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째 제목이 좀 이상하지요? 제가 오늘 영화평을 하려는 영화가 “쉰들러리스트”와 “너는 내운명” 등 2편이기 때문에 이런 제목을 붙였습니다. 이 영화들은 전부 실화를 바탕으로 하였다는 점과 개인적으로는 영화를 보면서 많이 울었다는 점, 그리고 내용 중 일부가 복음적으로 은혜롭다는 점에 있어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쉰들러리스트”는 1994년경(?) 개봉하였을 때 한 번 보고, 오늘 유선으로 한 번 더 보았고, “너는 내운명”은 작년에 개봉하였을 때 본 영화입니다.


먼저 “쉰들러리스트”의 줄거리를 살펴보면,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 수용소에서 유대인들을 강제로 노역을 시키거나 죽이는데, 독일군은 이 유대인들을 사람취급을 하지 않고, 동물보다도 못한 존재로 취급을 하고, 실제로 그런 법률도 통과를 시킵니다. 그곳의 소장인 괴트는 전쟁중 대략 1만명의 유대인을 살해합니다.(혼자 죽인 인원인지, 그 수용소 안의 독일군들이 죽인 인원인지는 확실하게 모르겠습니다.) 수용소 안이 내다보이는 자신의 높은 저택의 테라스에서 총으로 단지 앉아있던가 길을 걸어가고 있는 유대인(가슴에 다윗의 별을 달고 있음)들을 사냥하듯이, 아니면 사격연습 하듯이 죽입니다. 죽이는 데 이유가 없습니다. 괴트에게 유대인은 인간이 아니며, 어떻게든 처리하여야 할 쓰레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이 유대인들을 고용하여 사업을 하고 있는 나치당원인 ‘쉰들러’라는 사람이 있는데, 유대인들을 따뜻하게 보살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는 이 쉰들러가 운영하는 그릇공장에 들어가기를 소원하는데, 왜냐하면 그곳은 유대인에게는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작업장에서 일하다가도 아우슈비츠로 끌려가서 가스실에서 죽거나, 아니면 일하다가 독일군에게 사소한 실수로 총 맞아 죽거나, 정기검진에서 건강이 좋지 않으면 죽어야하거나, 일할 능력이 없는 아이들과 노인들은 죽어야하거나 하는 현실에서 그 공장은 목숨을 담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전쟁은 막바지로 치닫고, 독일군은 그 수용소를 폐쇄하고 유대인들은 아우슈비츠로 보내 가스실에서 한 번에 대량살상을 하려고 하고, 이 소식을 들은 쉰들러는 자기 공장의 유대인들을 살릴 묘안을 찾다가 소장인 괴트에게 제안을 합니다. 유대인 1인당 얼마씩 돈으로 계산하여 지불을 하고, 이들을 자신의 고향인 체코로 데려가서 독일군을 위한 탄피공장을 운영하여 독일군을 위해 일할 것이고, 또한 소장은 어짜피 죽을 유대인들 중 몇 백명을 빼낸다고 하여 크게 탈 날 일도 없으며 본인은 엄청난 돈을 벌거라고 말입니다. 괴트는 이를 승낙하고, 그날 저녁 쉰들러는 공장직원 이름 하나 하나를 불러주면 공장관리인(회계사)은 이를 타이프를 칩니다. 이 명단이 바로 ‘쉰들러리스트’이고, 이 명단에 든 사람은 전부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작성한 명단에는 총 1천 1백명이 있었고, 한 명이라도 더 살려내려고 최대한 공장의 인부들 이름을 기억해내려고 하는데, 쉰들러의 대사가 아주 감동적입니다. “이 명부는 생명부입니다.” 다른 사업을 하는 사업가에게 이 일에 도와달라고 부탁을 하지만(힘을 합치면 4천명 정도의 유대인을 살릴 수 있다고 합니다.) 그 사업가는 거절을 합니다. 이 수용소가 폐쇄되기 직전 유대인들이 기차에 올라타는데, 이 장면도 아주 극적입니다. “쉰들러리스트”에 포함된 유대인(이를 영화에서는 ‘쉰들러의 유대인’이라고 표현하더군요.)들은 구원의 기차(죽음의 수용소에서 살 소망이 있는 쉰들러의 고향인 체코로 향하는 기차이기 때문에.)에 올라타고, 이 명단에 포함되지 않은 유대인들은 죽음의 기차(‘사망에서 사망으로’가 연상되는군요.)에 올라탑니다. 출발은 같지만 방향만 틀립니다.


잘 마무리 될 것 같았으나, 위기는 옵니다. 쉰들러의 유대인 중 남자들이 탄 기차는 무사히 체코의 수용소에 도착을 하지만, 여자들이 탄 기차는 착오로 아우슈비츠로 가게 되고, 이들은 머리가 깍이고, 알몸으로 가스가 나오는 목욕탕으로 들어가고 문은 잠깁니다. 이들의 절망감과 공포감을 생각해보셨나요? 분명히 몸값을 치렀기 때문에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죽음이라뇨? 소문으로만 듣던 그 가스실의 천장에 매달린 스프링쿨러만 쳐다보며 공포에 떨고 있는데, 그 스프링쿨러가 서서히 돌아가더니, 단비와 같은, 아니 생명수와 같은 물이 뿌려지는 것입니다. 쉰들러가 극적으로 구한 것입니다. 십년감수하였지요. 아니 죽다가 살아난 것입니다.


체코의 수용소는 그야말로 천국입니다. 쉰들러가 체코 수용소의 독일군에게 이들은 자신의 노동자이기 때문에 간섭을 말라고 합니다. 더 나아가 수용된 유대인 중 랍비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까지 합니다. 드디어 독일군이 연합군에 항복을 하게 됩니다. 포로들을 사살하라는 명령을 받은 체코의 독일군들에게 조용히 떠나라고 하고, 유대인들에게도 자유가 주어졌으니 각자 고향으로 떠나라고 하는데, 자신도 나치당원이기 때문에 도망을 가야할 처지입니다. 헤어질 때 ‘쉰들러의 유대인들’이 서명한 문서(쉰들러가 유대인들의 생명을 구하여주었다는 내용)와 반지를 주는데, 이 반지에는 ‘한 생명을 구한 것이 세계를 구한 것이다’라는 문구가 써있습니다. 그때 쉰들러는 울부짖습니다. 자신이 타고갈 자동차를 가리키면서 이것으로도 유대인 열 명은 구하였을 것이고, 자신의 가슴에 단 나치당원 뺏지를 빼면서 이것으로도 유대인 목숨 두 명, 아니 한 명은 충분히 구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하면서 자신이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을 후회합니다. ‘쉰들러의 유대인들’은 말합니다. “당신은 최선을 다 하였습니다.”


이렇게 쉰들러는 1천 1백명이나 되는 유대인들의 목숨을 구하였습니다. 나레이터는 폴란드에서 살아남은 유대인과 그 자손이 현재 4천명이고, 쉰들러가 구한 유대인과 그 자손이 6천명이라고 말합니다. 한 국가에서 살아남은 유대인들 보다 쉰들러가 구한 유대인들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위 영화의 감독은 세계적인 감독 스필버그인데, 그도 역시 유대인입니다. 이 영화의 비장미가 더한 것이 이 영화를 흑백으로 처리하였다는 것이고, 곳곳에서(유대인들이 죽을 때) 음악(그 음악이 바흐인지, 바그너인지, 모차르트인지는 잘 모르겠으나)이 흘러나왔던 것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울었습니다. 왜 울 수밖에 없었을까요? 유대인들의 죽음이 안타까워서 울었고, 계몽주의(17-18세기) 이래 이성의 역사가 진보한다는 허구 및 역사의 비극에 울었고, 나는 한 생명도 구할 입장이 못 되기 때문에 울었고, 더구나 제가 바로 유대인처럼 그렇게 죽으면 죽어야 할, 다른 도리가 없기 때문에 울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영화를 어떻게 보셨나요?(아직 안 보셨다구요? 그럼 빨리 보세요.) 쉰들러의 인류애적인 구원이 감동적이지 않던가요? 쉰들러는 돈으로 유대인의 목숨을 구하였습니다. 목숨값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이런 이야기가 나오죠? 맞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 때문에 죽어야할 자기 백성들을 돈이 아닌, 당신의 목숨으로 우리의 목숨을 사셨습니다. 이것을 대속이라고 합니다. 누구를 대속하였다고요? 예, 자신의 생명책에 기록된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서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리스트”에 기록되어야만 삽니다. 영화에서처럼 위기가 닥쳐옵니다. 그러나 한 명도 빠짐없이 이들의 생명을 구하였습니다. 쉰들러처럼요. 그러나 쉰들러에게는 한계가 있었죠. 그 많은 유대인들을 전부 구원하지 못하였습니다. 마음은 원하였으나 못 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계가 없으십니다. 생명책에 기록된 당신의 백성은 빠짐없이 구하였습니다. 어디에서요? 사망 중에서, 아니 요한계시록에 보면 심판 중에서입니다. 그래서 저는 또다시 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번에는 왜요? 그 사랑과 은혜가 고맙고 완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다 울었냐구요? 아닙니다. 아직 울 일이 남았습니다. “너는 내운명”이 있거든요.



“너는 내운명”은 황정민이 작년에 시상식장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으면서 소감을 이야기한 것으로도 유명하지요. “너(전도연)를 만난 것은 나에게 기적이였어!” 이 영화는 시골 동네에서 시골노총각인 황정민이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다방에 레지로 일하는 전도연이 오토바이를 타고 차배달을 가는 것을 보는 장면으로 시작을 합니다. 첫눈에 반하였습니다. 그래서 둘이는 사랑을 하게 되고, 결혼을 합니다. 그러면서 벚꽃이 허드러지게 핀 밤에 평상에 둘이 누워 전도연에게 약속을 하죠. “너만을 사랑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너를 지켜줄꺼야!”


