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뼛속까지 자유롭고 치맛속까지 정치적인 - 프랑스 남자와 결혼하지 않고 살아가기
목수정 글, 희완 트호뫼흐 사진 / 레디앙 / 2008년 8월
평점 :
모 인터넷 서점에서 반값으로 판다기에 덥썩 사버렸다.
점점 거대해지는 인터넷 서점들의 권력과 횡포도 문제고 나도 문제다. 이런 생각을 하면 좀 울적해진다.
읽는 동안 꽤 즐겁고 유익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울적함을 조금 덜었다.
요즘도 이따금 스크린 쿼터 문제에 대해 생각한다.
당시의 나는 기이한 논리를 내세웠다.
"스크린 쿼터보다는 한복 쿼터가 더 시급해. 주에 이틀은 한복을 입게 해야 해. 포목점의 생존권은 누가 보장해? 그리고 국악 쿼터는?" 변명하자면 거의 모든 사안에 적절한 보호 정책이 필요하다는 얘기였지만, 운동을 실천하는 이들을 모욕하고 상처 준 발언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홍대 근처에서 돼지 껍데기를 먹으며 논쟁하던 친구 한 명 외에 아무도 위의 발언을 모른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지만)
진심으로 반성한다. 멍청해서 그랬다. 나아지고 있다.
똑똑한 사람들이 쓴 책들을 많이 읽으려고 애쓴다. 많은 것을 배우고 싶다.
이 책, 똑똑한 사람이 쓴 책이다. (어, 비아냥 아닌데)
자본의 집중과 소비를 향해서만 거대한 관용의 10차선 도로를 내주는 이 사회에서, 한 뼘의 자유를 차지하려고 투사가 되는 것보다 ‘고객님’으로서의 존재로 충실히 지내는 것은 쉽고 편한 선택일 수밖에 없다. - 나로서는 투사가 되는 것도 어렵고, '반가운 고객님'이 되기도 어렵다. 이거 원 진퇴양난이다.
문제의 본질을 직시하기보다는 손쉽게 믿고 맹목적으로 나아가는 대중의 비합리적이고 도착적인 욕망이 파시즘적인 정치 지도자를 불러왔다고 빌헬름 라이히는 지적한다. 프랑스와 한국에서 각각 사르코지와 이명박이라는 인물들이 열광적인 지지를 얻어 대통령이 된 지금의 상황을 이처럼 잘 설명하는 논리가 있을까.- '문제의 본질' 얘기만 나오면 거만해지려고 하는 나의 내면이 문제의 본질이다. 나는 요새 그 때문에 주변으로부터 적잖이 미움을 사고 있다. 걱정이다. 그건 그렇고, 내가 만약 출판사를 차리게 된다면 이런 이름 어떨까? 미움산책.
실로 미쳐 돌아가는 이 세상을 구할 수 있는 세 가지가 바로 사랑과 노동과 지식인 것을!- 셋다 나와 거리가 꽤 있다. 하려고 해도, 즐기려고 해도, 가지려고 해도 잘 안 되는 거 세 가지.
폭력은 여자보다 월등히 우월한 남자의 근력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폭력을 행사할 수도 있다는 의식에서 나온다.- 남자 얘기만 나오면 창피하다. 내가 할 수 있는 얘기는 "안 그런 남자도 있을 수 있을 가능성이 없지 않을 수 있을 공산이 그리 작지 않을 수도 있을 법 할 수도..."
외환위기가 들이닥치자 이 사회는 염치와 위엄의 가면을 벗어던지고 자본 앞에 무릎 꿇고 말았다.- 정답은 대체로 간단 명료하다. 이런 통찰력은 어디에서 구입하셨을까 목수정씨. (구입이라니. 그러니까 멍청하단 소릴 듣지)
기껏해야 자본의 제단에 머리나 조아리는 존재들이 여성들 앞에서는 기어이 군림하려 드는 현상... 됐다.
- 또 남자 얘기. 백번을 해도 때마다 머리를 조아려야 한다는 거 압니다. (진짜? / 쉿, 아직 멀었지만 일단은 안다고 해. 얼른 머리부터 조아리고. 어, 비아냥 아닌데)
시민연대계약- 목수정씨가 남편 희완씨와 혼인신고 대신 하신 건데, 자세히 설명하자면 쫌 길어. 아니 계약서가 길다는 게 아니고. 아무튼 꽤 근사한 계약서란 거만 알고 궁금하면 체게바라, 아니 책사봐라.
하지만 엄마는 ‘이웃 아줌마들’이라는 가장 무서운 벽을 아직 못 넘고 계셨던 것이다.- 프랑스 남자 사이에서 혼외의 자녀를 갖게 된 딸을 둔 어머니의 두려움. 그 실체는 다른 어느 것도 아닌 '이웃 아줌마들'. 내가 덧붙여야 하는 얘기는 "안 그런 아줌마도 있을 수 있을 가능.........................."
희완은 웃을 때 100%로 웃는 것처럼 사랑을 할 때도 마음 밑바닥까지 다 바쳐 사랑한다. 그는 아침에 헤어질 때면 늘 다시 못 볼 사람처럼, 저녁에 만날 때면 10년 만에 재회한 것처럼 뜨겁게 포옹하는 남자다.
