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서 나를 만드는 것들 - 지금 가까워질 수 있다면 인생을 얻을 수 있다
러셀 로버츠 지음, 이현주 옮김, 애덤 스미스 원작 / 세계사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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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XYZ라는 회사에서 일하는 것이 저의 꿈이며, XYZ라는 회사는 제게 정말 큰 의미가 있습니다.`
내가 그 회사에서 일하고 싶은 마음만 있으면, 그 회사도 당연히 나를 원할 거라고 생각하는 치명적 오류다. 방금 전 스미스가 한 말 기억하는가? 취업을 원한다면 그 회사의 인간애가 아닌 자기애에 호소해야 한다. 그러니 XYZ라는 회사가 나를 채용하면 왜 좋은지 그 이유를 설득력 있게 제시해야 한다. 나아가 내가 XYZ라는 회사가 추구하는 목표에 어떤 도움이 될지도 설명하라. 그러면 XYZ가 추구하는 목표를 잘 알고 있다는 사실까지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 가장 큰 신경을 쓰는 대상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이 사실을 기억해두면, 상대로부터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낼 때 상당한 도움이 된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취업을 준비하는 학생들에게 열정적으로 조언하는 부분이다. 이렇듯 우리는 사는 동안 가끔은, 아니 매우 자주 자신이 우주의 중심인 것처럼 착각한다. - 40, 41쪽

공정한 관찰자란 인간의 상상 속 인물로, 스미스에 따르면 인간의 행동은 이 공정한 관찰자와의 상호작용에 의해 이루어진다. 공정한 관찰자는 우리와 대화를 나누며 우리의 행동이 도덕적인지 확인해주는 공정하고 객관적인 인물이다. 즉, 어떤 행동이 도덕적인지, 어떤 행동이 옳은지 판단해야 할 때 우리는 이 인물과 얘기를 나눈다.
공정한 관찰자는 양심과 아주 비슷해 보이지만, 고맙게도 스미스는 이 둘의 차이점을 친절히 알려준다. 양심은 각자의 가치관이나 종교 등의 원칙이 정한 기준에 어긋났을 때 자극을 받는다. 그런데 이런 기준은 상대적이고 개인적이기 때문에 스미스는 큰 가치를 두지 않았다. 이보다는 어깨 너머로 나를 쳐다보는 사람이 인간 대 인간으로 나를 심판한다고 상상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다. - 45쪽

하지만 우리가 단순히 동정심을 갖고 추상적으로나마 남들을 신경 쓰기 때문에 바른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니다. 이 의견에 대한 스미스의 주장은 이렇다.

우리가 신성한 미덕을 실행하는 것은 이웃과 인류를 사랑해서가 아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이나 인류애보다 더 큰 사랑, 더 강력한 애정 때문이다. 그것은 명예롭고 고상한 것에 대한 사랑, 존엄과 위엄에 대한 사랑, 그리고 탁월한 자신의 인격에 대한 사랑이다. - 47쪽

인간이 이기적인 이유, 나아가 잔인한 이유에 대한 설득력 있는 설명 중 하나는 이렇다. 일부 사람들이 공정한 관찰자를 상상하지 않거나, 상상할 마음조차 없거나, 아니면 사랑스러워지는 데 관심 자체가 없다는 것이다. 그럴듯한 얘기다.
그러나 애덤 스미스의 생각은 달랐다. 공정한 관찰자가 정한 기준, 혹은 주변 사람들의 기준에 왜 부응하지 못하는지, 그 이유에 대해 스미스는 다른 견해를 갖고 있었다. 바로 인간이 자기기만에 빠지기 쉽기 때문이다. 그에 의하면 우리는 "공정한 관찰자가 실은 그렇게 공정하지 않아."라며 스스로를 속인다. 결국 자기애에 취한 나머지 공정한 관찰자이자 `가슴속 그 사람`을 짓눌러버린다는 것이다.

