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갈라디아서
진 에드워즈 지음, 전의우 옮김 / 생명의말씀사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그전에 서점에서 발견하고 손에 들었다가 다시 놓았던 이 책을 1개월 후 다시 손에 들고 이번에는 계산대로 간 것이 저에게는 큰 행운이였습니다. 누군가 책에도 운명이 있다고 말하였듯이 책과 독자와도 인연이 있는가 봅니다. 그다음날 이 책을 단숨에 읽어버렸는데, 중간에 책을 놓을 수 없을 정도로 박진감 넘치는 이야기들 때문에 가슴 설레이는 기분을 오랜만에 가져보았습니다.

 

이 책은 바울의 동역자 실라의 입을 빌려,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디아 지방으로 1차 전도여행을 떠났던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책의 제목은 ‘이야기 갈라디아서’이지만 원서의 제목은 ‘실라의 일기’입니다. 실라의 회상일기 형식으로 당시 바울의 1차 전도여행 상황과 ‘갈라디아서’를 작성하게 된 배경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실라는 바울의 2차 전도여행에 동행하지만 이 책에서는 1차 전도여행 상황을 바울과 바나바로부터 들어 나중에 독자들에게 전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1차 전도여행은 사도행전 13-15장에 나오는데, 이 성경의 내용을 바탕으로 작가가 이야기를 창작한 것이 이 책입니다. 작가의 능력이 뛰어난 게 당시 바울 및 이스라엘, 이방인의 상황, 갈라디아 교회들이 처한 상황 및 갈라디아서를 쓰게 된 배경을 너무나 생생하게 재현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당시 현장에 있는 것으로 착각할 정도였습니다. 이 책을 읽고 관련 성경내용을 읽으면 성경 말씀이 2,000년 전으로 돌아가 살아 숨쉴 것입니다.


처음 시작부분은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마가(마가복음의 저자)가 안디옥 교회의 파송으로 1차 전도여행을 떠나는 모습이 나오는데, 처음 구브로 섬에서는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라고 바울이 자서전적으로 서술하는 상황이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매질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는 정말 자신이 직접 안 맞아보고는 모르겠지요?


구브로 섬에는 이미 복음이 들어와 있었기 때문에(오순절 성령강림 때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받고 돌아간 신자들이 있었음) 복음이 전혀 전하여지지 않은 곳(갈라디아 지방)으로 가기 위하여 배를 타고 앗달리아 및 버가로 가는데, 여러분들도 바울과 같이 이 배에 오르면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의 의미가 팍 다가올 것입니다. 이곳에서 망가진 몸을 회복한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마가는 이곳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감) 당시 복음이 전하여지지 않은 갈라디아 지방으로 가기 위하여 험한 여정을 시작합니다.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우여곡절 끝에 바울과 바나바는 로마제국 영토에서도 험하기로 소문나고, 시민들의 대부분이 노예와 자유인(해방된 노예)으로 구성되어 있는 위 갈라디아 지방 중 첫 번째 도시인 비시디아 안디옥(유대인 회당으로 찾아감)에서 첫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그래서 신자(대부분이 노예)가 생기게 되고, 이곳에 에클레시아(교회)를 세워지게 된 후 4개월을 머물면서 율법에서 자유한 복음을 전하다가 그곳 ‘유대인들’로부터 핍박을 받고, 이고니온으로 떠나게 됩니다. ‘세 번 태장으로 맞고’


이고니온에서도 4개월을 머물면서 복음을 전하다가 유대인과 이방인, 관원들이 돌로 치려하여 다시 루스드라로 옮겨 5개월을 머물면서 복음을 전합니다. 루스드라에서 바울이 앉은뱅이를 고친 사건을 계기로 이곳 사람들이 전설에 따라 바나바를 제우스신으로, 바울을 헤르메스(신의 메세지를 전하는 전령)로 착각하여 신으로 섬기려는 사건도 발생합니다. 루스드라에는 디모데가 살고 있었는데, 바울은 여기서 디모데와 첫대면하고, 디모데는 바울의 전도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됩니다. 그런데,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핍박하던 유대인들이 루스드라까지 따라와서 바울을 돌로 치고, 바울이 죽은 줄 알고 성 밖에 버리게 됩니다. 그러나 바울은 다시 일어나 복음을 전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참 대단합니다.


