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요일 오전 6시가 조금 지난 시간. 세곡동에서 택시를 타고 사당역까지 갔다. 이사한지 얼마 되지 않아 대중교통편도 모르고, 7시에 출발하는 창녕행 답사버스에 늦을세라 불안한 마음 때문에 탄 택시였다. 날씨가 잔뜩 흐려 있어서 일기예보가 궁금했던 나는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라디오 소리는 정말 작았다. 하지만 채널을 확인하지 않아도, 내용을 듣지 않아도 그 격앙된 어조만으로도 금방 그것이 특정 종교 방송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기독교 방송인가요?’라고 조심스레 물었다. 기사는 “예, 작게 듣고 있다가 손님이 싫어하면 바꿔요.”라며 볼륨을 조금 높였다. 일기예보를 듣고 싶어서 물어보는 나를 기사는 기독교에 관심 있는 것으로 오해했던 모양이다. 교회 다니느냐고 묻는다. 나는 안 다닌다고 했다. 절에 다니느냐고 재차 묻는다. 안 다닌다고 했다. 일요일마다 가서 ‘좋은 말씀’을 들어야하는데 일 때문에 더러 빠진다고 했다. 그래서 시간 날 때마다 이렇게 라디오로 ‘말씀’을 듣는다고 하며 볼륨을 더 높인다. 나는 기분이 좀 안 좋아졌다. 나는 오늘 비가 올지 안 올지 좀 궁금할 뿐 그가 신앙인으로서 ‘말씀’을 듣는 것에 내가 딴지를 걸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돈 내고 택시를 탔지만 라디오채널 선택권까지 내 몫으로 챙기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기사가 두 번씩이나 볼륨을 높이면서 자기는 몸에는 성령이 들어있고 그것이 주는 기쁨으로 충만하고.......교회에 안다니는 사람은 그런 것을 모르고....... 블라블라...
나는 입을 딱 다물어 버렸다. 지난밤 늦게까지 『언더그라운드』를 읽으면서 찾아보았던 옴진리교 교주의 모습이 떠오르며 혐오감이 확 밀려왔다. 기사는 자신의 신념을 내게 계속해서 불어넣느라 내가 불쾌하든 말든, 혐오감을 느끼든 말든 개의치 않고 목소리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수양이 부족한 내가 언제까지 참을 수가 있었겠는가. 차가 예술의 전당을 지날 무렵, 지갑에서 돈을 꺼내며 말했다. 나는 종교인은 아니지만 가끔 불경도 보고 성경도 본다. 나는 예수님을, 성경을 마주하고, 아주 개인적으로, 1대1로 만나고 있으니까 너무 염려하지 마시라고. 택시비가 9300원인가 나왔는데 내게 만 원짜리가 없었다. 미안해하며 오만 원 짜리를 내밀자 잔돈을 거슬러주면서 계속 무어라 ‘말씀’중이시다. 문 열고 내린 내 손으로 만 원짜리가 먼저 건너오고 천 원짜리가 건너오고 동전이 마지막으로 내 손에 건너오기까지 아저씨의 ‘말씀’은 계속되었다. 누군가의 말처럼 그는 일용할 양식을 내려달라고 기도했을 뿐만 아니라 일용할 환상을 내려 달라고 기도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 댓가로 자아의 일정부분을 지불했을 것이다.
창녕에 도착해서 관룡사에 올랐더니 여기도 ‘말씀’ 중이시다. 법당에서 조근조근 법문을 하시면 좀 좋으랴만, 스피커를 통해 나오는 ‘말씀’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도 없고 찌직 거리는 기계음 때문에 절간이 절간이 아니다. 잠시 스쳐가는 내 미간이 이렇게 찡그려지는데 산 속의 동식물은 어떠하겠는가. 어째서 도시나 산 속이나 이렇게 ‘말씀’은 넘쳐나는가? ‘말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이토록 많다는 말인가? 나는 돌아와 아래와 같은 시를 몇 번씩이나 되풀이 읽으며 마음을 달래고 있다.
꾸오바디스/이영광
날 사탄이라 욕하고 행패 부렸던 택시를 다시 타고 말았다.
나도 점잖진 못했지만,
소규모 베드타운의 비극이다.
그자, ‘베드로맨’은 이제부터 잘 좀 지내보자고
아, 원수를 사랑하란 말도 있지 않습니까, 웃었다.
나는 정신을 잃느니 그냥 사탄하겠다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촛불도 없이 헤매고 다니는
당신 교회의 ‘우리 장로님’이라는 이나 얼른 좀 사랑해주시라고 말했다.
서로 사랑해야 하는 원수들이 함께 사는 곳이야말로 지옥이고
원수를 만들고서야 사랑을 싸지르는 지복의 착란 속에 사느니
차라리 선량한 백치가 되겠으며,
당신이 순교자가 될지 안될지 알 도리는 없지만
날 지옥에서 내려준다면, 백번 지각을 하더라도
깁스한 다리를 끌고 걸어서 ‘로마’까지 가겠노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