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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열심
박영선 지음 / 새순출판사 / 1992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어느 목사님은 박영선 목사님의 “하나님의 열심”은 믿음의 본질에 대해서 가장 탁월하고도 감동적으로 서술한 책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책이 처음 나왔을 때(8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한국 기독교계에서는 믿음에 대해서 제대로 정의를 내리거나 설명을 하지 못하였으나, 박영선 목사님께서 최초로 믿음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믿음이란 우리가 열심히 믿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열심히 일하신 결과라고 하였습니다. 박영선 목사님께서는 그 외에도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라던지, 많은 복음적인 내용들을 한국 기독교계에 소개한 분입니다. 저도 박영선 목사님의 책들 때문에 복음적인 말씀을 접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책은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아브라함, 야곱, 요셉, 모세, 욥, 다윗, 엘리야, 베드로-을 대상으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들의 인생에 간섭하셔서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었는지에 대해서 성경 말씀을 가지고 추적을 하고 있습니다. 총 15장으로 되어 있는데, 저는 분량 관계상 이 책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아브라함의 생애만을 저자의 순서대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아브라함>
제일 많은 부분(총 5장)을 할애하여 아브라함에 대해서 성경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왜 믿음의 조상이 되었는가? 아브라함에 대한 이 부분들은 이 책의 핵심이고,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믿음의 본질에 대해서 명확하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즉, 믿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아브라함의 생애를 통해서 펼쳐내 보였다는 것입니다.
제1장은 <갈대아 우르>인데, 저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부르실 때, 아브라함은 이방신을 섬긴 사람이였다고 -처음 이 책이 출판될 당시에는- 다소 충격적인(?) 서술을 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 24장에서 아브라함의 아버지인 데라가 이방신을 섬겼다고 하였는데, 고대 사회에서는 가족공동체이기에 아브라함도 아버지인 데라의 영향을 받아서 이방신을 섬겼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만!!! 사도행전 7장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 있을 때, 영광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라고 하여서 아버지 데라와 의논하여 데라의 주도하에 어쩔 수 없이 고향땅을 떠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고대 사회에서 고향을 떠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은 정말 가기 싫은데, 영광의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가라는데 안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대아 문명의 최변방인 하란까지는 왔으나, 더 이상 가나안땅까지는 가지 못하고 하란에서 눌러 살게 되었고, 거기에서 데라가 죽자, 다시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하나님이 지시할 땅이 가나안 땅이라는 것은 창11:31절에 나옴)으로 가라고 하여서 아브라함이 마침내(창12:5) 가나안 땅에 도착을 하였습니다. 여기까지 살펴보았을 때, 여기의 마침내는 아브라함이 가나안땅에 가고자 고생고생하여서 마침내 가나안땅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방신을 섬기는 아브라함을 일방적으로 부르셨고, 또한 하란땅에 눌러 앉은 아브라함의 등을 떠밀어 마침내 가나안땅에 오게 되었다는 마침내 입니다. 즉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사도행전 7장 4절에도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가나안땅으로 옮겼다고 나옵니다. 1장을 마무리하면서 저자는 불신앙으로 출발한 아브라함이어야만 우리가 믿는 이 구원이 복되다고 합니다.