그러나, 전도연은 과거가 있는 여자였습니다. 전에 살던 남편이 하도 폭력을 행사하여서 시골로 도망와서 살았는데, 이 남자가 전도연을 찾아냅니다. 그래서 위기가 오는데, 이 남자는 황정민에게 돈 300만원(여기서 영화를 같이 본 준성엄마는 1천만원이라고 하는군요.)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황정민은 자기가 가장 아끼는, 남의 소농장에서 일하지만 유일하게 자신의 소유인, 새 끼때부터 자식같이 키운 소를 팔아서 이 돈을 남자에게 주면서 다시는 전도연과 자신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합니다. 이를 안 전도연은 황정민에게 편지 한 통을 남기고 떠나는데, 돈을 벌면 꼭 돈을 갚겠다고 하면서. 그래서 전도연은 창녀촌으로 들어가고, 미리 받은 선 불금을 황정민에게 부치고, 황정민은 이 주소지를 가지고 전도연을 찾으러 창녀촌으로 가지만 전도연을 만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황정민은 어떻게 하였을까요? 기다립니다. 백방으로 알아봐도 찾을 수가 없으니 기다리면서 술로 한 세월을 보내면서 삶은 점점 피폐해져 갑니다.


그러면, 전도연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과거와 아픈 상처와 아련한 사랑이 있는 이 여자에게 천형과도 같은 에이즈가 찾아옵니다. 이제는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입니다. 왜죠? 에이즈는 현대의학으로는 고칠 수가 없기 때문에 살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그러나, 전도연이 더욱더 절망하는 것은 주위 사람들의 기피와 냉대입니다. 병도 병이지만 주위 사람들의 기피와 냉대는 전도연을 더욱더 비참하게 하고 절망하게 합니다. 사람들이 왜 전도연을 기피하죠?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이 병이 전염병이고, 성병이기 때문이고, 언론에도 이슈가 된 것은 전도연이 에이즈에 걸린 것을 알면서도 사회에 복수하기 위해서 손님들과 성관계를 맺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골에서는 해프닝이 일어납니다. 동네 보건소에서 마을 주민들 전체에게 에이즈검사를 하는데, 얼마나 인간이 이기적입니까? 하기야 그렇게 사랑한다던 황정민도 에이즈검사를 받으니 두 말할 필요가 없겠죠?


전도연은 교도소로 가게 되고, 황정민은 그래도 이 여자를 사랑한다고 홀어머니에게 이야기를 하고, 나문희(홀어머니)는 그러면 너와의 인연을 끊자고 하면서 위협용으로 탄 양젯물을 황정민은 마시고, 병원으로 실려가 위세척을 하지만 목이 상하여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매번 교도소에 면회를 가지만 전도연은 면회를 거절하다가, 마지막으로 매몰차게 황정민에게 미련을 가지지 못하도록 자신을 떠나게 하려고, 만나면서 자신은 황정민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이야기를 하면서 들어가는데, 황정민이 쉰 목소리로 울부짖습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전도연이 면회창에 다가와서는 왜 목이 상하였냐고 울부짖고, 황정민도 울부짖습니다. 손을 서로 잡으려고 하여도 면회창이 서로를 갈라놓으니 황정민은 면회소 위 창문에 설치된 스피커를 떼어내고 전도연의 손을 잡습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면회소 장면입니다.


이 장면에서, 아마 영화를 보던 사람들 대부분이 울었을 것입니다. 제가 영화볼 때도 훌쩍거리는 소리가 주위에 났었고, 저는 아예 눈물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더군요. 제가 왜 울었을까요? 울음이 헤퍼서? 그 말도 사실이지만 여러분은 감동적이지 않던가요? 단지 심파극이라고요? 맞습니다. 심파극이기 때문에 우는 것입니다. 우리의 부모세대들은 그런 영화나 창극 등을 보면서 사랑에 울고 사랑에 웃고, 배신에 분노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정말 황정민 같은 사랑을 할 자신이 있습니까? 세 쌍이 결혼하면 한 쌍이 이혼한다는 요즘 세상에 살고있는 여러분들은 말입니다. 과거가 있는 여자, 다방 출신인 여자는 경상도 말로 버겁죠. 결혼하기가 힘들단 말입니다. 더구나 죽을 병인 에이즈에 걸렸으면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암이라도 걸렸으면 그래도 병수발을 들 용기가 있을 분들도 있겠지만, 그 병이 에이즈라면 우리가 어떻게 그 여자를 사랑한다고 장담을 하겠습니까?


솔직히 인정합시다. 우리는 이 실화의 주인공인 남자보다도 더 사람을 덜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 사랑이 감동적이라서 울고, 그 사랑이 없음에 울고, 그 사랑에 감사하면서 울고... 성경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던가요? 예, 저는 고멜이 생각나던군요. 바람난 여자, 창녀 출신인 이 고멜은 구약의 호세아 선지자의 아내입니다. 하나님이 창녀인 고멜을 아내로 맞이하라고 호세아 선지자에게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호세아는 하는 수없이 고멜을 아내로 맞이하는데, 자식 낳고 살다가 딴 남자가 좋다며 바람나서 가출을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다시 호세아에게, 고멜을 찾아서 돈을 치른 후 다시 데려와서 살아라고 합니다. 이 호세아 선지자가 무엇을 느꼈겠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느꼈습니다. 바람난 창녀처럼 이방신들을 숭배하고, 율법을 지키지 않은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사랑을 느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처지와 우리 처지가 뭐가 다릅니까? 우리가 바로 주를 멀리 떠난 이스라엘이고, 탕자입니다. 우리가 바로 고멜이고, 전도연입니다. 신약에서 말하면 남편 다섯을 갈아치운 현남편도 본남편이 아닌 사마리아 여인입니다. 이런 자들을 주님은 사랑하시데, 끝까지 사랑하신다고 요한복음에선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언제까지요? 끝까지입니다. 세상 끝까지. 또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것이라.” 이런 주님 앞에서 창녀 같은, 죽을 병에 걸린 우리가 어찌 울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 목사님의 오후 말씀처럼 (마귀에게)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신’(엡4:8) 것입니다. 선물 받을 자격도 없는 자가 이 사랑, 이 은혜 받았으니, 감사의 눈물 외에 달리 우리는 할 것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감사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존재지만, 새하늘과 새땅에서는 눈물이 없을 것입니다. 질고의 눈물 뿐만 아니라 감사의 눈물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곳은 오직 기쁨의 찬양만 있을 것입니다. 이 두 편의 영화 제목을 이어보면, 주님의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만 영생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의 운명입니다.


실화는 늘 감동적이죠. 감동적이지 않으면 영화로 만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짜 실화가 있습니다. 세월이 너무 오래되어서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가물가물하지만 2,000년전에 한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영원한 창조주시고,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육신으로 세상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구원자로서 말입니다. 그분이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구원자인데, 이 구원자는 당시 유대인들이 기대하던 정치적 메시야나, 세상을 심판할 묵시적 심판자(인자)나, 모세 율법이 고대하던 그 선지자(고난의 개념이 없음)로서가 아니라, 고난받는 종으로서 오신 것입니다. 분명 이사야 등에 ‘고난받는 종’에 대해서 예언되어 있었지만 당시 유대인들은 이를 믿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생소한 개념이기 때문에 믿으려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오셨습니다. 고난받는 종으로서, 고난받는 인자로서, 고난받는 메시야(왕)으로서, 고난받는 선지자로서, 고난받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말입니다.


어떻게 고난받는 메시야, 고난받는 인자, 고난받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님을 당시 유대인들이 받아들일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이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신성모독자로. 그러나 자기 백성은 믿었습니다. 주님은 정말 자기 백성을,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은 전부 남김없이 구원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운명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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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충격적인 내용이였습니다. 약간의 줄거리를 듣고 영화를 보았지만, 실제 영화를 보고 감상평을 적으려니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될지 난감한군요.


희망의 섬, 아일랜드에 갈 수 있는 추첨에 당첨되기만을 기다리면서 지내는 인간들, 이들은 자신들이 지구오염의 환경에서 기적적으로, 선택받아 살아남은 것에 감사를 하면서 관리자들과 컴퓨터에 의해 오염되지 않도록 관리(통제)되면서 살아갑니다. 통제되면서 살아가는 것이 조금은 불편하지만 그래도 희망은 있습니다. 옛날 원초적 지구가 있었을 때처럼, 전혀 오염되지 않은 섬에서는 오염 걱정이 없기 때문에 통제받지 않고 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영화 시작부터 주인공 링컨 6-에코(이완 맥그리거 역)는 악몽에 시달립니다. 그 꿈의 내용에 대해서 의문을 품은 채 일상생활을 하다가 우연히 다른 구역에서 생활하는 친구 맥코드를 만나면서, 나방 한 마리를 잡아가지고 자기 구역으로 돌아옵니다. 이 나방을 여자 주인공 조던 2-델타(스칼렛 요한슨 역)에게 보여주면서 의문을 제기하죠. 다른 지역은 분명 오염되어 생물이 살 수가 없는데도 왜 이 나비는 죽지 않고 살아 있는지? 나방을 잡았던 자리에 다시 나방을 놓아주면서 이 나방을 따라 가서, 보았던 광경은 너무나 엄청난 내용이였습니다.


