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이스라엘
팔머 로벗슨 지음, 오광만 옮김 / 기독교문서선교회(CLC)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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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신학과 그리스도>를 쓴 작가로 널리 알려진 팔머 로벗슨 교수의 이 책은, 저에게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란 누구인가에 대해서 많은 유익을 주었습니다. 2년 전에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의 지도자가 사망한 사건이 발생하면서 팔레스타인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안개정국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성경적인 관점에서 이스라엘의 땅이나 백성의 개념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이 책은 서론과 결론을 제외하고 총 6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차례대로 간략하게 내용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1장 <하나님의 이스라엘: 이스라엘의 땅>에서 저자는 이스라엘의 땅은 언약의 주님께 속한 땅이라고 합니다. 레위기에는 “토지를 영원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레25:23)라고 하면서 그 땅을 팔아서는 안된다고 합니다. 이 사실은 온 땅과 우주가 주님의 것이라는 것을 전제할 때 올바로 이해할 수가 있다고 하면서 출애굽기, 신명기의 구절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인정합니다. 이 성경의 땅은 이스라엘 국가의 땅도, 팔레스타인 국가의 땅도 아닙니다. 주님의 땅인 것입니다. 또한 이 땅은 거룩한 곳이라고 합니다. 주님이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가나안 사람들이 땅을 더럽혔기 때문에 그 땅이 그들을 토하여내었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땅을 더럽혔기 때문에 그 땅이 그들을 토하여내어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이 땅은 아브라함과 자손에게 약속한 땅이었으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땅을 더럽혔기 때문에 새롭게 회복이 되어야 합니다.


시편에서는 의인이,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하리라고 합니다. 선지서에서는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가 거기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겔37:12)라고 하면서 무덤에서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에 근거하여 땅으로의 귀환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저자는 이러한 땅에 대한 이해가 새 언약의 성취에 있어 이방인 세계를 포함하는 것으로 확대되었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땅에 대한 약속을 궁극적으로 성취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생각합니다. 이 땅에서 진정한 의인과 온유한 자는 예수이고, 무덤을 열고 부활한 사람도 예수입니다. 우리는 이 예수를 믿음으로 약속에 참여한 자가 되었습니다. 이 땅은 결국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반영한다고 생각합니다.


2장 <하나님의 이스라엘: 이스라엘 백성>에서 저자는 “하나님의 이스라엘”이 누구인가에 대해서 여러 가지 논의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 즉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기를 원하노라”(갈6:16)라고 말씀하는 구절에서 “하나님의 이스라엘”의 다양한 논의들을 소개합니다. 첫 번째 이해는 위 하나님의 이스라엘은 이방인 세계와 구별되는 공동체인 유대 백성을 지칭한다고 하고, 두 번째 이해는 선택받은 유대인들이라고 하고, 마지막 이해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연합된 새로운 공동체라고 합니다. 저자는 헬라어 접속사 카이의 용법이 동격(설명적)이라고 하면서 세 번째 입장을 지지합니다. 이 장의 내용은 다음에 계속될 장들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3장 <하나님의 이스라엘: 이스라엘의 예배>에서 저자는 이스라엘의 제사 제도와 제사장 제도를 설명하면서 모든 부분을 히브리서 7장을 주해하는데 할애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에서는 레위 계통의 제사장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진정한 제사 제도와 제사장 직분의 성취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이스라엘의 제사 제도는 동물의 희생을 통하여, 대신 희생당하는 자가 있기에 죄 용서를 받을 수 있다는 것과, 제사장의 중보 사역을 통하여 제사가 드려질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더 나아가 이런 제도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희생당하심과 지금도 살아계셔서 약속의 자녀들에 대한 영원한 중보 사역을 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반영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점에서 현재의 이스라엘 땅에서 새로운 성전을 건축하고 동물제사도 지내야 한다는 일부의 주장은 참으로 어리석다고 생각이 됩니다.


4장 <하나님의 이스라엘: 이스라엘의 생활양식>에서 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활양식으로써 성경에 나타난 다양한 광야 영상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이후 40년 동안의 광야는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거쳐야 하는 시험의 땅이요, 죄가 드러나는 곳이며, 구원의 장소인 것입니다. 이러한 광야 경험은 선지서에서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심판으로 연결이 되며, 종말론적인 대망으로 확대되어 신약에서는 세례 요한의 광야 사역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신 것으로 연결이 됩니다. 결국 이스라엘의 광야 경험은 새 언약에 속한 백성들이 현 시대를 살아가는 것을 반영하고 있기에 이스라엘의 실패는 우리에게 좋은 교훈이 될 것입니다. 개인적인 소감은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시험에 실패하였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시험에서 이겼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광야1세대)이 누리지 못한 가나안 안식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원한 안식에 참여할 수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5장 <하나님의 이스라엘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서 저자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이스라엘의 미래는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정의를 내리기에 앞서 하나님은 우주의 왕이시며, 그분의 나라는 모든 존재를 다 포괄한다고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시작되었고, 그분의 인격을 통해 온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과 하나님 나라와의 관계에 대해서 공관복음과 사도행전, 바울서신 및 요한서신을 예로 들면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 나라가 아니라 이방인들을 포함한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들만으로 구성된 나라 인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미래에 있어서 현재의 유대인의 역할 외에 미래의 독특한 역할은 없다고 저자는 주장합니다.


