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형 평전 1 - 중국.일본에서 펼친 독립운동
강덕상 지음, 김광열 옮김 / 역사비평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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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은 몽양 여운형 선생의 70주기였다. 십진법으로 인물의 생사를 기념하는 데 큰 의미를 두진 않았으나 70년 전 한반도를 울음바다로 만들었던 몽양의 죽음이 이리 조용히 지나가도 되는가 싶다.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가 추모 학술심포지움을 개최한 것 외에는 재일사학자 강덕상의 <여운형 평전 1·2>(일본판 2005) 2권인 <여운형과 상해임시정부>가 출판됐을 뿐이다. 60주기에 <여운형 평전 1-중국 일본에서 펼친 독립운동>이 번역되고 십 년만에 나온 2권이다. 진지한 연구서는 외면하는 얇고 박한 독서풍토, 여운형이라는 독립운동가들 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일등성을 잊어버린 세태가 서글프다

 

강덕상은 일제가 수집한 방대한 정보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이름이 이동휘, 홍범도, 안창호, 여운형이며 1920년대 이후에도 계속 나오는 건 여운형뿐이라 지적한다. 그러면서 일제가 왜 이렇게 그를 주목했는지, 그런 인물에 대한 연구와 평가가 왜 이리 박한지 궁금해 평전을 쓰게 됐다고 밝힌다. 그 말처럼 여운형에 대한 연구는 빈약하고 삶과 사상을 조명한 책은 많지 않다. 회고록과 자료집을 빼면, 강준식의 소설 <혈농어수>와 평전이라 하여 강덕상, 김삼웅, 이기형, 이정식, 정병준이 쓴 책들이 있을 뿐이다. 이 중 이기형과 김삼웅의 책은 객관적 연구와 평가가 담긴 평전이라기보다 일종의 회고록이고 전기다.

 

맨 먼저 나온 역사학자 정병준의 <몽양여운형 평전>(1995)은 방대한 자료와 증언을 토대로 해방 직후의 활동을 복기한다. 몽양과 기독교의 관계가 소략해 아쉽지만, 당시 정국과 몽양의 좌우합작 노선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다만 읽다보면 자꾸 한숨이 나온다. 어려워서가 아니라 통일독립국가를 세우려는 몽양이 좌우 극단주의자들에게 12번이나 테러를 당하며 끝내 꺾이고 마는 과정을 보는 게 괴로워서다.

 

강덕상의 책과 재미 정치학자 이정식의 <여운형>(2008)은 좀 덜 괴롭다. 좌절을 거듭한 해방 이후와 달리 일제 치하에서의 눈부신 활약상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해 3·1운동과 임정 탄생을 이끌고, 도쿄 한복판에서 독립을 외쳐 일본 정계를 뒤흔들고 세상을 놀랜 일은 벅찬 감동을 준다. 그가 사장으로 있던 조선중앙일보가, 동아일보가 자랑하는 손기정 일장기말소사건을 주도했다 폐간된 것은 사소해 보일 정도다.

 

몽양은 유창한 영어로 서구 외교관들은 물론 손문, 레닌, 호치민 등과 교류하며 독립의 당위를 알린 조선 유일의 세계적 지도자였다. 강덕상이 미소의 지원이 없었다면 이승만과 김일성이 아니라 몽양이 한반도의 지도자가 됐을 거라고 보는 이유다. 또한 이정식은 반공청년 강원룡이 단번에 반했을 만큼, 생각이 다른 이들과의 대화를 즐긴 그를 한국 정치사에 보기 드문 민주주의자라고 상찬한다.