그후 더베에서 복음을 전하고, 수리아 안디옥으로 돌아올 때 편한 육로를 버리고 다시 루스드라, 이고니온, 비시디아 안디옥을 거치면서 교회들을 권면하고 앗달리아에서 배를 타고 수리아 안디옥으로 돌아오면서 바울의 1차 전도여행은 막을 내리게 됩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지방 네 곳(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에서 전한 복음은 ‘율법의 행위’ 없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내용입니다. 지금 현대상황에서 이 말씀은 당연하게 여겨질지 모르지만(그러나 아직도 율법주의적 복음이 도처에 있습니다.) 2천년전 갈라디아 지방의 이방인들에게는 이 복음이 분명 혁명적인 내용이였고, 할례와 율법준수를 자랑으로 여기고 있던 유대인들에게는 견딜 수 없는 모독적인 내용이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메시야로 믿는 유대인들은, 예수도 믿고 할례도 받고 율법도 준수해야 구원받는다고 공공연히 이야기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수리아 안디옥을 방문한 베드로의 외식을 책망하고(당시 베드로의 초석적인 지위와 바울의 지위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베드로가 우위였던 상황임을 염두에 두어야 함) 결국 예루살렘 회의가 열리게 되는 상황이 됩니다. 그 회의에서 이방인들도 할례없이 구원받는다는 내용을 확정하고 그 내용을 이방인 신자들에게 알리기 위해 편지로 써  유다와 실라를 이방인 교회로 파송하게 됩니다.

 

그런데, 바울의 적대자(책에서는 유대인이고 바리새인으로 묘사됨)가 갈라디아의 네 교회에 차례로 방문하여 그곳 신자들에게 온갖 감언이설로 바울을 비방하고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으려면 예수도 믿고 할례도 받고 율법도 지켜야 된다고 유혹(책에 보면 이 적대자의 감언이설이 얼마나 교묘한지, 정말 저도 모르게 넘어갈 정도로 잘 설명되어 있음)하게 되고, 갈라디아 교회들이 갈등하는 상황 중에 바울은 실라와 함께 위 교회들을 방문하기에 앞서 편지를 써 부치는데, 그 편지가 ‘갈라디아서’인 것입니다.

 

바울이 성령의 인도따라 목숨 걸고 세운 교회이지만 오래 머물지 못하여 아직 연약한 가운데 있는 갈라디아 교회들을 향한 바울의 외침은 거칠고, 가격하였습니다. 이 ‘갈라디아서’는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에게 받은 ‘이방인의 사도’라는 사명을 그대로 전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고, 이 복음 때문에 오늘 저도 할례없이, 율법 준수없이, 예수 믿어 구원받게 된 것입니다. 너무 감사한 일이지요. 그런데, 이 갈라디아서의 메세지가 세월이 지나면서 현대 교회들에게는 너무 순화된 것이 아닌가 반성해봅니다.

 

아무튼 이 책은 성경에 표현된 사도행전의 내용 및 바울의 자전적 서술들, 갈라디아서의 내용들을 다시 보게 합니다. 뭐랄까 성경의 글자가 살아 움직인다고 해야 되나...(너무 과찬인가?) 이 책의 작가인 ‘진 에드워드’의 책들이 우리나라에 여러 권 번역되어 있던데, 이 책에 반하여 몇 권을 주문하여 두었습니다.


(그중 ‘이야기 사도행전’은 사도행전 내용을 그린 것 같은데, 사실 이 책을 읽기 전에 먼저 읽었더라면 연대기순으로 더 적합하였을 거라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이 작가는 사도행전 이야기들을 시리즈로 책을 낸 것 같은데, 디도의 일기, 디모데의 일기, 브리스길라의 일기, 가이오의 일기 등도 하루 빨리 번역되길 바랍니다.)