6장 <로마서 11장에 나타난 하나님의 이스라엘>에서 저자는 교회 시대 끝인 종말의 때에 유대인들의 독특한 역할을 주장하는 자들의 근거로 사용되는 로마서 11장을 상세하게 주해하고 있습니다. 그 중 중요한 부분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완악하게 된 것이라”는 25절을 주해하면서 “까지”라는 의미는, 다양한 예들을 통하여 종결, 결말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에 현 시대 내내 그리고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이스라엘의 일부 가운데에서는 완악하게 되는 일이 계속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그 외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실현된 후에 이스라엘의 완악하게 된 것이 그칠 것이라는 의미는 아니라고 합니다. 그 다음 핵심구절인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라는 26절을 주해하면서 “그리하여”가 “그후에”(그리고 그 후에)라는 시간적인 의미가 아니라고 합니다. 즉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 “까지” 이스라엘이 더러는 완악하였다. 하지만 그 후에는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는다, 라고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합니다. 저자는 “그리하여”는 “그리고 그런 방법으로”(바로 이런 식으로)라는 의미이기 때문에 이방인이 구원받은 방식과 같은 방법으로 이스라엘의 택한 자들도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마지막으로 “온 이스라엘”이 누구인지 저자는 다양한 논의들을 제시하고 “온 이스라엘”은 택함 받은 유대인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모든 사람들로 이루어졌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이것이 바울이 갈라디아서 6장 16절의 “하나님의 이스라엘”과 연결되는 지점입니다. 저자는 이것이 하나님의 비밀이라고 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온 이스라엘”을 택함 받은 유대인으로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근호 목사님은 “온 이스라엘”을 유대인의 남은 자와 이방인으로 보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근호 목사님의 견해에 동의합니다.


독서소감이 다소 딱딱하고 어렵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만 직접 읽어보시면 그렇게 어렵지 않고 많은 유익이 읽을 것입니다. 어려운 책도 쉽게 설명하여야 되는데, 오히려 쉬운 책을 어렵게 설명하지 않았나 생각이 됩니다만 이 책은 이스라엘의 여러 주제들을 성경적으로 서술하였다는 데 그 의의가 있고, 히브리서 7장과 로마서 11장의 주해만으로도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독교서적이 홍수를 이루는 시대에 살면서, 무엇을 읽을 것인가 고민하는 성도들에게 이 책을 추천합니다. 덤으로 홀베르다 교수의 <예수와 이스라엘>을 함께 읽으면 더욱 유익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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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형남 2012-07-18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서평 잘 읽었습니다. 제 논문/책 "이슬람과 메시아 왕국 이슈"에 탄생되는데 큰 역할을 한 책이기도 합니다. 감사합니다. 정형남 선교사
 
하나님의 열심
박영선 지음 / 새순출판사 / 199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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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어느 목사님은 박영선 목사님의 “하나님의 열심”은 믿음의 본질에 대해서 가장 탁월하고도 감동적으로 서술한 책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책이 처음 나왔을 때(8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한국 기독교계에서는 믿음에 대해서 제대로 정의를 내리거나 설명을 하지 못하였으나, 박영선 목사님께서 최초로 믿음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믿음이란 우리가 열심히 믿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열심히 일하신 결과라고 하였습니다. 박영선 목사님께서는 그 외에도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라던지, 많은 복음적인 내용들을 한국 기독교계에 소개한 분입니다. 저도 박영선 목사님의 책들 때문에 복음적인 말씀을 접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책은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아브라함, 야곱, 요셉, 모세, 욥, 다윗, 엘리야, 베드로-을 대상으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들의 인생에 간섭하셔서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었는지에 대해서 성경 말씀을 가지고 추적을 하고 있습니다. 총 15장으로 되어 있는데, 저는 분량 관계상 이 책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아브라함의 생애만을 저자의 순서대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아브라함>


제일 많은 부분(총 5장)을 할애하여 아브라함에 대해서 성경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왜 믿음의 조상이 되었는가? 아브라함에 대한 이 부분들은 이 책의 핵심이고,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믿음의 본질에 대해서 명확하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즉, 믿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아브라함의 생애를 통해서 펼쳐내 보였다는 것입니다.


제1장은 <갈대아 우르>인데, 저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부르실 때, 아브라함은 이방신을 섬긴 사람이였다고 -처음 이 책이 출판될 당시에는- 다소 충격적인(?) 서술을 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 24장에서 아브라함의 아버지인 데라가 이방신을 섬겼다고 하였는데, 고대 사회에서는 가족공동체이기에 아브라함도 아버지인 데라의 영향을 받아서 이방신을 섬겼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만!!! 사도행전 7장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 있을 때, 영광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라고 하여서 아버지 데라와 의논하여 데라의 주도하에 어쩔 수 없이 고향땅을 떠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고대 사회에서 고향을 떠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은 정말 가기 싫은데, 영광의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가라는데 안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대아 문명의 최변방인 하란까지는 왔으나, 더 이상 가나안땅까지는 가지 못하고 하란에서 눌러 살게 되었고, 거기에서 데라가 죽자, 다시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하나님이 지시할 땅이 가나안 땅이라는 것은 창11:31절에 나옴)으로 가라고 하여서 아브라함이 마침내(창12:5) 가나안 땅에 도착을 하였습니다. 여기까지 살펴보았을 때, 여기의 마침내는 아브라함이 가나안땅에 가고자 고생고생하여서 마침내 가나안땅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방신을 섬기는 아브라함을 일방적으로 부르셨고, 또한 하란땅에 눌러 앉은 아브라함의 등을 떠밀어 마침내 가나안땅에 오게 되었다는 마침내 입니다. 즉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사도행전 7장 4절에도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가나안땅으로 옮겼다고 나옵니다. 1장을 마무리하면서 저자는 불신앙으로 출발한 아브라함이어야만 우리가 믿는 이 구원이 복되다고 합니다.