 

이정식의 책은 공산주의와의 거리를 강조한 나머지 몽양의 사상을 축소하고 뚜렷한 증거 없이 암살 배후로 남로당을 지목한 문제가 있고, 강덕상의 책은 내용이 전문적이고 광범위해 읽기 어려운 점이 있으나, 세 책 모두 일독의 가치가 있는 역작이다. , 강덕상의 근간을 제외하곤 도서관과 e북으로만 볼 수 있는데, 독자들의 성원으로 아직 빛을 보지 못한 강덕상의 평전 3권까지 전부 다시 출간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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랩 걸 - 나무, 과학 그리고 사랑 사이언스 걸스
호프 자렌 지음, 김희정 옮김 / 알마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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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랩걸>을 빌리려고 보니 대출 예약자가 2명이나 있다. 리처드 도킨스처럼 유명한 저자도 아닌데 과학책이 이렇게 인기가 있다면 품질은 보증된 셈, 당장 책을 사 읽기 시작했다. 군더더기 없이 정확하고 아름다운 문장들에 마음이 맑아진다. 글쓴이는 나무 연구로 일가를 이룬 여성 과학자 호프 자런. 사랑하면 닮는다고, 그녀의 글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쓰임이 많은 나무처럼 무엇 하나 버릴 게 없다. 잘 읽히는 문장이지만 천천히 읽는다. ‘랩걸(Lab Girl)’이라는 짧은 제목에서도 여러 의미가 읽힐 만큼 담긴 이야기도 생각할 거리도 많아서다.

 

첫 번째 이야기는 아빠의 실험실을 동경하던 소녀가 자신의 실험실을 가진 과학자로 커가는 랩걸 성장 스토리다. 여성 과학자에 대해선 듣지도 보지도 못한 소녀가 가난과 불안, 불면에 시달리면서도 끝내 자기 이름을 단 실험실을 이루는 이야기는 뿌듯하면서도 아프다. 용도는 다르지만 나도 자기만의 방을 꿈꾸었기에 그녀가 내 실험실은 창문이 필요 없는 하나의 우주며 그곳에선 하지 않은 일에 대한 죄책감이 해내고 있는 일들로 대체된다고 말할 때 깊이 공감했고 부럽기도 했다. 그러나 질투는 아니다. 이 우주를 위해 자런이 얼마나 치열하게 살았는지 알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야기는 불이 꺼지지 않는 실험실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주인공은 셋이다. 자런과 그녀를 돕는 남자 주인공 빌, 신비에 싸인 미스터리한 주인공 나무. 이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상상을 초월한다. 나무를 연구하는 일이 수십 미터의 땅을 파고 수천 킬로미터를 운전하고 수십 킬로그램의 장비를 나르는 막노동인 줄은 미처 몰랐거니와, 더욱 놀라운 건 그렇게 온몸을 바쳐 알아낸 나무의 비밀이다.

 

나무에 달린 수많은 이파리가 다 다르다는 것도, 거기서 만들어진 당이 인간을 생각하는 존재로 만든다는 것도, 팽나무 씨앗 속에 보석이 숨어 있단 것도, 발 달린 사람이 공간을 여행할 때 한 자리에 붙박인 나무는 시간을 여행한다는 것도 모두 처음 알았다. 더구나 직접 당을 생산해 자급자족하고 상처가 나면 소독약을 만들어 자가 치료를 할 뿐 아니라, 자신을 공격한 곤충은 병들게 하고 그 정보를 공유하는 소통능력까지 가졌다니,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지 않는 이 과묵한 존재 앞에서 무슨 말을 더 하랴.

 

그러나 나무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은 자신의 무능을 인정하는 대신 식물은 수동적이고 무기력하고 보잘것없는 존재라고 폄하한다. 남성 과학자들이 눈에 선 여성 과학자를 두고 저 여자애가 과학자라고?” 하며 무시하는 것처럼. 자런은 자신을 동료 과학자가 아니라 랩걸로 보는 그들의 시선에 상처 받지만 무너지지 않는다. 자신을 괴롭히는 질병과 마찬가지로 그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쉼 없이 나아가 식물이 세계를 바꿨듯 과학계를 변화시킬 따름이다.

