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급좌파 : 세 번째 이야기
김규항 지음 / 리더스하우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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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이란 무엇인가? 얼마 전 우연히 본 텔레비전 다큐멘터리에서 나는 참 오랜만에 그 정답을 되새길 수 있었다. 제주도의 해녀 할머니들을 그린 다큐멘터리였다. 평생 물질로 살아온 여든 된 해녀 할머니에게 물었다.
"스킨스쿠버 장비를 사용하면 더 많이 수확하실 텐데요?"
"그걸로 하면 한 사람이 100명 하는 일을 할 수 있지."
"그런데 왜 안 하세요?"
"그렇게 하면 나머지 99명은 어떻게 살라고?"
 

근래 한국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직함은 슬프게도 '사장님'이다. (중략) 사람을 실없이 치켜세우는 그 직함은 오늘 우리 사회를 그대로 반영한다. (중략) 요컨대 민주화의 성과가 자본의 차지가 되고 모든 사람들이 장사꾼의 심성을 가지게 된 사회에서 사람들은 서로를 인격체가 아니라 거래처로 파악하는 것이다. 


지역 문제는 그렇게 진보 정치의 성장과 '전 국민적 성찰'이 동시에 진행될 때 비로소 균열을 내고 해결될 수 있다.  


'지식인'이란 적어도 자기 세계관에 따라 발언하고 행동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제도 정치에 뛰어든 지식인들은 으레 자기가 속한 '정치적 형편'에 따라 제 세계관을 재조정하곤 한다. 


개혁이란 "사회문화적 표피를 변화시키지만 경제 질서와 계급 관계라는 본질은 끝없이 후회시킨다."는 내 의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
 

지배체제와 불화하지도 않으면서 예수를 말하는 건 가소로운 일이다. 그런 자들은 실은 예수의 명성을 빌려 제 말을 할 뿐이다.
 

회개란 교회에 안 가던 사람이 교회에 나가는 게 아니라, '지금까지의 삶의 방식을 뒤집는 것'이다.
 

이를테면 저는 아이들이 밥을 함부로 남기면 "고행한 농부들에게 미안한 일"이라고 말하는데 그게 바로 인간적 관계지요. 다른 이들의 노동이 나를 위하고 내 노동이 다른 이들을 위하는 것 말입니다. 그런데 자본주의 체제하에서는 그게 바뀌죠. 아이들이 이렇게 반문한다고 가정해보세요. "농부들은 자기 돈 벌려고 하는 거잖아." 이게 바로 상업적 관계입니다.
 

초라한 운동이 다 진보적인 건 아니지만, 진정으로 진보적인 운동은 언제나 당대에 초라합니다.
 

세상을 파악하는 데 필요한 건 지식이나 정보가 아니라 제대로 된 눈, 즉 교양이다. (중략) 물론 교양은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세상을 보는 정직한 태도에 기반을 두는 것이다.

 
이를테면 지난해 언젠가 나는 김건(저자의 초등학생 아들)과 땅에 대해 대화하다가 가슴이 저렸다. 그는 말했다. "아빠, 그런데 왜 어른들은 땅이 자기 거라고 하는 거야?" 아이들, '아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어른'이라 불리는 사람들의 영원한 선생이다.

 
"집이 없어서 창피해?"
"아니, 하나도 안 창피해"
"그래. 창피한 건 집을 여러 채 가진 사람이야."   

 

오늘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는 극우 세력이 아니라 바로 개혁 우파 세력이다. 90년대 이후 사회문화적 개혁으로 대중의 관심을 유도하면서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올인하여 우리 사회를 파탄으로 몰고 가는 개혁 세력 말이다. (중략) 민노당을 비롯한 진보-좌파 세력이 '실력이 없다'고 느껴지는 두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다. 하나는 개혁 우파에 의해 사회적 영향력을 갖는 무대에서 철저히 배제됨으로써 실력을 평가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그 실력을 평가하는 패러다임이 철저히 우파적이라는 것이다. (중략) 그런데 좌파적 지향을 우파적 패러다임으로 보면 엉성해 보일 수밖에 없다. 실력의 차이가 아니라 패러다임의 차이인 것이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아빠 생각엔 아는 것은 남의 생각을 받아들인 거고 깨닫는 건 그걸 내 생각으로 만드는 거야."
 