2장은 <애굽에 가다>인데, 2장은 가나안에 들어온 아브라함은 세겜에 거주하다가 다시 옮겨 벧엘과 아이 사이에 거하다가 또한 남방으로 옮겨 거하다가 기근을 만나 애굽으로 내려갔다는 내용으로 시작을 합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이 기근을 만나 애굽으로 간 사건을 박영선 목사님 이전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앙의 타락이라고 보았는데, 전혀 그런 내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자는 왜 신앙의 타락이 아니라고 하냐면 하나님께서 여기에 대해서 꾸짖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냥 자연스럽게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갔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걱정입니다. 고대 사회는 자기 목숨과 재산은 자기 힘으로 지킬 수 밖에 없는 살벌한 때인데, 자기 아내가 너무 예쁘니 바로 왕이 아내를 뺏기 위해서 자기를 죽일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바로 왕에게 누이라고 거짓말을 합니다. 그래서 바로 왕이 아브라함에게 양과 소와 노비 등을 주고는 사라를 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일로 바로에게-아브라함이 아닌-큰 재앙을 내리자 바로 왕은 혼줄이 나서 아브라함에게 왜 내게 거짓말로 속였냐고 하면서 사라를 돌려주면서 떠나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소유 하나 잃지 않고 오히려 마누라 때문에 치부하여서 가나안땅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저자의 말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이 사건을 통하여 자기를 부르신 하나님은 당시 전 세계 문명의 최고 통치자인 바로 왕 보다도 더 세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그 뒤에 나오는 두 가지 사건에서 나타납니다. 하나는 롯과 헤어지는 사건(창13장)인데, 앞에서도 설명을 하였지만 당시 고대사회에서 자기 혈육과 헤어질 결심을 한다는 것은 보통 결심이 아닙니다. 또한 롯에게 먼저 땅의 선택권을 주는 배짱은 애굽에서 체험한 하나님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 사건은 고대 아홉 왕이 싸우는 세계대전에서 조카 롯이 사로잡혔을 때 사병 318명을 데리고 가서 롯을 구출하고 빼앗겼던 재물도 찾아오는 사건입니다. 아브라함이 어디에서 이런 담력이 생긴 것일까요? 저자는 애굽 사건 때문이라고 합니다. 애굽에 가기 전에는 마누라 때문에 자기가 죽을까봐 바로 왕을 속이던 위인(?)이 애굽에서 나오면서 이렇게 변한 것입니다.


저자는 이 책에서 롯을 구출하는 장면을 설명하면서, 멜기세덱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습니다만 이 부분은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므로 제가-저도 다른 목사님에게 들은 내용이지만- 잠깐 언급을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아브라함이 롯을 구출하고 돌아올 때에서 소돔 왕도 영접을 나왔고, 살렘 왕 멜기세덱도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서 아브라함에게 주면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창14:20) 라고 축복합니다. 롯이 사로잡혀 갔다는 소식을 듣고 아브라함이 구출하러 가긴 가지만 318명 가지고 어떻게 당시 속국을 거느린 4개 연합군을 이길 수가 있습니까? 즉, 자기 실력으로 이긴 것이 아닌데 라는 생각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멜기세덱을 통하여, 자기에게 나타나신 그 하나님께서 대적을 붙여주셔서 아브라함이 이기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가 가진 재물들은 자기의 실력으로 가지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복으로 주셔서 받게 되었다는 것을 고백하는 의미로 십일조를 멜기세덱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소돔 왕이 사로잡혔던 사람들만 돌려주고 전리품은 아브라함이 가지라고 하여도 아브라함은 전쟁에서 승리한 복이 자기 때문이 아니고 하나님 때문이기에 이 제안을 거절합니다. 이 부분은 성경에서 최초로 여호와의 붙이시매 전쟁이 나오고, 하나님의 제사장인 멜기세덱이 나오고, 십일조가 나옵니다. 이런 부분들은 너무나 중요한 내용이지만 구체적인 설명은 이 글의 논지에서 벗어나므로 이만 줄이겠습니다.


3장은 <믿음>인데, 드디어 이 부분(창15장)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이것을 의로 여겨주셨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15장은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구하고, 멜기세덱을 만나고 난 이후부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다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하나님 자신이 아브라함에게 방패이고 지극히 큰 상급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저자의 표현에 의하면, 그러자 아브라함이 대꾸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전에는 하나님께 이끌려 다니면서 애굽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이라는 분이 바로 왕 보다도 더 센 대단한 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롯구출 사건을 통하여 그 하나님이 자기를 편들어 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이제 하나님과의 관계가 대화하는데 까지 진전하였다는 것입니다.


애초에 아브라함이 부름을 받았을 때(하란에서)에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고, 복의 근원이 되게 하여주겠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롯과 헤어졌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셔서 가나안땅을 아브라함과 후손에게 주고, 자손도 땅의 티끌같이 되리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물어봅니다. 내게 무엇을 주실 것인가요? 나는 아직 자식이 없는데, 하나님은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리라고 약속은 하셨으나 씨는 주시지 않고, 그러면 종인 엘리에셀이 나의 상속자가 될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네 몸에서 날 자가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하면서 하늘의 셀 수도 없이 많은 별과 같이 네 자손이 그렇게 되리라고 하자,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것을 아브라함의 의로 여기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자는 이 믿음이 아브라함에게서 나온 것인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인지를 묻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아브라함의 행적을 봤을 때, 이 믿음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서 여태껏 만들어 오신 것의 결정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로마서 4장을 가지고 아브라함은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은 것이 아니고,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롭다함을 받았다고 합니다. 구원이란 하나님이 우리를 중생시키시고 열심히 설득시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즉, 구원이란 하나님에게 원인행위가 있지, 우리에게는 원인행위가 없고, 나중에 그 구원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가 그 사실을 시인한다는 것이지요. 이 믿음의 문제가 박영선 목사님께서 강조하시는 핵심이 되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잠깐 곁길로 나가겠습니다. 원래 저자의 의도는 성경의 믿음사건을 추적하는데 목적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신 내용(창15장 후반부)은 생략합니다. 그러나 기왕 아브라함의 생애를 추적하였고, 성경에서 중요한 언약사건을 여기에서 언급하기 때문에 잠시 다루고 넘어 가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3년 된 암소 등을 잡아라고 하자 아브라함이 짐승들을 잡아서 중간을 쪼개어 놓았고, 타는 햇불이 쪼갠 고기사이로 지나갔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었다고 합니다. 원래 고대사회에서 언약은 언약 당사자 모두가 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면서 언약을 체결하는데, 언약을 어길 시 이 고기처럼 쪼개어져 죽을 것이라는 의미가 있는데, 이 쪼갠 고기사이로 아브라함은 지나가지 않았고, 오직 하나님(타는 햇불)만이 고기 사이를 지나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죽음을 담보로 언약을 반드시 이루겠다는 뜻이겠지요. 또한 이 언약에는 희생된 제물이 있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팔머 로벗슨 교수는 <계약신학과 그리스도>에서 이 언약을 “주권적으로 맺어진 피의 약정”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언약의 내용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400년 동안 그들을 섬기다가 가나안땅으로 돌아오고. 또한 애굽 강에서부터 유브라데 강까지 땅을 차지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약속은 애굽생활과 광야생활, 사사시대를 거쳐 약 1,000년 만에 성취가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자기의 언약을 이루는데 있어서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이 아브라함 언약은 뒤에 나오는 모세언약, 다윗언약, 새언약 등에 바탕을 이룹니다.


