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용지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차올라
온몸에 금빛 출렁이는
은행나무를 보거나
사람들 모두 다녀간 이후
고요한 연못에 홀로 드리운 부용정
닫힌 듯 미래로 열린
물속의 문을 보노라면
나는 말없이 떠난 자가
성긴 빗방울로 돌아와
문 두드릴 때
수많은 기다림의 나이테로
파문져 한 몸 되는
못물이고 싶다
물이 되기 위하여 물은
더 여위어야한다
바야흐로 은행나무의 계절이다. 은행나무는 암수 딴 그루이다. 암그루는 수그루를 저만치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수정을 하고 열매를 맺고 황금빛으로 출렁인다. 아름다운 거리다. 모름지기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켜야할 거리가 있는 법. 은행나무의 사랑법을 배울 일이다.
저물녘 실상사를 찾았다. 예전 대원각이었을 때 그곳에서는 고기를 굽고 풍악을 울리곤 했었다. 그 기운이 언제 걷혔는지 고즈녁한 산사의 느낌이 나를 사로잡았다. 지는 해가 녹인 황금물을 쏟아부었는지 은행나무는 황금촛대처럼 서 있었다.
나무는 떨켜를 만들어 가지끝으로 가는 물을 차단했을 것이다. 나뭇잎들은 뿌리로 부터 물이 오기를 목이말라 기다렸을 것이다. 기다리다 기다리다 목이 타들어갔을 것이다. 가을 단풍은 모든 나뭇잎이 목이 졸려 내지르는 비명이다. 머지 않아 생의 건널목을 건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