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오후에 정구 형제와 집사람, 준성이와 함께 영화를 보았습니다. 제목은 “브이 포 벤데타(v for vendetta)”인데, 그 유명한 ‘매트릭스’를 만든 “워쇼스키” 형제가 만들었다고 하여서 기대를 하였었는데, 오늘 보게 된 것입니다. 느낌이 어땠냐구요? 글쎄? 조금은 생각이 필요한 영화였던 것 같은데, 지금부터 그 조그만 생각을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참고로 준성이는 생애 최초로 영화를 보다가 무서워 울면서 엄마 손에 이끌려 밖으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먼저 짧은 영어실력 때문에 ‘벤데타’의 뜻을 몰랐는데, 나중에 네이버 검색을 하니, 상호복수, 피의 복수, 장기에 걸친 불화, 항쟁 등의 뜻이 있다고 하더군요. 배경은 세계 3차대전이 끝난 2040년의 영국의 통제사회였는데, 여기서 특이한 것은 미국이 3차대전을 일으켜 패전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화에서는 이 (구)미국이 영국에 (망하여서) 구호를 요청하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제가 이것을 보면서 속으로 어떻게 생각했겠습니까? 평소에도 미국의 패권주의와 반인권주의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오늘은 또 우리나라가 일본과 야구경기에서 7대0으로 완패를 하였는데, 패배의 이유 중에 하나가 미국이 자기에게 유리하게, 없는 룰을 만들었다는데 전국민(여기서 기독교인이나 비기독교인이나 한결같은데, 여기에 대해서 혹시 극친미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이야기할지 궁금하군요?)이 분노하고 있던 터에 미국이 망하였다고 하니 고소하였습니다. 이런 심리가 ‘지라르’가 이야기한 ‘모방욕망’인지도 모르겠지요.
그러면, 승전국인 영국은 살만한 나라였는가? 전혀 그렇지가 않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전국민이 통행금지(이것은 우리가 군사정권시절 경험한 적이 있지요.)와 감시카메라와 도청에 의해서 철저하게 통제당하는 사회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국민들이 가만히 있었느냐? 가만히 있었습니다. 왜요? 국민들이 그 국가권력을 용인하였고, 선출하였다는 것입니다. 당시 최고권력자가 ‘아담 셔틀러’이고 그 밑에 정당의 당수(크리디)가 있었는데, 최고권력자(의장으로 불림)의 이름이 제 개인적으로는 아주 유의미하다는 것입니다. 이름의 의미는 나중에 설명하기로 하고, 줄거리는 이 ‘셔틀러’가 국민들을 미디어로 여론과 사건을 조작하고, 테러나 바이러스에 의한 공포를 안전하게 지켜주겠다고 하여 국민들이 더욱더 국가를 의지하겠끔 만듭니다. 평화는 평화인데, 조작이나 공포에 의한 평화인 것입니다.
실제로 셔틀러가 권력을 잡는 계기가 10만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죽는 사태가 발생하는데, 이것은 셔틀러가 만들어낸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치료제를 개발하여 엄청난 재산을 모으고 국가권력도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최고권력자는 피부색, 성적, 정치적 성향이 다른 사람들을 어떤 곳으로 데려가 거기에서 생체실험을 하였는데, 바이러스 감염에 대한 실험(무기 개발이나 백신 개발을 위한 실험)이였고,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여기서 “v"라는 가면을 쓴 주인공(영화 내내 가면을 쓰고 등장함)이 등장하는데, 이 사람도 생체실험을 당하다가 살아남게 되고, 이 정권에 대한 복수(아니면 혁명)를 계획하게 되었습니다. 가장 먼저 선택한 것은 조작된 미디어에 의해 살아가는 국민들에게 그 미디어를 이용하여 국민들에게 멧세지를 남깁니다. 그러면서 정권창출에 동조하였던 측근들을 1명씩 차례로 죽여 나가고, 최후에는 국회의사당을 폭파하는 계획을 가지게 됩니다.
그 전에 여자 주인공 “이비”를 구하여 주면서 이 여자 주인공도 당연하게 여겼던, 국가의 조작정치와 공포정치가 최고권력자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나중에는 ‘브이’를 도와서 ‘혁명’을 이루어냅니다. 이 ‘브이’가 혁명을 이루어내는 방법은 자기가 쓰고 있던 가면을 국민들에게 배달을 시킵니다. 국민들은 이 가면을 쓰고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국회의사당으로 향하여 가게 되는데, 당연히 진압경찰들은 발포명령만 기다리고 있는데, 최고권력자 셔틀러는 당수(크리디)에 의해 죽고 당수는 브이에 의해 죽었기 때문에 명령자가 없어졌고, 동참하는 국민들의 인원에 놀라서 결국 혁명은 성공을 하게 되어 새로운 세상을 맞이한다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잠깐 부연하자면, 브이가 쓴 가면의 얼굴 모습은 1605년경에 영국의 제임스 1세 정부의 독재에 항거하기 위해 장작더미 아래 36배럴의 화약을 숨겨 의회 지하터널로 잠입했다가 체포되어 처형된 ‘가이 포크스’라는 실존 인물이랍니다.