4장은 <할례>인데, 아브라함이 99세 때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라고 하면서 시작을 합니다. 이 말씀의 배경은 창세기 16장에 나와 있는데, 사라가 잉태치를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하늘의 셀 수 없는 별과 같이 많은 자손이 있으리라고 하였는데, 사라가 잉태치 못하여 아브라함에게 여종 하갈과 동침하라고 하자 아브라함도 순순히 동의를 하고, 하갈은 잉태를 하게 됩니다. 여기서 저자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이스마엘을 낳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가 86세이고, 다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났을 때가 99세, 즉 13년 만에 나타나서는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아브라함을 꾸짖고 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5장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 사건 이전에는 믿음 없음을 나무라지 않지만 그 이후에는 전능의 하나님을 믿고 완전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름을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꾸어 주면서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창17:5)라고 말씀하였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심점이 “열국의 아비”가 아니라 “되게 하겠다”에 있다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약속을 이루어 가겠다는 표현입니다. 자식이라고는 딸랑-그것도 약속의 자식이 아니지만-하나 있는데, 열국의 아비라니요? 얼마나 창피하겠습니까?


여기서 저자는 하갈을 통하여 이스마엘을 낳은 사건을 하나님을 믿지 못하여서라고 합니다만, 저는 약간 다르게 생각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창15:4)고 하였기 때문에 자손이 사라와의 사이에서 꼭 태어나야만 하는 것이냐고 생각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16장 3절에 보면 가나안에 거한지 10년이라는 것으로 봐서 사라가 잉태할 때까지 많이 기다렸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야겠고, 그래서 하갈을 낳았다고 생각됩니다. 창세기 16장까지의 계시로 봐서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생각이지요. 그렇다고 아브라함이 믿음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약속을 어떤 방식으로 이루실지를 전혀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 약속을 없는데서 있게 하는 방식으로, 죽은 데서 살리시는 방식으로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보아서 알지만 그 당시(이스마엘을 낳을 때까지) 아브라함은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름을 바꾸어 주시면서 나라들과 열왕이 네게로 좇아 나리라, 심히 번성케 하겠다, 너와 네 후손 사이에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겠다... 등등을 말씀하시면서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명하십니다. 내게 속한 모든 남자는 할례를 행하고, 태어날 남자들도 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명하면서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저자는 할례의 의미를 거룩(구별)케 된다는 의미로 이야기합니다. 할례받지 않았다는 것은 거룩하지 않다는 의미라는 것이지요. 좀 더 보완하면, 인간의 생식능력을 부정한다는 것이지요. 약속의 자녀는 아브라함의 혈통이나 육정으로 태어나지도 않고, 이미 태가 끊어진 사라의 몸으로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으로만, 말씀의 능력으로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믿음의 세계로, 구원으로 인도하시는데, 우리들은 안 따라가려고 고집을 부린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집을 부려보았자 80년인데, 하나님의 고집은 영원하다고 하면서 우리가 더 이상 고집부리지 말고 하나님께 나아가자고 권면을 하면서 이 장을 마무리 합니다.


5장은 <이삭>인데, 그 유명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사건(창22장)입니다. 여기서 저자는 왜 하나님께서 갑자기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였을까? 라고 의문을 가지면서 이 사건을 창세기 12장 1절의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장면과 연결을 시킵니다. 창세기 12장의 축복의 내용과 창세기 22장의 축복의 내용에는 차이점이 있는데, 그것은 씨(자손)에 관한 말씀이 있냐? 없냐? 에 있습니다. 저자는 창세기 12장에는 없던 씨에 관한 내용이 창세기 22장에서는 이 씨가 가장 중요한 내용을 차지한다는 것입니다.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창22:18). 창세기 12장의 아브라함을 부르심에서 시작해서 22장의 독자 이삭을 바치는 사건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네 씨로 말미암아 내가 네게 축복한 것이 사실이 된다”는 것을 알게 하려고 여기까지 끌고 왔다는 것입니다. 너에게 축복한 모든 것이 네 자손에게서 성취가 된다는 것을 알리고, 그 자손은 장래에 나타날 어떤 단수의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는 이 씨(자손)를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이 약속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갈3:16).


저자는 또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는 사건을 할례와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할례는 너의 생식능력은 끊어졌다는 것을 상징화 한 것이고, 그러함에도 네 몸에서 자식이 나오면 네 자식은 육으로 말미암은 자식이 아니고 약속으로 말미암은 자식이라는 것을 더욱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삭은 네 자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행위를 통하여 이삭이 네 자손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고 깨달아 라는 것입니다.


이 사건에서 한 가지를 더 언급을 하면,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바치는 사건을 통해서 로마서에서는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하나님(롬4:17)으로 믿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알았습니다. 이삭이 죽어도 산다는 것을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어떻게 이삭이 죽어도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믿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 때문입니다.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다의 모래 같으리라는 등등의 약속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또한 아브라함은 어떻게 하나님의 언약을 믿을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실제로 100세된 아브라함과 태가 끊긴 사라에게서 이삭이 태어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없는데서 있게 하는 방식으로 일하는 하나님이심을 체험하였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자기 생애를 통해서 경험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삭은 죽었다가 살아난 자의 상징이 되고,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가 된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3일 만에 다시 부활하신다는 사실이 구약으로 거스려 올라가 아브라함 시절에 미리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을 언급하면서 “아브라함이 나의 때 볼 것을 보고 기뻐하였다”고 하셨는데, 아브라함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듯이 예수님을 알 수는 없었겠죠.


