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배받는 지배자 - 미국 유학과 한국 엘리트의 탄생
김종영 지음 / 돌베개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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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학을 앞두고 미국에 대한 우리 학문의 종속성을 분석한 책을 한 권 사서 읽었다. 비록 1만 6천원의 비용을 지출했을 뿐이지만, 책 한 권을 사면서도 나름 '미국 유학과 한국 엘리트의 탄생'이라는 흥미로운 부제 못지 않게, 알라딘 '편집장의 선택', '돌베개'라는 출판사에 대한 신뢰도를 따져 고른 책이었다.

 

2. 그런데 몇 장을 채 넘기기도 전에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이 책은 한국 지식인의 트랜스내셔널 탄생을 미국 대학의 글로벌 헤게모니, 트랜스내셔널 위치 경쟁, 트랜스내셔널 직업 기회들 사이의 역학 관계 속에서 이해한다."라든지 "이 책은 일종의 절충적 질적 종단 연구이며 두 단계의 질적 면접에 기반하고 있다."와 같은 문장들이 곳곳에 포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 이해한다"라는 주술관계의 호응을 비롯해서 '트랜스내셔널 ㅇㅇㅇ'이라는 정체불명의 조어를 남발하거나 '~적 ~적 ㅇㅇ'이라는 표현들 모두 논문이나 보고서 등에서 자주 발견할 수 있는 잘못된 문장들이다. (저자 자신이 교수라는 건 알겠지만)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책을 내고자 한다면 이런 문장들은 한 번쯤 충분히 다듬었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이것은 편집의 문제(혹은 책임)이기도 하다.
 

3. 이렇게 말하는 나도 보고서와 논문에 잘못된 표현들을 자주 사용하는 사람이지만, 학술논문이든 대중서적이든 글을 쓰는 사람은 끊임없이 자기의 글을 퇴고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낀다.

 

4. 책을 요약하면, 미국 대학이 갖는 헤게모니에 이끌린 사람들은 국내 대학들이 갖는 불평등과 차별, 비루함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유학을 결행하고, 미국에서는 주변인과 비영어권자로서의 한계를 인식하다가 학위 취득 후 국내에 돌아와 미국 현지에서의 열악했던 자신의 위치를 지식의 전달자로 '전환'하게 되며, 한국 사회 내 엘리트로서의 이러한 이익을 고수하기 위하여 결국 미국에 대한 학문적 종속에 이바지한다는 것.

 

5. 무슨 보고서 같은 류의 책을... 힘들게 읽었다.

 

 

------ 추가 (위 아킬레우스님의 비평에 대해)

 

깜짝 놀랐다. 누군가가 내가 쓴 것을 읽고, 그에 대한 평을 해주다니... 처음 겪는 일이어서 다소 놀랍기도 하고, 긴장되기도 하고, 부끄러우면서 왠지 모르게 즐겁기도 하다. 하지만, 굳이 제목에서부터 내 별명을 밝히면서까지 내 의견에 일일히 토를 달아 반박하면서 이 책의 가치를 설파하기 보다는 그냥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듯 내 의견도 받아들여 줬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이 책의 가치 여부가 독자들의 논쟁으로 드러나거나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각자가 읽으면서 판단하면 될 일을 (저자의 지인이나 출판사 관계자가 아닌 다음에야) 굳이 시간을 들여 내 짧은 식견을 비판하면서 이 책의 유용성을 설파할 것 까지야...

아무튼 그냥 끄적인, 어찌보면 너무 단순한 낙서 수준의 초라한 글에 이렇게 분석적인 글을 남겨주셔서 이 책에 대한 다른 관점 일부는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이 책에 대한 독자로서의 불만은 여전하다. 책을 읽고 느낀 점들은 다 제각각이어서 무엇이 옳고 그르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고, 전공자 수준의 학식을 갖춘 분과 굳이 논쟁할 생각/능력도 없지만 애초 내가 이 책을 읽으며 불편했던 점 이상을 과도하게 지적하신 것 같아 약간의 내용을 추가한다. (참고로 나는 사회학적 지식이 거의 없다.)

 

1. 나는 이 책을 단편적으로 이해해서 한국의 엘리트들이 미국에서는 열등한 위치였다는 것만을 강조하였다. 누군가가 이 책을 읽고 한 줄로 요약하라고 한다면, 난 위 4. 처럼 말할 수 밖에 없다.

반면, 아킬레우스님이 강조하듯 에필로그에서 제시한 짧지만 강력한 문장 "학문은 더럽다(Academia Immunda)"가 이 책의 '핵심'이라고는 생각하기는 어렵다. 그건 이 책의 구성(지배받는 지배자, 글로벌 문화자본의 추구, 미국 대학의 글로벌 헤게모니의 일상적 체화, 트랜스내셔널 위치 경쟁, 글로컬 학벌 체제, 트랜스내셔널 미들맨 지식인...) 중 저자가 어떠한 부분을 많이 할애하였는가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에필로그에 있는 이야기를 억지스럽게 숨어 있는 결론으로 이끌어낼 것 까지는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2. 이 책의 제목만으로도 그 내용이 굉장히 기대되었다. "지배받는 지배자"라는 모순적 표현이 미국 유학 후 한국의 엘리트 지식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을 아주 적확하게 지칭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1장의 앞부분을 제외하면 이 책의 키위드, 즉 이중적 지위에 있는 한국의 엘리트를 지칭하는 용어는 '트랜스내셔널 미들맨 지식인'이다. 정말 좋다고 생각했던 제목과 글의 내용에서 실제 활용되고 있는 용어의 불일치가 일단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내가 위 2. 에서 지적한 것은 사회학적 용어에 대한 낯섦이 아니다. 위에서 밝힌 바와 같이 "'트랜스내셔널 ㅇㅇㅇ'이라는 정체불명의 조어를 남발"하는 것이 읽기 불편했다는 것이다. 즉, 트랜스내셔널 미들맨 지식인, 트랜스내셔널 위치 경쟁, 트랜스내셔널 직업 기회와 같은 영어와 한글이 조합된 용어들을 말한다. (사회학계에서는 이 용어를 반드시 이렇게 써야 하는지 모르지만 그런 이해가 없는 나로써는) 굳이 한글로 번역하기가 곤란한 경우 학술적으로 이렇게 쓰는 경우도 있는 것으로 아는데 '트랜스내셔널리즘'과 같이 하나의 단어도 아닌 형용사 'transnational'을 왜 '트랜스내셔널'로 표기해야 하는 것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인터내셔널과는 달리 아직 적합한 국내 용어를 못찾았기 때문인가?). 용어를 발음 그대로 한글로 치환한 것은 그 용어가 중요하기 때문이어서 일수도 있지만, 그 용어를 어떻게 번역해야 할지를 몰라서 일수도 있다. '트랜스내셔널 미들맨 지식인'이라는 용어는 내가 볼 때는 후자에 속한다.