영화 시작에 산모는 출산일이 다가오면 무조건 아일랜드에 갈 수 있었는데, 모든 사람들의 부러움 속에 아일랜드로 가려고 관리자들을 따라 갔던 그 산모가 아이를 낳고는 한 번 안아보지도 못하고 죽임을 당하고 그 아이는 다른 부부의 손에 인계가 되는 것과, 아일랜드에 당첨되어 마냥 좋아하면서 따라 갔던 흑인은 수술용 침대에 누워 살아있는 채 간을 떼어내려다 흑인이 살려고 수술실을 뛰쳐나와 도망가다가 관리자들에 의해 다시 끌려들어가는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완전히 조작된 현실에서 살았던 것이지요. 그러나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주인공은 전체적인 윤곽은 파악을 하지 못하고, 다시 자기 구역으로 돌아와 막 아일랜드에 당첨되어 내일이면 떠나는 여자주인공을 데리고 탈출을 감행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 “아일랜드는 없다” “나를 믿고 따라와라”


사건의 진실은 이렇습니다. 때는 2019년, 인류는 인간을 복제할 수 있을 만큼 과학이 발달하였고, 인간복제 회사(메릭 바이오테크사)에서는 돈많은 사람들(스폰서)로부터 미리 주문을 받습니다. 자기의 복제인간(클론)을 만들어두고 만약 자기가 불의의 사고를 당하거나, 장기를 이식할 필요가 있을 때, 아니면, 대신 아이를 낳아줄 대리모를 주문할 때 이 클론을 사용하려고 보험에 가입하듯이 이 회사에 돈을 지불하는 것입니다.(약 50만달러 정도). 그런데, 주문한 사람들은 클론들이 사물을 인식하지 못하는 수면상태에 있는 식물인간인 줄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윤리문제에서 면피할 수가 있다고 생각을 하죠. 하지만 회사에서는 클론들도 인간과 똑같이 사고를 하고, 감정이 있다는 것을 주문자들에게 속입니다.


주문자의 DNA를 그대로 스캔해서(체세포 복제가 아님) 12개월 만에 새로운 성인 복제인간을 만들어서 주문자가 필요할 때까지 구역(치유센터)안에서 관리를 하다가, 필요하면 아일랜드에 보내준다고 하면서 복제인간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과 똑같이 사고를 하고, 인식을 하는 복제인간을 어떻게 속일 수가 있었을까요? 그것은 복제인간을 만드는 과정에서 12개의 프로그램을 복제인간의 눈을 강제로 뜨게 한 후 어린 시절부터 현재까지 자기가 있게 된 과정을 보여줍니다. 세뇌를 시키는 것이죠. 그래서 복제인간들은 자기가 과거도 있고, 부모도 있었고, 추억도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실에 안주하면서 살도록 아일랜드라는 유토피아도 보여주고요. 거의 완벽하게 가상현실을 조작해 낸 것입니다.


복제인간의 지능은 15세 정도, 복제인간끼리 새로운 생명이 탄생되면 안되니까 섹스에 대해서는 무지하고, 신에 대한 감정도 없으며, 진짜 세계와는 차단된 채 살아가는 복제인간들은 자기의 구역밖을 벗어난 적이 없고, 벗어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왜요? 다른 지역은 오염된 지역이고, 자기는 오염되면 죽는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약간의 의문은 있지만, 아일랜드에 당첨만 되기를 기다리면서 다른 것은 참을 수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박사는 처음부터 식물인간처럼 지각하지 못하는 복제인간을 만들 수 없었을까요? 있었습니다만, 식물인간처럼 만들면 주문자에게 거부반응이 생기기 때문에 지각있는 복제인간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인간의 잔인함을 볼 수가 있습니다.


계속 이야기를 이어가면, 여주인공을 데리고 통제된 구역을 탈출하여 진짜 세상으로 나오게 됩니다. 그때의 충격을 상상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는 너무나 낯선 진짜 세상을 경험하면서 친구 맥에게서 앞에서 이야기한 사건의 진실을 알고는 자기의 주문자(원본)을 찾아 떠납니다. 그런데 이 진짜 현실이 만만치가 않습니다. 탈출한 사실을 안 메릭 박사는 킬러(사설경호대)를 고용하여 이 탈출한 제품(제품으로 호칭됨)들을 수거하거나 제거하려고 하면서, 쫓고 쫓기는 화려한 액션장면이 영화의 중반을 장식합니다.


결국 자기의 진짜와 마주한 남주인공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죠. 스캔으로 복제가 되면서 진짜의 기억까지도 복제가 되었고, 그래서 악몽의 내용도 이 기억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자, 그러면 이 진짜(주문자)의 현실은 무엇일까요? 돈은 많이 벌었으나, 자신의 간 때문에 2년 밖에 살지 못한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고는 복제인간을 주문한 것입니다. 복제인간인 주인공이 진짜에게 물어보죠. “나는 얼마냐?” 그러자 진짜는 대답합니다. “50만 달러다, 영원의 대가치고는 싸지?” 남주인공이 진짜를 찾아온 것은 이 사실(수면상태에서 인간복제가 되는 것이 아니고, 복제인간들도 사고하고, 활동한다는 사실, 그리고 장기를 적출당하거나, 대리출산후 죽임을 당한다는 사실)을 진짜 세상에 폭로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회사는 망할 것이고, 자기 및 수천 명의 복제인간들도 살 수 있다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현실 세상도 진실(복제인간들이 사고할 수 있고, 살해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속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왜요? 메릭 박사가 그 사실을 숨겼기 때문입니다. 남주인공이 혼자 이 사실을 방송국에 폭로를 하면 미쳤다고 할 것이 뻔하죠?


어째든, 진짜 링컨은 가짜 링컨을 살리면, 자기는 2년 안에 죽어야 되기 때문에 자기가 살려고 가짜 링컨을 속여서 킬러들에게로 데려가게 되는데, 중간에 가짜 링컨은 이 사실을 눈치를 채고, 킬러와 진짜, 가짜가 대치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기서 아이러니하게도 킬러는 진짜를 죽이게 됩니다. 왜 그랬을까요? 누가 진짜인지 킬러로서는 구분이 안되고, 서로 진짜라고 우기면서, 가짜가 차고 있던 복제인간 인식 팔찌를 진짜에게 채우고, 킬러는 그 팔찌만 보고 진짜를 죽이는 것입니다. 이 장소가 창고같은 곳으로 거기에는 날개달린 사람(천사?)의 동상이 한쪽은 팔이 떨어져 나간 채 소품으로 나오는데 이것을 어디서 봤더라? 결국 집에 돌아와서 확인해보니, 똑같은 그림은 아니지만 진중권의 ‘미학에디세이’ 3권에 나오는 피라네시가 만든 동판 <미네르바의 조각이 있는 환상의 페허>, 1778년작과 이미지가 비슷하였습니다. 여기서 감독은 현 세상을 시뮬라크르의 시대라고 이야기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요? 원본이 없는 세상, 복제가 원본이 되고, 복제가 다시 복제되고, 가상이 현실이 되고, 현실이 가상이 되는...


계속 진행하면, 살아남은 가짜 링컨은 복제인간의 어떤 계열 전체가 잘못 만들어져서 수십 명을 리콜(?)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다시 조작된 세계(치유센터)로 들어갑니다. 복제된 인간들을 구하려고. 결국 홀로그램을 파괴하여, 땅 속에서 수천 명의 복제인간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이들도 진짜 현실과 마주하게 되면서 영화는 막을 내립니다.


이 영화에서 최고의 조크는 맥 친구집에서(사실 이 친구는 이 복제회사에 출근하여 어떤 업무를 담당하는 기술자입니다.) 부인이 링컨과 조단이 찬 복제인간이라고 인식할 수 있는 팔찌를 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야, 커플 팔찌가 예쁘네!”, “여보, 우리도 한 개 해요.” 참, 속도 모르고...


여러분, 어떻습니까? 좀 무섭지 않는가요? 아니면, 앞으로 우리 살아있을 때 이런 일이 생긴다면, 주문자처럼 영원을 바라보나요? 여러분은 이 영화에서 누구랑 동일시합니까? 주문잡니까? 복제인간들입니까? 아니면, 신과 같은 박사입니까? 이 영화에서도 나타난 것처럼, 윤리적인 문제만 해결되면 인간은 복제인간을 식물인간(수면상태)으로 만들어서라도 영원을 소망할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게 무서운 것이 아니라 인간이 무서운 것입니다.


황우석 교수가 줄기세포 배양에 성공했다고 해서, 세계를 빛낸 한국인이라고 자랑스러운가요? 세상은 인간의 의도가 아무리 선하다고 하더라도 선한 대로 움직이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끝으로, 영화를 보고 나오는데, 앞자리에서 보았던 젊은 여자가 친구에게 하는 말이 “야, 이 영화 완전 싸이코다!”, 어째 영화의 느낌이 이렇게 다를 수가!


저는 이 영화에서 복음을 봅니다. 영화처럼, 이 세상 현실은 마귀에 의해서 거의 완벽하게 조작되었습니다. 어떻게요? 여러분이 살아가는 이 현실이 진짜 현실인데, 비록 자기 뜻대로 살지 못하더라도 이 현실에 살아남아 있다는 것이 기적이기 때문에 조금은 통제받더라도 이해하고 살아라고. 그리고 희망도 있지 않냐고. 여러분에게는 아일랜드가 있으니까. 여기에서 열심히 살면 아일랜드에 갈 수 있는데, 이게 꿈이 아니고 실제 당첨돼서 떠나는 사람들을 주위에서 보지 않냐고. 이렇게 위로하면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이렇게 조작된 현실에서 빠져나올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현실도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거의”라고 하였던 것이구요. 이 조작된 현실에서 탈출한 사람이 있거든요.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만이 조작된 역사속에서 진짜 현실을 보았던 분입니다. 그런데 이 진짜 현실이 묵시란 말이죠. 역사속에 있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영 믿을 수가 없는 현실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고마운 게 하나 있습니다. 그렇게 조작된 현실에서 조작된 꿈(천국, 극락)을 가지고 죽기만을 기다리는 인간들에게 예수님께서 오셔서 진짜 현실을 보여준 것입니다.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진정한 자유를 누릴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탈출한 우리들은 그래서 감사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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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일상적인 하루였습니다. 뉴욕 항구부두에서 크레인 전문 운전기사였던 주인공 톰 크로즈는 일요일에도 나와서 일해 달라는 부두관리자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집으로 와서, 이혼하면서 전처와 살고 있는 아들과 딸을 주말마다 만나서 그날도 평범하게 아들과 딸에 대한 특별한 애정없이 지내던 중이였습니다.