인간은 맹렬하고도 부당하기 짝이 없는 이기적인 욕망에 압도당한 나머지, `가슴속 그 사람`, 즉 공정한 관찰자의 얘기를 제대로 듣지 못한다. 그리고 누가 봐도 옳지 않은 일들을 저지른다. - 91쪽

인간의 삶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지녔던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Richard Feynman)은 이렇게 말했다.
"첫 번째 원칙은 자기 자신을 속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자기 자신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속이기 쉬운 사람이다."
나는 누구인가? 가끔 나는 나를 가장 속이기 쉬운 사람이 된다. 나 자신이 얼마나 쉽게 속는가는 얼마든지 증명해낼 수 있다. 다른 사람들도 물론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 `나는 아니다.`라고 착각한다. 그것도 절대 아니라고 생각하며 이렇게 되뇐다.
`나는 나의 민낯을 정직하게 본다.`
하지만 이런 믿음이야말로 가장 심각한 자기기만이다. - 94쪽

개인의 이익이 걸려 있으면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하기 어렵다고 스미스는 말한다. 반면 순전히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일하면서 옳은 일을 한다고 스스로를 납득시키기는 쉽다. 그러한 상황에서 스스로를 지키는 한 가지 방법은 멘토와 같은 현실에서의 공정한 관찰자를 찾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눈을 자주 멀게 하는 자기기만이란 짙은 안개를 걷어줄 것이다.
자기기만에 대한 스미스의 통찰력을 오늘날 확증 편향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따. 확증 편향은 이의를 제기하거나 반박하는 증거를 무시하고 내 믿음을 확인시켜주는 증거만을 열렬히 받아들이는 성향을 말한다.
자신이 사랑스럽다고 믿고 싶은 사람들은, 자신에 대한 좋지 않은 평가는 잊거나 잘 기억하지 못한다. 반대로 자신의 사랑스러운 이미지를 확인시켜주는 기억은 지나치게 잘 받아들인다. 이런 오류는 대인관계를 넘어서는 영역까지 확대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스미스도 인생에서 겪는 혼란의 절반이 자기기만에서 비롯된다고 했을 것이다. 사실 어쩌면 절반을 넘어설지도 모르겠다. - 105쪽

`우주는 수많은 점들로 가득 차 있다. 그 중의 몇 개를 잘 이으면 무엇이든 그릴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당신이 선택한 점들이 왜 그 지점에 있는지가 아니다. 왜 당신이 나머지 점들을 선택하지 않았는지, 그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너무나도 자주 이런 오류에 빠진다. 자신이 선택한 점들만으로 그림을 그리고는, 자신이 예쁜 그림을 그렸다며 크게 기뻐한다. 나머지 점들로도 멋진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사실은 안중에도 없다. - 105, 106쪽

우리는 밝은 가로등 아래서만 열쇠를 찾는 술꾼과 다름없다. 열쇠가 밝은 가로등 아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술꾼 말이다. 실은 가로등 아래가 다른 곳보다 밝기 때문에 그 주위만 맴돌며 열쇠를 찾고 있는 것뿐이면서. - 107쪽

마지막으로, 키네아스가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겠느냐고 묻자, 왕은 마지막으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내 소중한 친구여, 우리는 편안하게 살 것이다. 그리고 하루 종일 술을 마시고 즐거운 대화를 나눌 것이다."
그러자 키네아스가 왕에게 일격을 가했다.
"그럼, 지금 폐하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하시나이까?"

우리는 우리의 삶을 만족시킬 도구들을 이미 모두 갖고 있다. 삶의 기본적인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 이탈리아 반도를 정복할 필요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 내면의 인간다움을 유지하고 마음속 비열한 생쥐를 짓눌러야 한다. 인생은 경주가 아니라 음미하고 즐기는 기나긴 여정이다. 더 많은 것을 가지려는 끈질긴 욕구, 즉 야심이 우리를 삼켜버릴 수 있다.
<플루타르크 영웅전>은 지금으로부터 약 2,000년 전에 집필되었다. 플루타르크는 자신이 살던 시대보다도 300년 전 얘기를 책에 녹여냈다. 이처럼 돈과 권력이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지 못한다는 사실은 실로 오래된 진리다. - 129쪽