제가 느낀 점을 이야기하자면, ‘아담 셔틀러’라는 이름의 문제입니다. 먼저 ‘셔틀러’는 독일 나치즘의 창시자 ‘히틀러’를 패러디한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어째서 그렇느냐? 이 셔틀러가 국민을 선동하기 위해서 연설을 하는 장면이 히틀러가 독일 국민들을 선동하는 장면과 똑 같다는 것입니다. 생김새도 비슷하고. 그러면 무엇으로 선동을 하였을까요? 우리 인간에 내재한 공포심리를 이용하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바이러스에 의한 집단 감염에 의한 죽음의 두려움, 테러에 의한 대량적이고, 불규칙적인 죽음에 대한 두려움 등을 이용한 것입니다. 제 생각을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증거가 ‘아담 셔틀러’ 중 ‘아담’이라는 이름입니다.
워쇼스키 형제가 그러면 성경을 알고, 최초의 인간 ‘아담’을 알았냐구요? 당연히 알았죠. 이 형제들은 감독이기 이전에 철학자들입니다. 전작 “매트릭스”를 만들 때도 철학책을 섭렵하였었고, 성경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매트릭스에는 ‘트리니티’라는 인물, ‘모세’라는 인물, ‘느부갓네살’이라는 함대 등이 등장하는데, 이것들은 전부 성경에 나오는 내용들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감독이 이 영화에서는 왜 ‘아담’이라는 이름을 지었을까요? 아담의 위상 때문입니다. 아담은 하나님께 죄를 지은 후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되었고, 그 후 모든 인류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살게 된 것입니다. 쉽게 말해 죽음에 종노릇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죽음을 방지하고, 책임을 지겠다는 사람을 당연히 국가의 지도자로 선출할 것입니다. 이것을 이 형제들은 알고는 이러한 이름을 지었다라고 저는 강력하게 주장하는 것입니다. 너무 억측 갔습니까?
한 가지 더 집고 넘어가자면, 대중심리의 전염성입니다. 이러한 심리는 대중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더 빠르게 전염되는 속성이 있습니다. 바이러스가 사람이 많을수록 더욱 많고, 빠르게 전염되듯이. 이러한 속성을 프랑스의 문학평론가이자 사회인류학자인 ‘지라르’는 “모방욕망”이라고 하더군요. 쉽게 말해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행동하면 나도 그렇게 행동하고자 하는, 모방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방욕망은 개인적으로 오늘도 제가 느꼈습니다. 오늘은 어떤 날입니까? 우리나라와 일본이 세계야구대회에서 4강전을 하는 날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제일 모르고, 싫어하는 스포츠가 야구입니다. 저뿐만 아니라 평소에 야구에 관심도 없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전국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볼까요? 마치 월드컵경기처럼. 남들이 보니 나도 본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니 재미도 있고요.
모방욕망에 대해서 다른 예를 들어볼까요? 성경에 예수님이 예루살렘의 빌라도 법정에서 재판을 받으실 때, 그 구경하던 군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시오.’라고 외치던 장면은 이 인간의 욕망과 전염성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처음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는 ‘호산나’라고 외치던 군중들이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자기들을 구해줄 줄 알았는데, 그대로 체포되어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어지자 순식간에 돌변을 한 것이지요. 하물며, 베드로 마저도 예수님이 잡히시던 밤에 3번이나 저주하면서 부인까지 하지 않던가요?
마지막으로, 이 영화 속의 사회가 미래사회라지만, 과거의 행태를 그대로 답습한다는 것입니다.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말입니다.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가이 포크스’라는 과거 인물의 이미지가 나타나고 히틀러 이미지가 나타나고 아담 이미지가 나타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 영화처럼 혁명이 성공하여, 다른 세상이 올까요? 역시 똑 같다는 것입니다. 참민주주의가 실현되었다고 하여도, 어짜피 대표자들이 있을 것이고, 그들의 욕망도 그전의 지도자의 욕망과 같고, 대중의 욕망도 그전의 대중의 욕망과 갔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아담 안”이라고 합니다.
오늘은, 이 “아담 안”에 대해서 깊이 느꼈던 하루였던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