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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제국 ㅣ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김영하는 소설을 잘 만드는 작가라고 생각해왔다. 그가 짜나가는 정교한 플롯은 늘 재미와 감탄을 준다. 감동을 추구하는 작가는 아니니 내가 감동을 받지 못하는 건 애초에 문제가 안 되고, 때론 감탄이 감동스러울 정도로 글을 잘 쓰는 작가라고 생각해왔다. 과거형에서 짐작하겠지만, 이 소설은 그런 생각을 좀 훼손시키는 엉성한 구조와 캐릭터들이 실망스러웠다.
고정간첩으로 근 이십 년을 남한에서 살아온 김기영에게 어느날 지령이 내려온다. 올라오라는 것. 느닷없는 지령에 기영은 온갖 경우의 수를 생각하며 올라갈 것인가 머물 것인가를 고민한다. 소설은 그런 기영의 하루를 따라가면서, 더불어 그의 아내 마리와 딸 현미의 하루를 보여준다. 스스로를 방기한 중년의 마리와, 정의 구현을 꿈꾸는 십대의 현미. 그들의 하루 또한 기영의 하루와 마찬가지로 끝없이 흔들린다. 이런 설정은 자못 흥미진진하고 진지하기도 하다. 그런데 막상 소설을 덮고 나면 이 설정들에 대한 의문이 슬며시 고개를 든다.
하이네켄을 좋아하고 예술영화를 즐기는 기영, 그가 지령을 받고 북으로 가길 꺼려하는 것은 독자에겐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는 간첩이란 직업을 가진 40대 남한인일 뿐이고, 그 사실은 마치 북에서 교육을 받을 때부터 그랬던 듯하다. 그는 시종 북에 대한 거리감을 강조하는데, 이 때문에 김기영의 정체성은 한번도 흔들리지 않고 지령은 갑작스런 아리랑치기 같은 불행으로만 여겨진다. 그의 삶이 겪는 불행, 아내 마리의 추락과 위악 또한 간첩이란 설정과는 무관하다. 김기영과 마리, 현미의 불행은 한국사회를 살고 있기에 겪는 불행이다. 그래서 이들의 비극에 마음 아파하고 그 위악에 가슴이 찔리다가도, 근데 이게 간첩과 무슨 상관인가 싶다. 김기영은 그저 그런 386세대여도 상관없고, 그가 느끼는 회오와 불안과 절망은 그 세대의 누구나 공감한다고 늘 이야기되던 것이 아닌가? 결국 간첩이란 설정은 이야기의 재미를 주기 위한 장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마리의 위악적 섹스 역시 그런 서비스의 일환으로 여겨질 뿐이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지를 채 결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글을 쓴 듯하다. 간첩이라는 매력적인 소재, 두 나라를 조국으로 둔 인물을 말할 수 있는 한반도의 작가라는 위치에 착안한 데 고무되어 그의 장기를 잊은 듯하다고 말하면 지나친 걸까. 간첩을 소재로만 활용하고 싶었다면 더 솔직했어야 하고, 그걸 주제로 육박해가는 주요 장치로 삼고 싶었다면 더 진지했어야 한다. 스스로가 믿지 않은 거짓말에 속을 만큼 독자는 바보가 아니니 소설가는 무엇보다 먼저 자신을 속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