 

비록 크고 강대한 그 세계에 비하면 아주 작은 변화지만 희망은 또한 사소함에서 시작하는 법. 해서 그녀는 조용히 무너져내리는 세상을 구하기 위해 일 년에 나무 한 그루를 심자고 말한다. 너무 사소하다고? 우리 발밑에서 떡잎이 하는 일을 보라. 지금은 떡잎에게 배울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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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난자들 - 남과 북,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이들에 관하여
주승현 지음 / 생각의힘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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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을 선의로 돕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의도하든 하지 않든, 자본주의사회와 사회주의사회에서의 삶을 비교하며 열등함을 자백받으려는 태도는 지금도 곳곳에서 확인된다. 사실상 탈북민은 이등 국민도 아닌 불가촉천민에 가깝다. -p. 58, 60

 

 

전쟁 위기가 고조되던 한반도에 봄이 왔다. 봄다운 봄을 맞은 것이 몇 해만인지. 얼마 전까지도 전쟁 임박설에 꿈자리가 뒤숭숭했는데 남북 대화가 시작되면서 편안해졌다. 남북 교류가 이어지고 사상 최초의 북미정상회담까지 잘 이루어져 계속 지금처럼 걱정 없이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전쟁 걱정에서 벗어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통일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통일은 대박이 아니라 분란의 시작이기 쉽다. 무지는 오해를 낳고 오해는 갈등으로 이어지는 법이니 먼저 온 통일이라 불리던 3만 탈북민의 현실이 바로 그 증거다.

 

2002년 북측 심리전단 요원으로 복무하다 휴전선을 넘어 귀순한 주승현은 자신을 조난자라 칭한다. 그는 1만 볼트의 고압전류와 지뢰, 4중 철조망을 뚫고 온 용감한 귀순용사고 십년을 고학해 탈북민 최초의 통일학 박사가 된 교수다. 경력만 보면 그야말로 입지전적 인물, 성공한 탈북민이다. 그러나 그는 자전 에세이 <조난자들>에서 아무리 그럴듯한 명함을 가져도 탈북민이라는 신분이 존재하는 한 동등하게 존중받기 어려운 경계가 있으며 자신은 지금도 그 사선을 넘고 있다고 토로한다.

 

그의 말이 아니어도 남한 사회에 탈북민에 대한 배타적·차별적 시선이 있는 건 알고 있었다. 나 역시 탈북민이라고 하면 남다르게 보았으니 노골적인 배제는 아니어도 은근한 경계가 있음은 분명했다. 하지만 그 경계를 삶과 죽음이 갈리는 사선(死線)으로까지 느끼는 줄은 책을 읽기 전엔 몰랐다. 남쪽에 살면서 북쪽 사정을 너무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철책 너머만이 아니라 바로 옆에 사는 탈북민의 실상에 대해서도 아는 게 없음을 몰랐다. 그 무지가 이들에게 상처가 되고 폭력이 된다는 것을, 그리하여 이들을 사선에 선 조난자로 만든다는 것을 몰랐다.

 

주승현은 남과 북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이들에 관해이 사회가 얼마나 모르는지 가만히 일깨운다. 그는 사선을 넘어와서 스스로 목숨을 버린 친구들에 대해, 남북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먼 이국을 떠도는 사람들에 대해, 자신의 내장 속까지 온 세상에 까발려진 탈북 병사의 치욕과 그가 앞으로 마주칠 온갖 혐오와 편견에 대해 말한다.

 

그 어조는 낮고 조심스러우며 언어는 답답할 만큼 절제되어 있다. 탈북 병사의 인격과 존엄이 정부, 언론, 의료진 각자의 시각과 목적에 의해 무시되었다고 지적할 때조차 그는 분노로 목소리를 높이는 대신 비통하게 신음한다. 탈북민에게 허용된 목소리는 남한을 찬양하는 한 가지뿐이며 탈북자는 전쟁포로에 불과함을 알기 때문이다.

 

