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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론 - 박영선 목사
박영선 지음 / 크리스챤서적 / 2001년 8월
평점 :
절판
박영선 목사님의 “성령론” 이라는 책은 1986년경에 처음 나왔으니까 약 20년 전에 나왔던 책인데, 저에게는 이 책을 통해서 최초로 박영선 목사님의 책들을 알게 되었으니까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뜻 깊은 책입니다. 당시 고등학생때 이 책을 읽을 때에는 어려워서 완독을 하지 못하였던 기억이 나는데, 최근에 다시 읽으면서 많은 유익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다시 읽으면서 전에는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무엇이냐 하면 박 목사님이 성령론을 이야기하면서도 성화에 대해서 강조를 하더란 말이지요. 그러면, 유익된 부분과 저의 생각과 틀린 부분들을 순서에 따라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1. 삼위일체론
박 목사님은 성령론을 이야기하면서 제일 먼저 삼위일체론을 들고 나옵니다. 먼저 삼위일체가 정립이 되어야 성령 하나님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삼위일체론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무심코 알고 있는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삼위로 계신다는 내용인데, 이렇게 이야기하면 이것은 단일신론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즉, 항상 숫자적으로 한 분이라고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박 목사님은 삼위일체가 하나님만이 유일(唯一)한 신이고 다른 신은 없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은 유일신이지 단일신(單一神)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예로, 하나님은 하늘 보좌에 계시고, 예수님은 그 보좌 우편에 있으며, 요한복음 14장 16절에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에서 내, 즉, 예수님이 계시고, 아버지, 즉, 하나님이 계시고, 또 다른 보혜사, 즉, 성령님이 따로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3 인격체, 즉, 구별된 3위(位)로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삼위일체에서 일체(一體)는 무엇입니까? 그 말은 본질에 있어서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이 동일하다는 것이지요. 역사적으로 이 삼위일체는 여러 논쟁이 있었고, 또한 수많은 사람들이 이단으로 정죄당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만큼 기독교사에서 상당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였습니다.
박 목사님은 단일신론을 주장할 때, 양자론과 양태론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양자론은 성자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 원래는 인간이였는데, 성부 하나님께서 그의 영으로 인간 중에서 예수님을 불러내어서 아들로 삼았다고 주장합니다. 즉, 예수님을 피조물이라고 봅니다. 양태론은 한 분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에는 성부 하나님으로 나타났고, 신약 시대에는 성자 예수님으로, 현 교회 시대에는 성령 하나님으로 가면을 바꾸어 쓰고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많이 들어본 이야기이죠? 여자의 위치가 가정에서는 어머니이고, 남편에게는 아내이고, 부모에게는 딸로서, 한 사람이지만 그 역할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박 목사님은 이야기하기를 “3위는 각각 100% 하나님이시다. 성자도 성령도 완전한 하나님이시다” 라고 합니다.
기존에 가졌던 잘못된 삼위일체론에 대해서 바른 시각을 가지게 해주는 내용이였습니다. 박 목사님은 “삼위일체는 신비입니다. 인간의 이성과 논리를 초월합니다” 여기서 신비는 “숫자적으로 어떻게 하나이면서 셋이냐? 하는 것이기 보다 어떻게 독립된 개체인데 본질이 동일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라고 하면서 본 단락을 맺습니다.