인간의 삶이 비참하고 혼란스러운 가장 큰 이유는 소유물이 곧 나 자신이라 착각하기 때문이다. - 140쪽

스미스는 우리가 단순히 돈 많고 유명한 사람들을 부러워하는게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그들이 우리보다 더 나은 운명을 맞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어떤 면에서 죽음은 그들에게 걸맞지 않는 옷이다. 그들의 죽음은 우리가 갈망했던 완벽한 결론에서 벗어난 암울한 잔혹 동화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사람들은 유명인의 죽음에 평균 이상으로 과하게 슬퍼한다. - 151쪽

스미스에게 야심, 즉 부자가 되거나 유명해지거나 아니면 둘 다가 되려는 욕망은 인생에 있어 반드시 피해야 할 독약이다. 페달에 일단 발을 올리고 나면, 멈추지 않고 계속 밟아야 하니까.

궁정에서의 화려한 노예 생활을 과감히 버리고, 자유롭고 두려움 없이 독립적으로 살겠다고 진지하게 결심했는가? 그 고결한 결심을 지킬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 있다. 아니, 오로지 이 방법 밖에 없다. 한 번 들어가면 되돌아 나온 사람이 거의 없는 그곳, 야심의 소굴로 절대 들어가면 안 된다. 그리고 세상 거의 모든 사람들의 관심을 사로잡은 지배자들과 자신을 절대 비교해서도 안 된다. - 158,159쪽

사랑받는 사람이 되기 위한 더 훌륭한 방법으로, 스미스는 미덕을 갖춘 삶을 권했다. 미덕, 이 애매한 단어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일까? 스미스가 생각하는 미덕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그중 그가 가장 강조한 세 가지가 있으니, 바로 신중, 정의, 선행이다. 이를 갖춘 인간은 사랑스러운 존재가 되어 주위 사람들에게 존경과 칭찬을 받게 된다. 즉, 이 세 가지는 사랑받는 사람이 되기 위한 자격요건인 셈이다.
신중 = 자기 자신을 돌본다
정의 =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
선행 = 다른 사람을 선한 마음으로 대한다 - 199쪽

<도덕감정론>에서도 밝혔지만 스미스가 가장 경멸한 사람은 `시스템에 갇힌 사람`이었다. 시스템에 갇힌 사람이란, 특정 설계나 비전에 따라 사회를 다시 세우려 하는 지도자를 뜻한다. 그런 사람들은 이상적인 사회를 그리기 위한 비전에 너무 빠져든 나머지, 그것이 이상적 상태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는 생각을 못 한다. 자신이 만든 비전에 파묻힌 그들은, 그로인해 자칫 피해를 입게 될 사람들이나 계획의 실행 과정에서 피해를 입는 사람들 역시 보지 못한다.
시스템에 갇힌 몽상가는 그 일에 몰두해버린 채, 계획을 제대로 실행하지 못하고 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들며 의도치 않은 결과를 만들어 낸다. 뿐만 아니라 그 계획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는 힘이 도사린다는 사실도 잊어버린다.
스미스에 따르면, 시스템에 갇힌 사람은 체스판의 말을 움직이듯 사람들도 쉽게 움직일 수 있다고 착각한다. 그러면서 정작 본인은 체스의 규칙을 무시해버리곤 한다. 시스템에 갇힌 사람은 게임의 규칙 안에서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말의 이동을 무시하고, 자기 멋대로 여기저기에 말을 갖다 놓는다. - 265, 266쪽

시스템에 갇힌 사람은 이 거대한 사회의 구성원들을 자기 멋대로 쉽게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마치 체스판의 말들을 손으로 배열하는 것처럼 말이다. 체스판의 말들은 오직 사람의 손에 의해서만 움직인다. 그러나 인간 사회라는 거대한 체스판에서는 모든 말 하나하나가 자율성을 갖고 있다. 즉 입법 기관이라는 외부적 힘에 의해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자율성과 외부적 힘, 그 두 가지가 서로 일치하고 같은 방향으로 작용한다면, 인간 사회라는 게임은 편안하고 조화롭게 진행될 것이다. 게임의 결과 또한 행복하고 성공적일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 두 가지가 서로 반대되거나 다르다면 인간 사회라는 게임은 순조롭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인간 사회는 최악의 무질서 상태에 처할 것이다. - 266, 267쪽