 

3. 이건 글의 전문성이 아닌 '퇴고'에 관한 생각이었다. 최근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이나 이오덕의 <우리글 바로쓰기>와 같은 책을 읽으며 우리말로 쓰는 좋은 글은 어떤 것일까에 천착하고 있었던지라, 책을 읽다가도 특히 문체에 관한 부분이 많이 거슬렸다. 그래서 특히 이 글의 문체에 대해 안 좋은 점을 비판한 것이다. 글의 용어나 내용이 전문적인 것과 글을 읽기 어렵게 쓴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아킬레우스님이 그렇게 강조하는, 내가 사회학적 기본지식이 없다는 비난을 인정한다고 해도 이 책의 문체와 강준만, 조한혜정, 엄기호, 오찬호 등의 문체가 확연히 차이가 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이건 저자가 독자의 입장에 서서 얼마나 자신의 글을 다듬었는가 하는 퇴고의 문제이며, 정성의 문제이다. 

이에 대해 대중서를 (읽기) 어렵게 쓰면 안되냐고 반문한다면 할 말은 없다. 그것은 저자의 특성이고, 권리이자, 취향이다. 반대로 조금 더 쉽게 읽을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 (적어도 '나'라는) 독자로서의 특성이고, 권리이자, 취향이다. 그리고 나는 적어도 저자라면 이러한 차원에서는 독자들에 대한 배려가 있어야 한다고 본다. 찾아보지는 않았지만, 이 책은 논문이나 보고서 등의 다른 학술적 형태로 게재되었으리라 짐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문이나 보고서가 아닌 다른 형식으로 글을 선보였다면, 학계 외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출판의 목적, 의도, 기대는 달랐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아킬레우스님은 이상한 비유를 들어 나를 비판하고 있는데, 나는 사회학 일반에 관한 대중서적으로 이 책을 구입한 것이 아니다. 만약 내가 수학에 관심이 있어서 책을 고른다고 하더라도 그 제목이 '대학수학'이었다면 나는 그 책을 구입하지도, 그 책이 그래도 읽기 수월할 것이라는 기대도, 그리고 책을 다 읽은 후에 책에 수식이 많다고 굳이 시간을 내어 비평을 쓰지도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책의 제목이 "지배받는 지배자"가 아니라 '한국에서의 트랜스내셔널 미들맨 지식인의 위치 경쟁에 대한 분석'이었다면 당연히 구입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그러한 비용을 치루고 싶지 않다면 연구서가 아니라 대중교양서적을 읽어야 한다."라고 지적하신 부분을 100% 인정한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한 것이다. 다만, (저자와 출판사가 밝히지 않은 관계로) 이것이 그토록 전문적인 '연구서'임을 몰랐을 뿐. 그리고 전문적인 연구서라는 이유로 읽기 어려운 문체를 사용하는 것이 허용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뿐.

 

4. 1.에서 개략적으로 언급한 바 있으므로 생략한다.

 

5. 지적하신 대로 내게는 "질적 연구와 질적 연구의 글쓰기에 대한 무지"가 있다고 하자. 하지만 나는 그것이 '연구'일지라도 그 분야의 지식인뿐 아니라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는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연구서에는 대중서와는 다른 그 나름의 체계와 글쓰기 방법론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글쓰기 방법이라는 것에 가독성이 좋지 않은 허술한 문체들이 포함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없다면 그것은 아는 것이 아니다', '쉽게 설명할 수 없다면 그것은 아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을 나는 신봉한다. 이 책이 쉽게 쓰여지지 않을 것이었다면, 저자가 비판적으로 연구했던 내용, 즉 "한국의 학문세계 또한 불평등하고 구조화/계층화 되어 있다는 점"을 이 책 스스로가 학계 외부로 확장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트랜스내셔널 미들맨 지식인'을 비판하면서 그것을 국내적으로 체화하지 못한 채, '트랜스내셔널 미들맨 지식인'을 운운하는 저자와 아킬레우스님은 '트랜스내셔널 미들맨 지식인'이 아닌가?

그럼에도 학술서적은 질적 연구 글쓰기 방법과 형식을 유지해야 하며, 이것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은 저자를 비판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무지를 비판하라, 그리고 쉽게 짜집기 한 대중서나 읽으라는 것인가? 만약 그런 의도라면 굳이 시간과 감정을 낭비하면서까지 구구절절 이런 말을 할 필요 없다. 책 표지에 작은 글씨로 '전문서적', '학술총서'라고 표기하는 것으로 족하다. 


`지배받는 지배자`는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의 계층 이론에서 `지식인`을 일컫는 말이다. 그에 따르면 현대 사회의 지배충은 자본가 계층과 지식인 계층으로 양분되어 있다. 이 중에서도 경제적 영역을 지배하는 자본가 계층이 문화적 영역을 지배하는 지식인 계층보다 우위에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지식보다 우선한다는 것이다. 지식인은 지배층에 속하지만 이런 이유로 지배층이면서도 지배를 받는 모순적인 집단이다. - 20쪽

트랜스내셔널 미들맨 지식인은 어떤 의미에서 지식 생산의 경제적 지위를 뜻하며, 지식인의 계급적 질서에서 중간적 위치에 있음을 의미한다. 미들맨 소수자가 식민지적, 전근대적 상황에서 출현하듯 트랜스내셔널 미들맨 지식인은 한국 학계의 지적 식민성과 전근대성 속에서 탄생한다. - 24쪽