주사파가 문제인 건 그들이 남한 인민도 북한 인민도 아닌 북한 정권을 무작정 따르기 때문이다. (중략) 현재 시점에서 주사파는 가슴 아픈 탄생 배경과는 무관하게 진보 운동의 암이다.

 
오늘 한국의 부모와 자식은 엘리트 체육에서 선수와 코치의 관계와 같기 때문이다. 선수의 성적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코치들은 선수의 인간적 면모에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설사 문제가 보인다 하더라도 이미 과도한 훈련에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친 선수에게 그런 부분까지 요구한다는 건 엄두가 안 나는 일이다.
 

가난은 불편하고 때론 참으로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적어도 부유보다는 정당하고 품위 있는 삶의 방식이다. (중략) 바야흐로 품위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전쟁에서 반드시 이겨야 한다. 이 전쟁에서 질 때, 그래서 아이들이 가난하지만 정직하게 땀 흘리며 살아가는 제 아비 어미를 수치스러워하게 될 때 우리 삶도 끝장이기 때문이다.
 

오늘 한국에서 조갑제가 더 해로운가, 강준만이 더 해로운가? 이 질문은 많은 사람에게 불쾌감을 줄 것이다. 아무리 강준만을 조갑제와 비교할까? 그러나 선입견을 버리고 곰곰이 생각해본다면 단연 강준만이 더 해롭다는 걸 알 수 있다.
 

"김건은 나중에 어떤 사람들 편을 들 거야?"
"가난한 사람들."
"괴로운 일도 많을 텐데."
"괴로워도 그게 맞잖아."
 

오늘 한국 교회의 하느님은 예수를 십자가에 달아 죽인 자들의 하느님이다.
 

진보란 무엇인가 하고 묻는다면 여러 대답이 가능하겠지만 저는 진보란 사회가 더 행복해지는 것이라 대답하겠습니다.
 

국익이란 건 실은 '지배계급의 이익'입니다.(중략) 국익이란 실은 거짓말이며 오로지 계급의 이익만 존재한다는 걸 되새겨야 합니다.
 

그러나 지성이란, 바로 그런 상황에서 '오해와 불편을 무릅쓰고' 문제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와 싸운다는 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또 다른 이유는 그놈의 신자유주의가 어느새 우리 안 깊이 들어와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진짜 적과 대면해야 한다. (중략) 우리는 '개선된 세상'이라는 몽상을 버리고 '다른 세상'을 꿈꾸기 시작해야 한다.
 

물론 이상주의가 무작적 좋은 것은 아니다. 지나친 이상주의는 현실적 조응력을 읽고 소수 지식은들의 관념놀이가 되어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지나친 이상주의보다 심각한 것은 이상주의가 사라지는 것이다.
 

이명박 씨에게 진저리를 치는 그들은 정말 이명박과는 다른 사람들일까? 그들은 정말 이명박과 다른 가치관과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행복이란 무엇인가? 얼마 전 우연히 본 텔레비전 다큐멘터리에서 나는 참 오랜만에 그 정답을 되새길 수 있었다. 제주도의 해녀 할머니들을 그린 다큐멘터리였다. 평생 물질로 살아온 여든 된 해녀 할머니에게 물었다.
"스킨스쿠버 장비를 사용하면 더 많이 수확하실 텐데요?"
"그걸로 하면 한 사람이 100명 하는 일을 할 수 있지."
"그런데 왜 안 하세요?"
"그렇게 하면 나머지 99명은 어떻게 살라고?"
 

사람이란 적보다는 의견이 다르거나 경쟁 관계에 있는 동료를 더욱 미워하는 경향이 있으며 그래서 치명적인 루머와 악선전의 생산자는 언제나 적이 아니라 동료다.
 