2장은 <애굽에 가다>인데, 2장은 가나안에 들어온 아브라함은 세겜에 거주하다가 다시 옮겨 벧엘과 아이 사이에 거하다가 또한 남방으로 옮겨 거하다가 기근을 만나 애굽으로 내려갔다는 내용으로 시작을 합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이 기근을 만나 애굽으로 간 사건을 박영선 목사님 이전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앙의 타락이라고 보았는데, 전혀 그런 내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자는 왜 신앙의 타락이 아니라고 하냐면 하나님께서 여기에 대해서 꾸짖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냥 자연스럽게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갔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걱정입니다. 고대 사회는 자기 목숨과 재산은 자기 힘으로 지킬 수 밖에 없는 살벌한 때인데, 자기 아내가 너무 예쁘니 바로 왕이 아내를 뺏기 위해서 자기를 죽일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바로 왕에게 누이라고 거짓말을 합니다. 그래서 바로 왕이 아브라함에게 양과 소와 노비 등을 주고는 사라를 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일로 바로에게-아브라함이 아닌-큰 재앙을 내리자 바로 왕은 혼줄이 나서 아브라함에게 왜 내게 거짓말로 속였냐고 하면서 사라를 돌려주면서 떠나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소유 하나 잃지 않고 오히려 마누라 때문에 치부하여서 가나안땅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저자의 말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이 사건을 통하여 자기를 부르신 하나님은 당시 전 세계 문명의 최고 통치자인 바로 왕 보다도 더 세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그 뒤에 나오는 두 가지 사건에서 나타납니다. 하나는 롯과 헤어지는 사건(창13장)인데, 앞에서도 설명을 하였지만 당시 고대사회에서 자기 혈육과 헤어질 결심을 한다는 것은 보통 결심이 아닙니다. 또한 롯에게 먼저 땅의 선택권을 주는 배짱은 애굽에서 체험한 하나님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 사건은 고대 아홉 왕이 싸우는 세계대전에서 조카 롯이 사로잡혔을 때 사병 318명을 데리고 가서 롯을 구출하고 빼앗겼던 재물도 찾아오는 사건입니다. 아브라함이 어디에서 이런 담력이 생긴 것일까요? 저자는 애굽 사건 때문이라고 합니다. 애굽에 가기 전에는 마누라 때문에 자기가 죽을까봐 바로 왕을 속이던 위인(?)이 애굽에서 나오면서 이렇게 변한 것입니다.
저자는 이 책에서 롯을 구출하는 장면을 설명하면서, 멜기세덱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습니다만 이 부분은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므로 제가-저도 다른 목사님에게 들은 내용이지만- 잠깐 언급을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아브라함이 롯을 구출하고 돌아올 때에서 소돔 왕도 영접을 나왔고, 살렘 왕 멜기세덱도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서 아브라함에게 주면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창14:20) 라고 축복합니다. 롯이 사로잡혀 갔다는 소식을 듣고 아브라함이 구출하러 가긴 가지만 318명 가지고 어떻게 당시 속국을 거느린 4개 연합군을 이길 수가 있습니까? 즉, 자기 실력으로 이긴 것이 아닌데 라는 생각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멜기세덱을 통하여, 자기에게 나타나신 그 하나님께서 대적을 붙여주셔서 아브라함이 이기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가 가진 재물들은 자기의 실력으로 가지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복으로 주셔서 받게 되었다는 것을 고백하는 의미로 십일조를 멜기세덱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소돔 왕이 사로잡혔던 사람들만 돌려주고 전리품은 아브라함이 가지라고 하여도 아브라함은 전쟁에서 승리한 복이 자기 때문이 아니고 하나님 때문이기에 이 제안을 거절합니다. 이 부분은 성경에서 최초로 여호와의 붙이시매 전쟁이 나오고, 하나님의 제사장인 멜기세덱이 나오고, 십일조가 나옵니다. 이런 부분들은 너무나 중요한 내용이지만 구체적인 설명은 이 글의 논지에서 벗어나므로 이만 줄이겠습니다.
3장은 <믿음>인데, 드디어 이 부분(창15장)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이것을 의로 여겨주셨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15장은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구하고, 멜기세덱을 만나고 난 이후부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다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하나님 자신이 아브라함에게 방패이고 지극히 큰 상급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저자의 표현에 의하면, 그러자 아브라함이 대꾸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전에는 하나님께 이끌려 다니면서 애굽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이라는 분이 바로 왕 보다도 더 센 대단한 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롯구출 사건을 통하여 그 하나님이 자기를 편들어 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이제 하나님과의 관계가 대화하는데 까지 진전하였다는 것입니다.