미국에서 교육받은 한국 지식인들은 귀국하거나 미국에 정착한다.트랜스내셔설 이동의 상황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지식인은 미국에서 생산된 지식을 한국으로 수입하는 역할을 하며, 이를 한국 실정에 맞게 변형, 적용시킨다. 이들의 한국에서의 지식 생산은 일반적으로 미국의 연구 중심 대학보다 독창성, 중요성, 파급력이 떨어지는데, 이는 연구 자원의 부족, 연구 인력의 전문성 부족, 연구 인정 체계의 파편화, 연구 집중 강도의 약화, 연구 문화의 파벌화와 정치화, 한국 학문 공동체의 천민성(pariahhood)으로부터 기인한다. 따라서 트랜스내셔널 미들맨 지식인의 주요 생존 전략은 미국에서 생산된 지식을 빨리 받아들여 한국의 로컬 지식인들에게 판매하는 것이다. 미국에서 훈련받은 한국 지식인들은 영문 저널 투고, 국내외 특허 출원, 연구의 글로벌 네트워킹에 참여하여 세계적인 지식 생산에 기여함에도 불구하고 중요하고 독창적인 연구 성과를 내지 못하고 세계 지식체계의 주변에 머무르는 경향이 있다. - 25쪽

가르침과 배움은 지배-피지배의 관계다.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가 말하듯이 모든 헤게모니적 관계는 교육적 관계다. 미국은 `가르치는 나라`이고, 한국은 `배우는 나라`다. 학문을 배운다는 것은 또한 제도적 공간인 대학 내에서의 지배의 관계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학은 위계를 가지며 고로 이 배움의 구조에서 탄생한 지식인들도 계층화되어 있다. 대학은 학문의 성지(temple)인 동시에 일종의 분류 기계(sorting machine) 또는 체(sieve)다. - 27쪽

대학은 개인에게 사회적 지위를 부여하는 `학위`라는 특정 상품을 공급한다. 학위는 제도화된 문화자본의 형태로서 지위재(positional goods)다. 지위재의 가치는 대학의 명성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즉 명성이 높은 대학일수록 수여되는 학위의 가치가 높다. 어떤 대학이 더 높은 명성을 가지는가? 근대 대학은 `연구 중심 대학의 승리`로 요약할 수 있으며,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볼 때 새롭고 중요한 지식을 생산하는 대학일수록 명성이 높다.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는 학자들은 연구 중심 대학에 속한 경우가 많으며, 이는 그 대학 명성의 중요한 척도가 된다. 학문과 과학은 글로벌한 활동이며 대학의 명성도 이에 따라 글로벌하게 형성된다. - 28쪽

연구는 커뮤니케이션에 기반한다. 영어는 학문과 연구 영역에서 지배적인 언어다. 한국인에게 영어는 `권력어`이며, 한국 연구자들에게도 마찬가지다. 특히 이공 계열에서는 영어로 논문을 쓰는 것이 보편화되었으며, 인문사회 계열에서도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무엇보다 SCI로 대표되는 `영어 논문`은 학휘 취득 후 교수직과 연구원직에게는 필요불가결한 문화자본이다. 특정 언어자본의 능숙한 구사가 학문적 실력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 31쪽

예전에는 고등학교만 졸업해도 은행에 취직할 수 있었다면 요즘은 많은 경우 대학을 졸업해야만 은행에 취직할 수 있다. 따라서 은행원이 되기 위해 필요한 학위증을 따려고 대학에 지불하는 등록금은 일종의 상징적 지대다. 이는 직업에 필요한 실질적 기술과 직업에 진입하기 위해 사회에서 요구하는 상징적 요건 사이의 간극에서 발생한다. 한국의 학벌 체제가 큰 사회문제가 되는 것은 이것이 인종주의를 만연시켜 사회적 부정의와 불평등을 낳을 뿐만 아니라, 지극히 비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언론과 SNS에서 회자되었던 부산의 한 초등학생의 <여덟 살의 꿈>이란 동시는 한국 사회가 지불하는 상징적 지대가 얼마나 큰지를 잘 대변한다. "나는 사립초등학교를 나와서 / 국제중학교를 나와서 / 민사고를 나와서 / 하버드대를 갈 거다 / 그래 그래서 나는 / 내가 하고 싶은 / 정말로 하고 싶은 미용사가 될 거다." - 40, 41쪽

무엇보다 한국 대학은 학벌 차별, 성 차별로 가득하며, 유교적 질서에 복종해야 하는 비합리적인 공간으로 인식된다. 즉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미국 유학 동기는 미국 대학과 한국 대학 간의 지위 간극뿐만 아니라 `윤리적 간극`(ethicdal gap) 때문에 발생하며, 유학생들에게 미국 대학은 한국 대학의 천민성과 억압에서 탈출할 수 있는 해방적 기능을 가진다. 동시에 미국 유학은 코즈모폴리턴 생활방식의 추구와 연관된다. 영어, 전문 지식, 서구적 삶은 한국의 `답답한` 삶과 대비되어 자유로움과 실력을 동시에 부여해줄 수 있는 기회로 여겨진다. 따라서 미국 유학은 글로벌 대학 체제 속에서 지위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계급적 전략이기도 하지만, 특정한 삶과 도덕성을 갈구하는 문화적 욕망이자 전략이기도 하다. - 60쪽

"한계를 인정하고 핸디캡을 받아들이는 것"은 결국 미국 학생들과 교수들의 기준에 못 미치는 자신의 위치를 숙명적으로 수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정체성의 형성은 이들의 교육적 궤적에서 아주 드라마틱한 사건이다. 초기에는 많은 학생들이 자신의 열등함을 받아들이는 것을 몹시 괴로워하지만 글로벌 교육체제에서 극복할 수 없는 자신의 위치 지어짐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현실과 타협한다. 여기서 타협이란 미국 원어민처럼 수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학점을 잘 받고 무사히 수업 과정을 마치며 수업시간에 어느 정도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정도로 기대 수준을 낮추는 것을 말한다. - 93쪽

한국의 엘리트 학생이라는 지위와 정체성은 미국 유학 과정에서 드라마틱하게 바뀐다. 수업 시간, 조교 생활, 연구 활동에서 자신을 열등한 존재로 여기게 되며 자신의 장애와 능력의 한계를 숙명적으로 받아들인다. 이 과정에서 이들은 탈구화(dislocated), 방향감각 상실(disoriented), 뿌리 뽑힘(uprooted)을 경험하게 된다. 영어는 완전 정복이 불가능하며 미국 학생과 동일한 선산에서 경쟁할 수 없다는 패배의식과 자기 모멸감을 느끼게 된다. 여기서 유학생들은 미국인과 한국인의 차이를 명확히 인식하게 되며, 미국 대학원 또는 미국 사회에서 완전한 사회적, 문화적 멤버십을 획득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한국에서의 엘리트 학생의 위치와 미국에서의 열등한 학생의 위치 사이에서의 트랜스내셔널 긴장은 유랑(유학)과 정착이라는 대립의 공간에서 발생한다. 미국 교수들과 학생들로부터 `인정`받으려는 필사의 노력은 심리적, 육체적 고난으로 이어지며, 수업과 연구에서 동등한 참여와 멤버십은 좌절된다. - 116, 117쪽

