톰 골드의 <골리앗>을 처음 보곤 시큰둥했다. 용기 있고 똑똑한 꼬마 다윗이 무섭고 힘센 거인 골리앗을 이긴 이야기라면 하도 많이 접해서 식상할 지경이었으니까. 아마 <골리앗>이 80여 쪽에 불과한 만화책이 아니었다면 펼쳐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만화책이니까 가볍게 ‘또야?’ 하는 냉소적인 눈길로 훑어볼 수 있었던 건데, 그러다 문득 멍해졌다. 한밤중 혼자 강에 나온 골리앗이 조약돌을 들고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다시 강으로 돌려보내는 장면에서였다. 왜 그럴까? 무슨 뜻일까?

 

책장을 넘겨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이번엔 천천히 한 컷 한 컷, 과묵한 흑백 그림을 오래오래 보았다. 그렇게 보름달 아래서 하염없이 조약돌을 바라보던 골리앗의 속내를 상상하는 사이, 어느새 마음은 돌이 들어앉은 듯 무거워졌다. 그 마음은 책장을 덮을 때까지, 아니 책장을 덮은 뒤에도 계속되었다. 누구보다 고요를 사랑했으나 단지 몸집이 크다는 이유만으로 전사가 된 골리앗이 홀로 황야에 앉아 있던 모습이 지워지지 않았다.

 

옛날 옛적 블레셋 사람 골리앗이 겪었을지도 모를 비극을 상상하자 강물 속에서 돌멩이가 떠오르듯 2천여 년이 지난 오늘 그의 후손들이 겪는 참혹한 현실이 떠올랐다. 작은 나라 이스라엘을 괴롭힌 죄로, 돌멩이를 던지고 제 몸을 폭탄으로 내던진 ‘무자비한’ 테러의 대가로, 거대한 장벽 안에서 대규모 공습을 당하는 잔인한 ‘테러리스트’들이 떠올랐다.

 

그랬다. 톰 골드가 일깨웠듯, 거인 골리앗은 칼 한 번 휘두른 적 없었다. 그의 칼엔 누구의 피도 묻은 적 없었다. 그는 그저 말을 했을 뿐. 어리석게도 그 말 때문에 제 칼에 제 피를 묻히고 말았을 뿐. 그도 그의 후손들도 다만 어리석었을 뿐. 고작 말 한 마디 돌멩이 따위로 제 땅을 지킬 수 있으리라 믿을 만큼 바보같이 순진했을 뿐.

 

순진함은 죽어 마땅한 죄일까. 어쩌면 그럴 것이다. 중동 전문 종군기자 로버트 피스크는 <전사의 시대>에서 현대의 위인을 열거한다. 그들은 하나같이 순진하다. 1차 대전 때 애국심이 전부는 아니라며 국적을 가리지 않고 치료하다가 독일군에게 사형당한 간호사 에디스 카벨, 팔레스타인 난민촌을 부수는 이스라엘 군 불도저를 맨몸으로 막아섰다가 참혹하게 죽은 미국 아가씨 레이첼 코리처럼. 불도저는 코리의 몸을 밟고 지나간 뒤 후진해서 다시 한 번 그녀를 깔아뭉갰다.

 

내가 아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은 이것이었다. 인간의 양심을 믿고 맨몸으로 맞선 코리가 다윗이고 그녀를 짓밟은 무도한 불도저가 골리앗이라고 알아왔다. 허나 아니었다. 이스라엘은 그녀를 죽인 군인은 무죄라 했고, 미국 정부는 그녀는 용감한 다윗이 아니라 어리석은 비애국자라고 했다. 내가 알던 다윗과 골리앗, 불가능한 싸움을 이길 수도 있으며 중요한 건 패배를 모르는 정신이라고 가르쳐주었던 옛이야기는 없었다. 피스크가 신물을 내던 상투적인 언어, 거짓 은유만이 있을 뿐.

