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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가지 1 - 을유세계사상고전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 지음, 박규태 역주 / 을유문화사 / 200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이곳은 ‘숲의 디아나’라고 불리는 성소이다. 이 성스러운 숲속에는 한 그루의 나무가 있고, 그 둘레에는 밤낮 없이 잔뜩 긴장한 한 사람이 번쩍거리는 칼을 들고 언제 기습을 받을지 모른다는 듯이 긴장된 자세로 늘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다. 그는 사제인 동시에 살인자이다. 그가 잔뜩 긴장하고 있는 이유는 그도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가 그의 사제직을 계승하기 위해서 그를 살해하려 호시탐탐 노리기 때문이다. 이 성소가 바로 사제직을 계승하는 장소로서, 사제가 되려는 사람은 반드시 그의 전임자를 살해하여야 하고, 황금가지를 꺾어야만 그 직을 쟁취할 수 있다. 이것이 이 성소의 엄격한 율법이다.”
이 성소의 율법에 우리는 몇 가지 질문을 할 수 있다. 사제는 왜 살해 되어야 하는가? 사제를 살해하려는 사람은 왜 반드시 황금가지를 꺾어야 하는가? 또 황금가지란 무엇인가? 프레이져의 『황금가지』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안락의자 위의 인류학자’라는 비난을 듣고 있는 프레이져의 황금가지는 총 13권으로 되어있다고 한다. 후대를 위해서인지 그는 스스로 1권의 축약본을 만들기도 했다. 아직도 나오고 있을 것만 같은 세헤라자데의 이야기 속 쥐만큼이나 방대한 자료들은 지루함을 넘어 끔찍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이러한 사료를 통한 그의 이론은 더러 흥미롭기도 하고 가끔은 탄성을 자아내게도 하며 꽤 설득력이 지니고 있기도 하다.
고대사회에서 사제나 왕, 추장은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 존재로 여겨졌다. 이들은 자연재해에 대한 책임을 져야했고 예기치 못한 자연의 폭력 앞에서 그들이 무너질 때 이 재난은 그들의 죄과로 돌려져 지위를 박탈당하거나 살해당하였다.
황금가지는 참나무에 기생하는 겨우살이의 다른 이름이었다. 겨우살이의 가지를 잘라두면 잎뿐만 아니라 가지까지 황금색으로 변해 그야말로 황금가지로 보여 지기 때문이기도 했다. 겨울이 되어 참나무가 그 잎을 다 떨어뜨려도 이 겨우살이는 푸르름을 간직한 채 남아있었다.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죽은 참나무의 정령이 그 겨우살이에 거처를 정한 것이라고 믿었다. 그것은 땅에도 하늘에도 속하지 않은 곳이기 때문에 가장 안전한 곳으로 여겨졌다. 황금빛과 노란색은 동종주술의 원리에 의해 불씨 혹은 태양을 상징한다. 아마도 사람들은 이듬해 참나무가 다시 소생하는 것을 보고 겨우살이에 깃들었던 참나무의 정령이 겨울을 잘 보내고 참나무로 거처를 옮겨간 것으로 여긴 듯하다. 황금가지는 불이나 태양의 상징으로 모든 생명의 근원이면서 동시에 축제를 통해 악령을 제거하는 정화의 의식에도 사용되었다.