유학생들은 그들이 밟는 트랜스내셔널 궤적 때문에 `탈구 속에서의 희망과 가능성`이라는 이방인성을 지닌다. 즉 트랜스내셔널 이방인으로서 미국 유학생은 한편으로는 `똥밭`을 구르지만, 이는 자신의 미래에 `거름`이 되는 가치 있는 장소라는 이중성을 띤다. 미국 대학의 교수진이 전수하는 학문자본의 양과 질, 미국 대학 인프라의 탁월함, 대가라는 학문권력과의 만남, 우수한 연구 네트워크, 미국 학문 활동의 에토스와 규범은 한국 대학이 제공하지 못하는 귀중한 `거름`이다. 이것들을 경험하게 되면서 미국 대학은 학문을 하는 이상적인 장소로 인식되고, 미국 대학의 학문적 규범은 누구나 따라야 할 준거가 된다. - 118쪽

학문은 감정적 작업이다. 감정적 투신 없이는 탁월한 작업이 나올 수 없다. 학문적 열정은 특정한 사회적 맥락 속에서 발생한다. 랜들 콜린스는 성공적인 학자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를 갖추어야 한다고 말했는데, 그것은 학문자본과 학문에 대한 열정(emotional energy)이다. 양질의 학문자본은 탁월한 선생으로부터 전수받아야 한다. 훌륭한 선생을 찾기 위해 한국의 인재들은 미국 유학을 간다. (...) 탁월한 선생 또는 대가와의 접촉은 학문자본의 전수뿐만 아니라 학문적 열정의 고양과 연결된다. 따라서 학문적 열정은 사회적 상호작용의 지속성 안에서만 유지된다. 즉 짧고 단기적인 만남보다 지속적인 만남을 통해서 계속해서 고양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집합 흥분`(collective efervescence)이 없는 `탁월한` 학문 공동체는 존재하기 어렵다. 곧 공부는 사회적인 것이다. - 195, 196쪽

"공부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교수를 한다"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지혜에 대한 사랑`이라는 학문의 왕, 철학의 어원에서 방점을 찍어야 할 곳은 지혜가 아니라 사랑이다. - 197쪽

학문은 더럽다(아카데미아 임문다 Academia Immunda). 정치가 그러하듯이. 학문 지배의 글로벌 구조에서 열등한 위치에 있는 한국 지식인은 이 궁극적인 리얼리티에 직면하게 된다. 피라미드 구조인 학문의 세계에서 극히 소수만이 그 정점에 오를 수 있다. 민주적 이념을 가진 학문의 세계가 결과적으로는 가장 불평등한 세계인 것이다. 제아무리 진리와 초월을 꿈꿀지라도 학문은 어디까지나 `세계-내-학문`이다. 지식인은 누구보다 자존심이 강하고 사회적 인정을 갈구한다. 이들에게 학문적 배척은 곧 지옥이며 존재 이유의 상실이다. 그러나 이 지옥은 대다수의 한국 지식인들이 처절하게 경험하는 현실이다. 거들떠보지 않는 학벌, 인용되지 않는 논문, 인정해주지 않는 동료들, 그리고 수여되지 않는 사회적 지위. 피라미드의 정점에 있는 지식인들은 경외와 숭배의 대상이지만 학문자본이 미천한 지식인은 언제나 손쉬운 먹잇감이다. 이는 곧 지식인은 지식인에 대한 신이자, 지식인에 대한 늑대이기 때문이다. - 296쪽

학문의 제도적 담지자인 대학은 진리의 전당일 뿐 아니라 호모 사피엔스의 등급을 분류하는 기계다. 학벌 인종주의로 물든 한국 사회에서 한국 엘리트들에게 최고의 지적 등급을 부여하는 곳은 미국 대학이다. 한국 대학과 비교도 되지 않을 재정, 수많은 유수의 교수진, 우수한 연구 시설, 학문에 집중할 수 있는 조직과 문화 등등 압도적인 비교 우위가 한국 지식인이 미국 대학의 글로벌 헤게모니에 종속되는 이유다. 이 트랜스내셔널 간극과 대학의 글로벌 불평등이 미국 유학 션상의 원인이다. 이것이 문제시되는 것은 교육을 통한 불평등이 한 국가를 넘어 재생산되기 때문이다. 미국 유학 지식인의 사회적 특권은 학문적, 사회적 폐쇄 속에서 작동하며, 이는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경쟁을 막고 특정 집단의 이익에 봉사한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 296쪽

헤게모니 이론을 정치인류학적 관점에서 세련화시킨 제임스 스콧(James Scott)의 논변은 이런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는 <약자의 무기(Weapons of the Weak)라는 책에서 피지배층 농민들은 지주들에게 토지개혁을 요구하지 않는다고 밝힌다. 아니 그것은 그들 머릿속에서는 상상 밖의 일이다. 이들은 현재의 계급질서를 무너뜨릴 혁명보다는 일상적인 저항을 통해 자신들의 조건을 조금씩 낫게 만들려고 한다. 한국지식인들에게 한국 대학과 학계에서 미국 대학의 글로벌 헤게모니를 전복시킨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the unthinkable)일 것이다. 그들은 스콧이 묘사하는 약자들처럼 대학에서 좀 더 좋은 자리를 얻고, 강의 시수를 줄이고, 연구 시간을 늘리고, 학계와 전문가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좋은 논문을 쓰고, 만약 기회가 온다면 정계와 같이 더 큰 사회에 나가 기여하고픈 욕심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 297쪽