지금까지 아브라함의 생애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가를 보았습니다. 저자는 아브라함의 생애를 통하여 믿음을 풀어보려고 하였습니다. 저자의 결론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이 우리의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 때문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박영선 목사님의 저서들을 통하여 많은 유익을 받았는데, 이 책은 박영선 목사님이 남서울교회 에선가 부교역자로 계실 때 설교한 내용을 책으로 만든 것입니다. 박영선 목사님의 목회 초기에 설교하였던 내용들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완전할 수가 없습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박영선 목사님의 성화론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거룩은 되어가는 과정이 아니라 상태(구별,분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성화에 초점을 맞춘 내용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실 때 믿음이라는 방식으로 구원하시는데, 이 믿음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고, 하나님이 열심히 일하신 결과라는 것입니다. 믿음에 대해서 고민하신 분들에게 많은 유익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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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 우리 시대의 고전 15
르네 지라르 지음, 김진식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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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지라르의 이 책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이 책은 지라르 저작들의 결론과 같은 입장에 위치한 책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책들은 읽지 않았지만, 핵심 주장들을 먼저 요약을 한 후 이 책에 대해서도 진행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저서는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로서 소설 속의 인물들을 대상으로 인간 욕망의 구조를 밝혀내는 작업을 하였습니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향해서 자발적으로 욕망한다는 자율적 욕망을 믿는 것은 ‘낭만적 거짓’이며, 타인이라는 모델(중개자)의 욕망을 모방하는 타율적인 욕망, 즉 모방 욕망임을 인정하는 것이 ‘소설적 진실’이라는 것이 결론입니다(243 페이지).


첫 번째 저서에서 인간의 욕망이 모방욕망임을 밝혀낸 지라르는 두 번째 저서인 〈폭력과 성스러움〉- 이 책 제목을 패러디한 책이 진중권의 “폭력과 상스러움”이죠 - 이라는 책을 통해, 인간 욕망의 모방 대상인 모델이 가까운 동료(짝패)가 될 때, 이 동료들 사이에는 선망과 질투, 증오 등의 감정이 생겨나고 갈등이 발생하는데 이것이 폭력의 씨앗이 된다고 합니다. 이 폭력은 상호 폭력으로 인류사회에서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아주 기본적이고 본질적인 폭력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개인들 사이의 차이가 사라지는 무차별 상태에서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로 이어지고,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사회를 유지시킬 것인가 하는 의문이 발생하는데, 이런 의문에 대한 해답이 바로 ‘희생양 메커니즘’이라는 것입니다.


희생양 메커니즘은 사회가 무차별적 위기에 처했을 때 그 위기의 책임자로 한 사람을 지목하여 사회의 상호적 폭력을 그에게로 집중시킴으로써 다시 평화를 회복하는 메커니즘입니다. 모방적인 상호 폭력을 피하기 위해 인류가 만들어낸 일종의 방책이 희생양 메커니즘인데, 세계 도처의 인류학적 자료와 신화, 민담 등을 통해 이 메커니즘의 존재를 입증해 보이고 있습니다.


세 번째 저서인 〈희생양〉에서는 희생양 메커니즘의 규칙성을 밝혀내려고 하면서 인간 문화의 근본 구조를 드러내는데, 그의 주장에 의하면 모든 문화의 근저에는 집단 구성원의 만장일치적 폭력인 박해와 살해가 있고, 이 집단 살해를 전해주는 것들이 있는데, 그것을 지라르는 ‘박해의 텍스트’라고 부르며, 역사적인 기록이나 민담, 신화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부분이 나타나는데 이런 기록들은 모두 그 집단 살해 ‘이후에’ 기록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집단살해에 성공한 살해자들의 기록입니다. 그러므로 살해당한 자들의 입장은 완전히 배제되어 진실을 왜곡하였다는 것이지요. 세 번째 저서에서 희생양 메커니즘이 통용될 수 있는 구체적인 환경과 과정을 여러 신화와 문헌 속에서 찾아내면서, 거기에 성경이라는 기독교의 텍스트로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도 하나의 희생양의 죽음으로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서론이고, 지라르 책들의 요약입니다. 너무 길었죠? 본론은 더 길어 질 것 같은데, 일단 나가봅시다. 지라르의 네 번째 저서인 이 책에서는, 신화와 성경을 상세하게 상호 비교하면서 ‘희생양 메커니즘’에 대한 그 차이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즉 신화적 텍스트(아폴로니우스 신화)는 집단폭력의 희생자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즉, 죄를 지어서 그 집단에 의해 살해를 당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텍스트는 집단폭력의 희생자가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라는 것입니다. 즉, 무고하게 살해를 당하고 고난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저자는 신화의 해석은 환상이고 거짓이며, 성경의 해석이 정확하고 진실이라고 하면서 기독교를 옹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화와 성경의 기록이 실제 일어난 일로 해석을 합니다.


신화적 해석이 어려운 이유는 그 사회 자체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이야기합니다. 그 이유는 신화의 기록자 자신이 신화적 폭력 뒤에 있는 군중 현상을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이라는데, 이러한 신화적 사회는 폭력에 전염되어 과도하게 모방에 빠져들어 그들의 희생물이 죄가 있고, 그래서 그로 인해 자신들이 다시 화해한다고 믿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화해로 인해 희생물은 최종적으로 찾아온 평화를 가져다준 존재로 떠받들어져서 신격화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기록만이 이런 환상을 극복할 수 있는데, 성서를 쓴 사람들이 이러한 환상을 극복하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성경의 기록자들은 처음에는 신화와 유사한 모방 전염에 빠져 다른 군중들처럼 정신을 못차리다가 나중에는 특이한 경험을 통해 모방 전염을 넘어서서 희생물이 무고하다는 것을 알아보게 된다고 합니다. 그 예로 구약에서는 요셉이 있고, 신약에서는 베드로가 있습니다.


