게 설명해주기도 한다. 그러나 가장 와닿는 부분은 역시 글쓰는 이의 인간됨과 기본 마음가짐에 대한 강조 부분이었다. 저자는 틈만 나면 주변 사람과 사물에 대한 사랑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후회 없는 인생이란 많은 것들을 사랑하면서 살아온 인생이다. 우리는 수시로 우리들 자신이 얼마나 많은 것들에게 눈길을 주면서 그것들에게 사랑을 느꼈는가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가슴 안에 사랑이 간직되어 있지 않은 인간은 결코 예술을 느낄 수도 없으며 예술을 행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214쪽)


일곱번째, 사랑에 대한 강조에 더하여, 좋은 작가, 좋은 예술가, 보다 나은 인간이 되기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 즉 절대고독에 대한 이야기도 아름답고 깊은 감동을 준다.

 

번데기는 12일 동안 꼼짝달싹도 못한 채 캄캄한 고치 속에 갇혀서 절대고독을 감내해야 한다. 그리고 날개를 가지기 위해 등껍질이 찢어지는 아픔도 감내해야 한다... 번데기의 과정을 한마디로 대신할 수 있는 단어는 절대고독밖에 없다. 절대고독은 유시형곤충들(날개를 가진 곤충들)이 날개를 가지기 위해 필수적으로 감내해야 하는 통과의례다... 절대고독이 두렵고 등껍질이 찢어지는 아픔이 두렵다면 무시형곤충을 선택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대는 오로지 먹고사는 즐거움 하나로 만족하면서 밑바닥을 기어 다닐 각오를 해야한다. 그러나 날개를 가진 공충들은 거의가 아주 소량의 먹이만으로 생명활동을 영위한다. 그것들은 먹이를 최상의 즐거움으로 삼는 단계를 벗어난 생명체들이다. 기어다니는 생명체들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들이다. 그것들에게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즐거움이 있다... (220쪽)


우리가 날기를 포기하는 순간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암시해주는 다음 이야기는 섬뜩하다.


날개가 없는 곤충들은 대부분 집단적으로 먹이를 공격하거나 남이 잡아놓은 먹이를 훔치거나 상처 입은 먹이를 찾아 헤매거나 다른 동물의 몸에 기생하거나 함정을 만들어놓고 먹이가 지나가기를 끈질기게 기다려야 한다.(220쪽)


어떻든 인간은 날개 달린 존재가 되기위해 절대고독을 감수해야 하는 윤리적 사명을 띄고있는 존재라는 생각마저 들게 하는 이야기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어떤 분야든 장인이 되기 위해서 반드시 요구되는 고도의 집중력과 끈질긴 인내심이 작가가 되기위해서도 반드시 요구되는 자질이라고 말한다. 결국 글쓰기의 성패는 기술의 탁마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정신의 탁마로 결정되는 것이라는 저자의 말에 깊이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집중력과 인내심을 기르는 일 역시 정신적 탁마의 일부일 것이므로.


사족 한 마디. 음양오행의 범주에 따른 인물 구성 방법에 관한 저자의 독특한 관점이 재미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어떤 인물도 이 음양오행의 범주를 떠나서 존재할 수는 없다고 단언하면서 그 특성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놓고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이 책은 다른 창작방법론 서적과는 다른 차별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겠다. 


12. 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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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브 키터리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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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브 키터리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드세고 거친 여자 올리브 키터리지의 일생. 어머니와 혹은 배우자나 아이와 관계가 썩 좋지 않았던 사람이라면 공감할 여지가 많은 소설일 것이다. 상처받은 사람은 저도 모르게 상대에게 상처를 주면서 스스로 또 상처를 입기 마련이라는 변함없는 공식.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고리 바깥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따뜻한 사랑을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하고 자란 올리브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도 상대를 대하는 방법을 알지 못해 평생 좌충우돌하며 고통스러워한다. 황량하고 추운 자신의 내면을 상대방이 이해하고 보듬어주기를 끝도 없이 갈망하면서도 그 갈망을 분노와 독단이라는 일그러진 방식으로 표출할 수밖에 없는 몸만 자란 어른인 것이다. 사랑이라는 자양분의 결핍으로 미처 성장하지 못한 내면의 아이가 끊임없이 불쑥불쑥 분노를 표출하며 남편과 아들의 마음이 자신으로부터 멀어지도록 만들고, 불행한 스스로를 위안하기 위해 자신보다 더 불행해 보이는 사람이나 찾아다니는 이 참담한 삶을 어떻게 할 것인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대답은 심리학적 공식에 충실하다. 바로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충분한 관심과 사랑을 되받는 일 외에 해결책이 있을 수 없다는 것. 올리브가 너무도 사랑하면서도 자신으로 인해 상처받은 아들 크리스의 마음을 되돌릴 방법은 자신이 상처 준 사실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일에 있을 것이다.