그래도 현실이 어쩔 수 없지 않냐고? 그렇다면 우리는 이명박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단지 이명박과 사이가 나쁜 사람들일 뿐이다. 여전히 억울하게 느껴지더라도, 사실이다.
 

사랑하고 존경한다는 사람들로 차고넘치는, 더할 나위 없이 효성스런 자식 덕에 세상에 부러울 게 없던 부자가 어느 날 불현듯 생각한다. '내 자식이 나에게 이리도 잘 하는 건 내 재산 때문이 아닐까?' 그 부자는 그 순간 꼼짝없이 지옥에 입장한다. 뭐 하나 내세울 게 없는 개털 아비가 어느 날 누군가에게서 자식이 한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우리 아버지가 가난한 이유는 그가 자신만을 위해 살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 아버지를 세상에서 가장 존경한다.' 개털 아비는 그 순간 천국에 입장한다.
 

세상은 갈수록 (이오덕) 선생의 바람과는 거꾸로, 그러나 선생이 예견한 그대로 가고 있다.
 

인텔리들은 뭐가 옳은가를 해명하느라 아무것도 안 하느느 경향이 있다.
 

"가난해도 잘 살 수 있다." 다들 그렇게만 생각한다면 천국이 따로 없을 것을.
 

모든 사람에게 적당한 불편함과 적당한 위로를 주는 글을 나는 혐오한다.
 

노예는 주인의 호사는 당연하게 여기면서 다른 노예의 나은 처지는 참질 못한다.
 

남자의 성장은 인간화가 결여된 사회화 과정이고 여자의 그것은 사회화가 결여된 인간화 과정인 경향이 있다.

 
대개의 한국 교회는 교회가 아니라, 교회라 주장되는(여겨지는) 상점들이다.
 

예수가 한 일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뭐라 할 수 있을까요?
글쎄요...... 지금 떠오르는 걸 말해도 될까요?
그러시죠.
'하느님 아버지'를 '엄마 하느님'으로 바꾼 것입니다.
예수 이후에 하느님은 엄마가 되었다는 말씀인가요?
예, 그러나 기독교가 다시 바꾸어 놓았죠.
 

대화엔 두 가지가 있다. 이해하기 위한 대화와 이기기 위한 대화.
 

켄 로치 영화는 혁명을 카타르시스하는 게 아니라 혁명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켄 로치는 언제나 혁명과 혁명 내부를 함께 담는다. 혁명만 담은 영화는 혁명에 대한 성찰을 담지 못함으로써 상투적인 선전 영화가 되고, 혁명 내부만 담은 영화는 혁명에 대한 회의를 극대화하여 반공(반혁명)영화가 되어버린다는 걸 켄 로치는 잘 안다.
 

경멸은 억압보다 더 사람을 비참하게 만든다.
 

인류 역사에서 신이 존재한다는 생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보다 훨씬 해로웠고 여전히 해롭다는 것.
 

근래는 좌파 진영에 있으면서 주식이니 펀드니 하는 걸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사람들을 이따금 보곤 한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비난하고 싶은 마음보다는 측은한 마음이 든다. '굳이 왜 좌파를 해, 그냥 양심적인 우파하면서 살지'라고 조용히 말해주고 싶어진다.  

 

그러나 사람에겐 사람임을 증명하는 기본이란 게 있고 조선일보와 상종하지 않는 건 그 가운데 하나야. 조선일보에 글 쓰는 놈은 나쁜 사람이 아니라 사람이 아니야.
 