이 책에서 지라르의 두 번째로 중요한 개념은 사탄을 인간의 이러한 ‘모방욕망’으로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구약의 십계명 중 열 번째 계명은 이러한 인간의 모방욕망을 금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개인들은 날 때부터 이웃이 소유하고 있는 것을 욕망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에 인간 집단 가운데는 아주 강한 경쟁적 갈등의 성향이 있고, 이것을 제어하지 못하면 위기나 폭력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웃이 우리 욕망의 모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저자가 주장하는 사탄의 실체를 인용해보겠습니다. “거기서 거짓을 끌어내오는 악마의 ‘정수’는 바로 실체가 하나도 없는 강렬한 모방일 뿐이다. 악마에게는 고정된 기초가 없으며 ‘존재’는 더더욱 없다. 자신이 마치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악마는 신의 피조물에 붙어서 기생해야 한다. 이렇듯 악마는 완전히 모방적인 존재라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61 페이지)


저자는, 신약으로 와서 예수 자신도 이러한 인간의 모방욕망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금지하기 보다는 대상을 바꾸어 모방하라고 이야기하였다는 것입니다. 복음서에는 예수가 항상 금지의 언어가 아닌 모방하는 모델의 언어로 자신을 모방하라고 이야기하였는데, 그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모방 경쟁을 피하게 하려는 생각에서였다고 합니다. 그러면 예수를 욕망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예수의 삶이나 방식이나 습관을 모방하라는 뜻은 아니고, 금욕법칙도 아니며, 그것은 예수가 욕망하는 것, 즉 그 자신의 ‘욕망’이라는 것입니다. 예수의 욕망은 무엇입니까? 가능한 한 하나님 아버지를 가장 많이 닮는다는 목표로 그를 인도하는 정신이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는 아버지를 모방하는데 온 힘을 바치고, 우리에게 그를 모방하라고 권하는 것은 결국 예수의 모방을 모방하라고 권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대략적으로 책에 대한 소개를 하였는데, 다른 중요한 내용들도 많이 있지만 이것으로 정리를 하고, 그러면 이 책에 대한 평을 간략하게 해보겠습니다. 장점 먼저 이야기하면, 지라르는 이 책에서뿐만 아니라 이전 책에서도 인간의 욕망은 모방욕망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평생을 걸쳐 이에 대한 신화, 민담, 성경 등을 분석하면서 입증하려고 애를 썼는데, 아주 탁월하고도 정확하게 인간의 욕망의 구조를 밝혀낸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깊이 공감하고 있고, 이런 시각으로 사물을 보거나 현상을 보면 그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다른 장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은 무고하다는 것을 인류학적으로 옹호하였다는 것입니다. 죄가 없지만 당시 이스라엘 군중들의 모방욕망에 의해 무고하게 희생을 당하였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예수의 모방을 모방하라는 충고는 깊이 새겨 들을만합니다. 현실 교회의 목사보다도 더 은혜적이기까지 하구요.


그러면, 지라르의 문제점은 없느냐? 제가 보기에 먼저 사탄을 실체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바로는 모방욕망이 사탄이 아니라 사탄이 인간의 배후에서 이러한 모방욕망을 충동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의 기록도 사탄을 실체로 보고 있구요.


다른 문제점은 기독교를 옹호한다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무고한 희생을 강조합니다만 이것을 신화의 해석과 비교하다보니, 너무 수동적으로만 파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 희생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였고, 예수 그리스도가 능동적으로 걸어간 길이라는 것을 놓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분명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 구약의 창세기에서부터 예언되어 요한계시록에까지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주제입니다.


이 책은 번역이 잘 되어 있어서 이해하는 데 있어서 번역에 대한 애로사항은 없을 것 같습니다. 인간욕망에 관심있는 분이나, ‘희생양’에 대해서 궁금하신 분들은 한 번 읽어보세요.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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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0-08-13 1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말할 필요가 없는 멋진 리뷰입니다~ 정말 잘 읽었어요!
 
레위기 - 어떻게 읽을 것인가?
전정진 지음 / 성서유니온 / 2004년 8월
평점 :
절판


 

평소에 성서유니온에서 나온 책들을 즐겨 읽는 저로서 전정진 성결대학교 교수의 이 책 “레위기 어떻게 읽을 것인가?”을 설레임 반, 의구심 반으로 구입하였습니다. 왜 의구심 반이 들었냐면 저자도 처음 들어보는 저자이고, 더군다나 우리 나라에서는 레위기에 대해서 주석이나 강해서를 많이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책을 읽는 동안 그 의구심은 한 권의 양서를 만났다는 기쁨으로 변하였습니다.


이 책의 장점을 이야기하면, 저자는 레위기의 제사제도, 제사장제도, 정결법 등의 규례를 설명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단 번에 이루신 제사 및 제사장 사역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저의 생각도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히 이루심”의 사역에 기초를 둘 때 이 레위기의 모든 제사제도 등이 진정한 의미가 밝혀진다고 생각합니다.


저자는 레위기 1-7장을 제사규례, 8-10장을 제사장 제도의 설립, 11-16장을 정결과 부정의 규례, 17-27장을 거룩한 삶을 위한 규례로 나누어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정결과 부정의 규례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저자는 레위기나 성경의 규정이 거룩과 정결, 부정의 세 가지로 구분(구별)하였다고 합니다. 즉 거룩하지 않은 모든 것은 속되며, 속된 모든 것은 정한 것과 부정한 것으로 나뉜다고 합니다.