2. 성령과 불로써의 세례
이 단락에서 “세례”에 대해서 설명을 하는데, 이 부분이 앞의 “삼위일체론”과 뒤의 “오순절 성령강림의 의미”와 함께 이 책에서 가장 유익을 얻은 부분입니다. 박 목사님은 먼저 세례는 동일시, 동질화, 연합이라고 합니다. 세례주는 자의 세계로 세례받는 자가 동일시, 연합이 된다는 의미이겠죠. 그래서 골로새서 2:12절에 보면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라고 하면서 “함께”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물세례는 원래 인간이 죽어 마땅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행위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물세례를 받으심으로서, 그 물세례 아래 친히 들어가심으로 자신도 죽어 마땅한 인간들과 동등한 위치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즉, 죄인과 “함께” 하기 위해서 물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께 물세례 주는 것을 반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것만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길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세상과 죄에 대하여 죽는 자리에 동참하고 그와 함께 하나님 안에서 새로 부활하는 자리에까지 동참케 되는 것입니다.(롬6:3-8) 여기서 박 목사님은 세례 요한의 물세례를 노아의 홍수사건과 연결을 시킵니다. 베드로전서 3장 20,21절에서 물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는 표, 곧 세례라고 합니다. 방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고요. 물은 모든 육체를 그 아래 삼켜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는 무서운 것이지만, 역설적이게도 방주는 물이 없으면 뜨지 못합니다. 즉, 물이 사망이 되게도 하고, 생명이 되게도 한다는 말입니다. “결국 물은 멸망 받을 것과 사망 아래 있어야 하는 것들에 대해서 우리를 구별해 내고 분리해 내는 방법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나 방주 안에 있으면, 그 심판의 물로 말미암아 물 위에 뜨게 되고 살아남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박 목사님은 물세례를 이스라엘 백성들의 홍해사건과 연결을 시킵니다. 고린도전서 10:1,2절에 보면,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가는데 홍해를 건널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다 홍해에서 빠져 죽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게 속하여 홍해를 건넜습니다. 홍해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입니다. 마치 노아홍수에서 방주 안에서 살아남은 것과 같이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모세에게 속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연합입니다. 이것이 세례의 의미라고 박 목사님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세례 요한이 말한 “성령과 불”로서 세례를 준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먼저 불이란 심판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가치 없는 것을 태우고 소멸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친히 “성령과 불”로서 세례를 주심으로 우리 안에 성령님이 내주하신다고 합니다. 이 부분은 박 목사님의 설명이 약간 미흡한데, 보충하자면 먼저 성령과 불로써 세례를 받으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물세례를 받으시고 올라오시자 성령이 비둘기 같이 예수님 위에 임하심으로서 성령 세례를 받으셨고,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심으로서 불세례, 즉 심판을 받으신 것입니다. 죄에 대한 심판을, 죄 없으신 분이 대신하여 불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이와 동일하게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도 예수님이 주시는 성령 세례를 받음으로서 우리가 이제 심판(불세례)에서 면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연합되었기에 이루어진 일입니다.
3. 오순절 성령 강림의 의미
박 목사님은 오순절에 성령님께서 강림하시게 된 의미를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오순절(칠칠절, 맥추절)과 안식일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칠칠절이라고 하는 것은 유월절부터 일곱 안식일을 지나기 때문이고, 그때가 보리 수확하는 시기라서 맥추절이라고도 합니다. 즉, 오순절이라는 것이 안식일에서 나왔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안식일은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출애굽기 20장의 십계명에서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는데, 이것의 의미는 천지창조를 생활로 간증하는 의식이라는 것입니다. “쉰다는 것,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레 되는 날 쉼으로써 앞의 엿새 동안에 하나님께서 일해서 온 천하 만물을 만들었다는 신앙고백을 형식화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명기 5장에서는 안식일의 개념이 한 단계 더 진전되는데, 여기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땅에서, 종이 되었던 것을 출애굽시킨, 구원하신 하나님이신 것을 기념하는 것이 첨가됩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였을 때의 거룩도 구별됨임으로 이러한 구약의 내용들은 우리가 종되었던 곳에서 구원을 받았고, 자유를 받았기 때문에 안식일을 지킴으로 그 사실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희년의 개념도 같은 것이구요. 이 일이 신약에서 예수님께서 죄의 종이였던 우리를 꺼내어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님께서 오순절에 오셨다는 것은 그런 안식일과 희년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는 대로, 예수님께서 죄와 사망의 종에서 꺼내셨다는 것을 증명하고 보증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좀더 보충하자면, 오순절, 칠칠절의 절기가 안식일의 내용도 포함하지만 이 절기를 계산하는 기준점은 유월절에 있는 것입니다. 즉,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으로 살아남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과 무교절을 지키고, 이 유월절로부터 계산하여 칠칠절을 지켰으며, 수장절을 지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유월절 절기 때 십자가를 지셨고, 안식일 이튿날 요제로 단을 가져온 날이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이고, 칠칠절에 성령께서 강림하셨고, 앞으로 추수때인 수장절만 남았습니다. 예수님의 재림때는 가라지는 불에 태우고 알곡은 거두어 저장하실 것입니다.(계14:15,16) 이렇듯 모든 절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합니다.(골2:16,17)
4. 성령강림, 그 자체가 갖는 메시지
여기서부터 박 목사님은 성령강림에 대해서, 그 뒷부분에 나오는 성령 세례와 성령 충만에 대해서 본인의 생각과 전혀 틀린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박 목사님은 오순절 성령강림에 있어서 성령님의 사역을 객관적 사역과 주관적 사역으로 나누고, 또한 객관적 사역은 예수 믿는 모든 신자들에게 모두 주어지는데, 그 객관적 사역은 먼저, 죄인인 인간들이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었으나(창 6장의 하나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제 성령님이 함께 하실 수 있는 존재로 바뀌어졌다(요엘 2장의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는 것이 객관적인 증거요 사역이라고 합니다.