밝은 얼굴로 아직 희망이 있다, 고 말하는 사람을 보면 이 사람은 희망에 대해선 관심이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확신에 찬 얼굴로 신은 있다, 고 말하는 사람을 보면 이 사람은 신에 대해선 관심이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500쪽을 훌쩍 넘는 분량의 책이다.
많은 부분에서 불편함(간혹 불쾌감)을 느꼈지만 대들 수가 없었다.
뭐 아는 사이도 아니고, 안다고 해도 내가 어떻게...
솔직히 나는 쫄았다.
김규항의 구분에 의하면 나는 좌파는 못 되고 심지어는 상식을 가진 우파 자유주의자도 못 되고
뭐랄까 그냥 '상식적으로 살려고 다소 애쓰는 축'에 든다고는 할 수 있을까?
그가 꽤 짜증내는 타입일 것이다. 나는 책 읽는 중간중간 경멸하는 그의 시선을 적잖이 느껴야 했다.
그래도 난, 지식인도 아니고 부자도 아니니까 낙제점은 아닐 거라는 희망을 갖고는 있다.
물론 김규항의 평가가 중요한 건 아니겠지.
문제는 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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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Q84 3 - 10月-12月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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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어, 그렇게 읽는 거 아냐. 하루키 좀 읽었다는 사람이 아이큐팔십사라고 읽는 거 아냐.
그럼 어떻게 읽어? 어떻게 어떻게~~~ 일천큐백팔십넷?

얼마 전 잠시 쉬러 고향에 다녀왔다.(매번 봐도 참 아름다운 곳이다, 충주.)
책을 읽다가 하도 어이없는 내용이 계속 되기에 잠시 누워 눈을 감고 어깨를 들썩이며 '괜히 샀어'를 반복하고 있었는데
누군가 내 눈을 가리며 말했다.
"누구게?"
"글쎄"
"짜잔"
사랑하는 조카였다.
"조카네!"
일큐팔사를 구석으로 밀어놓고 조카를 양 발에 얹어 비행기를 태워주었다. 녀석 꽤 무거워졌다.

요즘 종종 눈에 띄어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텔레비전 광고.
"저기요. 여기 가려면 어떻게 가야 돼요?"
"직진하시다가, 이렇게 우회전 하신 후에, 다시 우회전, 우회전, 우회전, 그런 다음에 (자신의 가슴팍을 가리키며) 이렇게 오시면 돼요."
그 장면을 처음 보았을 때 반사적으로 입에서 튀어나온 말.
"조카네!" 

어제 저녁은 비가 많이 왔다. 단골 추어탕 집에서 1인분 식사와 1병의 이슬을 시켜놓고 1큐84의 후반부를 읽었다.
드디어 만나게 된 아오마메와 덴고. 아오마메가 말한다.
"나는 아이를 가졌어. 아마도 너의 아이를."
책을 읽는 내내 나는 덴고의 반응이 궁금했다.
"내 아이를 가졌다? 우리는 지난 이십 년 동안 한 번도 얼굴을 마주한 적 없어."
옳지, 말이 안 되지.
"그런데도 나는 네 아이를 가졌어. 나는 그 아이를 낳을 생각이야. (중략) 그리고 내가 가진 건 너의 아이라고 나는 확신해. 설명할 수는 없어. 하지만 나는 그냥 그걸 알아. 믿어 주는 거지? 내 안에 있는 작은 것이 네 아이라고."
이건 정말이지 미치고 펄쩍 뛸 일이 아닌가. 자 과연 덴고의 반응은?
"진심으로 믿어."
나는 다이알 비누 냄새가 나는 추어탕을 먹다가 이렇게 말 할 뻔했다.
'조카네!'
하지만 말하지 않았다. 왠지 예의에 어긋나는 일(어긋나도 한참)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리고 생각했다. '순진한 덴고. 너 당한거야. 알아?'

이 책을 로맨스 소설로 읽은 독자들은 말하겠지. "저질"
이 책을 본격 문학으로 읽은 독자들은 말하겠지. "저능아"
나의 반응은 '순진한 독자님들, 당하신 거예요. 아세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지금?"
"그건 아냐. 그러니까 전적으로는 아냐. 두꺼운 책 세 권을 읽으면서 조금 스트레스를 받았고, 그걸 어떻게든 풀려다 보니까 이렇게 되었어. 썩 좋은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해."
"독자들한테 사과해."
"진심으로 사과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지금?"
"그건 아냐. 그러니까 전적으로는 아냐. 너의 글을 읽으면서 조금 스트레스를 받았고, 그걸 어떻게 풀어야 하나 고민하다바니까 그렇게 말하고 말았어. 썩 좋은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해."