 

피스크는 “우리의 삶을 빚어내는 건 언어와 역사”라 했다. 그의 곧은 언어와 골드의 새로운 그림언어는 ‘전사의 시대’에 전사가 되기를 거부한 인간이 겪어야 했던 고독과 죽음을 되돌아보게 한다. 거짓 은유를 뒤집은 그들의 언어 덕분에 지워진 역사가 되살아나고 삶이 다시 시작된다. 참된 언어는 힘이 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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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의 시대 - 조선의 유교화와 사림운동
계승범 지음 / 역사비평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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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서 배운다고 하지만 역사에서 배우기는 쉽지 않다. 역사의 실상을 알기는 어려우며 무엇보다 역사는 때로 자기부정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나치의 자식들>이란 책에는, 대량학살을 주도한 나치 한스 프랑크의 아들이 “아버지가 처형당한 날이면 나는 그의 사진 위에서 수음을 한다”고 고백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 때문에 그는 많은 비난을 받았다. 나치의 2인자였던 아버지를 옹호한 괴링과 헤쓰의 자식들보다 더. 그러나 아버지의 죄에 눈감음으로써 아버지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이들과, 아버지의 죄를 직시하고 거기서 자유로울 수 없는 자신을 인정하며 괴로워하는 이들 중에 정말 비난받아야 할 사람은 누구일까?

흔히들 독일을 예로 들어 일본의 역사 왜곡을 비판하지만, 독일의 과거사 반성은 이처럼 아버지를 부정하는 -우리 사회가 가장 금기시하는 패륜과 그에 따른 자기부정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아버지가 처형된 날 수음을 한다는 고백은 따라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새로운 정체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토로한 비명과도 같다.

역사에서 배운다는 건 이런 고통을 감수하는 것이며 그래서 어렵다. 역사에서 배우느니 차라리 역사를 왜곡할 만큼. 식민사학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한국사의 경우, 민족주의란 이름 아래 당쟁은 철학논쟁으로, 사대는 민족 이익을 도모한 최선의 외교로 평가되곤 했다. 또한 주희의 해석을 절대 권위로 확립한 조광조-이황-송시열이 선비의 표상이 되고 최강국 청나라와 싸우겠다는 몽상이 애국으로 신성시되면서, 백성들에게 전란과 패배의 고통을 겪게 한 이들의 책임은 잊혀졌다.

 

역사학자 계승범은 오래 잊혔던 그 역사를 파헤친다. <조선시대 해외파병과 한중관계>에서 광해군을 몰아낸 조선 사대주의의 민낯을 폭로한 그는, <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에서 이상적 인간상으로 숭상되어온 선비의 실상을 드러내 충격을 주었다. 그리고 <정지된 시간>에 이은 근작 <중종의 시대>에서, 뿌리 없는 권력이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어떻게 대국의 권위를 이용하고 그에 의탁해 사대주의를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공고히 했는지 낱낱이 보여준다.

그가 대장금의 왕으로나 기억되던 중종에 주목한 까닭은, ‘중종의 시대’가 사대와 유교가 하나로 합체된 시기이며 중종이 사대를 주도함으로써 이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때문이다.

 

신하들의 반정으로 왕이 된 중종은 허약한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명황제의 권위를 빌린다. 시도 때도 없이 사신을 보내며 정성을 다한 덕에 그는 허수아비 왕에서 최장수 왕으로 보신에 성공한다.

백성들은 빈번한 사신 행차로 고통을 받았지만, 그와 그의 치하에서 세력을 키운 사림에게 의(義)란 중화에 대한 의리일 뿐, 자신들의 땅을 갈며 예와 의를 다한 민초들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왕조사회이니 당연하다 여길지 모른다. 그러나 광해군이 권력의 뿌리를 지키기 위해 실리외교를 실천한 것이나, 중국으로부터 직접 군사적 위협을 받은 베트남왕조가 틈만 나면 황제를 칭하며 주체성을 내세운 것을 보면 그리 말할 수만은 없다.