복잡한 이 세상에서 사람들의 행동을 법률로 제정하려는 사람이라면, 인간이 태생적으로 각자 특정한 욕구와 꿈이 있음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각자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어 한다. - 267쪽

우리는 체스판의 말들을 마음대로 옮길 수 있다고 착각한다. 또한 나 자신에게 무엇이 가장 좋은지 스스로 잘 안다고 착각한다. 설사 자신과 타인에게 무엇이 가장 좋은지 잘 알고 있어도, 가끔은 그냥 내버려두라고 스미스는 조언한다. 그것이 때로 가장 좋을 수 있다고 덧붙이면서.
우리의 노력이란 실패의 가능성을 항상 품고 있다. 또 때로는 남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다. 그러니 국가와 사회라는 무대에서 멀리 떨어져 나올 필요도 있다. 국가와 사회라는 체스판보다 더 작지만 더 훌륭한 일상을, 그 소소한 목표를 생각하는 것이 가장 좋을 수도 있다. - 277, 278쪽

<도덕감정론>은 <국부론>과 단지 초점이 다를 뿐이다. <도덕감정론>은 인간의 본성이나 행동 방식에 대한 색다른 이론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리고 인간성에 대해 낙관적인 시각도 제시하지 않는다. 이 책은 인간의 관계 맺기에 대한 색다른 영역을 다루고 있다.
<도덕감정론>과 <국부론>의 저자 애덤 스미스는 실제 사람들의 행동 방식 그 자체에 관심을 두었다. 이렇게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인간 행동을 다뤘기에, 두 책에서 말하는 인간의 성향이 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 가까운 사람간의 관계를 다룬 <도덕감정론>과 상품의 생산과 교역을 다룬 <국부론>에 나타난 사람들의 행동방식은 완전히 다르다. 결론적으로 이 두 책에서 말하는 영역은 삶에서 서로 아주 다른 범위에 있다. - 293쪽

우리 삶에는 이렇게 두 개의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두 세계의 차이를 받아들일 준비를 미리 하지 않는다. F.A. 하이에크가 자신의 저서 <치명적 자만(The Fatal Conceit)>에서 지적했듯이,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동시에 두 세계에서 살아야 한다. 하이에크에 따르면, 사람들은 사회생활을 가족생활처럼 만들고 싶어 한다. 가족의 평등한 문화를 사회 전체로 확대함으로써, 사회와 경제를 또 다른 버전의 가족으로 만들려고 한다는 주장이다. 하이에크는 그러면서 사회를 가족처럼 만들려는 시점에 바로 독재가 탄생한다고 경고했다.
스미스가 하이에크의 경고에 동의했을지는 잘 모르겠다. 1759년에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가 없던 시대였으니까. 그러나 스미스는 인간이 가까운 관계를 넘어서 자신의 사랑과 관심을 확대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 298, 299쪽

스미스가 하이에크와 생각을 같이 한 부분도 있다. 인간이 유력한 지도자들을 우러러보고 존경하며, 자신의 운명을 맡기고자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붙, 그리고 가족의 울타리를 벗어나면서부터 부모 같은 존재와 안전을 갈망한다. 문제는 히틀러나 스탈린 같은 사람들이 절대 우리의 부모가 될 수 없다는 데 있다.
그런 사람들은 우리를 자식처럼 사랑해주지 못한다. 오히려 우리의 그런 열망을 악용한다. 스미스와 하이에크는 바로 이 점을 경고했던 것이다. 정치적 유력자를 향한 우리의 열망이 얼마나 위험한지 말이다. - 2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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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서의 괴로움
오카자키 다케시 지음, 정수윤 옮김 / 정은문고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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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이 아무리 많더라도 책장에 꽂아두는 한 언제든 검색할 수 있는 듬직한 ‘지적 조력자’다. 하지만 책장에서 비어져 나와 바닥이며 계단에 쌓이는 순간 융통성 없는 ‘방해꾼’이 된다. 그러다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오면 범람은 결국 ‘재해’로 치닫는다. 아직은 책의 범람이 지하에 머물러 다행이지만, 이윽고 1층을 잠식하고도 성이 차지 않아 계단을 따라 2층까지 밀고 올라오면 정말이지 ‘대참사’가 따로 없다. - 19쪽