마지막 쪽에는 '끝'이라 쓰여있지 않고, 'BOOK3 끝'이라고 쓰여있다.
어쩌면 지금 덴고와 후카에리가 머리를 맞대고 BOOK4를 쓰고 있을지도,
아오마메는 조산원에서 틈틈이 원고를 검토하며 본인의 캐릭터를 가지고 투덜거릴지도,
모른다. 불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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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만큼 여기 어울리는 사람은 없어
미란다 줄라이 지음, 이주연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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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무척 흥미로운 영화였다.
'미앤유앤에브리원'
감독이자 여주인공 역할을 했던 미란다 줄라이는 창의적이나 독선적이지 않고,
강한 존재감을 지니고 있으나 겸손하고,
독특한 성격이었으나 착한 사람이다,
라고 추측했다.
추측을 하지 않고도 알 수 있는 것도 있었다.
곱다!
어, 내 타입이잖아,
라는 생각도 하고,
큭, 언감생심
이란 생각도 했다.
 

흥미로운 소설이다.
'너만큼 여기 어울리는 사람은 없어'
여러 개의 단편을 모아 놓았다.
난 이야기마다 미란다 줄라이가 이입된 인물을 찾으려고 애썼고,
쉽게 찾을 수 있었다(이런 걸 엿장수 마음이라고 하지).
오해 또는 오독의 가능성을 전제로 말하자면...
 

그녀의 소설은 대부분 등장인물의 연애 감정을 다루고 있지만
또래의 남녀가 사랑하는 이야기는 단 한편도 없다.
 "어째서?"   "낸들"
이야기들의 소재는 미니멀하고, 묘사는 퍽 사실적이지만
등장인물의 성격에 의해 스토리는 매우 비현실적으로 흐른다.
그렇다 '비현실적으로 흐른다'고 한 언급은 '그런 현실도 있다'라고 비판받을 수 있다.
하지만 작가의 태도는 '그런 현실도 있음'을 말하는 쪽보다는
'이런 현실 어때?'라는 식으로 보인다.
인물들은 불행이 닥쳐도(작든 크든) 대체로 의연한 편이며,
때문에 읽는 이로 하여금 연민을 느끼기보다는 불행에 대한 선입견을 의심하게 한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지금 그대, 보편을 기준으로 불행하다면 기준을 바꿔요. 
까짓 그런 불행 간단히 스킵할 수 있는 건 물론이고,
자 이제부터는 아무나 사랑할 수 있을 테니까
나이 차이, 성별, 배우자의 유무, 미성년 아니냐고? 그런데 뭐(so what?)'
이런 건 과연 권할 만한 자세일까?   

 

물론 그녀(미란다 줄라이)가 저런 - 다소 과격하달 수 있는 - 주장을 하고 있다는 얘기는 - 전적으로는 - 아니다.
 

소설은 종종 사실과 판타지가 조우하거나 등장인물의 내면에서 혼선을 빚는데
그 순간 등장인물과 더불어 독자들까지도 현실과 꿈이 헷갈린다.
작가는 이러한 '존재에 대한 의심'을 작품 전체에 걸쳐 권유하고 있다.
 "어째서?"   "낸들"
작가는 또한 가랑이 사이의 문제에 대해 매우 떳떳할 뿐더러 성기 또는 성기를 칭하는 욕을 하는데도 매우 거침없는데
때문에 거의 모든 작품에 섹스 장면이 있지만 아슬아슬하지도 선정적이지도 않다. 
 "아쉬워?"   "무슨!"

 ...........

...........

 
이건 뭐 뒤죽박죽이군.
어쨌든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 실패했다고 보고,
그래도 꽤 흥미롭게 읽은 모양인데, 어째서?

난 그냥 그녀(미란다 줄라이)의 상상력과 유머 감각이 좋아을 뿐이야. 

예를 들면 어떤 부분? 

굳이 예를 들자면 이런 부분. 

 "이제 둘이 같이 뭘 좀 하자고."
 "섹스 같은 거?"
 "아니. 왜 그런 거라고 생각해?"
 "응, 같이, 라고 하길래 난 또..." 