 

사대주의는 조선인의 속성이 아니라 제 땅과 백성을 외면한 지배층의 전략이며 그들의 속성이었으니, 계승범이 보여주었듯 이 역사를 직시하고 극복하지 않는 한 우리는 언제까지고 대국의 사절들 앞에서 부채춤을 추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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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 - 10인의 작가가 말하는 그림책의 힘
최혜진 지음, 신창용 사진 / 은행나무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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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 디렉터 최혜진이 유럽 -주로 프랑스어권에서 활약하는 그림책 작가 열 명을 인터뷰한 <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를 읽었다. 거의 매 페이지 사진이 들어간 300쪽 남짓한 책을 읽는 데 한 달이나 걸렸다. 여러 책을 동시다발로 읽는 독서습관 탓도 있지만 다양한 작가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곱씹다보니 좀체 책장이 넘어가지 않은 까닭이다.

제목을 봤을 땐 그림책 작가들이 자신의 작업과 그림책의 매력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일 거라고 생각했다. 맞다. 덕분에 소개된 책들을 다 찾아 읽고 싶을 만큼 그림책의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책에 담긴 내용은 이뿐만이 아니어서, 읽다보면 아이 양육, 독서법, 예술가의 삶과 창작 등 여러 주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다.

무엇보다 책에서 중점을 두는 건 어떻게 창의성을 키울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다. 최혜진은 주입식 교육과 경쟁의 일상에서 잃어버린 창의력을 되살릴 방법을 찾기 위해 작가들에게 집요하게 묻는다. 당신의 독특한 상상과 창의력은 어디서 나오는가? 부모나 학교가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창의성을 키우는 특별한 방법이 있는가? 창작자로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인가?

나이, 환경, 작품 스타일, 작업방법이 다 다른 만큼 그들의 대답은 모두 다르다. 꼼꼼한 판화작업으로 일가를 이룬 조엘 졸리베는 ‘관찰력’을, 빨간 털실 그림으로 유명한 세르주 블로크는 ‘뭔가를 할 작은 용기’를, 스테디셀러 <노라와 친구들> 시리즈의 이치카와 사토미는 ‘계속하는 끈기’를, <조금 부족해도 괜찮아>의 작가 베아트리체 알레마냐는 ‘자신에 대한 믿음’을 창의성의 원천으로 꼽는다.

흥미로운 것은 부모나 학교의 교육 덕분에 이만큼 성장했다고 말하는 이가 드물다는 점이다.(미술교육을 받은 적 없는 작가가 한둘이 아니다.) 몇몇 작가들은 부모의 가르침과 영향을 고마운 마음으로 회상하지만, 프랑스의 국민작가로 불리는 클로드 퐁티나 <책놀이>로 화제를 모은 에르베 튈레 같은 이들은 어두운 유년시절이 자신을 키웠다고 이야기한다.

두 사람만큼은 아니더라도 다른 작가들 역시 어린 날의 장애와 외로움, 열패감, 불안이 자신을 읽고 상상하고 그리는 사람으로 만들었다고 토로한다. 이는 각종 교구와 교육 프로그램으로 아이들의 창의력을 키울 수 있다는 세간의 믿음을 배반하며, 그런 믿음에 부응하지 못해 자책하던 부모들의 죄책감을 덜어준다. 그렇다고 이들이 부모나 교사의 역할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교육이나 사랑이란 이름으로 아이의 삶에 개입하지 말라는 것이다.

창의성을 키우고 발휘해온 방식은 다르지만 작가들이 한결같이 강조하는 것이 있다. 아이들에게 시간을 주라는 것이다. 혼자 있을 시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심심하게 있는 시간, 너무 심심해서 주위를 관찰하고 공상하고 책을 뒤적일 시간,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생각하고 시도해 볼 시간, 실패를 통해 배울 시간. 남다른 상상력과 창의성을 키우는 것은 바로 이런 시간이라고 그들은 경험으로 말한다. 잘하려는 생각이 오히려 창의성을 방해하더라는 실패담까지 곁들여서.

