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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7
나쓰메 소세키 지음, 윤상인 옮김 / 민음사 / 2003년 9월
평점 :
나쓰메 소세키의 전기 삼부작(『산시로』,『그 후』,『문』)중 두 번째다. 『산시로』의 주인공은 시골에서 도쿄대학교 인문학부에 진학한 학생이다. 그의 희망은 시골에서 어머니를 모셔오고 아름다운 아내를 맞이하여 학문에 전념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직 학문적 성과도 경제적 능력도 없다. 아름다운 여자를 만났지만 여자는 금테안경을 낀 남자에게 시집가버렸다. 『그 후』는 그 후의 이야기다.
다이스케는 부유한 아버지 덕택에 하루 종일 책이나 읽고 음악이나 들으면서 지낸다. 본가에서 나와 부엌일과 심부름 하는 사람을 두고 혼자 살고 있다. 물론 생활은 본가의 아버지와 형님이 책임진다. 비록 생활비를 정기적으로 아버지에게서 받아 오긴 하지만 그는 다른 사람에게 들려줄 만큼 피아노 치는 실력도 있고 실내장식을 위해 서양화를 주문제작하기도 한다. 그는 잠결에 동백꽃 지는 소리를 들을 만큼 또 베개 밑이나 방의 네 귀퉁이에 향수를 뿌리고 잠을 잘 만큼 예민한 감수성을 지녔다. 그러니까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 훌륭한 교육을 받았고 매력 있는 육체와 빈틈없는 사고력을 갖추고 풍족한 생활을 즐기면서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다이스케에게 왜 일을 하지 않느냐는 친구의 물음은 어쩌면 당연하면서도 하나마나한 소리다. 생활만을 위한 일은 무가치 하며, 빵과 무관한 신성한 일이라면 왜 자기가 마다하겠느냐는 다이스케의 말은 그 만이 할 수 있는 너무나 당연한 대답이다.
이런 다이스케가 친구의 아내 미치요와 사랑에 빠졌다. 두 사람은 결혼 전부터 서로에게 호감이 있었지만 미치요는 다이스케의 친구와 결혼했다. 그러나 아이도 잃고 건강도 나쁘다. 더구나 남편의 부정행위로 직장을 잃고 생활이 곤란해지자 다이스케를 찾아온 미치요. 다이스케가 결혼 선물로 준 진주 반지를 전당포에 맡겨야 할 만큼 그녀의 생활은 곤궁하다. 남편은 새로운 직장을 찾느라 바쁘고 부부의 관계는 소원하다. 이런 미치요에게 안타까운 마음을 갖던 다이스케의 감정은 과거를 떠올리며 점점 연민으로 깊어간다.
회사 경영에 부정한 수단을 동원했던 다이스케의 아버지는 위기를 맞게 되고 다이스케에게 재력가의 딸과 결혼할 것을 강요한다. 아버지의 뜻을 따르게 되면 집안도 살리고 자신도 지금처럼 만족한 생활을 계속할 수 있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고 미치요를 택할 경우 부자간의 관계도 끊기고 당장 생활이 막막해지게 된다. 먹고 살기 위해 일하는 것을 타락한 노동이라 생각하고 감자를 다이아몬드보다 소중히 여기게 된다면 인간은 끝장이라고 믿는 다이스케는 어떻게 할 것인가?
소세키는 다이스케에게 아버지가 소중히 여기는 덕목에 역행하는 역할을 부여했다. 구시대적 통념에서 벗어나려는 인물로 그린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회적 재생산에 참여하지 않는 존재로 그리고 있다. 소세키는 다이스케의 연적인 히라오카의 입을 빌려 비판의 형식을 취하고는 있지만 거기에 서 큰 힘은 느껴지지 않는다.
『도련님』에서 보여 지던 건강한 웃음과 활기는 어디에도 없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서 보여 지던 잔잔한 웃음과 건강한 수다도 없다. 『산시로』에서 볼 수 있었던 청년의 수줍음도 없고 한차례 열병 같은 사랑도 아니다. 주인공들이 생활현장으로 한걸음씩 나아가면서 점점 무거워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