이 부분에서 상상력은 뭐고 유머 감각은 뭐야? 

무심코 이런 대화를 주고 받는 부부 관계를 상상해내는 일은 어려운 거야.
그리고 재미있지 않아?

너 미란다 줄라이 좋아해? 

무슨!!!!  뾰로롱~~ 언감생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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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
주노 디아스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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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장 보름 간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을 읽었다.  얇은 책은 아니지만 보름이 걸렸으니 빛의 속도로 읽은 것은 아니다.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다 해도) 핑계를 대자면 "퇴근하면 술 마시거나 당구를 치거나 배철수를 듣거나 달리기를 해야해서, 내게 독서할 시간은 그다지 충분치 않아." 출퇴근 시간에 지하철에선? "매일의 신문과 두어 종의 주간지와 역시 두어 종의 월간지와 한 종의 격월간지와 두어 종의 계간지는 거짓말이고, 출퇴근 시간의 4호선은 그야말로 지옥이라고. 숨 쉬는 것도 얼마나 벅찬데, 얘는. 습습후후, 습습후후...." 주말에는? "교회에...(거짓말!!), 퀴즈프로 두어 개랑, 출발 비디오 여행이랑, 천하무적 야구단이랑, 가요톱텐이랑,  선덕여왕이랑, 등등등 봐야해서.." 언제는 바보상자라며? "내가 언제?? 얘는."
 

별점은 네 개 반. 이토록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는 어떻게든 꼭꼭 씹어먹으려고 페이지마다 안달을 떨었다. 도미니카가 어디 붙어있는지도 찾아봐야했고, 그 나라의 근현대사를 대충 훑어야 했고, 트루히요란 인간이 소설 안에서 어느 정도 과장 된 건지도 알아야 했다. (찾아 본 결과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그 안에 무수히 등장하는 미국 B문화의 등장인물들은 도중에 포기해야 했다. (그러면서 이 책의 리뷰를 쓰겠다는 생각도 포기해야만 했다) 

 어찌되었건 이 소설은 너무나도 슬픈 이야기여서 그런 것도 있지만, 잘 쓴 책을 보면 나는 늘 조금은 슬프다. '나는야 지망생'인데다가. I'm just a jealous guy 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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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제임스 설터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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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을 읽었다.
열 개의 단편을 묶어 놓았다.
한겨례21의 소개로 알게 되었다.
어젯밤에 읽었다.

 
제임스 설터는
무심한 듯 강건한 문체로
냉정한 듯 위태로운 관계들을
얼기설기 배치한 후 
뒤죽박죽 묘사하다가
어느 한순간에 압축된 실마리를 제공하는 척 하면서
마지막에 '뭐 대단치 않다'는 듯 뒤통수를 친다.
하지만 뒤통수를 맞은 사람은 (대단치 않다고?) 대단히 아프다.
 

내가 종종 주창하는 바, 섹스는 인간을 태어나게도 하지만 인간 관계를 작살내기도 한다는 거.
이런 게 인생이란 말인가, 이따금 애틋하다가 결국 파탄이 나는 관계를 맺었다 끊었다 하는 일?
제임스 설터는 그렇다고, 그런 반복의 중심에 섹스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거 말야, 좀 참으면 안 돼?" - (알리딘의) 지니
"인간은 자신의 욕망에 어떻게든 떳떳하려는 경향이 있어. 
 대부분 '참아야지' 보다는 '괜찮겠지' 하고 생각해 버리고 말거든." - 조르그
 

매우 훌륭한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몇 줄 안 되는 나의 글이 이 소설의 전체를 대변한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나는 숲을 보지 않고 나무를 보는 사람이다.
"큭큭" - 지니
"어, 웃어?" - 조르그
 

* 새삼 발견한 건데, '마음산책'이란 출판사 이름 누가 지었는지 잘 지었다.
'마음이 하는 산책'도 되고 '내 마음을 산 책'도 되고, '내 마음이 산 책'도 되고, '마, 음산한 책'도 되고... 
적어도 <어젯밤>은 음산한 구석이 마, 다분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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