애초에 아브라함이 부름을 받았을 때(하란에서)에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고, 복의 근원이 되게 하여주겠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롯과 헤어졌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셔서 가나안땅을 아브라함과 후손에게 주고, 자손도 땅의 티끌같이 되리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물어봅니다. 내게 무엇을 주실 것인가요? 나는 아직 자식이 없는데, 하나님은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리라고 약속은 하셨으나 씨는 주시지 않고, 그러면 종인 엘리에셀이 나의 상속자가 될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네 몸에서 날 자가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하면서 하늘의 셀 수도 없이 많은 별과 같이 네 자손이 그렇게 되리라고 하자,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것을 아브라함의 의로 여기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자는 이 믿음이 아브라함에게서 나온 것인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인지를 묻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아브라함의 행적을 봤을 때, 이 믿음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서 여태껏 만들어 오신 것의 결정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로마서 4장을 가지고 아브라함은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은 것이 아니고,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롭다함을 받았다고 합니다. 구원이란 하나님이 우리를 중생시키시고 열심히 설득시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즉, 구원이란 하나님에게 원인행위가 있지, 우리에게는 원인행위가 없고, 나중에 그 구원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가 그 사실을 시인한다는 것이지요. 이 믿음의 문제가 박영선 목사님께서 강조하시는 핵심이 되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잠깐 곁길로 나가겠습니다. 원래 저자의 의도는 성경의 믿음사건을 추적하는데 목적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신 내용(창15장 후반부)은 생략합니다. 그러나 기왕 아브라함의 생애를 추적하였고, 성경에서 중요한 언약사건을 여기에서 언급하기 때문에 잠시 다루고 넘어 가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3년 된 암소 등을 잡아라고 하자 아브라함이 짐승들을 잡아서 중간을 쪼개어 놓았고, 타는 햇불이 쪼갠 고기사이로 지나갔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었다고 합니다. 원래 고대사회에서 언약은 언약 당사자 모두가 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면서 언약을 체결하는데, 언약을 어길 시 이 고기처럼 쪼개어져 죽을 것이라는 의미가 있는데, 이 쪼갠 고기사이로 아브라함은 지나가지 않았고, 오직 하나님(타는 햇불)만이 고기 사이를 지나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죽음을 담보로 언약을 반드시 이루겠다는 뜻이겠지요. 또한 이 언약에는 희생된 제물이 있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팔머 로벗슨 교수는 <계약신학과 그리스도>에서 이 언약을 “주권적으로 맺어진 피의 약정”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언약의 내용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400년 동안 그들을 섬기다가 가나안땅으로 돌아오고. 또한 애굽 강에서부터 유브라데 강까지 땅을 차지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약속은 애굽생활과 광야생활, 사사시대를 거쳐 약 1,000년 만에 성취가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자기의 언약을 이루는데 있어서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이 아브라함 언약은 뒤에 나오는 모세언약, 다윗언약, 새언약 등에 바탕을 이룹니다.
4장은 <할례>인데, 아브라함이 99세 때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라고 하면서 시작을 합니다. 이 말씀의 배경은 창세기 16장에 나와 있는데, 사라가 잉태치를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하늘의 셀 수 없는 별과 같이 많은 자손이 있으리라고 하였는데, 사라가 잉태치 못하여 아브라함에게 여종 하갈과 동침하라고 하자 아브라함도 순순히 동의를 하고, 하갈은 잉태를 하게 됩니다. 여기서 저자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이스마엘을 낳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가 86세이고, 다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났을 때가 99세, 즉 13년 만에 나타나서는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아브라함을 꾸짖고 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5장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 사건 이전에는 믿음 없음을 나무라지 않지만 그 이후에는 전능의 하나님을 믿고 완전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름을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꾸어 주면서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창17:5)라고 말씀하였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심점이 “열국의 아비”가 아니라 “되게 하겠다”에 있다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약속을 이루어 가겠다는 표현입니다. 자식이라고는 딸랑-그것도 약속의 자식이 아니지만-하나 있는데, 열국의 아비라니요? 얼마나 창피하겠습니까?
여기서 저자는 하갈을 통하여 이스마엘을 낳은 사건을 하나님을 믿지 못하여서라고 합니다만, 저는 약간 다르게 생각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창15:4)고 하였기 때문에 자손이 사라와의 사이에서 꼭 태어나야만 하는 것이냐고 생각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16장 3절에 보면 가나안에 거한지 10년이라는 것으로 봐서 사라가 잉태할 때까지 많이 기다렸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야겠고, 그래서 하갈을 낳았다고 생각됩니다. 창세기 16장까지의 계시로 봐서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생각이지요. 그렇다고 아브라함이 믿음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약속을 어떤 방식으로 이루실지를 전혀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 약속을 없는데서 있게 하는 방식으로, 죽은 데서 살리시는 방식으로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보아서 알지만 그 당시(이스마엘을 낳을 때까지) 아브라함은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름을 바꾸어 주시면서 나라들과 열왕이 네게로 좇아 나리라, 심히 번성케 하겠다, 너와 네 후손 사이에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겠다... 등등을 말씀하시면서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명하십니다. 내게 속한 모든 남자는 할례를 행하고, 태어날 남자들도 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명하면서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저자는 할례의 의미를 거룩(구별)케 된다는 의미로 이야기합니다. 할례받지 않았다는 것은 거룩하지 않다는 의미라는 것이지요. 좀 더 보완하면, 인간의 생식능력을 부정한다는 것이지요. 약속의 자녀는 아브라함의 혈통이나 육정으로 태어나지도 않고, 이미 태가 끊어진 사라의 몸으로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으로만, 말씀의 능력으로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믿음의 세계로, 구원으로 인도하시는데, 우리들은 안 따라가려고 고집을 부린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집을 부려보았자 80년인데, 하나님의 고집은 영원하다고 하면서 우리가 더 이상 고집부리지 말고 하나님께 나아가자고 권면을 하면서 이 장을 마무리 합니다.