 

갑자기 집이 흔들려 밖으로 나가보니 하늘에는 온통 먹구름이 끼고, 바람이 세차게 불었으며, 무엇보다도 특이한 것은 번개가 구름에서 땅으로 내리쳤지만, 그후에 나타나야 될 천둥 소리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영화의 전개과정에 대한 복선이겠지요.


불안한 주인공은 딸을 집안에 있게 한 후, 자신의 자동차를 운전하고 나간 아들을 찾을 겸  밖으로 나가보니, 불안한 시민들도 주인공처럼 밖으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길거리에는 전부 자동차가 멈춰져 있었고, 주위의 모든 전기는 정전이 되어서 외부와의 연락도 차단되었습니다.


그런데 모인 군중들 밑에서 땅이 갈라지기 시작하더니, 땅에서 엄청나게 큰, 빌딩 높이만한 세 발이 달린 기계(머리 부분은 타원형의 문어대가리 모양?)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스필버그는 외계인이 만약 지구를 침공할 거면 대기권 밖에서부터 들어올 것이라는 일반적인 예상을 깨려고 하였지만, 이 구상이 그렇게 치밀하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기계가 땅에 묻히게 된 계기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거든요. 다시 영화로 돌아와서, 이쯤 되면 아!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과 함께 죽도록 도망을 가야지요. 그런데 인간의 호기심은 죽기까지 끝이 없는 것 같더군요. 아니, 죽고 나서도 호기심이 발동하지 않을까요? 여기가 어딘가??? 그래서 호기심 천국 아니면 호기심 지옥인가?(썰렁~) 도망을 가면서도 그 기계의 실체에 대해서 계속 뒤를 돌아보며, 궁금해 하던 사람들... 그러면서 죽어가는 사람들... 이 기계는 드디어 가공할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는데, 두 눈처럼 생긴 촉수같은 곳(자동차의 전조등과 비슷하게 생김)에서 자기장 광선이 나오더니 순식간에 사람들을 재로 만들고, 빌딩과 자동차들을 파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도저히 감당이 안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상상속의 일들이, 아니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 현실로 발생하다니! 그러나 이것은 앞으로 지구의 멸망을 예고하는 시작에 불과합니다. 급히 집으로 돌아와서 비상식량을 챙기고 아들과 딸을 데리고, 멈춰진 자동차들 중 주인공의 이웃인 자동차정비공이 유일하게 수리한 남의 자동차에 타고, 위 저주받은, 아니 외부로부터 침공을 받은 뉴욕을 떠나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게, 갈 때가 없다는 것입니다! 일단 뉴욕에서의 위기를 모면하여야 하지만 어디를 가야 안전한가?


특별한 대안없이 그저 이 기계로부터 멀리 떨어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무작정 자동차를 운전하는데, 여기서 자동차정비공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주인공이 남의 자동차를 타고 가려니, 당연히 자동차정비공이 문을 열면서 내리라고 합니다. 남의 자동차를 가져가면 자기가 물어주어야 한다나요... 그런데 이야기하는 중에 뒤에는 기계가 자기장 광선을 싸대면서 모든 것을 파괴하며 다가오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서 주인공이 너도 빨리 타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자세히 설명을 할 시간이 없으니 내 말을 믿고 타라고 하는 주인공의 간절한 눈빛을 대하던 자동차정비공은 이것을 외면한 채 주인공을 끌어내리려고 하고, 주인공은 사정없이 자동차문을 닫고 출발을 합니다. 그와 동시에 자동차정비공은 자기장 광선을 맞고 순식간에 재가 되어 버립니다.


출발은 하였으나 갈 때는 없고, 일단 이 기계로부터 멀리 떨어지려고 무작정 길을 떠났습니다. 도로는 정차된 자동차들과 피난가는 사람들로 가득 찹니다. 가면서 주인공의 간절한 바램은 무엇이였을까요? (영화를 그냥 즐기면 되는데, 뭐한다고 주인공의 생각까지 알려고 하냐고 핀잔을 줘도, 궁금한데 어떻게 합니까?, 역시 호기심은 끝이 없죠?) 제발 주인공이 본 이 기계가 1대만 있기를 간절히 바랬을 것이고, 그러면 살 희망은 있다. 이 기계는 외부에서 온 것이 아니고, 일부 세상에 대해서 비관적인 정신병적인 과학자가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면 어찌 살 방도를 찾아볼 수도 있는데... 라고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를 저 혼자 생각해봅니다.


그러나 가면서 주인공이 경험한 것은 공격하는 기계들이 하나 둘이 아니고, 무수히 많다는 것과 이 기계들의 공격 범위가 전지구적이라는 것과 이 기계들이 점령한 지역은 거의 초토화되어 있어, 전부 핏빛으로 물들어 있으며, 생존한 인간은 한 명도 없다는 것을 경험합니다. 또한 기계들의 목표는 지구에 사는 인류들을 포로로 잡아 부리겠다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인류 멸망이였습니다. 여기에서 오는 절망감을 이루 말을 할 수 없겠지요? 흐르는 강물에는 수많은 시체들이 떠내려가고, 푸르러야 할 산과 들에는 온통 핏빛으로 물들어 있는 지구를 한 번이라도 상상해 보셨나요? 이것이 현실로 나가올 수도 있다고 생각을 해보셨나요? 가상현실이 실제 현실이고, 실제 현실이 가상현실이 될 수도 있다는 경험을 매트릭스 영화나 진중권의 책들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실제로 생각해 보지는 않았는가요?


주인공은 추락된 비행기에서 생존한 여기자(?)로부터 기계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얻는데, 여기서 스필버그 감독은 다소 황당한 설정을 합니다. 이 기계들이 땅에서 나왔는데, 이 기계들이 땅 속에 있었던 기간은 인류가 생기기도 훨씬 전에 땅 속에 묻혀 있었다는 것이지요. 진화론에 의하면 인류가 100만년 전에 생겼나요? 그전에 땅 속에 묻혀 있었다면서 외계인의 지구침공 계획은 인류가 지구에 있기 전부터 있었다는 것이지요. 이런 스필버그의 의도는 인간이 이 지구상의 주인공이고, 주인이라는 거만한 생각을 떨쳐버리라는 멧세지인가요?  아무튼 이 땅속에 묻힌 기계들이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은 번개 속에 비밀이 있습니다. 또한 번개가 치면서 천둥소리가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구요. 외계인(외계인의 모습을 보니 이미지가 E.T나 골룸과 비슷한데, 영화에 나오는 외계인들의 한결같은 특징은 징그럽다는 것이지요. 이것도 인간을 기준으로 한 편견인가요?)들이 지구 땅 속에 묻혀 있는 기계에 내려갈 수 있었던 것은 번개(자기장?)를 통해서였습니다.


그후 영화는 기계들이 인류를 공격하는 장면들과 인류들은 전혀 대항하지 못하고 죽어가는 모습들로 수를 놓습니다. 이제 주인공은 아들과 딸을 데리고 이혼한 전처가 있는 보스톤으로 향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주인공은 인간 생존본능을 경험하게 되는데, 자동차가 피난하는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서 이 피난하는 사람들이 유일한 이동수단인 이 자동차에 함께 타려고 주인공의 자동차를 공격하게 되고, 급기야 주인공과 아들, 딸은 자동차에서 쫒겨나고, 이 자동차를 탈취한 사람은 5미터도 가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 의해서 총격을 당하여 살해되고, 다시 이 사람은 다른 누군가에 의해서 살해당할 것이고....


지구 멸망의 위기에서, 자기 목숨에 대한 생존본능은 가히 상상도 할 수가 없는데, 인간의 윤리와 도덕은 여기에서 힘을 발휘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타인의 목숨은 나의 목숨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방해가 된다면, 없어져도 상관없다는 이 인간 실존의 모습을 스필버그 감독은 상정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 주인공도 자기 생존본능과 딸의 안녕을 위해서, 지하실에 함께 숨어있던 사람을 살해한다는 암시가 나오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영화에는 인간애라는 장면이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기계들의 무차별 공격만이 있고, 무력한 미군의 방위력은 이 기계들 앞에서 힘을 발휘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인간 생존본능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스필버그가 끝까지 놓치지 않는 부분은 가족애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동적인가요??? 전지구적 멸망의 위기에서 대책없는, 그래서 너무도 두려운 주인공이 아들과 딸을 구하는 장면에서는 자기의 목숨조차 아까와 하지 않습니다. 실제 딸이 기계에 잡혀서 기계 속으로 사라졌을 때, 우리의 주인공은 수류탄 주머니를 들고 과감하게 기계에 잡혀 기계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여기서 이 기계의 실체가 드러나는데, 문어대가리 모양의 머리 부분의 안쪽에는, 양쪽으로 철창이 있고, 그 철창안에는 사로잡혀 있는 인간들이 빨판으로 빨아드리려는 기계의 촉수를 이리저리 피하고 있는 아수라장이였습니다. 거기서 딸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고, 주인공이 그만 이 빨판의 표적이 되어 잡혀, 빨판 안쪽으로 계속 밀려들어가는 것입니다. 실제 주인공이 머리부터 다리까지 빨려들어가다가 다른 사람이 다리를 잡고, 여러 사람들이 함께 도와주어서 겨우 빠져나왔습니다. 주인공은 죽다가 살아남은 것이지요. 여기서 모든 영화의 특징인 주인공은 죽을 수 없다. 죽더라도 영화가 끝나갈 때 죽는다는 철칙이 나타납니다.