    그녀에게서 변화가 싹튼 것은 자신의 이야기를 충실하게 들어줄 수 있는, 또 다른 자신만의 상처를 지니고 있는 잭이라는 노인을 만나면서다. 레즈비언 딸에게 절연의 상처를 주고 딸의 미움을 되돌려 받은 잭의 고통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통해 마침내 올리브는 잭에게 자신의 아들 역시 자신으로 인해 상처 받았음을 처음으로 인정하게 된다.


    올리브는 당장 답장을 썼다. “나도 죽도록 괴로워요. 죽음보다 더. 분명 내 잘못일 텐데, 난 이해를 못하겠어요. 같은 일도 아이가 기억하는 것하고 내가 기억하는 게 달라요. 아들은 아서라는 정신과 의사를 만나는데, 내 생각엔 아서가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은 것 같아요.” 그리고 오랫동안 가만히 있다가 ‘보내기’를 누르곤 바로 다시 썼다. “추신. 하지만 분명 내 잘못이기도 할 거예요. 내가 절대로 사과를 하지 않는다고 헨리가 말한 적이 있는데, 어쩌면 헨리 말이 맞을 거예요.” 올리브는 ‘보내기’를 눌렀다. 그러고는 또다시 썼다. “또 추신. 헨리 말이 맞아요.”(479-480쪽)

“아들, 정말로 때렸어요.” 올리브가 말했다. “애가 어릴 때 가끔 그랬어요. 그냥 엉덩이만 몇 대 때린 게 아니라 정말 때렸어요.”(481쪽)


     이제 아들과의 화해는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다. 물론 결코 간단치만은 않은 과정이 남아 있긴 하겠지만. 


     잭이 백인 부자들이 지지하는 공화당 지지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해도 그에게서 연민을 넘어 사랑을 느끼는 올리브는 분명 이전과 달라진 모습이다.


     ... 병원에서 잭은 올리브를 필요로 했고, 세상에는 올리브의 자리가 있었다. 이제 그의 푸른 눈이 올리브를 지켜보고 있었다. 조용히 그의 곁에 앉으면서, 잭의 눈빛에서 올리브는 두려움을, 손을 내미는 여린 마음을 보았다. 그리고 손을 펼쳐 그의 가슴에 대고 쿵쿵 뛰는 심장을 느껴보았다. 다른 모든 심장처럼 언젠가는 멎을 심장을. 그러나 그 ‘언젠가’는 지금 이 자리에 없었다. 햇살이 따스한 작은 방의 고요뿐. 그들은 이 자리에 있고, 그녀의 몸은, 늙고 뚱뚱하고 살갗이 축 처진 몸은 그의 몸을 처절히 원했다. 헨리가 죽기 전 몇 년 동안 자신이 이렇게 헨리를 사랑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너무 슬퍼서 올리브는 눈을 감았다.

젊은 사람들은 모르지, 이 남자의 곁에 누우며, 그의 손을, 팔을 어깨에 느끼며 올리브는 생각했다. 오, 젊은 사람들은 정말로 모른다. 그들은 이 커다랗고 늙고 주름진 몸뚱이들이 젊고 탱탱한 그들의 몸만큼이나 사랑을 갈구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내 차례가 돌아올 타르트 접시처럼 사랑을 경솔하게 내던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모른다. 아니, 사랑이 눈앞에 있다면 당신은 선택하거나, 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다. 그녀의 타르트 접시는 헨리의 선량함으로 가득했고 그것이 부담스러워 올리브가 가끔 부스러기를 털어냈다면, 그건 그녀가 알아야 할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알지 못하는 새 하루하루를 낭비했다는 것을. (482-483쪽)


     사랑 없이는 구원도 없다는 자명한 진리를 다시 확인하게 만드는 소설이다. 그런데 그 사랑이란 게 일상적 삶을 존중하는데 있으며 그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작가의 준엄한 메시지가 신선했다. 내 남편과 내 아이와 내 어머니를 향한 나의 태도를 뒤돌아보게 된다. 나는 일상에서 그들을 얼마나 소중하게 대했던가. 그들의 목소리에 얼마나 진지하게 귀기울였던가... 