그럴 듯해 보이는 내용이나, 사실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구원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성령님이 함께 하실 수 있는 존재로 우리가 바뀐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구원의 사역을 성령님께서 직접 신자들에게 적용시킴으로서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또한 성령님은 혼자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승천하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 보내신 분이십니다. 성령님은 아들의 영이고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또한 우리가 예수님이나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존재가 바뀐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성령을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성령이 임하여 신분이 바뀐 것입니다. 약간 어려워 보이나 차이점은 분명 있습니다.
박 목사님은 성령님의 객관적 사역의 두 번째로 성령님이 오시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라(요16:7-11)고 하면서 성령님의 오신 것 자체가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는 증거라고 합니다. 이 구절은 중요한 구절인데, 그러나 박 목사님은 이 부분에 대해서 충분히 설명을 하지 못할 뿐 아니라, 성령님의 오심 자체가 이런 객관적 사역을 증거한다고 하지만, 성령님의 오심을 가지고 객관적, 주관적으로 나누는 것도 문제가 있고, 또한 성령님이 오셔서 하시는 사역 때문에 우리가 책망을 받는 것이지 성령님의 오심 자체가 효과를 발휘하는 것은 아닙니다. 박 목사님이 성령 강림 자체를 강조하는 것은 박 목사님이 이야기하는 성령의 주관적 사역을 염두에 두기 때문에 불가피하다는 생각이 됩니다.
그러면 요한복음 16장에서 이야기하는 성령님께서 세상을 책망하시는 내용은 무슨 의미일까요?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즉,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다른 윤리 도덕적인 것이 죄가 아니고 말입니다. 이렇게 성령님은 죄에 대해서 책망을 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죄인이다. 왜? 예수 믿지 않으니까. 그리고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보지 못함이요” 즉, 예수님만이 유일한 의인데, 이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시면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시지 않음으로 의를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진정한 의인을 몰라보느냐고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즉, 이 세상 임금, 마귀가 이미 심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이 세상을 심판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재림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심판을 확인하는 작업인 것입니다. 이것이 믿어지십니까? 안믿어지신다구요? 그러니까 성령님께서 책망을 하시는 것입니다.
5. 성령이 주시는 세례로써의 성령세례
박 목사님은 “성령강림, 그 자체가 갖는 메시지” 단락에서부터 엉뚱한 주장을 하더니, 여기서는 아예 성령이 주시는 세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근거로 고린도전서 12:12,13절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한 성령을 마시게 하였느니라.” 라고 하면서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성령님에 의해서 세례를 받았다는 뜻으로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세례를 베푸셨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본문은 그런 뜻이 아니라 앞 구절에서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듯이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인데, 여러 지체가 있다고 하면서 우리가 한 몸인 증거가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또한 한 성령을 마시게 “하였느니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각자 받은 성령이 한 성령이라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세례를 베푼 것이 아니고요. 아니, 성령님이 무슨 세례를 베푼단 말입니까? 그런 말이 구약에 있습니까? 신약에 있습니까? 오히려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께로부터 성령을 받아 우리에게 베풀었다고 하는 것이 맞지 않는가요?
박 목사님은 자꾸 구원받은 우리를 성령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덧붙이시는 작업을 성령님께서 베푸시는 “성령 세례”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즉, 그리스도와 연합되게 하는 세례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것은 성령님께서 베푸시는 성령세례가 아니라 성령님의 사역이라고 이야기를 해야 더 올바르다고 생각을 합니다.