이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주인공은 빨판에서 빠져나오면서 수류탄 주머니를 빨판에 던지고, 멋도 모르는 기계는 이 수류탄을 삼킨 후 수류탄이 폭발하여 기계는 쓰러지고 철창 속에 있던 사람들은 살아남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드는 것은 왜 기계나 외계인들은 인간의 피를 원할까요? 영화에서는 이 부분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만 영화를 보는 내내 가진 의문이였습니다. 기계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피가 필요한 것일까? 아니면 외계인들의 에너지원으로서 필요한 것일까?


영화 중간에 기계들의 점령지인 지하실에서 주인공과 딸, 그리고 집주인이 숨어 있는데, 기계의 촉수가 지하실로 내려와서 움직이는 물체가 있는지를 탐색하는 장면과 외계인 몇이 지하실에 나타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기서 주인공은 처음으로 외계인을 보게 되죠. 그런데 이 장면들(기계가 탐색하는 장면)이 낯이 익다는 것입니다. 어디서 봤더라? 그렇죠. 쥬라기공원에서 공룡들이 주인공들을 잡으려고 탐색하는 장면과 흡사하더군요.


영화는 종반으로 치달아가고 있는데, 어떻게 주인공이 외계인의 약점을 밝혀내고, 이를 이용하여 외계인과 기계들을 물리쳐서 자기도 살아남고, 가족들을 살리고, 그리고 우리의 바램인 지구를 지킬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영화를 보고 있는데, 의외로 단순하게 해결이 되더군요. 너무나 간단해서 얼척(?)이 없을 정도로....


자 그러면, 처음에는 거창하게 시작하였던 인류멸망의 위기상황에서, 스필버그 감독은 어떻게 위기를 해결하면서 마무리를 짓는지 살펴볼까요. 우선 주인공이 기계들의 공격으로부터 피하면서, 기계가 파괴되어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는 미군에게 물어보죠. 어떻게 이 기계가 쓰러졌냐고. 미군의 대답은 기계가 그냥 빙빙 돌더니 쓰러지더라고 대답을 합니다. 그리고 다른 기계들을 보니 까마귀가 기계들 위에 달라붙어 있는 것입니다. 자기장으로 보호막을 치고 있던 기계들에게서 자기장 보호막이 사라진 것입니다. 이 보호막 때문에 미군의 화력이 소용이 없었던 것이구요. 그러면 까마귀가 지구를 구했냐구요? 아닙니다. 여기서 주인공은 원인을 찾지 못합니다만 미군에게 보호막이 사라진 기계들을 향하여 화력으로 공격하라고 하고, 미군들은 이 기계들에게 공격을 가하여 기계들이 하나 둘 쓰러집니다.


주인공은 딸과 함께 무사히 보스톤으로 가서 이혼한 전처와 그리고, 피신 중간에 미군을 도와서 지구를 구하겠다며 떠난 아들도 만나면서 영화는 엔딩을 하는데, 원래 주인공의 목표인 가족들의 생존은 이루어졌군요. 역시 대단합니다.


아직 기계가 쓰러진 원인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그 원인을 나레이터는 지구에 존재하는 미생물들에 있다는 것이지요. 이 미생물들은 지구가 생겨나면서부터 있었을 것이고, 그런 환경에서 진화한 인류는 미생물로부터 알레르기를 일으키지 않지만, 외계인들은 다르다는 거죠. 이 외계인들이 인류는 죽일 수 있지만, 이 지구상에 있는 미생물들에게는 적응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외계인들의 입장에서는 지구에서는 살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외계인들이 미생물에 감염되어 하나 둘 죽으면서, 기계들도 쓰러졌던 것이구요. 그러면 지구는 누가 구하였는가요? 스필버그의 대답은 미생물이라는 것이지요. 어째 좀 황당하지 않은가요?


그러면, 이 영화의 주제는 뭐일까요? 지구는 인류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주인도 아니니까 조금은 겸손하게, 그리고 자연환경을 보존하면서 살자! 아니면 역시 지구는 누가 지키던 멸망하지 않아! 하는 안도감? 글쎄요? 과연 그런지 두고 볼 일입니다. 이상으로 영화평을 적었는데, 분량이 너무 길어져버렸습니다.


여기서 주님 재림과 비교하여 느낀 점을 간략하게 적어 보겠습니다.


1. 주님 재림은 이 영화처럼 우리의 일상중에 임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노아 때처럼,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중에.....

 

2. 이 재림은 인간 누구나가 감당을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영화의 인류처럼, 기계들의 무차별 공격에 대처할 방법이 없었듯이....

 

3. 이 세상 심판 때 인간들은 생존본능으로 몸부림칠 거라는 것이지요. 몇 시간이라도 더 살려고....

 

4. 그러나 갈 때가, 피할 때가 없다는 것이지요. 주님의 심판은 전지구적이고, 전우주적이기 때문에...

 

5. 주인공의 말을 믿지 않은 자동차정비공처럼, 인간은 심판이 임박하였으니 나를 믿으라는 주님의 말씀을 믿지를 않는 것입니다. 마치 소돔성에 있던 롯의 사위가 소돔멸망 소식을 농담으로 여겼듯이.... 그러나 심판이 막상 닥치면 그때는 이미 늦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만사에 때가 있다고, 하였지 않은가요?

 

6. 이 심판에서 살아남을 방법이 없습니다. 주인공도 죽다가 살아났지 않던가요? 우리도 주님이 당하신 십자가의 심판 그대로, 죽다가 살아나는 방법만이 살 길입니다. 주님이 살려주어야 삽니다.

 

7. 영화에서는 요행으로 미생물이 지구를 구합니다만, 실제 심판 때는 이런 요행이 통하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구는 멸망합니다. 가상현실 갔죠? 하기야 우리가 어떻게 보지 않고 이것을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8. 그러면 지구가 멸망하면 그것으로 끝인가요? 아니죠. 다시 만들죠. 이것을 재창조라고 합니다. 어떻게? 그거야 저는 모르죠. 방법은 모르고, 사실만 안다는 것입니다.

 

9. 그러면, 어짜피 죽을 인생 멋대로 살자? 아니죠. 인간은 지구가 멸망하지 않는다고 하여도 계속 멋대로 살았습니다. 지구 멸망한다고 멋대로 살지는 않죠. 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이야기죠? 심판주이신 예수믿고 살자는 이야기입니다. 결론이 너무 간단하고 황당한가요? 영화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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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칼로그 - 십계, 키에슬로프스키, 그리고 자유에 관한 성찰
김용규 지음 / 바다출판사 / 2002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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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규씨의 책 “데칼로그”는 특이한 책입니다. 부제가 말해주듯이 구약성경에 나오는 십계명을 해석하는데, 폴란드의 영화감독 키에슬로프스키의 “데칼로그”라는 연작영화를 소재로 하여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데칼로그는 그리스어로 ‘십계명’을 말합니다. 책의 구성은 각 계명에 따라 영화의 줄거리를 소개하고, 위 계명에 대한 기독교사에 있었던 십계명에 대한 해석들을 설명한 후, 저자가 주장하는 존재론적 해석으로 마무리를 하는데, 이 입장으로 키에슬로프스키의 “데칼로그”에 대한 영화평도 하고 있습니다.


저자가 주장하는 존재론적 해석이 설득력이 있는 게 저자가 신학을 전공하였기 때문이고, 본문 뒤에 첨부된 만만치 않은 미주와 전문용어 해설을 보아서도 알 수가 있습니다. 한 마디로 공을 들인 저작이라는 것이지요. 또한 키에슬로프스키 영화감독도 상당한 내공을 보여주고 있는데, 감독은 이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 여러 권의 신학 책에 대해서 섭렵하였다고 하는군요. 나중에 보니 영화계에서는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감독이였습니다. 제가 다행히 비디오를 보았더니 기존의 도덕적 해석으로는 “데칼로그” 영화가 잘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저자의 설명을 따라 존재론적으로 해석을 하니 이해가 가더군요. 즉, 저자의 말에 의하면 이 영화는 존재론적인 해석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 책의 대략을 살펴볼까요? 저자는 십계명에 대한 역사적 해석을 크게 윤리적인 해석과 크뤼제만이 주장한 사회적 해석과 자신이 주장하는 존재론적 해석으로 나누고, 윤리적, 사회적 해석에 대한 비판을 제기한 후 존재론적 해석에 대한 타당성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윤리적인 해석은 유대교, 이슬람교, 그리고 일부 기독교에 받아들이는 해석으로써 십계명은 시대를 초월한 보편타당성을 간직한 윤리서라는 것입니다. 인간으로서 반드시 지켜야할 도덕이라는 것이지요.