당시 바울의 치열하였던 갈라디아 교회의 전도 상황을 이보다 더 리얼하게 묘사한 사람은 지금까지 없었을 것 같습니다. 강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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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빈치코드』를 보고..


세계적 베스트셀러인 댄 브라운의 ‘다빈치코드’를 영화화한 <다빈치코드>가 개봉되었습니다. 주위의 대체적인 분위기는 별루 재미없다는 반응이였는데, 저도 책을 읽어보지 않고 영화를 보아서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리 재미있는 영화는 아니였습니다.


영화평을 작성하기 전에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핵심 내용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 전에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아기를 임신하고 있었고,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 박해를 피해 마리아는 프랑스로 넘어가서 아기(여자)를 낳았으며, 그 자손들이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온다는 것입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이 사실이 밝혀질 경우 예수님의 ‘신성’에 타격을 입을 것과 교황청의 권위가 무너질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 후손들을 제거하려고 주교들의 비밀조직(요푸스데이)을 이용하여 예수님의 후손을 찾는데(그리고 제거하려는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시온수도회’라는 비밀조직은 이에 대항하여 예수님의 후손을 수호하는데 조직의 사활을 걸고 지켜내고 있으며, 예수님의 후손이 있다는 사실과 위치를 암호화(코드화)해서 다른 사람들은 이 암호를 풀 수 없고, 핵심멤버(시온수도회의 수장)만 이를 풀 수가 있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 예수님의 후손을 둘러싼 쫓고 쫓기는 싸움은 1세기부터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살던 15세기까지 이어지고, 다빈치가 “최후의 만찬”을 그리면서, 예수님의 후손이 있다는 사실을 이 그림에 암호화(코드화)시켜놓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다빈치는 ‘시온수도회’의 수장이였구요.


그러면, 이 그림의 어디에 코드화시켜 놓았을까요? 이 “최후의 만찬” 그림에는 ‘성배’가 없다고 합니다.(저도 처음 알았습니다.) 아니 최후의 만찬에 성배가 없다니요?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에 제자들과의 최후의 만찬에서 떡을 떼시고, 술을 잔에 부으시면서 이는 내 살과 피라고 하시면서 이를 기념하라고 말씀하였지 않은가요?

그런데, 왜 다빈치는 최후의 만찬의 핵심인 술잔(성배)을 빼버렸을까요? 그것은 성배는 술잔이 아니라 막달라 마리아인 것을 나타내기 위해 성배를 빼버렸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예수님의 우측옆(예수님쪽에서)에는 공간이 비어있고, 예수님의 반대방향으로 비스듬이 누워있는 사람이 마리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공간의 라인을 따라가면 성배가 그려진다는 것입니다. 성배가 코드화(고대에는 잔이 여자를 상징한다나요?)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비스듬이 기대어 있는 마리아를 예수님의 좌측옆으로 이동시키면 정확하게 예수님의 좌측으로 기대어있는 모습과 자연스럽게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실제 그림을 보고 설명을 하면 더 쉬울 텐데(네이버에서 조회해서 보시면 됩니다.) 아쉽지만 일단 넘어갑시다. 그동안 예수님의 성배를 찾는 전설이나 영화, 소설 등이 무수히 많았는데, 이 영화에서는 그 실체가 막달라 마리아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15세기의 다빈치가 “최후의 만찬”에 코드화시켜 놓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재까지 잘 보존(시온수도회 덕분?)되어 그 예수님의 후손이 ‘소피’라는 여자주인공이라는 것이 결론입니다.


이 후손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하고 극적인 요소들이 배치가 되면서 영화가 구성되었습니다. 영화에서는 약간 지루한 면도 있었으나, 소설을 읽어본 사람들의 반응은 재미있다는 것입니다. 저도 영화를 관심있게 보았습니다. 그러면 이 내용이 사실일까요?