무엇보다 미국 유학파가 이 헤게모니에 도전할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그들은 미국 대학의 글로벌 헤게모니에 지배받는 자이지만 한국 대학과 사회에서는 지배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즉 이들은 약자가 아니다. 이들은 자신의 `트랜스내셔널 위치성`(transnational positionality)을 사회적 지위 향상의 기회로 삼을 수 있다. 이들은 외국인 대학원생이라는 학문적 약자에서 출발하여 한국과 미국의 지식 엘리트로의 전환이라는 트랜스내셔널 궤적을 가진다. 국내 학위 소지자들이 이따금 담론적으로 이 헤게모니에 도전하지만, 그것이 어떤 변화를 가져온 적은 없다. 무엇보다 이들은 한국 대학의 개혁을 기획할 조직적 연대도 치밀한 전략도 없다. - 297쪽

무엇보다 한국 대학과 학계의 천민성은 미국 대학의 헤게모니에 철저하게 종속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이다. 한국 지식인 집단은 정치사회와 시민사회에 민주화와 근대화를 거세게 요구해왔지만 정작 본인들은 비민주적이고 전근대적인 가장 모순된 집단을 이루고 있다. 학벌 인종주의, 남성 우월주의, 폐쇄적 학벌주의, 유교적 위계질서, 검증되지 않는 전문가, 상징 폭력(symbolic violence)이 난무하는 학계... 이는 베버가 말한 비합리적 천민주의의 대학버전이다. 이 점에서 미국 대학은 한국 대학의 변혁을 이끌어내는 해방자의 역할을 담당한다. 즉 미국 대학의 근대성은 한국 대학의 전근대성을 타파하는 문화적 전범이며, 몇몇 미국 유학파들은 이를 한국 대학에 설파하는 개혁가들이 된다. - 2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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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계의 금기를 찾아서 살림지식총서 136
강성민 지음 / 살림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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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하게 말할 것 없이 무의식은 청개구리와 같은 것이다. 의식은 `노`(no)라고 하는 데 무의식은 `예스`(yes)라고 하는 경우가 학계엔 의외로 많다. 생태주의자들은 현대사회의 반생태성을 비판하지만 자신들 논리의 반생태적인 부분을 모르는 경우가 있다. 문화평론가들도 자신들의 글에 `문화`와 `비평`이 빠져 있고, 오히려 자신들의 글쓰기가 `문화비평`의 대상이라는 점을 인식하지 못한다. 우리 학문의 미국의존성을 비판하는 사람들도 자신이 유럽 의존적이라는 점을, 민족 의존적이라는 점을 모르고 있다. 정말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은 희극(戱劇)이 존재하는지 모른다. 진정한 공부는, 아니 진정한 `사유`는 사유하기를 통해 형성되지 않은, 즉 교육되고 주입된 자신의 무의식을 발견하고, 그것을 객관적 의식공간에 올려놓고 점검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진정한 실천은 단순하게 `언행일치`를 잘 감시한다고 해서 생겨나는 게 아니라 의식과 무의식의 건강한 타협에서 비롯된다고 나는 믿고 있다. - 4, 5쪽

엄격한 형식주의는 학술자들의 표정을 모노톤으로 바꾸고 풍성함을 사라지게 한다. 얼마전 <모색>이라는 잡지에서 조사한 결과 최근 몇 년간 국내 학술지에서 기획 특집이 거의 사라졌다고 한다. 엄격한 형식을 추구하다 보니 자유로운 발상이 숨 쉴 수 있는 공간이 좁아지는 것이다. - 31쪽

"혁명적 좌파라고 스스로 주장하는 사람들의 상당수가 젠더와 섹슈얼리티 문제에 관해서 본의 아니게 일종의 제국주의자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
진보주의자라면 사회적 소수자인 여성에 대해서 끊임없는 자기반성으로 생리적 판단을 자제하고 소수자를 위한 정치적 실천을 해야 한다는 주장인데, 나는 이런 주장이야말로 일종의 거짓말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의 모순을 구조적인 차원에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비판하는 진보주의자가, 자신의 주 고민 영역이 아닌 부분에서까지 일관되게 행동하기를 요구한다는 것 자체가 사람의 두뇌활동과 정서 구조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역행하는 무리한 주장 같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페미니스트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게 해당 진보주의자더러 일상의 영역에서 뼈를 깎는 정치적 실천을 하라고 요구할 게 아니라, 우리 사회 일반의 젠더 의식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 큰 문제 될 게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모든 개체와 관계를 동등한 수준으로 유지하는 것과 각각의 개체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차이의 정치학`은 서로 다른 게 아닐까? - 50, 51쪽

나는 생태주의자들이 그들과 생각이 다른 지식인들을 설득하고 변화시킬 수 있어야 지속 가능성을 가질 수 있다고 본다. 다소 위험한 발언이지만 위로부터의 생태화가 아래에서의 생태화와 만날 수 없다면 결국 요즘 벌어지는 것처럼 생태주의와 상품화와 개인화, 그리고 온정주의와 결합된 기형적 생태운동 등의 반복될 것이다. - 67, 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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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브랜드를 알면 자동차가 보인다 - 살림지식총서 447 살림지식총서 447
김흥식 지음 / 살림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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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면, BMW 760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와 같이, 상식 차원에서 자동차 브랜드를 한번 쭉 훑어보고, 그 브랜드와 앰블렘을 서로 매치 시키는 수준을 원한다면 확실히 도움이 된다.

반면, 시리즈의 특성상 한정된 지면에 자동차 브랜드를 최대한 많이 담으려 한 저자의 노력은 알겠으나, 자동차 브랜드의 배치가 너무 나열식이고 내용 또한 해당 자동차 탄생의 간략한 배경 수준이어서 다소 아쉽다.

독일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표방하는 BMW는 그 이미지에 맞게 모델명에 있어서도 확실한 숫자 표기를 이용한다. 세단은 `1-3-5-7 시리즈` 등 우선 차체 크기에 따라 숫자로 분류한 후 마지막 두 자리에는 배기량을 표기한다. 예를 들어 BMW 최상위 럭셔리 대형 세단인 BMW 760 Li는 7시리즈의 모델이며 배기량 6,000cc를 의미한다. 끝의 `L`은 `롱바디(Lond body)`를 의미하며 `i`는 가솔린 엔진이 장착됐음을 나타낸다. 또 Z4의 경우 `Z`은 2인승을 의미하는 독일어의 약자이며, X5에서 `X`는 4륜구동을 의미한다. M3, M5의 `M`은 Motorsports의 약자로 고성능 스포츠 세단을 의미한다. - 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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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한국현대사 - 1959-2014, 55년의 기록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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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나는 고령 유권자들이 투표행위를 통해 자신의 삶과 시대를 인정받으려 했다고 추측한다. 그들은 일제강점과 해방공간의 혼란, 참혹한 전쟁과 절대빈곤의 고통을 견뎌내고 기나긴 군사독재의 시대를 통과해 오늘에 이르는 동안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룸으로써 대한민국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어놓았다. 자식들을 먹이고 입히고 교육하는 일에 모든 것을 쏟아부은 후 빈손으로 노후를 맞았다. 박근혜 후부에게 투표하는 것이 그 삶과 시대를 인정받으려는 소망을 표현하는 적절한 방법은 아니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2012년 12월에는 그것 말고는 적절한 표현 방법이 없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가설(假說)일 뿐이다. 하지만 나는 이 가설로 2012년 대선 결과를 어느 정도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다. - 22, 23쪽