6. 예수님이 주시는 세례로써의 성령세례(성령의 부어주심)
이 단락에서 박 목사님은 더욱더 헷갈리게 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박 목사님은 성령세례를 총 3가지로 나누고 있습니다. 첫 번째 성령님께서 베푸시는 세례로써의 ‘성령세례’는 우리를 그리스도 안으로, 즉 연합되게 하는 세례이고, 두 번째 ‘성령과 불’로써 세례를 주신다고 했을 때의 그 예수님이 주시는 ‘성령세례’는 우리 모든 신자에게 성령님이 내주케 되는 그런 의미에서의, 즉 주께서 베푸시는 1차적 의미로서의 성령세례이고, 세 번째 예수님이 주시는 성령의 부어주심으로서의 ‘성령세례’는 구원 얻은 것과는 다른 그 이상의 선물이고 그 이상의 경험이라고 하면서, 이러한 성령세례들은 성경에서 분명한 차이를 둔다고 합니다. 아니, 성령세례가 박 목사님이 주장하는 것처럼 이렇게 구분이 되는 것인가요? 그것도 3가지로 말입니다.
그러면, 박 목사님이 말하는 2차적 의미에서의 예수님께서 성령의 부어주심의 의미는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박 목사님은 예수님이 주시는 2차적 의미에서의 성령의 부어주심의 근거의 대표 구절로 요한복음 7장 38,39절 말씀에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라고 하면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는 표현은 성령의 내주하심으로서의 성령세례(1차적 의미)는 아니라고 합니다. 그 표현이 너무 강하여 본인도 인식할 수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지금 여기에서는 예수님께서 주실 것으로 묘사되고 있기 때문에 성령님이 주시는 세례도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성령님이 안계신다는 묘사는 성령님이 내주하시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성령의 부어주심이 없다는 이야기라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는 표현은 구약적인 표현이고, 상징으로서 성령을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본인이 인식 하고, 안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면, 즉, 부활승천하시면 성령님께서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전에는 성령님께서 아직 오시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성령님께서 내주하고, 안하고의 문제도 아닙니다. 박 목사님이 왜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하게 되느냐 하면, 구원 중심으로 성경을 보게 되기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한다고 생각합니다.
7. 성령의 부어주심과 성령 충만의 차이
박 목사님은 이번에는 한 술 더 떠서 성령의 부어주심과 성령 충만과도 차이가 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다시 한 번 정리를 해보면, 먼저 성령님께서 베푸시는 세례로서의 성령세례(그리스도와 연합됨)가 있고, 두 번째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1차적 의미로서의 세례(성령의 내주)가 있고, 세 번째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2차적 의미로서의 세례(성령의 부어주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단락에서는 이 성령의 부어주심과 성령 충만은 또 다르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박 목사님은 성령세례를 총 4가지로 나누고 있습니다. 성령세례는 3가지로 나누어지고, 이 성령세례 중 세 번째 성령세례(성령의 부어주심)는 다시 성령 충만과도 다르다는 것입니다. 다시 박 목사님의 말을 들어봅시다. “성령님의 내주가 신자라면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라면 이제 성령의 부어주심(성령세례)라는 것은 그 외의 일로 인하여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한 것으로 나에게 확실한 인식되는 것이요, 내가 감각하는 것이요, 내가 분명히 ‘이것이다’라고 외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기독교사에서 부흥의 시기를 그 증거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요나단 에드워드, 찰스 웨슬레, 조지 휫필드 등등.