- 살아오면서 아무 것에도 누구에게도 마음 밑바닥까지 다 바쳐 사랑한 적이 없다. 결과는 현재의 상황이 적나라하게 증언하고 있다. 그것은 태도의 문제라기보다 능력의 문제라고 나는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 삶이 남아 있고 스스로 개전의 정을 품고 있으니 좋아질 것이다. (너무 늦은 거 아냐? / 안 늦었어.)
자본주의 사회에서 취향이란 많은 사람들이 흔히 착각하는 것처럼 스스로의 선택이 아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출신계급과 교육수준, 집안 환경 등이 촘촘히 얽혀서 구조적으로 생산되고 똑 확산된다. 개인의 의지로 쉽게 떨쳐낼 수 없는 유기적 습성이다.- 그래 그래. 맞어 맞어. 나도 저렇게 생각했다니까. / 근데 넌 왜 재즈 음악을 듣니? / 그거야 뻔 하지 나의 출신계급과 교육수준과 집안 환경 등에서 유발 된 유기적 습성이 뭐 이 정도란 걸 어필하고 싶은 거지. 그러니까 사기지. / 그럼 진실은? / 김완선이나 본조비나 아바 등등)
이른바 명품 취향이 다른 계층과 서둘러 경계를 긋고자 할 때 가장 안전한 선택이 된다.- 가장 손쉬운 선택이기도 하지. 나 지금 제이빔 셔츠와 쬬다쉬 청바지와 옴파로스 벨트와 무등 양말과 독립문 속옷과 까발로 운동화를 신고 있지. 게다가 길에서 음악을 들을 땐 마이마이 카세트 집에서 음악을 들을 땐 태광 에로이카까지. 나, 된장남?
"사랑은 학문으로 존재해야 한다. 그것을 연구해서 모든 인류가 더 많이 더 만족스럽게 사랑을 나누며 살아야 한다.”
- 이거야말로 본인이 사춘기 시절부터 주창해오던 바, 사랑에 얽힌 여러 불행들을 극복하는 방법을 초등학교 시절부터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 나의 지론. 당연한 것이, 당시의 나는 근의 공식이나 묘청의 난보다는 부모님이 덜 싸우시고 옆집 소영이가 날 그만 쫓아다니게 할 수 있는 방법이 훨씬 절실했으니까. (어, 뻥 아닌데)
중년 남성의 가슴 콩닥거리는 연애는 차단되어 있지만, 매춘은 무한히 허락되어 있을 뿐 아니라 끊임없이 부추기는 사회.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이고 흥미로운 관계 맺기인 연애를 특정 시기, 특정 연령층의 전유물로 규정하고 비좁은 김밥의 틀 속에 밀어 넣어버린 사회. 어쩔 수 없이 옆구리로 삐져나오는 비명과 분출되는 욕구들은 모두 어두운 음지 속에 처넣어 버리는 사회. 이 숨 막히는 사회적 모순을 비집고 우리가 건강하고 싱그러운 연애를 계속해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 글쎄요.
사랑은 그것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기쁨과 똑같은 크기의 절망이나 상처를 반드시 내포하고 있다. 사랑이 내게 안겨주는 희열의 능선이 가파르면 가파를수록 그 뒤에 필수적으로 따라다니는 절망의 계곡은 음습하고 깊다.
- 그러게요.
아직 그 광적인 에너지를 체험하지 못했다면, 당신의 겨드랑이 밑으로 천사의 날개가 돋아나 연인과 함께 천상을 날아다니며 공기 중에 퍼져 있는 행복의 입자를 혀끝으로 맛보지 못했다면, 당신은 사랑을 제대로 체험해보지 않은 것이다.
- 그러니까요.
결혼과 이혼 사이에는 우리가 찾고자만 한다면, 또 다른 대안들이 널려있다.
- 그렇죠?
지구라는 이 넗은 별에서 쉼없이 경계를 지우며 살아갈 터이다.
- 지지합니다.
확신과 자신감에 차 있는 사람을 보게 되면 난 부끄러우면서도 조금 쓸쓸해진다.
나는 그것도 일종의 소유라고 생각하고 있다.
가진 자도 있고 못 가진 자도 있는 것이다.
저자의 말에 의하면 그것 역시 각자의 환경에 영향을 받은 유기적인 습성일 것이다.
그런데 어쩔 수 없는 건 움직여야 하는 순간이 다가온다는 것이다.
신중함만이 능사는 아니다.
그동안 열심히 해보라는 충고엔 '집중력 핑계'
움직여 보라는 충고엔 '길눈이 어둡다는 핑계'를 대며 살아왔다.
언젠가부터는 저 두 핸디캡을 장식품으로 승화하려고까지 하기도 했다(기가 막혀).
이럴 때 마다 늘 떠올리는 시가 있다.
마을이 가까울수록 나무는 흠집이 많다.
나는 너무 성하다. - 이정록
자, 감상에 젖지 말고,
결론, 늦지 않았다. 이제 시작이다.
(무엇을? / 그게, 그러니까,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