     책을 읽으면서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가 떠올랐다. 스테레오 타입의 희생적인 엄마를 잃고나서야 마침내 고마움과 미안함의 반성적인 시간을 갖는 자식들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진부한 효도윤리를 되새기는 작업이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베스트셀러를 장식하는 현실이 짜증났었고 좀 다른 관점의 가족관계에 관한 이야기가 목말랐었다. 가령 나쁜 아내이자 나쁜 엄마 때문에 상처받는 남편과 아이들에 관한 이야기, 그 나쁜 아내이자 엄마가 그렇게 된 사연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그들은 어떻게 화해할 수 있을 것인지 같은 이야기 말이다. 희소식은 <올리브 키터리지>가 바로 이런 갈증을 충분히 해소해 주었다는 사실이다. 개개인이 원자화된 시대라고는 하지만, 가족관계는 아직도 우리의 삶에 중심을 차지하는 테마가 아닐까 싶다. 이런 깊이있는 통찰력을 주는 책이 좀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04/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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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없는 사람
커트 보니것 지음, 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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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도착한 책 더미 가운데 만만한 두께의 이 책을 먼저 집어 들게 되었다. 김중혁 작가를 비롯해서 보네거트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유난스럽기까지 해서 그의 책을 한 번쯤은 읽어봐야겠다고 벼르고 있던 참이었다. 기대했던 대로 커트 보네거트의 글은 유쾌하고 통쾌하다. 웃음을 통해 드러나는 날카로운 통찰력은 재미와 진지함을 모두 충족시켜준다. 보네거트는 풍부한 인생 경험을 바탕으로 유머, 가족제도, 정치, 음악, 문학, 예술, 종교, 과학기술, 행복, 인생 등 누구나 한 번쯤은 진지하게 생각해보았을 문제들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명쾌하게 들려준다. 무엇보다도 미국에도 ‘좌파’라는 것이, 그것도 문학을 하는 좌파의 존재가 있다는 사실이 가장 신선하게 와 닿았다.

그의 생각을 대충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 유머론: 유머 구원론

유머는 두려움과 좌절에 대처하는 인간만의 방식이다.(13쪽)


“내가 정말로 하고 싶었던 일은 사람들에게 웃음으로 위안을 주는 것이었다. 유머는 아스피린처럼 아픔을 달래준다”(127쪽) 


그러고보니, 결국 유머와 예술과 종교의 역할은 같은 것이로구나!


* 가족제도: 대가족주의

이혼의 진짜 이유는 외로움(대화 상대의 결핍)이며, 대가족 제도만이 대안이라고 주장한다. 재미있는 통찰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혼을 하면 딱 한 사람과 가정을 이룬다. 신랑은 친구가 하나 생기는데 그나마 여자다. 신부는 이야기 상대가 하나 생기는데 그나마 남자다.”(56쪽)


풍성한 지적 대화가 오가는 분위기의 예술가 집안에서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이로서 충분히 할 법한 생각이지만, 오히려 인간을 고립시키는 억압적인 역기능 가정도 많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할까?


* 정치적 입장: 휴머니즘으로써의 사회주의

보네거트는 미국의 거만함, 물질주의, 돈에 대한 집착, 리더들의 비양심적인 사리사욕에 기반한 파괴욕을 줄기차게 비판한다. 이미 오래 전에 셰익스피어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악마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성경 구절을 인용한다.”(110쪽) 부시 일당만이 아니라 다수의 정치인들과 소위 사회지도자임을 자처하는 이들의 언행을 정확히 꿰뚫는 말이다. 

양심에 기반한 상식적인 판단을 헌신짝처럼 저버리기 위해서 비싼 하버드나 예일의 졸업장이 필요한 건 아니라는 그의 통렬한 지적에 완전한 공감을 보낸다. 동정심이나 수치심을 상실한 미국의 정치지도자들을 부끄럽게 여기는 보네거트 같은 지성인이 있어 미국에겐 그나마 다행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수는 너무도 적다....


* 종교(기독교)에 관한 입장: 인간에 대한 사랑과 평등의 사도, 휴머니스트로서의 예수(산상수훈의 가르침) 지지


“사실 기독교와 사회주의는 똑같이,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게 창조되었고 어느 누구도 굶주려서는 안 된다는 명제를 실현하고자 한다.”(21쪽)


“휴머니스트라면 누구나 그렇듯 나는 예수를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그의 가르침이 훌륭하고 대부분의 말이 절대적으로 아름답다면 그가 신이든 아니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그러나 만일 그리스도가 자비와 동정의 메시지가 담긴 산상수훈을 설파하지 않았다면 나는 인간으로 태어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차라리 방울뱀으로 태어나는 게 나았으리라.”(82쪽)


*소설에 관한 생각: 과학기술 발달이라는 현실을 반영하는 소설 지향

코넬 대학 화학과 출신이라는 지적 배경을 지닌 지식인답게 보네거트는 작가들의 과학에 대한 무지를 비판하고 자신이 SF 소설가로 규정하는 이들을 향해 일리 있는 항의를 한다.