5장은 <이삭>인데, 그 유명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사건(창22장)입니다. 여기서 저자는 왜 하나님께서 갑자기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였을까? 라고 의문을 가지면서 이 사건을 창세기 12장 1절의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장면과 연결을 시킵니다. 창세기 12장의 축복의 내용과 창세기 22장의 축복의 내용에는 차이점이 있는데, 그것은 씨(자손)에 관한 말씀이 있냐? 없냐? 에 있습니다. 저자는 창세기 12장에는 없던 씨에 관한 내용이 창세기 22장에서는 이 씨가 가장 중요한 내용을 차지한다는 것입니다.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창22:18). 창세기 12장의 아브라함을 부르심에서 시작해서 22장의 독자 이삭을 바치는 사건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네 씨로 말미암아 내가 네게 축복한 것이 사실이 된다”는 것을 알게 하려고 여기까지 끌고 왔다는 것입니다. 너에게 축복한 모든 것이 네 자손에게서 성취가 된다는 것을 알리고, 그 자손은 장래에 나타날 어떤 단수의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는 이 씨(자손)를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이 약속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갈3:16).
저자는 또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는 사건을 할례와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할례는 너의 생식능력은 끊어졌다는 것을 상징화 한 것이고, 그러함에도 네 몸에서 자식이 나오면 네 자식은 육으로 말미암은 자식이 아니고 약속으로 말미암은 자식이라는 것을 더욱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삭은 네 자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행위를 통하여 이삭이 네 자손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고 깨달아 라는 것입니다.
이 사건에서 한 가지를 더 언급을 하면,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바치는 사건을 통해서 로마서에서는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하나님(롬4:17)으로 믿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알았습니다. 이삭이 죽어도 산다는 것을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어떻게 이삭이 죽어도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믿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 때문입니다.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다의 모래 같으리라는 등등의 약속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또한 아브라함은 어떻게 하나님의 언약을 믿을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실제로 100세된 아브라함과 태가 끊긴 사라에게서 이삭이 태어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없는데서 있게 하는 방식으로 일하는 하나님이심을 체험하였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자기 생애를 통해서 경험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삭은 죽었다가 살아난 자의 상징이 되고,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가 된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3일 만에 다시 부활하신다는 사실이 구약으로 거스려 올라가 아브라함 시절에 미리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을 언급하면서 “아브라함이 나의 때 볼 것을 보고 기뻐하였다”고 하셨는데, 아브라함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듯이 예수님을 알 수는 없었겠죠.
지금까지 아브라함의 생애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가를 보았습니다. 저자는 아브라함의 생애를 통하여 믿음을 풀어보려고 하였습니다. 저자의 결론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이 우리의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 때문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박영선 목사님의 저서들을 통하여 많은 유익을 받았는데, 이 책은 박영선 목사님이 남서울교회 에선가 부교역자로 계실 때 설교한 내용을 책으로 만든 것입니다. 박영선 목사님의 목회 초기에 설교하였던 내용들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완전할 수가 없습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박영선 목사님의 성화론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거룩은 되어가는 과정이 아니라 상태(구별,분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성화에 초점을 맞춘 내용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실 때 믿음이라는 방식으로 구원하시는데, 이 믿음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고, 하나님이 열심히 일하신 결과라는 것입니다. 믿음에 대해서 고민하신 분들에게 많은 유익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