그래도 역시 책은 팔아야 한다. 공간이나 돈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 내게 무엇이 필요한지, 꼭 필요한 책인지 아닌지를 판가름해 원활한 신진대사를 꾀해야 한다. 그것이 나를 지혜롭게 만든다. 건전하고 현명한 장서술이 필요한 이유다. 초판본이나 미술서처럼 수집할 가치가 있는 책들만 모아 장서를 단순화하는 방법도 있지만, 대부분 책이 너무 많이 쌓이면 그만큼 지적 생산의 유통이 정체된다. 사람의 몸으로 치면 혈액순환이 나빠진다. 피가 막힘없이 흐르도록 하려면 현재 자신에게 있어 신선도가 떨어지는 책은 일단 손에서 놓는 편이 낫다. - 31쪽

앞으로는 이렇게 하면 된다. 어쨌거나 누구 책이든 이것저것 다 사 모을 필요는 없다. 꼭 필요한 책 한 권만 갖고 있으면 그걸 숙독하고, 그래도 마음이 벅차오른다면 영역을 넓히면 된다. 2013년 봄에 나는 쉰여섯 살이 되었다. 히틀러도, 전설적인 스모 선수 후타바야마도, 포크송 가수 다카다 와타루도, 여성 추리소설가 구리모토 가오루도 이 나이에 세상을 떴다. 덮밥을 두 그릇이나 먹을 나이도, 역 계단을 한 번에 두 개씩 뛰어오를 나이도 아니다. 지적 욕구로 허세를 부리는 일도 어지간히 쇠했다. 슬슬 장서를 엄선하고 응축하는 데 마음을 써야 할 때가 아닌가. - 37쪽

아마도 `명장정궤‘라는 사상 속에는 책장이 없는 듯하다. 어떤 의미에서 서재는 책장을 갖는 순간부터 타락하기 시작하는지도 모른다. 책장이 있으면 책을 꽂아두고 싶다는 소유욕이 생기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이상적인 서재에 한해서다. 뭐든 이상적으로 흘러가는 경우가 어디 있겠느냐마는. - 60쪽

책을 필요 이상으로 끊임없이 쌓아두는 사람은, 개인차가 있긴 하겠으나 멀쩡한 인생을 내팽개친 사람이 아닌가 싶다. 생활공간 대부분을 거의 책이 점령하는 주거란, 일반 상식에서 보면 아무리 잘 봐주려 해도 멀쩡한 정신은 아니다. 쌓고 무너뜨리기를 반복하는 일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있는 것은 그저 한도 끝도 없이 갖고 싶은 책이 눈앞에 아른거려 계속 살 수밖에 없는 비틀어진 욕망뿐이다. 게다 그에 대한 반성마저 별반 없다. - 65쪽

여러 정황으로 보아 요시다의 장서는 일관되게 적었다. 그저 정말 필요한 5백 권, 피와 살이 되는 5백 권만 지니고 있었다. 시노다 하지메가 말하는 ‘5백 권의 가지’는 이랬다.
책 5백 권이란 칠칠치 못하다거나 공부가 부족하다는 것과는 다르다. 어지간한 금욕과 단념이 없으면 실현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를 실행하려면 보통 정신력으로는 안 된다. 세상 사람들은 하루에 세 권쯤 책을 읽으면 독서가라고 말하는 듯하나, 실은 세 번, 네 번 반복해 읽을 수 있는 책을 한권이라도 더 가진 사람이야말로 올바른 독서가다. - 149, 150쪽