박근혜 후보가 오로지 `박정희의 딸`이어서 대통령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문재인 후보가 오로지 `노무현의 친구`였기에 1,500만 표에 육박하는 지지를 받았다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두 사람은 각자 나름의 개성과 훌륭한 경력을 가진 정치인이었다. 그러나 `박정희의 딸`과 `노무현의 친구`가 아니었다면 그들은 유력한 정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2012년 대통령 선거는 박정희의 시대와 김대중 노무현의 시대가 부딪친 역사의 전장(戰場)이었다. 그것은 과거와 과거의 싸움인 동시에 서로 다른 미래를 품은 싸움이었다. 그렇다면 박정희의 시대가 승리했고 김대중 노무현의 시대는 패배했는가? 그렇지 않다. 후보와 정당들은 승패를 갈랐지만 국민들은 52:48의 비율로 둘 모두를 긍정했다. 나는 그 선거 결과를 역사의 퇴행으로 규정하는 일부 지식인들의 평가에 동의하지 않는다. - 23쪽

2012년 대통령 선거는 단순한 정당 사이의 권력다툼이 아니라 서로 다른 가치관과 인생관의 투쟁이었고, 서로 다른 문화의 갈등이었으며, 서로 다른 역사인식의 충돌이었다.
현재는 과거의 산물이며 미래는 현재의 연장이다. 그런 점에서 미래는 언제나 오래된 것이다. 내일 오는 게 아니라 우리 내면에 이미 들어와 있다. - 28쪽

거듭 말하지만, 역사는 주관적인 기록이다. 누가 쓴 어떤 역사도 과거를 `원래 그러했던 그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현재`는 가상적인 개념일 뿐이다. 현재의 모든 사실은 발생과 동시에 과거가 된다. 과거는 거대한 임시수용소와 같다. 흐르는 시간에 실려와 퇴적된 모든 사실이 그곳에서 망각과 소멸의 운명을 기다린다. 어떤 역사가가 내민 구원의 손길을 잡은 소수의 사실만이 요행히 그 운명의 집행을 잠시 유예받는 `역사적 사실`이 된다. 사실 자체에는 선택할 권리가 없다. 그것은 역사가의 몫이다. 그래서 같은 시대에 대해 100명의 역사가는 100가지의 서로 다른 역사를 쓸 수 있다. 하나의 시대에 대해 같은 사람이 서로 다른 역사를 쓸 수도 있다. - 28, 29쪽

역사적 사실 그 자체가 객관적인 진리를 이야기한다고 믿는 것은 순진한 착각일 뿐이다. 사실은 스스로 말하지 못한다. 역사가가 허락할 때만 말을 한다. 역사가는 제멋대로 사실을 만들거나 바꿀 수 없지만 사실의 노예인 것도 아니다. 사실과 역사가는 평등한 관계에서 서로를 필요로 한다. 자기의 사실을 가지지 않은 역사가는 뿌리 없는 풀과 같고 자기의 역사가가 없는 사실은 죽은 것이다. 역사는 역사가와 사실들의 지속적 상호작용이다. - 29쪽

1959년 국민의 가장 강력한 욕망은 먹고사는 생존의 문제, 북한의 위협과 사회 내부의 혼란에서 자신과 가족의 안전을 지키는 문제였다. 사람들은 이 욕망을 충족할 수 있게 해주기만 한다면 어떤 사람이나 집단에게도 복종할 뜻이 있었다. 4.19에서 5.16까지 1년을 제외하면, 국민들은 정부 수립 이후 1987년까지 40년 동안 권력에 굴종하며 살았다. 이승만 정부는 `멸공통일`을, 박정희 정부와 전두환 정부는 그와 더불어 `경제발전`이라는 목표를 내걸고 힘으로 대중을 억눌렀다. 격렬하게 저항한 사람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자유와 인권, 민주주의에 대한 억압을 기꺼이 받아들이거나 어쩔 수 없이 굴복했다. 1인당 국민소득이 3,000달러에 근접해 생존에 필요한 물질적 자원을 어느 정도 확보한 다음에야 대중은 분명한 태도로 자유와 민주주의, 사회적의와 인권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은 그렇게 해서 일어났다. - 55쪽

안보국가에서 출발해 발전국가와 민주국가를 거쳐 복지국가로 나아간 것은 인류의 문명사에서 보편적인 국가의 `계통발생`이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그 과정을 정확하게 압축.재현했다. 국가의 진화는 `욕망의 위계`를 반영한다. 문명 발생 이후 호모사피엔스가 생물학적 진화를 이루었다는 증거는 없다. 1만 년 전이나 지금이나 인간은 동일한 위계를 가진 동일한 욕망을 품고 있다. 사람은 일반적으로 `생리적 욕망`부터 충족한 다음 더 고차원적인 욕망을 충족하려고 한다. 인간 공동체인 국가도 `생리적 욕망`의 충족을 도모하는 데서 출발해 안전, 자유, 존엄이라는 차원 높은 욕망 충족을 향해 나아간다. - 57쪽

먹고 마시고 좋은 곳에서 잠을 자려는 욕망을 다 충족한 후에야 더 차원 높은 욕망이 행동의 동기가 될 수 있다면 사람은 죽을 때까지 생리적 욕망과 충동의 지배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의 인간은 그렇지 않다. 흙먼지 날리는 거리에서 김밥을 팔아 모은 재산을 대학에 기부하는 할머니는 생리적 욕구나 안전에 대한 욕구를 다 충족했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니다. 근로기준법 준수를 요구하면서 자기 몸에 불을 붙였던 청년 노동자 전태일도 그렇다. 목숨을 걸고 농장을 탈출해 도시로 달아났던 19세기 중반 미국의 흑인 노예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을 사로잡았던 욕망은 사회적 존경, 자기 존중, 존엄, 정의, 자유 같은 것이었다. 인간의 여러 욕망 사이에 엄격한 위계는 없다. 사람에 따라, 시대에 따라, 환경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 우선순위가 있을 뿐이다. 이렇게 느슨하게 해석하면 욕망의 위계 가설은 역사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 무척 유익하다. - 58, 59쪽