여러분, <다빈치코드>는 소설이고 영화입니다. 즉, 허구라는 것입니다. 착각하지 마시고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은 역사소설이나 대하소설을 읽어보셨을 것입니다. 저도 옛날에 역사소설 등을 좋아해서 읽어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실존인물’이 등장하면서 ‘역사적 사건’을 중심으로 작품이 ‘구성’되면 그 소설 전체를 사실로 오인을 할 수가 있는데, 그것은 작가가 실존인물과 역사적 사건만을 발췌하여서 세밀하게 새로이 구성한 플롯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러한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면 그 작가의 뛰어난 ‘구성’ 때문입니다. 이를 역사적 사실과 동일시하면 안 됩니다. 이 소설도 댄 브라운이라는 작가가 쓴 소설입니다. 여기서 실존인물과 역사적 사실로 등장하는 것은 다빈치와 “최후의 만찬”인 그림입니다.


여기서부터 영화에 대한 비평입니다. 다빈치가 실존인물임에는 틀림없으나 이 다빈치가 ‘시온수도회’ 수장이였다는 말은 금시초문이고, 허구입니다. “최후의 만찬”도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가 만찬 자리에 있었다고 쳐도 그 사실이 예수님과의 관계(결혼)를 통해 후손을 낳았다는 결론은 비약입니다. 설사 성배가 없다손 치더라도, 이것을 막달라 마리아와의 결혼으로 연결하는 것은 비약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를 사랑하셨다는 내용이 나오는 복음서나 ‘막달라 마리아 복음서’가 있다고 해도, 이것을 가지고 예수님과 결혼하였다는 결론으로 이끄는 것도 비약입니다. 사실 이런 내용(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하였다는 내용)은 “예수의 마지막 유혹”이라는 영화에도 언급되었던 내용이지요.

 

또한, 성배가 마리아를 상징한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예수님의 후손하고 뭐가 상관이 있습니까? 이것(즉, 성배가 마리아를 상징하더라도)이 예수님의 후손이 있다는 내용에 결정적인(혹은 정황적인) 증거가 되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마치 진화론자들의 진화단계 이론에서 결정적인 ‘연결고리’가 빠졌듯이.


따라서 이 영화의 핵심요소인 다빈치의 그림에서 마리아를 발견할 수는 있어도 그 외 추가적인 요소(예수님이 마리아와 결혼한 사실과 후손이 있다는 사실)는 작가의 상상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너무 진지하게 대응하였는가요? 단지 소설일 뿐인데...


사람들은 열광합니다. 현대인들은 이슈를 찾아서, 이벤트를 찾아서 몰려듭니다. 할인점이나 백화점에 이벤트 행사한다면 물불 가리지 않습니다. 언론에서는 이러한 이슈들만 노리고 뉴스에 게재를 하고, 폭발적인 조회수가 현대인의 이런 경향을 증명합니다. 하루하루가 새로운 사건으로 넘쳐나기를 바랍니다. 지루하고 평범한 것은 견디지를 못합니다.


모든 회사에서 상품을 판매하기 위해서는 이런 대중심리를 마케팅에 적극 이용하여야 성공합니다. 이것은 영화산업이나, 소설이나, 음악계나 차이가 없습니다. 댄 브라운은 이 심리를 적극 이용하였습니다. 이 심리는 현대인의 고유한 심리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고유한 심리입니다. 세계 최대의 종교인 기독교에서 핵심교리인 예수님의 ‘신성’을 공격하는 소설책에, 세계가 열광하지 않을 수가 없지요. 돈방석에 앉았습니다.(세계적으로 4,300만부가 팔렸다고 하고, 우리나라에서는 260만부가 팔렸다고 합니다.) 당연히 영화로도 만들어져야지요.


비기독교인들이 열광하는 이유는, 정말 기독교인들의 행태를 보니 미워죽겠는데, ‘울고 싶은데 뺨때려준다’고 기독교의 핵심교리를 공격하고, 또한 기독교 교리 자체에 대한 거부감으로 열광할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에게는 악마의 책이라는 둥, 사실일까? 라는 둥 온갖 호기심을 갖게 하니 열광합니다. 흥행이 되니 출판계, 영화계, 부수사업 등에서 등달아 이슈화시킵니다. 원래 세상의 구조가 이렇게 흘러가게 되어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개봉된다고 하니, 한기총에서 결사반대한다고 하고, 이것이 다시 이슈화되고, 사람들은 영화를 더 많이 봅니다. 한기총이 오히려 흥행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역설이지요.