크뤼제만이 주장하는 사회적 해석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정치적, 사회적으로 종되었던 애굽땅에서 출애굽(구원)시킨 후에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주셨는데, 그 내용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얻은 자유를 보존하라는 취지로 십계명을 주었다는 것입니다.(그래서 크뤼제만의 책 제목이 ‘자유의 보존’입니다.) “각각의 계명들을 다른 시대 다른 사람들에게 사용할 때 그들을 굴복시키고 길들이는 도구로 사용해서는 안 되며, 윤리적 금지행위가 아닌 사랑의 구체적 실현으로 이해해야 하고, 종교적으로 뿐만 아니라 사회적, 경제적인 자유를 추구하는 실질적이고 적극적인 실행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면 이 책의 핵심인 존재론적 해석은 무엇일까요? 먼저 저자는 십계명을 주신 하나님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나는 있는 자이다’(출3:14)라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역사상 ‘존재론’의 전통에 대해서 설명을 하면서 십계명도 이 노선에 따라 해석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1계명을 예로 들면, 신은 존재이고 창조주이고, 인격적이며, 유일자이지만 다른 우상은 ‘존재물’이고 어떤 열망의 형상화이기 때문에 이를 섬긴다는 것은 그 어떤 존재물이나 그에 대한 열망에 스스로 구속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유일한 ‘존재’로서 자유를 주는 자이기 때문에 우상으로부터 자유로워져라 라는 것이 1계명의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데칼로그 1>은 주인공이 현대인의 여러 우상 중 ‘계산적 이성’을 신으로 섬겨 그의 노예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저자의 십계명 해석에 동의를 하는가요? 저는 이해는 가지만 동의는 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십계명(율법도 마찬가지)을 달리 해석하기 때문이지요. 십계명은 저자의 말대로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구원)시킨 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을 지키면 구원을 받는다는 내용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구원을, 계명을 통하여 확인하고 유지하라는 내용이지요.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계명들(뿐만 아니라 다른 율법들도)을 지킬 수가 있었을까요? 당연히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사법을 함께 주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계명과 제사가 함께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늘 계명을 어겼고, 그래서 늘 속죄가 이루어져야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속죄제사도 나중에는 제사장들과 백성들의 탐욕과 외식으로 그들의 죄만 더할 뿐이였던 것이 성경이 말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이고 인간의 역사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지키지도 못할 계명을 주었단 말인가요? 라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율법에는 흠이 없습니다. 문제는 인간의 실상에 있는데, 그것은 탐욕이였습니다. 저자도 간파하였듯이 이 탐욕 때문에 인간은 십계명을 지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탐욕을 불교에서는 욕심이라고도 하고, 현대철학에서는 욕망이라고도 합니다. 성경에서는 이 탐욕(탐심)을 우상숭배라고 하는데, 이 탐욕을 이길 인간은 아무도 없다고 증거합니다. 설명이 너무 길어졌으나, 결과적으로 십계명을 포함한 모든 율법은 인간의 죄성을 폭로하고 이를 통하여 구세주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율법의 참뜻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에 있으나, 이를 완전히 이룰 인간이 없다는 것에서 인간의 절망이 있으며, 온몸으로, 죽기까지 이 계명을 지킨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써 또한 인간의 희망이 있습니다. 이것이 십계명에 대한 복음적인 해석입니다.


어째 기독교인이나 비기독교인이나 제 말에도 동의하기가 힘드시죠? 하지만 이것이 제가 십계명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선이해(전제)이기 때문에 저는 이러한 전제에서 이 책을 읽었고 서평을 작성하였습니다. 저자가 심혈을 기울인 책이므로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그런데 양장본이라 책값이 조금 비싸서....


사족 하나, 저희 동네 비디오 가게에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위 “데칼로그” 영화(총10개)를 특선영화코너에서 한참을 찾았는데, 드디어 찾아내고는 위 비디오 2개를 빌리려고 하니까 주인아저씨가 저보고 이 영화감독을 아세요? 라고 물어보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영화감독은 모르고 이 영화는 안다고 이야기를 하였는데, 주인아저씨 왈, 이 영화비디오는 엄청 귀한 거라서 시내의 비디오 가게에서 찾기가 힘들 것이라고 하면서 자신이 이 비디오를 소장하고 있는 것을 은근히 자랑하더라구요.


사족 둘, 우연히 시립도서관 자료검색에서 이 “데칼로그”를 입력하였더니 세상에나! 글쎄 이 연작영화가 DVD 5장으로 비치되어 있더라구요. 위 영화는 보고 싶으나 주위 비디오 가게에 위 비디오 테이프가 없으신 분들은 공공도서관 자료검색에서 검색을 해보시지요. 그러면 혹시나?


사족 셋, 저자의 십계명 구분은 개신교에서의 구분법과 약간 틀립니다. 카톨릭에서 사용하는 구분법을 따랐는데, 개신교에서의 2계명에 해당하는 우상숭배금지 조항이 카톨릭에서는 1계명에 포함되었고, 개신교에서의 10계명에 해당하는 이웃의 것에 대한 탐심 조항을 카톨릭에서는 2개로 나누어 이웃의 아내에 대한 탐심 조항과 이웃의 소유에 대한 탐심 조항으로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저자는 7계명인 도적질하지 말라는 조항을 물건이 아닌 사람 도적질을 의미한다고 하는군요. 고대 노예 사회에서 자유인을 납치하여 파는 행위를 금하였다는 것이지요. 일리가 있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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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0-08-13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을 보니, 정말 읽고 싶군요! 당장 사야 겠어요^^
 
성령론 - 박영선 목사
박영선 지음 / 크리스챤서적 / 2001년 8월
평점 :
절판


 

박영선 목사님의 “성령론” 이라는 책은 1986년경에 처음 나왔으니까 약 20년 전에 나왔던 책인데, 저에게는 이 책을 통해서 최초로 박영선 목사님의 책들을 알게 되었으니까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뜻 깊은 책입니다. 당시 고등학생때 이 책을 읽을 때에는 어려워서 완독을 하지 못하였던 기억이 나는데, 최근에 다시 읽으면서 많은 유익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다시 읽으면서 전에는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무엇이냐 하면 박 목사님이 성령론을 이야기하면서도 성화에 대해서 강조를 하더란 말이지요. 그러면, 유익된 부분과 저의 생각과 틀린 부분들을 순서에 따라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1. 삼위일체론


박 목사님은 성령론을 이야기하면서 제일 먼저 삼위일체론을 들고 나옵니다. 먼저 삼위일체가 정립이 되어야 성령 하나님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삼위일체론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무심코 알고 있는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삼위로 계신다는 내용인데, 이렇게 이야기하면 이것은 단일신론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즉, 항상 숫자적으로 한 분이라고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박 목사님은 삼위일체가 하나님만이 유일(唯一)한 신이고 다른 신은 없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은 유일신이지 단일신(單一神)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예로, 하나님은 하늘 보좌에 계시고, 예수님은 그 보좌 우편에 있으며, 요한복음 14장 16절에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에서 내, 즉, 예수님이 계시고, 아버지, 즉, 하나님이 계시고, 또 다른 보혜사, 즉, 성령님이 따로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3 인격체, 즉, 구별된 3위(位)로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삼위일체에서 일체(一體)는 무엇입니까? 그 말은 본질에 있어서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이 동일하다는 것이지요. 역사적으로 이 삼위일체는 여러 논쟁이 있었고, 또한 수많은 사람들이 이단으로 정죄당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만큼 기독교사에서 상당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였습니다.


박 목사님은 단일신론을 주장할 때, 양자론과 양태론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양자론은 성자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 원래는 인간이였는데, 성부 하나님께서 그의 영으로 인간 중에서 예수님을 불러내어서 아들로 삼았다고 주장합니다. 즉, 예수님을 피조물이라고 봅니다. 양태론은 한 분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에는 성부 하나님으로 나타났고, 신약 시대에는 성자 예수님으로, 현 교회 시대에는 성령 하나님으로 가면을 바꾸어 쓰고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많이 들어본 이야기이죠? 여자의 위치가 가정에서는 어머니이고, 남편에게는 아내이고, 부모에게는 딸로서, 한 사람이지만 그 역할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박 목사님은 이야기하기를 “3위는 각각 100% 하나님이시다. 성자도 성령도 완전한 하나님이시다” 라고 합니다.


기존에 가졌던 잘못된 삼위일체론에 대해서 바른 시각을 가지게 해주는 내용이였습니다. 박 목사님은 “삼위일체는 신비입니다. 인간의 이성과 논리를 초월합니다” 여기서 신비는 “숫자적으로 어떻게 하나이면서 셋이냐? 하는 것이기 보다 어떻게 독립된 개체인데 본질이 동일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라고 하면서 본 단락을 맺습니다.


2. 성령과 불로써의 세례


이 단락에서 “세례”에 대해서 설명을 하는데, 이 부분이 앞의 “삼위일체론”과 뒤의 “오순절 성령강림의 의미”와 함께 이 책에서 가장 유익을 얻은 부분입니다. 박 목사님은 먼저 세례는 동일시, 동질화, 연합이라고 합니다. 세례주는 자의 세계로 세례받는 자가 동일시, 연합이 된다는 의미이겠죠. 그래서 골로새서 2:12절에 보면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라고 하면서 “함께”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물세례는 원래 인간이 죽어 마땅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행위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물세례를 받으심으로서, 그 물세례 아래 친히 들어가심으로 자신도 죽어 마땅한 인간들과 동등한 위치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즉, 죄인과 “함께” 하기 위해서 물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께 물세례 주는 것을 반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것만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길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세상과 죄에 대하여 죽는 자리에 동참하고 그와 함께 하나님 안에서 새로 부활하는 자리에까지 동참케 되는 것입니다.(롬6:3-8) 여기서 박 목사님은 세례 요한의 물세례를 노아의 홍수사건과 연결을 시킵니다. 베드로전서 3장 20,21절에서 물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는 표, 곧 세례라고 합니다. 방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고요. 물은 모든 육체를 그 아래 삼켜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는 무서운 것이지만, 역설적이게도 방주는 물이 없으면 뜨지 못합니다. 즉, 물이 사망이 되게도 하고, 생명이 되게도 한다는 말입니다. “결국 물은 멸망 받을 것과 사망 아래 있어야 하는 것들에 대해서 우리를 구별해 내고 분리해 내는 방법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나 방주 안에 있으면, 그 심판의 물로 말미암아 물 위에 뜨게 되고 살아남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박 목사님은 물세례를 이스라엘 백성들의 홍해사건과 연결을 시킵니다. 고린도전서 10:1,2절에 보면,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가는데 홍해를 건널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다 홍해에서 빠져 죽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게 속하여 홍해를 건넜습니다. 홍해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입니다. 마치 노아홍수에서 방주 안에서 살아남은 것과 같이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모세에게 속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연합입니다. 이것이 세례의 의미라고 박 목사님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세례 요한이 말한 “성령과 불”로서 세례를 준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먼저 불이란 심판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가치 없는 것을 태우고 소멸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친히 “성령과 불”로서 세례를 주심으로 우리 안에 성령님이 내주하신다고 합니다. 이 부분은 박 목사님의 설명이 약간 미흡한데, 보충하자면 먼저 성령과 불로써 세례를 받으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물세례를 받으시고 올라오시자 성령이 비둘기 같이 예수님 위에 임하심으로서 성령 세례를 받으셨고,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심으로서 불세례, 즉 심판을 받으신 것입니다. 죄에 대한 심판을, 죄 없으신 분이 대신하여 불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이와 동일하게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도 예수님이 주시는 성령 세례를 받음으로서 우리가 이제 심판(불세례)에서 면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연합되었기에 이루어진 일입니다.


