랩 걸 - 나무, 과학 그리고 사랑 사이언스 걸스
호프 자렌 지음, 김희정 옮김 / 알마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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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랩걸>을 빌리려고 보니 대출 예약자가 2명이나 있다. 리처드 도킨스처럼 유명한 저자도 아닌데 과학책이 이렇게 인기가 있다면 품질은 보증된 셈, 당장 책을 사 읽기 시작했다. 군더더기 없이 정확하고 아름다운 문장들에 마음이 맑아진다. 글쓴이는 나무 연구로 일가를 이룬 여성 과학자 호프 자런. 사랑하면 닮는다고, 그녀의 글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쓰임이 많은 나무처럼 무엇 하나 버릴 게 없다. 잘 읽히는 문장이지만 천천히 읽는다. ‘랩걸(Lab Girl)’이라는 짧은 제목에서도 여러 의미가 읽힐 만큼 담긴 이야기도 생각할 거리도 많아서다.

 

첫 번째 이야기는 아빠의 실험실을 동경하던 소녀가 자신의 실험실을 가진 과학자로 커가는 랩걸 성장 스토리다. 여성 과학자에 대해선 듣지도 보지도 못한 소녀가 가난과 불안, 불면에 시달리면서도 끝내 자기 이름을 단 실험실을 이루는 이야기는 뿌듯하면서도 아프다. 용도는 다르지만 나도 자기만의 방을 꿈꾸었기에 그녀가 내 실험실은 창문이 필요 없는 하나의 우주며 그곳에선 하지 않은 일에 대한 죄책감이 해내고 있는 일들로 대체된다고 말할 때 깊이 공감했고 부럽기도 했다. 그러나 질투는 아니다. 이 우주를 위해 자런이 얼마나 치열하게 살았는지 알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야기는 불이 꺼지지 않는 실험실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주인공은 셋이다. 자런과 그녀를 돕는 남자 주인공 빌, 신비에 싸인 미스터리한 주인공 나무. 이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상상을 초월한다. 나무를 연구하는 일이 수십 미터의 땅을 파고 수천 킬로미터를 운전하고 수십 킬로그램의 장비를 나르는 막노동인 줄은 미처 몰랐거니와, 더욱 놀라운 건 그렇게 온몸을 바쳐 알아낸 나무의 비밀이다.

 

나무에 달린 수많은 이파리가 다 다르다는 것도, 거기서 만들어진 당이 인간을 생각하는 존재로 만든다는 것도, 팽나무 씨앗 속에 보석이 숨어 있단 것도, 발 달린 사람이 공간을 여행할 때 한 자리에 붙박인 나무는 시간을 여행한다는 것도 모두 처음 알았다. 더구나 직접 당을 생산해 자급자족하고 상처가 나면 소독약을 만들어 자가 치료를 할 뿐 아니라, 자신을 공격한 곤충은 병들게 하고 그 정보를 공유하는 소통능력까지 가졌다니,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지 않는 이 과묵한 존재 앞에서 무슨 말을 더 하랴.

 

그러나 나무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은 자신의 무능을 인정하는 대신 식물은 수동적이고 무기력하고 보잘것없는 존재라고 폄하한다. 남성 과학자들이 눈에 선 여성 과학자를 두고 저 여자애가 과학자라고?” 하며 무시하는 것처럼. 자런은 자신을 동료 과학자가 아니라 랩걸로 보는 그들의 시선에 상처 받지만 무너지지 않는다. 자신을 괴롭히는 질병과 마찬가지로 그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쉼 없이 나아가 식물이 세계를 바꿨듯 과학계를 변화시킬 따름이다.

 

비록 크고 강대한 그 세계에 비하면 아주 작은 변화지만 희망은 또한 사소함에서 시작하는 법. 해서 그녀는 조용히 무너져내리는 세상을 구하기 위해 일 년에 나무 한 그루를 심자고 말한다. 너무 사소하다고? 우리 발밑에서 떡잎이 하는 일을 보라. 지금은 떡잎에게 배울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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