"모든 국민은 자기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 프랑스 정치가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 1805-1859)이 한 말로 알려져 있다. 대학생 시절 책에서 처음 이 문장을 보았을 때는 늘 옳은 말인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자유롭고 민주적인 국가라면 당연히 국민 수준이 정부 수준을 결정할 것이다. 하지만 표현의 자유를 탄압하고 언론을 통제해 여론을 조작하며, 정부를 찬양하는 교과서로 아이들을 세뇌하고, 공포를 조장해 대중을 길들이는 독재체제에서는 정부와 국민의 수준이 일치할 수 없다. 우리 국민은 훨씬 더 훌륭한 정부를 가질 자격이 있다. 독재를 무너뜨리고 민주화를 하기만 하면 우리도 미국이나 서유럽처럼 수준 높은 정부를 세울 수 있다. 나는 그렇게 믿었다. - 68쪽

하지만 그것은 공부와 경험이 아직 부족한 청년의 순진한 낙관론이었다. 토크빌이 전적으로 옳다. `국민의 수준`에는 훌륭한 사람을 대통령으로 선출하는 능력뿐만 아니라 자유롭고 민주적인 선거제도를 만들고 운영하는 능력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이승만 정부도 박정희 정부도, 심지어는 전두환 정부조차도 모두 국민의 수준을 반영한 정부였다고 생각한다. 그때 대한민국 국민에게는 민주주의를 손에 넣을 만한 의지와 능력이 없었다. - 68쪽

그런데 혁명인지 쿠데타인지를 구분하는 기준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쿠데타는 혁명과 달리 민중의 동의와 지지와 참여가 없이 폭력으로 국가질서를 전복하고 권력을 장악하는 행위다. 군대를 동원해 이런 일을 하는 것이 군사쿠데타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학술적 개념이다. 박정희 대통령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5.16을 굳이 혁명이라고 주장하는 심정은 이해할 수 있다. 경제발전을 이루었으니 `결과적으로` 5.16은 잘된 일이었고, 잘된 일에는 군사정변이나 쿠데타보다 혁명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이 국가운영을 잘해서 국민의 지지를 받았다고 해도 5.16이 군사쿠데타였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 94쪽

4.19와 5.16 둘 모두 일정한 성공을 이루었다. 4.19는 실패한 것처럼 보였지만 50년이라는 긴 세월에 걸쳐 점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다만, 10년으로 끝나버린 진보세력의 집권과 심각하게 흔들리는 오늘의 민주주의는 4.19의 승리가 아직은 완성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5.16도 성공했다. 박정희 장군은 18년 동안이나 권력을 누렸으며 그 후예인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이 12년 더 집권했다. 서가 33년이 지난 시점에 딸이 국민의 선택을 받아 대통령이 되었으며, 이유가 무엇이든 그는 국민이 가장 좋아하는 대통령 가운데 한 사람으로 남아 있다. 세계사에서 이만큼 성공한 군사쿠데타는 별로 없었다.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을 가장 좋아하는 시민들이 진정으로 좋아하는 대상은 사실 그의 인격과 행위가 아니라 그 시대를 통과하면서 시민들 자신이 쏟았던 열정과 이루었던 성취, 자기 자신의 인생일 것이라고 나는 추측한다. - 99쪽

민주주의는 단순한 제도의 총합이 아니다. 제도와 행태와 의식의 복합물이다. 합리적인 제도가 있어도 행태가 비뚤어지면 그 제도는 힘을 잃는다. 권력집단과 유권자의 행태는 욕망과 감정, 의식과 관습을 비롯한 여러 요소에 좌우된다. 좋은 헌법이 있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집권세력 또는 통치자가 헌법과 민주주의 기본원리를 존중해야 하며 시민들이 자기의 권리를 제대로 알고 행사해야 한다. 그래야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잇다. 통치자가 헌법과 법률 위에 군림하고, 시민들이 그것을 별 문제의식 없이 받아들이거나 굴종하면 헌법은 한낱 종이에 쓴 글씨에 지나지 않는다. - 177, 178쪽

칼 포퍼는 특정한 계획이나 목표에 입각해 사회 전체를 개조하는 사회혁명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는 인간의 능력을 전적으로 신뢰하지는 않았다. 사람은 현실조차 있는 그대로 인식할 능력이 없으며, 미래를 옳게 설계할 능력은 말할 나위도 없다. 특정한 목표 또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사회 전체를 재조직하려는 혁명가들의 동기는 고상할지 모르지만 그들의 청사진이 옳고 훌륭하다는 증거는 없다. 그들이 국가권력을 장악한 다음 그 청사진에 따라 재조직한 사회가 혁명 이전의 사회보다 확실히 훌륭할 것이라는 보장도 없다. 정의, 평등, 인간해방 등 혁명가들이 내거는 목표가 무엇이든, 어떤 추상적인 선을 실현하기 위해 폭력으고 사회를 재조직하는 혁명은 반드시 전체주의 독재로 귀결된다. 이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불행하게도 20세기 세계사는 포퍼가 옳았다고 말한다. 그래서 포퍼는 추상적인 선은 실현하려고 혁명을 하기보다는 현실의 구체적인 악을 제거하기 위한 사회적 개혁과 개량에 집중하자고 호소했다. - 178쪽

그렇다고 해서 그가 모든 종류의 혁명에 반대한 것은 아니다. 전제정치를 타도하고 민주주의를 세우는 정치혁명만은 열렬히 옹호했다. 민주주의는 최선의 인물이 권력을 장악해 최대의 선을 실현하도록 하는 제도가 아니다. 최악의 인물이 권력을 잡아도 악을 마음껏 저지르지 못하게 하는 제도다. 민주주의는 현실에 존재하는 구체적인 악을 최소화함으로써 사회를 지속적으로 개량해나가는 데 필수불가결한 전제조건이다. 이렇게 본다면 전제정치를 타도하고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민중이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불가피하고 정당한 행위가 된다. 단, 민중의 저항권 행사는 독재를 타도하고 민주주의 정치체제를 세우는 데서 멈추어야 한다. 이것이 포퍼의 주장이다. 대한민국의 정치혁명은 바로 그런 혁명이었다. 4.19혁명과 6월 민주항쟁은 민주주의 정치체제를 세운 바로 그 지점에서 멈추었다. - 178, 179쪽