<조난자들>을 읽는 것은 이 현실에 좌절한 이의 낮은 목소리 뒤에 숨은 절망과 망설임, 갈등과 고뇌를 읽는 것이며, 검은 글줄 사이에 감춰진 열망을 읽는 것이다. 그래서 괴롭지만 그래서 계속 읽게 된다. 결국 이것은 내 이야기, 분단국에 사는 한() 조난자일 수밖에 없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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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얼음 - 경계인 송두율의 자전적 에세이
송두율 지음 / 후마니타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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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 <경계도시2>를 보고 송두율의 책을 계속 찾아 읽었다. 날선 경계의 삶을 스스로 돌아본 자서전이 나왔다기에 큰 기대를 갖고 보았으나 명치가 답답한 느낌. 피를 토하듯 진솔했던 김시종의 자서전을 읽은지 얼마 되지 않은 탓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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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잘된 거야 엠마뉘엘 베르네임 소설
엠마뉘엘 베르네임 지음, 이원희 옮김 / 작가정신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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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엠마뉘엘 베르네임의 신작을 보았다. <다 잘된 거야>. 아버지의 죽음을 다룬 자전소설이라니 궁금하다. 책을 빌려오다가 횡단보도 앞에서 뒤표지에 적힌 소개 글을 읽었다. 눈을 뗄 수가 없다. 우르르 옆 사람들이 움직이는 걸 느끼고 고개를 들어보니 주위가 온통 검다. 검은 상복을 입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 천천히 길을 건너고 있었다. 하얀 리본, 검정 치마저고리, 흙먼지가 묻은 검은 양복.

“아버지는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끝내게 네가 나를 도와주면 좋겠다.’ 나는 얼어붙었다.”

방금 읽은 베르네임의 문장이 가슴을 찔렀다. 몇 달 전이라면 이 문장에도, 수십 수백 명이 돌려 입은 저 흔해빠진 상복에도 이토록 가슴이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신을 잃지 않았다면 이 모든 상징의 심연을 나는 몰랐을 것이다. 영영 모르고 살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눈앞이 흐려진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가정과 후회를 부른다. 그때 이렇게 했더라면, 조금만 달랐더라면… 부질없는 줄 알면서도 ‘만약’을 떨치지 못하는 것은 오직 시간을 되돌리고 싶어서다. 실은 이미 그때도 알았었다. 영원한 회한에 사로잡힐 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던 것뿐. 그렇다, 죽음이란 어쩔 수 없음이다.

뇌혈관 장애로 쓰러진 여든아홉의 아버지가 딸에게 죽게 도와달라고 하는 것도, 자살충동을 느낄 만큼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딸이 그 부탁을 들어주는 것도, 모두 어쩔 수 없어서고 어쩔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사랑하기에 그 어쩔 수 없음을 이해하고 감당하는 것이다. 베르네임이 고통스런 선택을 하게 한 아버지를 원망하는 대신 그럴 수밖에 없는 늙은 아버지의 절망을 묵묵히 받아들였듯이, 사랑은 판단하는 대신 수용한다. 설령 그것이 죽음이라 해도.

 

그러나 이것은 말일 뿐. 현실은, 실제로 겪는 죽음은 이 모든 말들 너머에 있다. 아버지의 임종을 지킨 이로부터 “다 잘됐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모든 것이 아버지 뜻대로 됐음을 알면서도 베르네임은 잘됐다고 말하지 못한다. 3년이 지나고, 고통스런 시간을 복기한 소설을 쓰고, 그렇게 온몸으로 아버지의 죽음을 다시 겪은 뒤에야 그녀는 “다 잘된 거야” 하고 말한다. 그제야 비로소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인다.

아흔의 아버지는 베토벤의 음악을 들으며 편안히 눈을 감았고 딸은 50대 중반이었으니 누구는 호상(好喪)이라 하고 누구는 슬픔이 지나치다 하리라. 하지만 좋은 죽음이란 무엇이며, 가장 가까이서 생애를 함께한 이를 보내는 데 적당한 시간이란 얼마큼일까?

 

미국의 구술사가 스터즈 터클이 쓴 책 <여러분, 죽을 준비 했나요>에는 생사의 현장을 지키는 응급구조사, 죽다 살아난 암환자, 불면에 시달리는 참전군인, 자식을 잃은 부모 등 다양한 죽음을 겪은 60여 명의 육성이 담겨 있다. 그들의 이야기는, 모든 사람은 각자의 죽음을 겪으며 그 죽음의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죽음에 관한 한 무엇이 좋고 얼마큼이 적당한지 아무도 말할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모두의 운명인 그 어쩔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뿐. 그 운명에 공감하며 함께 우는 것뿐. 눈물이 죽은 땅을 적셔 꽃을 피울 때까지, 죽음이 다시 삶으로 흘러갈 때까지. 아버지, 제가 당신의 죽음을 받아들일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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