프레이져의 연구는 디아나 숲의 사제 살해 모티프에 대한 몇 가지 질문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준다. 그러나 왜 참나무여야 했는가에 대해서는 질문도 대답도 없다. 우리는 흔히 새 중의 새를 참새라 하고 나무 중의 나무를 참나무라 한다. 북부 이탈리아의 디아나 숲의 그 참나무도 내가 알고 있는 이 참나무라면 그곳에서 이 참나무가 어떤 의미였는지도 설명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프레이져는 캐임브릿지 대학의 자기 서재 안에서 수많은 자료를 수집하고 섭렵한 다음 그것을 정리했다. 그의 범위는 유럽뿐만 아니라 오스트레일리아, 아프리카, 아시아 등 지리적 경계를 망라하고 농경민족과 유목민족 등 인류의 생활양식도 함께 고찰한다. 그는 원시인의 주술, 신화, 입사의식, 터부, 수목의 정령이나 인간을 포함한 동물 살해, 축제 등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례를 비교 정리 한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프레이져는 유사의 법칙에 의한 ‘동종주술(모방주술)’과 접촉, 전염의 법칙을 바탕으로 한 ‘감염주술’로서 인간이 가진 본질적 유사성을 추출해 낸다. 그것은 스스로 그러한 자연(自然)에 대한 인간의 태도와 인간이라면 피해갈 수 없는 죽음에 대한 부정, 그리고 영혼불멸의 신앙이다. 프레이져는 마치 자연 앞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자연은 일정한 법칙을 가지고 순환되지만 그것이 반드시 일정불변의 법칙을 가진 것은 아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은 해마다 반복되지만 그 계절이 모두 똑같을 수는 없다(반복과 차이/엘리아데의 영원회귀). 자연은 친숙하고 다정한 얼굴로 찾아오기도 하고 폭력적인 재앙으로 예고도 없이 찾아들기도 한다. 처음 인간은 자연에 대해 자신이 어떤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초자연적 힘을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인간의 이 같은 믿음은 주술을 낳았다. 주술사는 자연에 대항하여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종의 해결사였다. 그러던 인간이 자연의 폭력 앞에 무릎 꿇어야 했을 때 그는 보이지 않는 어떤 위대한 존재가 있다고 믿었고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의 자비심을 구하는 일 뿐이었다. 인간은 초자연성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여기에서 종교가 생겨났다.
프레이져는 자연을 대하는 인간의 사유는 이렇게 주술에서 종교를 거쳐 과학으로 진행되어왔다고 결론짓는다. 과연 그의 말대로 주술은 종교보다 앞서 존재했고 종교는 과학보다 앞서 존재하면서 진화론적으로 발달하는 것일까? 문명화의 식민지와 같고 과학에 대한 믿음이 망상으로까지 치닫는 현대에도 여전히 주술이 행해지고 있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주술과 종교의 차이는 다만 초자연적인 존재에 대한 방법적 접근의 차이로서만 설명될 수 있을까? 과학은 진보하지만 주술은 거꾸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그 효력이 극대화되었다. 혹시 프레이져가 말하는 미개인에게는 주술이 과학이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기독교에 대한 프레이져의 생각은 참으로 흥미로웠다. 불 축제에 대해 고찰하면서 크리스마스가 태양의 탄생에 관한 고대 이교도의 축제들을 대신하기 위해서 교회에 의해 제도화되었다고 했을 때 기독교도들의 비판을 받을 만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25일이라는 날짜가 밤의 길이가 가장 긴 동지 즈음을 기점으로 하고 있다는 것 역시 우주만물의 순환과 농경사회에서의 태양의 의미, 주역에서의 괘 등 많은 것을 생각해보게 해주었다.
책을 읽으면서 내내 한 가지 불편한 심사가 뒤따른다. 프레이져가 말하는 미개인들이 인간과 동물 사이에 뚜렷한 경계의식을 두지 않았고 또 자신이 죽이는 동물에 대해 아무리 경건한 의식을 갖추고 존경을 바친다고 하더라도 그 행위가 인간 우월주의, 인간 중심주의, 힘의 논리를 반영하고 있다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살육이고 이론의 확립을 위한 어쩔 수 없는 배제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이러한 예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동물이나 맛좋은 고기를 제공하는 동물은 경건한 의식으로 존중되고, 무섭지도 않고 맛도 없는 동물은 멸시되는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 숭배하기 때문에 살해하지도 먹지도 않는가 하면 바로 그 숭배 때문에 살해하고 먹기도 하는 것을 보면 이헌령비헌령이 따로 없다. 자신에게 닥친 재앙을 무생물이나 동물 심지어 같은 인간에게까지 옮기는 행위, 속죄양을 만드는 행위 역시 마찬가지이다. 시대는 다르지만 스스로도 이런 행위에서 크게 어긋나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달을 때, 또 끝내 비껴갈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할 때 넘을 수 없는 벽을 맞닥뜨린 것 같고 암담한 거울 앞에 서 있는 듯하다. 사물을 비추지 않으면 거울이 아니다. 어쩌면 사람을 비추지 않으면 사람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런 면에서 황금가지는 나를 비추는 종이거울이며 프레이져는 인간의 형상을 한 거울과 다르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