굳이 이래저래 말을 늘어놓지 않더라도 ‘전자서적’에 대한 나의 곱지 않은 시선을, 여태껏 이 책을 읽어주신 분이라면 이해해주시리라 믿는다. 책은 내용물만으로 구성되는 건 아니다. 종이질부터 판형, 제본, 장정 그리고 손에 들었을 때 느껴지는 촉감까지 제각각 다른 모양과 감각을 종합해 ‘책’이라 불리는 게 아닐까. - 1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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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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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도 생명권, 자유권, 문화와 정치에 관여할 권리를 지닌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식시키려는 싸움은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이 싸움은 가끔은 퍽 암울하다. 내가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를 쓰면서 스스로도 놀란 점은, 처음에는 재미난 일화로 시작한 글이 결국에는 강간과 살인을 이야기하면서 끝났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나는 여성이 사회에서 겪는 사소한 괴로움, 폭력으로 강요된 침묵, 그리고 폭력에 의한 죽음이 모두 하나로 이어진 연속선상의 현상들이라는 사실을 똑똑히 깨달았다(그리고 우리가 여성 혐오와 여성에 대한 폭력을 더 잘 이해하려면 힘의 오용을 총체적으로 바라보아야만 한다. 가정폭력을 강간, 살인, 성희롱, 협박과 별개의 문제로 취급하지 말아야 하고, 온라인과 가정과 직장과 거리를 전부 아울러야 한다. 그렇게 전체를 보아야만 패턴이 뚜렷해진다). - 31, 32쪽

그 남자는 자신이 고른 피해자에게는 아무런 권리도 자유도 없지만 자신에게는 그녀를 통제하고 처벌할 권리가 있다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던 셈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폭력은 무엇보다도 일단 권위주의적이라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폭력은 내게 상대를 통제할 권리가 있다는 전제에서 시작한다.
살인은 그런 권위주의의 극단적 형태다. 살인자는 당신이 죽을지 살지 결정할 권리는 자신에게 있다고 살인을 통해서 단언하는 셈이다. 이것은 타인을 통제하는 궁극의 수단이다. 설령 당신이 고분고분하게 굴더라도 아무 소용없을지 모르는데, 통제의 욕망은 순종으로는 좀처럼 달래기 힘든 격렬한 분노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 행위의 이면에 모종의 두려움과 취약함이 깔려 있을지라도, 아무튼 그런 행위는 타인에게 괴로움을, 더 나아가 죽음을 부여할 자격이 자신에게 있다는 생각에서 나오기 마련이다. 그런 의식이 범인도 피해자도 비참하게 만든다. - 45, 46쪽

우리가 이미 너무나 잘 아는 이야기를, 내가 어떻게 들려줘야 좋을까? 그녀의 이름은 아프리카였다. 그의 이름은 프랑스였다. 그는 그녀를 식민지로 삼았고, 착취했고, 입을 막았으며, 그런 일을 그만두기로 한 때로부터 수십년이 지난 뒤에도, 가령 코트디부아르 같은 곳에서 그녀의 사정을 결정하는 일에 위세를 부렸다. 여담이지만, 그가 그녀에게 그런 이름을 준 것은 그녀에게서 나오는 수출품 때문이지 그녀의 정체성 때문은 아니었다(코트디부아르 Cote d`Ivoire는 프랑스어로 `상아 해변`을 뜻한다. - 67쪽

그녀의 이름은 아시아였다. 그의 이름은 유럽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침묵이었다. 그의 이름은 권력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가난이었다. 그의 이름은 풍요였다. 그녀의 이름은 그녀의 것이었지만, 그녀가 과연 무엇을 소유했던가? 그의 이름은 그의 것이었고, 그는 그녀까지 포함해 모든 것을 그의 소유로 여겼다. 그리고 그녀의 의향을 묻거나 뒷일을 염려하지 않고도 그녀를 취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 67, 68쪽