그러나 제가 생각하기에 박 목사님은 성경을 오해한 것 같습니다. 박 목사님이 이 책에서 솔직하게 어려운 부분을 토로하고 있지만 결과는 그렇게 만족스럽지 않습니다. 저는 부흥의 시기가 있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렇다고 그 사실이 성령세례와 성령의 부어주심, 성령의 내주하심 등으로 나누어진다고는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성령님의 사역으로 얼마든지 그런 부흥이 일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박 목사님이 생각하는 성령의 부어주심과 성령 충만과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성화가 등장하거든요. 박 목사님은 확실하게 성령의 부어주심과 성령 충만은 다르다고 하면서 에베소서 5장 18절(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구절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성령 충만을 받으라”는 표현은 권고형이고, 성령 세례는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라는 것으로서 권고형은 아니기에 다르다고 합니다. 성령의 부어주심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행사하시는 은사임으로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없으나 성령 충만을 받으라는 것은 열심히 추구할 것으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분명히 다르고 구별해야 되며, 성령 충만을 받으라는 것은 원래 성경에서 성화의 원리로서 요구되고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왜 박 목사님께서 앞 단락들에서 그토록 성령 세례를 3-4가지로 구분하였는지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구분함으로서 성령 세례는 주어야 받지만 성령 충만은 우리가 노력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점차 성화되어 완전한 길로 나아가듯이...
그러나 과연 그렇습니까? 여러분들은 성화가 되던가요? 성령 충만이 되던가요? 성령 충만을 받으라는 말은 내가 노력하면 된다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너라는 인간은 안되기 때문에 성령 충만이 있어야 돼! 라는 책망의 말씀이 아닐까요? 그리고 내가 아니고 성령님께서 충만하게 하시기 때문에 위로가 되는 말씀이기도 하구요. 제가 성경을 잘못 보고 있습니까?
성경에서 말하는 명령문들을 우리는 흔히 우리가 지킬 수 있다고 오해를 합니다. 즉,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셨으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키지 못하여서 예수님께서 이 율법을 완성하시러 오셨다. 그럼으로 이제는 예수님으로 구원받았고, 중생되었으니 우리가 신약의 권면의 말씀들을 지키자고 생각합니다만 이 사고방식 자체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고방식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선택받았으니 율법을 지키자는 것하고 뭐가 다릅니까?
구약이나, 신약에서 성화의 개념은 없습니다. 히브리서 10장 10절에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미 거룩함을 얻었습니다. 거룩은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루어 가는 것이 아니고 말입니다.
8. 우리에게 일어나는 변화들
박 목사님은 이 단락에서 아예 성령 충만을 성화라고 못을 박습니다. 갈라디아 5장 16-23절 말씀에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라는 권면의 말로 되어 있다면서 이것은 성화, 즉 성령 충만에 관한 것이 라고 합니다. 그리고 성화의 결과는 성령의 열매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본문이 과연 그러한 말씀일까요? 앞에 서도 이야기했듯이 우리는 성경에서 권면한다고 권면을 지킬 수가 없는 자들입니다. 오히려 그 권면들이나 명령들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더 바라보아야만 하는 자들입니다. 내가 구원받고, 안받고 상관없이 말입니다. 혹시 우리에게 사랑이나 자비 등 성령의 열매가 나왔습니까? 그래서 그것이 우리의 열매가 아니라 성령의 열매인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맺으신 열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 세례를 받은 자들은 내적, 외적으로 어떤 일이 발생한다고 하는데, 간략하게 요약하면, 내적 현상의 처음은 자기의 내면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직접적인 인식, 하나님 존재에 대한 자각이 생기고 두 번째는 기쁨과 거기에 따르는 확신이 생기고, 세 번째는 주를 영화롭게 하려는 마음이 생기고, 네 번째는 빛에 대한 이해가 생긴다고 하며, 외적 현상의 처음은 성령 세례를 받은 본인뿐만 아니라 옆에 있는 사람도 분명히 느낄 수 있는 어떤 증거가 있고, 두 번째는 얼굴이 달라지고, 세 번째는 말이 달라진다고 합니다.
저는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던데, 저는 그러면 성령 세례를 받지 못한 것인가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박 목사님의 주장이 사실일까요? 얼굴에 빛이 나지 않는 사람은 성령 세례를 받지 못한 사람일까요?