“나는 과학기술을 생략함으로써 인간의 삶을 왜곡하는 소설은 섹스를 생략함으로써 빅토리아 시대의 삶을 왜곡하는 소설만큼이나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25쪽)


*예술론: 바람직한 삶의 방식으로써의 예술 찬양


“만일 부모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주고 싶은데 게이가 될 배짱이 없다면 예술을 하는 게 좋다. 이건 농담이 아니다. 예술은 생계수단이 아니다. 예술은 삶을 보다 견딜 만하게 만드는 아주 인간적인 방법이다. 잘하건 못하건 예술을 한다는 것은 진짜로 영혼을 성장하게 만드는 길이다. 샤워하면서 노래를 하라. 라디오에 맞춰 춤을 추라. 이야기를 들려주라. 친구에 게 시를 써보내라. 아주 한심한 시라도 괜찮다. 예술을 할 땐 최선을 다하라. 엄청난 보상이 돌아올 것이다.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것을 창조하지 않았는가!”(31-32쪽)


보네거트는 <햄릿>의 위대함은 그것이 삶의 진실(우리에게 일어난 일 가운데 어떤 것이 좋은 소식이었는지 혹은 나쁜 소식이었는지를 알 수가 없다는 사실)을 말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열광적인 감동을 주는 스토리텔링의 방식보다 중요한 것은 진실을 이야기하는 데 있다고 강조한다.


자신이 다른 소설가들과 다르게 느껴지는 이유에 대한 보네거트의 질문에 솔 스타인버그가 대답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예술관을 피력한다.


“예술가엔 두 종류가 있는데 이건 결코 뛰어남의 차이가 아니야. 하지만 한 부류는 지금까지 자기가 만든 작품의 역사에 대응하고, 다른 부류는 인생 그 자체에 대응한다네.”(131쪽)예술의 진정성에 관한 지적이다.

타고난 재능 여부에 관한 질문에는, 솔은 그런 건 없으며 다만 “어떤 작품에서든 사람들의 반응은 예술가가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어떻게 노력했는가에 맞춰진다”(131쪽)고 답한다. 우리 모두에게 용기를 주는 말이기도 하지만, 예술의 어려움을 보여주는 말이기도 하다.


*전자공동체에 관한 의견: 부정적

보네거트는 몸과 몸이 직접 만남으로써 이루어지는 소통의 우연적 특성에서 빚어지는 정서적 교류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직접적인 마주침에서 발생하는 정서적 반응을 생략한다면 우리 인생은 훨씬 삭막해질 것이라는 그의 우려에 공감한다.


“전자 공동체에는 실체가 없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인간은 춤추는 동물이다. 잠자리에서 일어나 세수를 하고 대문을 나서서 뭔가 한다는 건 얼마나 멋진 일인가! 우리가 지구상에 존재하는 것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냄새를 피우기 위해서다. 누군가 다른 이유를 대면 콧방위를 뀌어라.”(66쪽)


그러나 현재의 SNS가 직접적인 만남을 대체하지는 못하더라도 만남과 소통의 범위를 확장함으로써 소통의 공간적, 시간적 한계를 넘어서게 해주는 측면이 있음을 간과할 수는 없다. 전자공동체는 직접 만남을 대체하기 보다는 보완해 주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음악 애찬론:


“음악은 세상 모든 사람이 음악이 없을 때보다 인생을 더 사랑하게 만든다.”(70-71쪽)


보네거트는 특히 우울증에 특효를 발휘하는 치료제로 블루스를 꼽는다. 미국의 노예제 시절, 노예들이 그 주인들에 비해 우울증으로 자살하는 비율이 낮았던 원인은 바로 그들이 블루스를 연주하고 노래한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울한 음악은 우울한 현실을 견딜 수 있도록 위안을 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현실을 더욱 우울하게 바라보도록 우리의 뇌를 길들이는 측면도 있지 않나?


*행복론:

사람들이 행복할 때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게 문제다. 이에, 보네거트가 제시하는 해결책은 다음과 같다.


“행복할 때 행복을 느끼고 그 순간에 나처럼 외치거나 중얼거리거나 머릿속으로 생각해보라. “이게 행복이 아니면 무엇이 행복이랴!””(129쪽)


사회주의자, 휴머니스트, 음악 애찬론자, 유머 애찬론자인 소설가 커트 보네거트를 혼자서 뒤늦게 발견하고는 어느새 그의 팬의 대열에 동참한 나를 발견한다. 


12. 03.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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