박정희 대통령은 `자기 성공의 희생자`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생물학적 생명을 빼앗은 것은 총탄이었지만 정치적 생명을 앗아간 것은 그 자신이 이룬 성공이었다. 그는 물질적 풍요를 바라는 대중의 욕망을 무제한 분출시키고 그 탁류에 기대어 권력을 유지했다. 그런데 산업화의 성공으로 절대빈곤의 수렁에서 빠져나온 대중은 다른 욕망에 끌리기 시작했다. 자유, 정의, 민주주의, 인간적 존엄성을 원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그 욕망을 존중하지 않자 많은 국민들이 마음으로 그를 버렸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으로 하여금 방아쇠를 당기게 한 것은 그와 같은 민심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나는 10.26사건을 그렇게 이해한다. - 221, 222쪽

광주민중항쟁은 민주주의 정치혁명의 가능성과 당시 민주화운동의 현주소를 명료하게 보여준 역사적 사건이었다. 전제정치를 타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연속적.동시다발적.전국적 도시봉기라는 것, 그로 아직 대한민국 국민은 그 과업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준비를 갖추지 못했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난 것이다. 참혹한 패배로 막을 내린 광주민중항쟁은 많은 국민의 가슴에 깊은 죄책감을 남겼다. 신군부가 광주에서 무자비한 살상을 저지를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지역 시민들이 계엄군의 폭력에 굴복했기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난 1987년 6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는 어느 지역도 고립되지 않는 전국적 도시봉기를 정밀하게 기획하고 준비했다. 광주 시민들만 홀로 고립의 아픔을 겪게 만든 1980년 5월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6월 민주항쟁은 사실상 광주민중항쟁의 전국적 확대판이었다. - 235, 236쪽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이 아니다. 미래는 우리들 각자의 머리와 가슴에 이미 들어와 있다. 지금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이 미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 시각 우리 안에 존재하고 있는 것들이 시간의 물결을 타고 나와 대한민국의 미래가 된다. 역사는 역사 밖에 존재하는 어떤 법칙이나 힘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역사를 만드는 것은 사람의 욕망과 의지이다. 더 좋은 미래를 원한다면 매 순간 우리들 각자의 내면에 좋은 것을 쌓아야 한다. 우리 안에 만들어야 할 좋은 것의 목록에는 역사에 대한 공명도 들어 있다. 우리가 만든 대한민국현대사의 갈피마다 누군가의 땀과 눈물, 야망과 좌절, 희망과 성공, 번민과 헌신, 어리석은 악행과 억울한 죽음이 묻어 있다. 그 55년의 이야기를 마치면서, 나는 그 모든 것에 공명하고 싶어하는 동시대의 벗들에게 말하고 싶다. 벗이여, 미래는 우리 안에 이미 와 있습니다! - 417, 4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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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인간
성석제 지음 / 창비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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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노동삼권은 어찌 보면 자본가나 권력자 같은 강자에게는 불공평해 보일 수 있는 법조항이다. 노동자는 자본가에 대항해서 노조를 만들 권리가 있고 단체교섭을 하고 조건이 맞지 않으면 쟁의행위를 할 수가 있다. 그 과정에서 그들에게 피해가 발생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자본가와 사용자의 편이어야 할 법이 노동자에게 이런 권리를 보장해주고 있는가. 산업혁명 이후에 노동자들이 너무도 안 좋은 작업환경에서 살인적인 장시간 노동을 하며 착취를 당한 나머지 유럽 산업도시 소년 노동자 평균수명이 15세밖에 되지 않았다. 공장을 돌릴 최소한의 노동력을 보충할 노동자마저 씨가 말랐던 거다. 노동자가 없으면 자본주의도 없다. 그래서 자본조의 편인 국가가 노동자에게 최소한의 법적 장치며 권리로서 노동권을 보장해주게 된 것이다. 그게 바로 노동법이다. 절대로 자본과 권력이 노동자들에게 은혜를 베풀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다. 우리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에 투쟁을 하는 것은 노동자의 당연한 권리다. 저들이 뭐라고 하더라도 우리가 맞다. - 255쪽, 256쪽

우리가 언제나 옳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법으로 정해진 우리의 권리조차 다 찾지 못하고 있다. - 256쪽

단지 가족이라서가 아니라 정말 훌륭하고 고귀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저절로 좋아하고 존경하게 된 거다. 태어나면서부터, 타고나기를 그랬던 것 같다. 그들은 나의 뿌리이고 울타리이고 자랑이다. 나는 그들이 정말 좋다. 지금도 그렇다. 눈을 감으면 언제든 복숭아꽃 살구꽃이 환하게 핀 고향의 집에서 어머니가 나 오기를 기다리며 마당에 서 있는 게 보인다. 형님은 하모니카로 `클레멘타인`을 불고 아버지는 가마니를 짜고 새끼를 꼬고 있다. 어서 와, 어서 와. 누나들은 산나물이 담긴 바구니를 옆에 끼고 나를 향해 손짓한다. 할아버지의 글 읽는 소리. 할머니의 다정한 말소리. 동생들이 달려나온다. 석수다. 옥희다. 나는 마주 달려간다. 부엌에서 달그락달그락 소리가 난다. 햇볕이 따뜻하다. 소가 운다.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른다. 내 아들 태석이가 까르르 웃는 소리가 들린다. 앞 치마를 한 아내가 손을 닦으며 나를 바라다보고 있다. 보고 싶은 사람들이 모두 모였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거기 다 있다. 보인다. - 365, 366쪽

지금 같은 순간이 있어서 나는 행복하다. 내가 목숨을 다해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를 부르는 소리, 기쁨이 내 영혼을 가득 채우며 차 오른다.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느낌, 개인의 벽을 넘어 존재가 뒤섞이며 서로의 가장 깊은 곳까지 다다를 수 있을 것 같다. 이게 진짜 나다. - 3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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