이러한 구분은 이스라엘의 삶 다방면에 나타나는데, 먼저 광야 이스라엘 진의 배치를 보면, 진 중앙의 회막은 거룩한 장소이고, 이스라엘이 머무르는 진은 정결했으며, 진 바깥은 부정하였다고 합니다. 제사장은 거룩하게, 이스라엘 백성은 정결하게, 이방인은 부정하게 간주되었습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거룩의 정도도 구분하였다고 합니다. 대제사장과 제사장, 백성이 구분되었고, 회막도 성소와 지성소, 회막뜰로 구분되었고, 성막 내의 기구들도 구분되었고, 심지어 시간도 구분되었는데, 안식일과 속죄일은 특별히 거룩하여 모든 활동이 금지되었고, 무교절 등 각종 절기들은 일상 활동을 하는 것이 금지되었고, 월삭은 일하는 것이 허용되었다고 합니다.


왜 이렇게 성경은 거룩과 정결, 부정을 구분하고, 거룩의 정도도 구분을 하였을까요? 제 생각에는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하시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너무나 거룩한 하나님이기에 죄많은 인간이 하나님을 만날 수도 없고 또한 만나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가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났을 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6:5) 라는 고백이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거룩한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면서 희생 제물이 자신의 죄(부정) 대신에 죽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했고, 이것이 점진적 계시를 통하여 이제는 동물이 아니라 한 인격으로 모아지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 인격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므로 하나님께 온전한 제사를 드렸습니다. 구약의 대제사장마저도 자신의 죄 때문에 속죄제를 드려야 했고 결국 죽어야 했지만, 죄없으신(거룩하신) 예수의 제물 되심과 제사장 되심으로 말미암아 이를 믿는 자들도 이제는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거룩, 즉 성화는 되어가는 과정이 아니라 구별됨, 즉 상태입니다.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히10:10)


정결 및 부정의 규례에 대한 저자의 설명 중 아쉬운 점은, 부정한 자와 접촉한 자는 그 부정이 접촉한 자에게 이전된다는 내용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연결시키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신약(특히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예수의 치료사역 중 예수의 손을 문둥병자에게 대시며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며 문둥병을 고치시는 장면과 열병으로 앓아 누운 베드로의 장모의 손을 만지시며 열병을 고치시는 장면 등은 예수께서 친히 병자들의 부정을 흡수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마8:17) 라는 뒷구절에서 명백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온갖 부정과 죄를 친히 담당하시고 짊어지신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은 우리가 깨끗함을 입은 것입니다.


끝으로, 거룩한 삶을 위한 규례(17-27장)에서 개인적으로 언급하고 싶은 것은 구약의 율법이 명령하는 내용들은 우리는 도저히 지킬 수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율법의 모든 명령( 총 613가지 라고 함)들을 항상 지킬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율법은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여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인 것입니다. 율법을 다 항상 지키면 구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율법을 다 항상 지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직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나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은 유익을 얻었습니다. 레위기를 상세하게 읽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레위기 어떻게 읽을 것인가? 저자의 구분과 설명을 따라 차례대로 읽으면 될 것 같습니다. 저자의 다음 책도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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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후에 정구 형제와 집사람, 준성이와 함께 영화를 보았습니다. 제목은 “브이 포 벤데타(v for vendetta)”인데, 그 유명한 ‘매트릭스’를 만든 “워쇼스키” 형제가 만들었다고 하여서 기대를 하였었는데, 오늘 보게 된 것입니다. 느낌이 어땠냐구요? 글쎄? 조금은 생각이 필요한 영화였던 것 같은데, 지금부터 그 조그만 생각을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참고로 준성이는 생애 최초로 영화를 보다가 무서워 울면서 엄마 손에 이끌려 밖으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먼저 짧은 영어실력 때문에 ‘벤데타’의 뜻을 몰랐는데, 나중에 네이버 검색을 하니, 상호복수, 피의 복수, 장기에 걸친 불화, 항쟁 등의 뜻이 있다고 하더군요. 배경은 세계 3차대전이 끝난 2040년의 영국의 통제사회였는데, 여기서 특이한 것은 미국이 3차대전을 일으켜 패전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화에서는 이 (구)미국이 영국에 (망하여서) 구호를 요청하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제가 이것을 보면서 속으로 어떻게 생각했겠습니까? 평소에도 미국의 패권주의와 반인권주의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오늘은 또 우리나라가 일본과 야구경기에서 7대0으로 완패를 하였는데, 패배의 이유 중에 하나가 미국이 자기에게 유리하게, 없는 룰을 만들었다는데 전국민(여기서 기독교인이나 비기독교인이나 한결같은데, 여기에 대해서 혹시 극친미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이야기할지 궁금하군요?)이 분노하고 있던 터에 미국이 망하였다고 하니 고소하였습니다. 이런 심리가 ‘지라르’가 이야기한 ‘모방욕망’인지도 모르겠지요.


그러면, 승전국인 영국은 살만한 나라였는가? 전혀 그렇지가 않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전국민이 통행금지(이것은 우리가 군사정권시절 경험한 적이 있지요.)와 감시카메라와 도청에 의해서 철저하게 통제당하는 사회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국민들이 가만히 있었느냐? 가만히 있었습니다. 왜요? 국민들이 그 국가권력을 용인하였고, 선출하였다는 것입니다. 당시 최고권력자가 ‘아담 셔틀러’이고 그 밑에 정당의 당수(크리디)가 있었는데, 최고권력자(의장으로 불림)의 이름이 제 개인적으로는 아주 유의미하다는 것입니다. 이름의 의미는 나중에 설명하기로 하고, 줄거리는 이 ‘셔틀러’가 국민들을 미디어로 여론과 사건을 조작하고, 테러나 바이러스에 의한 공포를 안전하게 지켜주겠다고 하여 국민들이 더욱더 국가를 의지하겠끔 만듭니다. 평화는 평화인데, 조작이나 공포에 의한 평화인 것입니다.


