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용지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차올라

온몸에 금빛 출렁이는

은행나무를 보거나

 

사람들 모두 다녀간 이후

고요한 연못에 홀로 드리운 부용정  

닫힌 듯 미래로 열린

물속의 문을 보노라면

 

나는 말없이 떠난 자가

성긴 빗방울로 돌아와

문 두드릴 때

수많은 기다림의 나이테로

파문져 한 몸 되는

못물이고 싶다

 

물이 되기 위하여 물은

더 여위어야한다 

 

 바야흐로 은행나무의 계절이다.  은행나무는 암수 딴 그루이다. 암그루는 수그루를  저만치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수정을 하고 열매를 맺고 황금빛으로 출렁인다. 아름다운 거리다. 모름지기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켜야할 거리가 있는 법. 은행나무의 사랑법을 배울 일이다. 

저물녘 실상사를 찾았다. 예전 대원각이었을 때 그곳에서는 고기를 굽고 풍악을 울리곤 했었다. 그 기운이 언제 걷혔는지 고즈녁한 산사의 느낌이 나를 사로잡았다.  지는 해가 녹인 황금물을 쏟아부었는지 은행나무는 황금촛대처럼 서 있었다.  

나무는 떨켜를 만들어 가지끝으로 가는 물을 차단했을 것이다. 나뭇잎들은 뿌리로 부터 물이 오기를 목이말라 기다렸을 것이다. 기다리다 기다리다 목이 타들어갔을 것이다. 가을 단풍은 모든 나뭇잎이 목이 졸려 내지르는 비명이다. 머지 않아 생의 건널목을 건널 것이다.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양철나무꾼 2010-11-05 1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운사에도 그런 은행나무가 있어요.

오늘은 후와님 서재를 거쳐서 왔어요.
후와님 글의 답시 너무 좋아요,이 말씀도 꼭 드리고 싶어요~^^

반딧불이 2010-11-05 14:02   좋아요 0 | URL
지난달에 선운사에 갔었는데 꽃무릇만 눈이 무르도록 보고 왔네요. 진작 알았더라면 함께 보았을텐데요.

후와님의 시를 보고 깜짝 놀랐어요. 그냥 좋다고 하기엔 너무 성의가 없는 것같아 적었는데 다시 읽어보니 제 잘난척이 되고 만것 같아요. 제 의도는 그런게 아니었는데 말이죠.

cyrus 2010-11-05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 잘 읽었습니다. 밖에 노란색으로 물든 은행나무 이파리를 보면
가을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어서 좋은거 같아요^^
그리고 이 글과 전혀 관련은 없지만,,
프라이팬에 볶은 은행나무 열매 먹고 싶어지네요..^^;;
(위의 댓글과 비교가 되네요...ㅠ_ㅠ )

반딧불이 2010-11-05 23:23   좋아요 0 | URL
저한테는 그 노란 은행잎이 경고장으로 보일 때도 종종 있는걸요.

아. 저희동네는 가로수가 은행나무인데요. 저도 가끔 주워다 구워먹어요~

스트레인지러브 2010-11-05 2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무에도 자웅이 있는지는 처음 알았네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열매를 맺는다는 게.... 특이하네요.
제가 이과 쪽(생물 쪽)에 지식이 없어서일수도 있습니다만.

반딧불이 2010-11-05 23:26   좋아요 0 | URL
사실을 말하면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있으면 수그루의 꽃가루가 바람에 날려 암그루에게 닿아 수정을 하는 거지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는 제 표현이구요.

스트레인지러브 2010-11-05 23:36   좋아요 0 | URL
헤에, 그럼 은행은 한 그루만 심어놓으면,
은행이 열리지 않겠네요. 그런 것도 있었군요..

반딧불이 2010-11-05 23:46   좋아요 0 | URL
그렇죠. 평생 열매를 한번도 맺지 못하는 은행나무도 있겠죠.

기웃 2010-11-06 0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김현 선생님의 '행복한 책 읽기'가 걸려 있네요. 읽은지 꽤 오래되었지만 소중한 글귀들이 꽤 많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거리'라고 하니 '행복한 책 읽기'에서 진정한 친구는 옆에서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초조하거나 불편하지 않고 편한 게 진정한 친구가 아닌가-하고 언급했었죠.

반딧불이님이 말씀하신 은행나무의 '거리'는 수학에서 말하는 실수가 아닌 허수의 공간인 것 같네요. 혼자만 있으면 존재하지 않는 서로 곱해야지만 음의 공간/'거리'없음이 보이는- 그 미지의 보이지 않는 거리가 아닐까요..^^

반딧불이 2010-11-06 12:50   좋아요 0 | URL
제게도 행복을 전염시켜준 책이었어요. '책읽기의 괴로움' 역시 괴로움보다는 행복쪽으로 기울게 해주었구요. 이름 뒤에 '선생님'을 분명하게 붙여 부르시는 '기웃'님 반갑습니다.

실수나 허수 같은 수학용어들을 저는 잘 몰라요. 다만 암수 은행나무의 거리, 부용정과 부용지의 거리, 못물과 빗물의 순환과정을 생각했었어요. 물이 다시 물이되기 위하여 증발해야하듯이 '나'도 '나'가 되기 위해서 '나'를 여위어야하는 구나...생각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