3. 오순절 성령 강림의 의미


박 목사님은 오순절에 성령님께서 강림하시게 된 의미를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오순절(칠칠절, 맥추절)과 안식일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칠칠절이라고 하는 것은 유월절부터 일곱 안식일을 지나기 때문이고, 그때가 보리 수확하는 시기라서 맥추절이라고도 합니다. 즉, 오순절이라는 것이 안식일에서 나왔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안식일은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출애굽기 20장의 십계명에서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는데, 이것의 의미는 천지창조를 생활로 간증하는 의식이라는 것입니다. “쉰다는 것,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레 되는 날 쉼으로써 앞의 엿새 동안에 하나님께서 일해서 온 천하 만물을 만들었다는 신앙고백을 형식화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명기 5장에서는 안식일의 개념이 한 단계 더 진전되는데, 여기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땅에서, 종이 되었던 것을 출애굽시킨, 구원하신 하나님이신 것을 기념하는 것이 첨가됩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였을 때의 거룩도 구별됨임으로 이러한 구약의 내용들은 우리가 종되었던 곳에서 구원을 받았고, 자유를 받았기 때문에 안식일을 지킴으로 그 사실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희년의 개념도 같은 것이구요. 이 일이 신약에서 예수님께서 죄의 종이였던 우리를 꺼내어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님께서 오순절에 오셨다는 것은 그런 안식일과 희년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는 대로, 예수님께서 죄와 사망의 종에서 꺼내셨다는 것을 증명하고 보증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좀더 보충하자면, 오순절, 칠칠절의 절기가 안식일의 내용도 포함하지만 이 절기를 계산하는 기준점은 유월절에 있는 것입니다. 즉,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으로 살아남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과 무교절을 지키고, 이 유월절로부터 계산하여 칠칠절을 지켰으며, 수장절을 지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유월절 절기 때 십자가를 지셨고, 안식일 이튿날 요제로 단을 가져온 날이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이고, 칠칠절에 성령께서 강림하셨고, 앞으로 추수때인 수장절만 남았습니다. 예수님의 재림때는 가라지는 불에 태우고 알곡은 거두어 저장하실 것입니다.(계14:15,16) 이렇듯 모든 절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합니다.(골2:16,17)


4. 성령강림, 그 자체가 갖는 메시지


여기서부터 박 목사님은 성령강림에 대해서, 그 뒷부분에 나오는 성령 세례와 성령 충만에 대해서 본인의 생각과 전혀 틀린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박 목사님은 오순절 성령강림에 있어서 성령님의 사역을 객관적 사역과 주관적 사역으로 나누고, 또한 객관적 사역은 예수 믿는 모든 신자들에게 모두 주어지는데, 그 객관적 사역은 먼저, 죄인인 인간들이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었으나(창 6장의 하나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제 성령님이 함께 하실 수 있는 존재로 바뀌어졌다(요엘 2장의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는 것이 객관적인 증거요 사역이라고 합니다.


그럴 듯해 보이는 내용이나, 사실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구원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성령님이 함께 하실 수 있는 존재로 우리가 바뀐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구원의 사역을 성령님께서 직접 신자들에게 적용시킴으로서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또한 성령님은 혼자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승천하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 보내신 분이십니다. 성령님은 아들의 영이고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또한 우리가 예수님이나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존재가 바뀐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성령을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성령이 임하여 신분이 바뀐 것입니다. 약간 어려워 보이나 차이점은 분명 있습니다.


박 목사님은 성령님의 객관적 사역의 두 번째로 성령님이 오시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라(요16:7-11)고 하면서 성령님의 오신 것 자체가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는 증거라고 합니다. 이 구절은 중요한 구절인데, 그러나 박 목사님은 이 부분에 대해서 충분히 설명을 하지 못할 뿐 아니라, 성령님의 오심 자체가 이런 객관적 사역을 증거한다고 하지만, 성령님의 오심을 가지고 객관적, 주관적으로 나누는 것도 문제가 있고, 또한 성령님이 오셔서 하시는 사역 때문에 우리가 책망을 받는 것이지 성령님의 오심 자체가 효과를 발휘하는 것은 아닙니다. 박 목사님이 성령 강림 자체를 강조하는 것은 박 목사님이 이야기하는 성령의 주관적 사역을 염두에 두기 때문에 불가피하다는 생각이 됩니다.


그러면 요한복음 16장에서 이야기하는 성령님께서 세상을 책망하시는 내용은 무슨 의미일까요?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즉,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다른 윤리 도덕적인 것이 죄가 아니고 말입니다. 이렇게 성령님은 죄에 대해서 책망을 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죄인이다. 왜? 예수 믿지 않으니까. 그리고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보지 못함이요” 즉, 예수님만이 유일한 의인데, 이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시면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시지 않음으로 의를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진정한 의인을 몰라보느냐고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즉, 이 세상 임금, 마귀가 이미 심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이 세상을 심판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재림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심판을 확인하는 작업인 것입니다. 이것이 믿어지십니까? 안믿어지신다구요? 그러니까 성령님께서 책망을 하시는 것입니다.


5. 성령이 주시는 세례로써의 성령세례


박 목사님은 “성령강림, 그 자체가 갖는 메시지” 단락에서부터 엉뚱한 주장을 하더니, 여기서는 아예 성령이 주시는 세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근거로 고린도전서 12:12,13절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한 성령을 마시게 하였느니라.” 라고 하면서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성령님에 의해서 세례를 받았다는 뜻으로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세례를 베푸셨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본문은 그런 뜻이 아니라 앞 구절에서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듯이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인데, 여러 지체가 있다고 하면서 우리가 한 몸인 증거가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또한 한 성령을 마시게 “하였느니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각자 받은 성령이 한 성령이라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세례를 베푼 것이 아니고요. 아니, 성령님이 무슨 세례를 베푼단 말입니까? 그런 말이 구약에 있습니까? 신약에 있습니까? 오히려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께로부터 성령을 받아 우리에게 베풀었다고 하는 것이 맞지 않는가요?


박 목사님은 자꾸 구원받은 우리를 성령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덧붙이시는 작업을 성령님께서 베푸시는 “성령 세례”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즉, 그리스도와 연합되게 하는 세례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것은 성령님께서 베푸시는 성령세례가 아니라 성령님의 사역이라고 이야기를 해야 더 올바르다고 생각을 합니다.


6. 예수님이 주시는 세례로써의 성령세례(성령의 부어주심)


이 단락에서 박 목사님은 더욱더 헷갈리게 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박 목사님은 성령세례를 총 3가지로 나누고 있습니다. 첫 번째 성령님께서 베푸시는 세례로써의 ‘성령세례’는 우리를 그리스도 안으로, 즉 연합되게 하는 세례이고, 두 번째 ‘성령과 불’로써 세례를 주신다고 했을 때의 그 예수님이 주시는 ‘성령세례’는 우리 모든 신자에게 성령님이 내주케 되는 그런 의미에서의, 즉 주께서 베푸시는 1차적 의미로서의 성령세례이고, 세 번째 예수님이 주시는 성령의 부어주심으로서의 ‘성령세례’는 구원 얻은 것과는 다른 그 이상의 선물이고 그 이상의 경험이라고 하면서, 이러한 성령세례들은 성경에서 분명한 차이를 둔다고 합니다. 아니, 성령세례가 박 목사님이 주장하는 것처럼 이렇게 구분이 되는 것인가요? 그것도 3가지로 말입니다.


그러면, 박 목사님이 말하는 2차적 의미에서의 예수님께서 성령의 부어주심의 의미는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박 목사님은 예수님이 주시는 2차적 의미에서의 성령의 부어주심의 근거의 대표 구절로 요한복음 7장 38,39절 말씀에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라고 하면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는 표현은 성령의 내주하심으로서의 성령세례(1차적 의미)는 아니라고 합니다. 그 표현이 너무 강하여 본인도 인식할 수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지금 여기에서는 예수님께서 주실 것으로 묘사되고 있기 때문에 성령님이 주시는 세례도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성령님이 안계신다는 묘사는 성령님이 내주하시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성령의 부어주심이 없다는 이야기라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는 표현은 구약적인 표현이고, 상징으로서 성령을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본인이 인식 하고, 안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면, 즉, 부활승천하시면 성령님께서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전에는 성령님께서 아직 오시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성령님께서 내주하고, 안하고의 문제도 아닙니다. 박 목사님이 왜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하게 되느냐 하면, 구원 중심으로 성경을 보게 되기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한다고 생각합니다.


