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잘된 거야 엠마뉘엘 베르네임 소설
엠마뉘엘 베르네임 지음, 이원희 옮김 / 작가정신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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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엠마뉘엘 베르네임의 신작을 보았다. <다 잘된 거야>. 아버지의 죽음을 다룬 자전소설이라니 궁금하다. 책을 빌려오다가 횡단보도 앞에서 뒤표지에 적힌 소개 글을 읽었다. 눈을 뗄 수가 없다. 우르르 옆 사람들이 움직이는 걸 느끼고 고개를 들어보니 주위가 온통 검다. 검은 상복을 입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 천천히 길을 건너고 있었다. 하얀 리본, 검정 치마저고리, 흙먼지가 묻은 검은 양복.

“아버지는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끝내게 네가 나를 도와주면 좋겠다.’ 나는 얼어붙었다.”

방금 읽은 베르네임의 문장이 가슴을 찔렀다. 몇 달 전이라면 이 문장에도, 수십 수백 명이 돌려 입은 저 흔해빠진 상복에도 이토록 가슴이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신을 잃지 않았다면 이 모든 상징의 심연을 나는 몰랐을 것이다. 영영 모르고 살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눈앞이 흐려진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가정과 후회를 부른다. 그때 이렇게 했더라면, 조금만 달랐더라면… 부질없는 줄 알면서도 ‘만약’을 떨치지 못하는 것은 오직 시간을 되돌리고 싶어서다. 실은 이미 그때도 알았었다. 영원한 회한에 사로잡힐 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던 것뿐. 그렇다, 죽음이란 어쩔 수 없음이다.

뇌혈관 장애로 쓰러진 여든아홉의 아버지가 딸에게 죽게 도와달라고 하는 것도, 자살충동을 느낄 만큼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딸이 그 부탁을 들어주는 것도, 모두 어쩔 수 없어서고 어쩔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사랑하기에 그 어쩔 수 없음을 이해하고 감당하는 것이다. 베르네임이 고통스런 선택을 하게 한 아버지를 원망하는 대신 그럴 수밖에 없는 늙은 아버지의 절망을 묵묵히 받아들였듯이, 사랑은 판단하는 대신 수용한다. 설령 그것이 죽음이라 해도.

 

그러나 이것은 말일 뿐. 현실은, 실제로 겪는 죽음은 이 모든 말들 너머에 있다. 아버지의 임종을 지킨 이로부터 “다 잘됐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모든 것이 아버지 뜻대로 됐음을 알면서도 베르네임은 잘됐다고 말하지 못한다. 3년이 지나고, 고통스런 시간을 복기한 소설을 쓰고, 그렇게 온몸으로 아버지의 죽음을 다시 겪은 뒤에야 그녀는 “다 잘된 거야” 하고 말한다. 그제야 비로소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인다.

아흔의 아버지는 베토벤의 음악을 들으며 편안히 눈을 감았고 딸은 50대 중반이었으니 누구는 호상(好喪)이라 하고 누구는 슬픔이 지나치다 하리라. 하지만 좋은 죽음이란 무엇이며, 가장 가까이서 생애를 함께한 이를 보내는 데 적당한 시간이란 얼마큼일까?

 

미국의 구술사가 스터즈 터클이 쓴 책 <여러분, 죽을 준비 했나요>에는 생사의 현장을 지키는 응급구조사, 죽다 살아난 암환자, 불면에 시달리는 참전군인, 자식을 잃은 부모 등 다양한 죽음을 겪은 60여 명의 육성이 담겨 있다. 그들의 이야기는, 모든 사람은 각자의 죽음을 겪으며 그 죽음의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죽음에 관한 한 무엇이 좋고 얼마큼이 적당한지 아무도 말할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모두의 운명인 그 어쩔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뿐. 그 운명에 공감하며 함께 우는 것뿐. 눈물이 죽은 땅을 적셔 꽃을 피울 때까지, 죽음이 다시 삶으로 흘러갈 때까지. 아버지, 제가 당신의 죽음을 받아들일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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