9. 성령의 인침과 성령의 은사
이 단락에서도 박 목사님은 ‘성령 세례’와 ‘성령의 인침’에 대해서 구분을 시도합니다. 성령 세례와 성령의 인침은 본질은 같으나 초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즉, 성령 세례는 하나님을 증거하는 ‘증인’이라는 내용에 초점이 있고, 성령의 인침은 자기의 구원문제, 예수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를 확인하는 ‘확인’쪽에 초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인침을 설명하면서 사도행전 8장의 빌립의 전도와 베드로의 성령 안수사건, 10장의 이방인 고넬료에게 성령이 임한 사건, 19장의 바울의 에베소에서 성령 안수사건 등을 언급하면서 예수믿는 것과 성령이 임하는 것이 동일한 사건이 아니라고 주장을 합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이 사건들은 계시가 완성되기 전의 초대교회에서 성령이 임하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차원에서 발생한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확실한 것은 성령이 임하지 않고서는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생략하겠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리차드 개핀의 <성령은사론>을 보시면 많은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박 목사님은 성령의 은사를 이야기하면서 성령의 은사는 능력적인 것인데, 이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한 능력이 아니라 교회의 유익을 위한 능력이라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12장 말씀을 가지고 설명을 하는데, 여기도 애매한 문제가 있습니다. 박 목사님이 이야기하는 ‘교회의 유익’은 뉘앙스가 현실 교회를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이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7)에서 ‘유익’은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유익입니다. 그리고, 모든 성령의 은사도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합니다.
박 목사님은 또한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 중에 성령의 은사를 받지 못한 사람도 있다고 이야기를 하는데, 이것도 사실이 아닙니다.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은 반드시 성령의 은사가 나타납니다. 왜 그럴까요? 같은 성령이고, 한 성령이기 때문입니다.(고전12:11)
10. 성령세례, 어떻게 받을 것인가?
박 목사님은 이 단락을 끝으로, 이제까지 이야기하였던 모든 것을 통하여 본인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을 주장합니다. 그러면 그 내용이 무엇일까요? 박 목사님은 성령 세례에 대해서 하나님의 약속들을 어떻게 소유할 것인가를 생각하라고 합니다. 즉, 성령 세례를 받을 수 있도록 우리가 잘 준비하라는 말이지요. 성령 세례를 소유개념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 성령 세례는 인과율적인 믿음과 안수라는 방법으로 온다는 오류를 없애야 한다고 합니다. 이것들은 방법론이 아니란 것입니다.
박 목사님은 이런 것들이 방법론이 아니라고 하면서 성령 세례를 받으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라고 하면서 다른 방법론을 들고 나옵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축복의 길에 서 있을 것인가? 어떻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은혜를 받는 곳에 가 있을 것인가?”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가 성령 세례를 만들 수는 없지만 성경을 잘 보아서 그 축복의 길에 서 있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는 곳에 가 있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어떻게 허물과 죄로 죽은 자가 그 자리에 서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계속해서 박 목사님의 말을 들어 봅시다. “이제 그 구체적인 방법론으로 들어갑시다. 첫 번째로 우리는 항상 이 약속을 목표와 생각으로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마치 대학 입시를 앞에 둔 자녀에게 부모가 신경을 쓰듯이 이 약속에 대해서도 그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답니다. 그래야 성령 세례를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두 번째는 성령 세례를 받는 이 일을 위해서는 반드시 제거되어야 할 것들이 있다고 합니다. 죄들로부터 자기를 거룩케 하기 위해서 애를 써야 된다고 하면서, 죄를 윤리,도덕적인 목록들로 생각을 하고 그러한 구절들을 증거구절로 언급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아를 떨쳐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기도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기도하라는 것은 이것이 인간의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고백하는 큰 상징이라고 하면서도 기도에 관한 증거구절들을 설명하면서 전심전력으로 기도해야 된다고 합니다. 제가 보기에 앞뒤가 안맞습니다.
이상으로 박 목사님의 “성령론” 책을 상세하게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제가 보기에 박 목사님께서 네 번째 단락부터 성령 세례와 성령의 부어주심 등을 구별하면서 엉뚱하게 주장하는 이유가 성화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을 해봅니다. 마지막 단락은 제목 자체가 “성령세례, 어떻게 받을 것인가?”가 아닙니까? 우리가 잘 준비하면 성령세례도 받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은 날마다 성화가 되어 가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은혜가 왕노릇하는 세계)에 소속된 사람입니다. 그것을 날마다 확인하면서 그 은혜에 감사하면서 더욱더 죄의 깊이를 깨달아 가는 사람입니다. 아닙니까? 그리고 이 책에서는 선택의 개념이 전혀 없습니다. 성령 세례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총 177페이지 밖에 되지 않는 얇은 책인데, 아무튼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책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