7. 성령의 부어주심과 성령 충만의 차이


박 목사님은 이번에는 한 술 더 떠서 성령의 부어주심과 성령 충만과도 차이가 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다시 한 번 정리를 해보면, 먼저 성령님께서 베푸시는 세례로서의 성령세례(그리스도와 연합됨)가 있고, 두 번째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1차적 의미로서의 세례(성령의 내주)가 있고, 세 번째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2차적 의미로서의 세례(성령의 부어주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단락에서는 이 성령의 부어주심과 성령 충만은 또 다르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박 목사님은 성령세례를 총 4가지로 나누고 있습니다. 성령세례는 3가지로 나누어지고, 이 성령세례 중 세 번째 성령세례(성령의 부어주심)는 다시 성령 충만과도 다르다는 것입니다. 다시 박 목사님의 말을 들어봅시다. “성령님의 내주가 신자라면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라면 이제 성령의 부어주심(성령세례)라는 것은 그 외의 일로 인하여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한 것으로 나에게 확실한 인식되는 것이요, 내가 감각하는 것이요, 내가 분명히 ‘이것이다’라고 외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기독교사에서 부흥의 시기를 그 증거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요나단 에드워드, 찰스 웨슬레, 조지 휫필드 등등.


그러나 제가 생각하기에 박 목사님은 성경을 오해한 것 같습니다. 박 목사님이 이 책에서 솔직하게 어려운 부분을 토로하고 있지만 결과는 그렇게 만족스럽지 않습니다. 저는 부흥의 시기가 있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렇다고 그 사실이 성령세례와 성령의 부어주심, 성령의 내주하심 등으로 나누어진다고는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성령님의 사역으로 얼마든지 그런 부흥이 일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박 목사님이 생각하는 성령의 부어주심과 성령 충만과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성화가 등장하거든요. 박 목사님은 확실하게 성령의 부어주심과 성령 충만은 다르다고 하면서 에베소서 5장 18절(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구절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성령 충만을 받으라”는 표현은 권고형이고, 성령 세례는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라는 것으로서 권고형은 아니기에 다르다고 합니다. 성령의 부어주심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행사하시는 은사임으로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없으나 성령 충만을 받으라는 것은 열심히 추구할 것으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분명히 다르고 구별해야 되며, 성령 충만을 받으라는 것은 원래 성경에서 성화의 원리로서 요구되고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왜 박 목사님께서 앞 단락들에서 그토록 성령 세례를 3-4가지로 구분하였는지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구분함으로서 성령 세례는 주어야 받지만 성령 충만은 우리가 노력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점차 성화되어 완전한 길로 나아가듯이...


그러나 과연 그렇습니까? 여러분들은 성화가 되던가요? 성령 충만이 되던가요? 성령 충만을 받으라는 말은 내가 노력하면 된다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너라는 인간은 안되기 때문에 성령 충만이 있어야 돼! 라는 책망의 말씀이 아닐까요? 그리고 내가 아니고 성령님께서 충만하게 하시기 때문에 위로가 되는 말씀이기도 하구요. 제가 성경을 잘못 보고 있습니까?


성경에서 말하는 명령문들을 우리는 흔히 우리가 지킬 수 있다고 오해를 합니다. 즉,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셨으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키지 못하여서 예수님께서 이 율법을 완성하시러 오셨다. 그럼으로 이제는 예수님으로 구원받았고, 중생되었으니 우리가 신약의 권면의 말씀들을 지키자고 생각합니다만 이 사고방식 자체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고방식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선택받았으니 율법을 지키자는 것하고 뭐가 다릅니까?


구약이나, 신약에서 성화의 개념은 없습니다. 히브리서 10장 10절에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미 거룩함을 얻었습니다. 거룩은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루어 가는 것이 아니고 말입니다.


8. 우리에게 일어나는 변화들


박 목사님은 이 단락에서 아예 성령 충만을 성화라고 못을 박습니다. 갈라디아 5장 16-23절 말씀에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라는 권면의 말로 되어 있다면서 이것은 성화, 즉 성령 충만에 관한 것이 라고 합니다. 그리고 성화의 결과는 성령의 열매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본문이 과연 그러한 말씀일까요? 앞에 서도 이야기했듯이 우리는 성경에서 권면한다고 권면을 지킬 수가 없는 자들입니다. 오히려 그 권면들이나 명령들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더 바라보아야만 하는 자들입니다. 내가 구원받고, 안받고 상관없이 말입니다. 혹시 우리에게 사랑이나 자비 등 성령의 열매가 나왔습니까? 그래서 그것이 우리의 열매가 아니라 성령의 열매인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맺으신 열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 세례를 받은 자들은 내적, 외적으로 어떤 일이 발생한다고 하는데, 간략하게 요약하면, 내적 현상의 처음은 자기의 내면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직접적인 인식, 하나님 존재에 대한 자각이 생기고 두 번째는 기쁨과 거기에 따르는 확신이 생기고, 세 번째는 주를 영화롭게 하려는 마음이 생기고, 네 번째는 빛에 대한 이해가 생긴다고 하며, 외적 현상의 처음은 성령 세례를 받은 본인뿐만 아니라 옆에 있는 사람도 분명히 느낄 수 있는 어떤 증거가 있고, 두 번째는 얼굴이 달라지고, 세 번째는 말이 달라진다고 합니다.


저는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던데, 저는 그러면 성령 세례를 받지 못한 것인가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박 목사님의 주장이 사실일까요? 얼굴에 빛이 나지 않는 사람은 성령 세례를 받지 못한 사람일까요?


9. 성령의 인침과 성령의 은사


이 단락에서도 박 목사님은 ‘성령 세례’와 ‘성령의 인침’에 대해서 구분을 시도합니다. 성령 세례와 성령의 인침은 본질은 같으나 초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즉, 성령 세례는 하나님을 증거하는 ‘증인’이라는 내용에 초점이 있고, 성령의 인침은 자기의 구원문제, 예수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를 확인하는 ‘확인’쪽에 초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인침을 설명하면서 사도행전 8장의 빌립의 전도와 베드로의 성령 안수사건, 10장의 이방인 고넬료에게 성령이 임한 사건, 19장의 바울의 에베소에서 성령 안수사건 등을 언급하면서 예수믿는 것과 성령이 임하는 것이 동일한 사건이 아니라고 주장을 합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이 사건들은 계시가 완성되기 전의 초대교회에서 성령이 임하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차원에서 발생한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확실한 것은 성령이 임하지 않고서는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생략하겠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리차드 개핀의 <성령은사론>을 보시면 많은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박 목사님은 성령의 은사를 이야기하면서 성령의 은사는 능력적인 것인데, 이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한 능력이 아니라 교회의 유익을 위한 능력이라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12장 말씀을 가지고 설명을 하는데, 여기도 애매한 문제가 있습니다. 박 목사님이 이야기하는 ‘교회의 유익’은 뉘앙스가 현실 교회를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이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7)에서 ‘유익’은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유익입니다. 그리고, 모든 성령의 은사도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합니다.


박 목사님은 또한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 중에 성령의 은사를 받지 못한 사람도 있다고 이야기를 하는데, 이것도 사실이 아닙니다.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은 반드시 성령의 은사가 나타납니다. 왜 그럴까요? 같은 성령이고, 한 성령이기 때문입니다.(고전12:11)


10. 성령세례, 어떻게 받을 것인가?


박 목사님은 이 단락을 끝으로, 이제까지 이야기하였던 모든 것을 통하여 본인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을 주장합니다. 그러면 그 내용이 무엇일까요? 박 목사님은 성령 세례에 대해서 하나님의 약속들을 어떻게 소유할 것인가를 생각하라고 합니다. 즉, 성령 세례를 받을 수 있도록 우리가 잘 준비하라는 말이지요. 성령 세례를 소유개념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 성령 세례는 인과율적인 믿음과 안수라는 방법으로 온다는 오류를 없애야 한다고 합니다. 이것들은 방법론이 아니란 것입니다.


박 목사님은 이런 것들이 방법론이 아니라고 하면서 성령 세례를 받으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라고 하면서 다른 방법론을 들고 나옵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축복의 길에 서 있을 것인가? 어떻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은혜를 받는 곳에 가 있을 것인가?”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가 성령 세례를 만들 수는 없지만 성경을 잘 보아서 그 축복의 길에 서 있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는 곳에 가 있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어떻게 허물과 죄로 죽은 자가 그 자리에 서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계속해서 박 목사님의 말을 들어 봅시다. “이제 그 구체적인 방법론으로 들어갑시다. 첫 번째로 우리는 항상 이 약속을 목표와 생각으로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마치 대학 입시를 앞에 둔 자녀에게 부모가 신경을 쓰듯이 이 약속에 대해서도 그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답니다. 그래야 성령 세례를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두 번째는 성령 세례를 받는 이 일을 위해서는 반드시 제거되어야 할 것들이 있다고 합니다. 죄들로부터 자기를 거룩케 하기 위해서 애를 써야 된다고 하면서, 죄를 윤리,도덕적인 목록들로 생각을 하고 그러한 구절들을 증거구절로 언급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아를 떨쳐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기도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기도하라는 것은 이것이 인간의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고백하는 큰 상징이라고 하면서도 기도에 관한 증거구절들을 설명하면서 전심전력으로 기도해야 된다고 합니다. 제가 보기에 앞뒤가 안맞습니다.


이상으로 박 목사님의 “성령론” 책을 상세하게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제가 보기에 박 목사님께서 네 번째 단락부터 성령 세례와 성령의 부어주심 등을 구별하면서 엉뚱하게 주장하는 이유가 성화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을 해봅니다. 마지막 단락은 제목 자체가 “성령세례, 어떻게 받을 것인가?”가 아닙니까? 우리가 잘 준비하면 성령세례도 받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은 날마다 성화가 되어 가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은혜가 왕노릇하는 세계)에 소속된 사람입니다. 그것을 날마다 확인하면서 그 은혜에 감사하면서 더욱더 죄의 깊이를 깨달아 가는 사람입니다. 아닙니까? 그리고 이 책에서는 선택의 개념이 전혀 없습니다. 성령 세례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총 177페이지 밖에 되지 않는 얇은 책인데, 아무튼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책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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