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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길에 반하다 - 가벼운 걷기에서 울트라 도보까지
유혜준 지음 / 미래의창 / 2009년 8월
평점 :
절판
어릴 적부터 멀미가 심했던 탓에 나는 차 타기보다 걷기가 좋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는 '걷기를 좋아해'라고 말할 엄두를 내지 못하겠다. 하루에 10킬로미터를 훌쩍 넘게 걷는 지은이의 기세는 물론이거니와, 그보다 더 기가 죽은 건 내가 걸었던 길조차 그녀의 걸음을 좇다보니 영 낯설기만 한 것이다. 걷는 데도 '도'가 있구나, 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으면서 제일 반가웠던 건, 내가 엄두도 낼 수 없는 먼 길이 아니라 언제든 맘만 먹으면 갈 수 있는 길들이 소개된 점이다. 걷기 여행이 유행하면서 책도 여러 권 나왔지만 그 책들을 보면 나와는 영 거리가 먼 느낌이 들어 좌절감에 사로잡히곤 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는 여러 번 "나도 여기 아는데!" "나도 가봤는데!" 하며 반가워하곤 했다. 그만큼 서울 사는 내게 익숙한 길들이 나온다.
그런데 그 익숙한 길들이 지은이를 따라 걷다보면 왜 이리 낯설게 느껴지는지. 분명 나도 걸었던 길들인데 나는 그저 스쳐지나간 길을 그녀는 꼼꼼히 살펴보고 담담하게 전해준다. 화려한 미사여구도, 과장된 감탄사도 없이 담백하게 쓴 문장 속에서 낯익은 길들이 새삼스런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걸 발견하는 기쁨이 만만치 않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길에도 해당된다는 걸 이 책을 읽고 알았다. 내 옆에 있지만 내가 모르고 스쳤던 길들에 새삼 눈이 뜨이고, 그 길들처럼 묵묵하게 다가오는 책의 문장들에 마음이 젖는다.
맑은 가을, 나도 도시락 싸들고 지은이를 따라 걷고 싶다. 그래서 마음 속에 호젓한 길 하나 내고 싶다. 그 길에서 꿈꿔왔던 만남까지 이룬다면 더 바랄 게 없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