교회에서는 목사님들이 앞 다투어 이런 악마의 영화를 보면 안된다고 하는데, 교인들은 보고 싶어 미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는 사람은 속은 후련하지만 목사님이 보지 말라고 했는데 봐서 내 믿음에 어떤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까 불안하고, 끝까지 안보는 사람은 믿음이 좋다고 스스로 자위해 봅니다만, 어딘지 찝찝합니다.

뭐가 그리 불안한가요? 예수님의 복음하고 이 소설하고 뭐가 상관입니까? 예수님의 후손이 있다는 허구의 사실이 무슨 비밀이라도 되는 양 안달입니까? 이것은 비밀이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이런 것을 비밀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십자가’를 비밀이라고 합니다. 정말 이것만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후손이 감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구요. 이 ‘십자가’의 코드(비밀)는 ‘시온수도회’ 수장도 모릅니다. 제발 오해하지 마세요.


정말 우리는 믿음이 없습니다. 안 그런가요?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산을 바다에 던지울 것이라는 말씀이 실감나지 않은가요? 우리들의 ‘믿음없음’을 고발하기 위해서 이 영화는 만들어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진짜 믿음이 선물로 주어진 자만 찾는 작업, 이것이 예수님의 추수작업일 것입니다.

그래서 영화를 보란 말인가요? 말란 말인가요? 저는 별루던데 보고 싶으면 보세요. 그런데 아마 “미션임파서블 3”보다 재미없을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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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편안한 마음으로 영화를 보았는데, 이 영화가 저에게는 기대이상으로 다가오기에 몇 자 적어봅니다.

 

대충 줄거리를 이야기하면, 박정희 군사독재시절이 최절정에 이르는 1969년을 배경으로 대학을 다니던 부잣집 아들 윤석영(이병헌 분)이 여름방학 때 농활(농촌봉사활동)을 가서 그 마을 도서관 사서로 있는 서정인(수애 분)을 만나면서 서로 사랑이 싹튼다는 내용입니다.


약 열흘 동안 머물면서 서정인과의 추억을 쌓아가는 중에 서정인의 부모님이 도서관을 만들었으나 월북하는 바람에 그 마을 전체에 피해를 입히게 되고 서정인은 마을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농활의 마지막 날 밤에 대학생들이 마을 사람들을 위해서 영화를 상영해주고, 그 와중에 마을 도서관이 불에 타버리면서 서정인은 윤석영을 따라 서울로 가게 됩니다. 여기까지는 대학생과 농촌처녀의 그렇고 그런 사랑이야기인데, 그후 사건이 급반전 됩니다.


일단 윤석영은 서정인과 함께 자신이 다니는 대학교정으로 가서 서정인에게 자신의 가방을 맡기고 학생회 사무실로 올라가는데, 학생회측에서는 박정희 3선 개헌반대 집회를 개최하고, 윤석영과 서정인은 이 데모에 휩싸이게 되면서 서정인이 경찰서로 연행이 되고, 윤석영도 연행이 됩니다.


문제는, 서정인이 부모님(연좌제) 때문에 사상을 의심받게 되고, 서정인이 들고 있던 윤석영의 가방 때문에 윤석영도 간첩혐의로 의심을 받게 되면서 폭력과 협박에 의한 취조가 진행되는데, 윤석영의 아버지는 윤석영에게 서정인을 모르는 여자라고 이야기하라고 합니다.


경찰관의 심문에 윤석영은 서정인을 모르는 여자라고 부인을 합니다. 그러자 경찰관은 윤석영을 서정인의 취조실로 데려가서 대질심문을 합니다. 서정인은 윤석영을 보자마자 반가운 마음으로 쳐다보는데(여기서 수애의 연기가 일품이지요), 윤석영은 자신이 살려고(당시 시대상황에서 간첩 혐의가 인정되면 최대 사형, 최소 몇 년은 징역살이를 하여야 합니다.) 서정인을 모르는 여자라고 합니다.