어디 창의성뿐이랴. 일도 사랑도 간절한 치열함보다 무심한 은근함이 힘이 될 때가 많다. 가지를 놓아버린 낙엽이 겨울나무에게 좋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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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불멸주의자 - 인류 문명을 움직여온 죽음의 사회심리학
셸던 솔로몬.제프 그린버그.톰 피진스키 지음, 이은경 옮김 / 흐름출판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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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나 소설에서 임종의 자리는 흔히 용서와 화해의 대단원으로 그려진다. 죽음을 앞둔 사람은 잘못을 뉘우치고 미움을 털어내고 부질없는 욕심을 버린다. 죽음이 사람을 지혜롭고 착하게 만든다는 통념의 반영이고 재생산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죽음이 머지않은데도 가진 것을 잃을까 두려워하고, 죄를 뉘우치기는커녕 지은 죄를 덮기 위해 새로 죄를 짓는 이들이 많다. 그들을 탓하고 비웃을 순 있지만 과연 나는 얼마나 다를까? 죽음 앞에선 돈도 명예도 권력도 심지어 사랑조차 소용없음을 알면서도 왜 사람은 그걸 놓치지 않으려 마지막까지 몸부림칠까? 왜 사람은 자신의 존재가 사라지는 순간에조차 삶의 미망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



문화인류학자 어니스트 베커는 그 이유를 죽음의 공포에서 찾았다. 마흔아홉으로 세상을 뜨기 직전 펴낸 <죽음의 부정>(1973)에서 그는 “인간의 모든 행위는 죽음을 부정하고 초월하려는 무의식적 노력”이라고 말했다. 생전에 학생들은 그의 강의에 -학교 대신 급여를 지급하겠다고 나설 정도로- 열광했고 사후에 책은 퓰리처상을 받았지만 학계는 내내 냉담했다. 당시로선 낯선 학제적 연구 스타일, 무엇보다 죽음이란 주제가 문제였다. 이는 10여 년이 지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1984년 셸던 솔로몬 등 세 명의 심리학자가 그의 연구를 기반으로 ‘공포 관리 이론’을 발표했을 때 심리학계는 침묵으로 외면했다. ‘증거가 없다’는 게 이유였다.



그러나 베커가 죽는 날까지 포기하지 않았듯 후학들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들은 이론을 뒷받침하기 위해 30년간 공동연구를 계속했고 마침내 <슬픈 불멸주의자>를 증거로 내놓았다. 온갖 분야의 자료가 망라된 이 책은 종교, 문화, 철학, 정치, 경제, 식습관까지, 모든 인간 행동의 바탕에 죽음의 공포가 자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저자들은 고대 도시의 발달부터 20세기 파시즘의 지배까지 인류 역사를 새롭게 재해석하고, 다양한 실험을 통해 인간 심리에 드리운 공포의 그림자를 증명한다. 



실험에 따르면 죽음을 떠올렸을 때 사람은 비싼 사치품에 더 관심을 보이고, 국가와 사회의 기존 가치를 더 신봉하며, 이민족이나 소수 집단에게 더 배타적이 된다. 돈, 국기, 십자가 같은 문화적 사물체계가 공포를 완화시키기 때문이다. 부는 가치 있는 존재라는 느낌을 주어 공포 관리에 꼭 필요한 자존감을 높이며, 국가와 민족에 대한 충성심은 불안한 개인에게 집단적 불멸성이라는 안전판을 제공한다.



허나 안전판은 안전을 보장하지 못하고(사람은 결국 죽는다!) 오히려 자기기만과 도취, 환상을 부추긴다. 대개의 인간은 이를 안다. 그래서 환상과 현실 사이에서 쓸쓸한 줄타기를 하며 삶이 자신을 속일지라도 노여워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자존감이 낮고 두려움에 압도된 사람은 현실을 외면하고 약물 등에 중독되며 때론 공동체 전체가 눈먼 환상을 좇기도 한다. 사회적으로 불안한 시기에 죽음으로 위협하고 국가적 불멸을 약속하는 독재자가 득세하는 것도, 대량학살이 벌어지고 끔찍한 전쟁이 일어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어느 때보다 불확실한 이 땅의 현실이 그래서 두렵지만 다행히 이제 시작이다. 가짜 불멸의 민낯이 드러난 지금, 진짜 삶을 시작할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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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법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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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언 반스의 입담만을 확인할 수 있을 뿐, 죽음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책. 반스의 책은 <플로베르의 앵무새>에서 끝내야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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