실제로 셔틀러가 권력을 잡는 계기가 10만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죽는 사태가 발생하는데, 이것은 셔틀러가 만들어낸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치료제를 개발하여 엄청난 재산을 모으고 국가권력도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최고권력자는 피부색, 성적, 정치적 성향이 다른 사람들을 어떤 곳으로 데려가 거기에서 생체실험을 하였는데, 바이러스 감염에 대한 실험(무기 개발이나 백신 개발을 위한 실험)이였고,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여기서 “v"라는 가면을 쓴 주인공(영화 내내 가면을 쓰고 등장함)이 등장하는데, 이 사람도 생체실험을 당하다가 살아남게 되고, 이 정권에 대한 복수(아니면 혁명)를 계획하게 되었습니다. 가장 먼저 선택한 것은 조작된 미디어에 의해 살아가는 국민들에게 그 미디어를 이용하여 국민들에게 멧세지를 남깁니다. 그러면서 정권창출에 동조하였던 측근들을 1명씩 차례로 죽여 나가고, 최후에는 국회의사당을 폭파하는 계획을 가지게 됩니다.


그 전에 여자 주인공 “이비”를 구하여 주면서 이 여자 주인공도 당연하게 여겼던, 국가의 조작정치와 공포정치가 최고권력자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나중에는 ‘브이’를 도와서 ‘혁명’을 이루어냅니다. 이 ‘브이’가 혁명을 이루어내는 방법은 자기가 쓰고 있던 가면을 국민들에게 배달을 시킵니다. 국민들은 이 가면을 쓰고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국회의사당으로 향하여 가게 되는데, 당연히 진압경찰들은 발포명령만 기다리고 있는데, 최고권력자 셔틀러는 당수(크리디)에 의해 죽고 당수는 브이에 의해 죽었기 때문에 명령자가 없어졌고, 동참하는 국민들의 인원에 놀라서 결국 혁명은 성공을 하게 되어 새로운 세상을 맞이한다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잠깐 부연하자면, 브이가 쓴 가면의 얼굴 모습은 1605년경에 영국의 제임스 1세 정부의 독재에 항거하기 위해 장작더미 아래 36배럴의 화약을 숨겨 의회 지하터널로 잠입했다가 체포되어 처형된 ‘가이 포크스’라는 실존 인물이랍니다.


제가 느낀 점을 이야기하자면, ‘아담 셔틀러’라는 이름의 문제입니다. 먼저 ‘셔틀러’는 독일 나치즘의 창시자 ‘히틀러’를 패러디한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어째서 그렇느냐? 이 셔틀러가 국민을 선동하기 위해서 연설을 하는 장면이 히틀러가 독일 국민들을 선동하는 장면과 똑 같다는 것입니다. 생김새도 비슷하고. 그러면 무엇으로 선동을 하였을까요? 우리 인간에 내재한 공포심리를 이용하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바이러스에 의한 집단 감염에 의한 죽음의 두려움, 테러에 의한 대량적이고, 불규칙적인 죽음에 대한 두려움 등을 이용한 것입니다. 제 생각을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증거가 ‘아담 셔틀러’ 중 ‘아담’이라는 이름입니다.


워쇼스키 형제가 그러면 성경을 알고, 최초의 인간 ‘아담’을 알았냐구요? 당연히 알았죠. 이 형제들은 감독이기 이전에 철학자들입니다. 전작 “매트릭스”를 만들 때도 철학책을 섭렵하였었고, 성경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매트릭스에는 ‘트리니티’라는 인물, ‘모세’라는 인물, ‘느부갓네살’이라는 함대 등이 등장하는데, 이것들은 전부 성경에 나오는 내용들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감독이 이 영화에서는 왜 ‘아담’이라는 이름을 지었을까요? 아담의 위상 때문입니다. 아담은 하나님께 죄를 지은 후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되었고, 그 후 모든 인류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살게 된 것입니다. 쉽게 말해 죽음에 종노릇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죽음을 방지하고, 책임을 지겠다는 사람을 당연히 국가의 지도자로 선출할 것입니다. 이것을 이 형제들은 알고는 이러한 이름을 지었다라고 저는 강력하게 주장하는 것입니다. 너무 억측 갔습니까?


한 가지 더 집고 넘어가자면, 대중심리의 전염성입니다. 이러한 심리는 대중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더 빠르게 전염되는 속성이 있습니다. 바이러스가 사람이 많을수록 더욱 많고, 빠르게 전염되듯이. 이러한 속성을 프랑스의 문학평론가이자 사회인류학자인 ‘지라르’는 “모방욕망”이라고 하더군요. 쉽게 말해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행동하면 나도 그렇게 행동하고자 하는, 모방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방욕망은 개인적으로 오늘도 제가 느꼈습니다. 오늘은 어떤 날입니까? 우리나라와 일본이 세계야구대회에서 4강전을 하는 날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제일 모르고, 싫어하는 스포츠가 야구입니다. 저뿐만 아니라 평소에 야구에 관심도 없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전국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볼까요? 마치 월드컵경기처럼. 남들이 보니 나도 본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니 재미도 있고요.


모방욕망에 대해서 다른 예를 들어볼까요? 성경에 예수님이 예루살렘의 빌라도 법정에서 재판을 받으실 때, 그 구경하던 군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시오.’라고 외치던 장면은 이 인간의 욕망과 전염성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처음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는 ‘호산나’라고 외치던 군중들이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자기들을 구해줄 줄 알았는데, 그대로 체포되어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어지자 순식간에 돌변을 한 것이지요. 하물며, 베드로 마저도 예수님이 잡히시던 밤에 3번이나 저주하면서 부인까지 하지 않던가요?


마지막으로, 이 영화 속의 사회가 미래사회라지만, 과거의 행태를 그대로 답습한다는 것입니다.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말입니다.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가이 포크스’라는 과거 인물의 이미지가 나타나고 히틀러 이미지가 나타나고 아담 이미지가 나타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 영화처럼 혁명이 성공하여, 다른 세상이 올까요? 역시 똑 같다는 것입니다. 참민주주의가 실현되었다고 하여도, 어짜피 대표자들이 있을 것이고, 그들의 욕망도 그전의 지도자의 욕망과 같고, 대중의 욕망도 그전의 대중의 욕망과 갔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아담 안”이라고 합니다.


오늘은, 이 “아담 안”에 대해서 깊이 느꼈던 하루였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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