서정인은 결국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도 윤석영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여 윤석영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 결과 윤석영은 바로 석방이 되고, 서정인은 남한산성에서 징역살이를 하는데, 윤석영은 사랑하는 여자, 서정인을 부인하였다는, 버렸다는 죄책감에 아버지에게 부탁을 하여 서정인도 석방을 시키고, 이제는 절대 서정인과 떨어지지 말자며 무작정 기차를 타고 둘이서 떠나려고 합니다.


그러나 대기실에서 윤석영이 약을 사러 간 사이 서정인은 홀연히 떠나게 되고, 윤석영은 이 서정인을 찾아 36년 동안 전국을 헤매지만 결국 찾지 못하고 독신으로 대학교수를 하며 지내는데, 방송국에 다니는 제자를 통하여 편백나무 잎으로 만든 카드를 보고, 추적하여 서정인이 자신과 헤어진 후의 행적을 알게 됩니다.(물론 서정인은 죽었죠.) 그리고 영화는 막을 내립니다.


이 영화를 통하여, 두 가지를 느꼈습니다. 먼저 취조실에서 서정인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윤석영의 모습이 베드로가 십자가 지시기 전날 밤 예수님을 부인하는 모습과 오버랩이 되었습니다. 윤석영이 서정인을 사랑한다고 자신하던 모습이 취조실에서는 자신이 살려고 부인하는 모습으로 바뀌는 것이 베드로와 꼭 같습니다. 저나 여러분도 당시 상황에서 윤석영처럼, 베드로처럼 부인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베드로가 어떻게 다시 예수님을 믿게 되었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승천 후에 주어진 성령의 역사 때문일 것이고, 예수님의 기도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베드로는 평생 그 흔적을 가지고 살 것입니다. 윤석영이 서정인을 그리워하면서 살듯이...


두 번째 느낀 점은, 이미 사랑하심을 입은 자에게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언젠가는 미칠 것이라는 것입니다. 영화에서, 서정인이 언젠가는 윤석영에게 전달될 거라고 확신하며 편백나무 잎으로 만든 카드를 주위 사람들에게 전달하여 그 향기가 전해졌듯이...

 

성경에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합니다. 문제는 생명의 향기를 담당하는 자도 있는 반면에 사망의 향기를 담당하는 자도 있다는 것입니다.(고후5:16) 이것을 우리는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오직 주님께서 감당케 하심으로 가능할 것입니다.


올 겨울엔 이 영화를.... 아니면 편백나무 향기를 맡으심이 어떨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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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와 칼- 위에 서는 힘, 아래에서 섬기는 힘
그레고리 보이드 지음, 신선해 옮김 / 한언출판사 / 2007년 5월
12,000원 → 10,800원(10%할인) / 마일리지 6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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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새로운 출발을 위하여
레스리 뉴비긴 / 대장간 / 1994년 4월
2,200원 → 1,980원(10%할인) / 마일리지 11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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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모던 시대의 진리
레슬리 뉴비긴 지음, 김기현 옮김 / IVP / 2005년 9월
4,500원 → 4,050원(10%할인) / 마일리지 22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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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던 시대의 기독교 세계관
브라이안 왈쉬 외 지음, 김기현 외 옮김 / 살림 / 2007년 5월
20,000원 → 18,000원(10%할인) / 마일리지 1,0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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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과 예수
데이빗 웬함 지음, 이한수 옮김 / 크리스챤출판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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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신학개요
톰 홀랜드 지음, 박문재 옮김 / CH북스(크리스천다이제스트) / 2005년 3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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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생애와 신학
박헌욱 지음, 박은숙 옮김 / 대한기독교서회 / 2005년 11월
12,000원 → 10,800원(10%할인) / 마일리지 60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2월 19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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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과 예수
에버하르트 융엘 지음, 허혁 옮김 /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 1982년 9월
13,000원 → 12,350원(5%할인) / 마일리지 6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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