진화생물학자들이 자주 말하는 공리가 있다. ‘개체발생은 계통발생을 반복한다.’ 한 생물체의 배아가 발달하는 과정은 그 종이 진화해온 과정을 반복한다는 뜻이다. 총재의 성폭행 혐의라는 개체발생은 IMF의 계통발생을 반영한 것일까? 아닌 게 아니라, 그 조직은 미국의 경제적 비전을 나머지 세계에 부과하려 한 악명 높은 브레텐우즈 회의 결과 중 하나로서 제2차 세계대전 말에 만들어지지 않았던가.
IMF는 원래 각국의 개발을 돕기 위해서 돈을 빌려주는 기관으로 설립되었지만, 1980년대에는 이미 자유무역주의와 자유시장주의 이데올로기를 추종하는 조직이 되고 말았다. IMF는 대출금을 볼모로 삼아서 온 남반구 국가들의 경제와 정치에 막대한 영향력을 획득했다. - 71쪽

그녀의 이름은 아프리카였다. 그의 이름은 IMF였다. 그는 그녀에게 올가미를 걸어 약탈당하게 했고, 보건 써비스를 폐지하게 했고, 굶주리게 했다. 자신의 친구들을 배불리기 위해서 그녀에게 쓰레기를 투척했다. 그녀의 이름은 남반구였다. 그의 이름은 워싱턴 컨센서스(1990년대 미국이 중남미 국가들에게 제시한 자유무역주의에 기반한 경제정책의 통칭)였다. 그러나 그의 연승은 끝나가고 있었고, 그녀의 운은 상승하고 있었다. - 72쪽

IMF는 포식세력이었다. 개발도상국가들의 문호를 열어젖혀 부유한 북반구와 강력한 초국적기업들의 경제공세를 겪게끔 만들었다. IMF는 포주였다. 어쩌면 지금도 그렇다. 그러나 1999년 씨애틀의 반기업 시위를 계기로 세계적 운동이 점화된 이래 IMF에 저항하는 대중봉기가 일어났고(1999년 씨애틀에서 열릴 예정이던 세계무역기구 각료회의의 저지를 목표로 5만명의 시위대가 벌인 반세계화 시위, 이른바 ‘씨애틀 전투’를 가리킨다), 그런 세력이 라틴아메리카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며, 그 덕분에 앞으로 벌어질 모든 경제논쟁의 틀이 바뀌고 있으며, 경제와 전망에 관한 우리의 상상이 더 풍요로워지고 있다. - 73쪽

최근에 많은 미국인들은 ‘동성결혼’(same-sex marriage)이란 어색한 용어를 ‘평등결혼’(marriage equality)으로 바꾸었다. 원래 이 용어는 동성 커플도 이성 커플이 누리는 권리를 전부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그렇지만 이 용어는 결혼이란 평등한 사람들 사이의 관계라는 뜻도 될 수 있다. 전통적 결혼은 그렇지 않았다. 서구 역사에서 대부분의 기간에, 법은 결혼을 통해서 남편이 사실상 아내의 소유자가 되고 아내는 사실상 남편의 소유물이 된다고 규정했다. 혹은 남자가 주인이 되고 여자는 하인이나 노예가 된다고 규정했다. - 92쪽

그물을 짜되 그물에 걸리지 않는 것, 세상을 창조하는 것, 자신의 삶을 창조하는 것, 자신의 운명을 다스리는 것, 아버지들만이 아니라 할머니들을 호명하는 것, 직선만이 아니라 그물을 그리는 것, 청소부만이 아니라 제작자가 되는 것, 침묵당하지 않고 노래하는 것, 베일을 걷고 모습을 드러내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이 내가 빨랫줄에 너는 현수막들이다. - 118쪽

미래는 어둡고, 나는 그것이 미래로서는 최선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이 선언은 예사롭지 않다. 이 선언은 우리가 거짓된 점괘를 믿거나 울적한 정치적 혹은 이데올로기적 내러티브를 미래로 투사함으로써 모르는 것을 아는 것으로 바꿀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이 선언은 어둠을 칭송하며 - ‘나는 ... 생각한다’ 부분이 암시하듯이 - 스스로의 선언에 대해서조차 기꺼이 불확실함을 인정한다. - 122쪽

사람들은 대부분 어둠을 두려워한다. 아이들의 경우에는 말 그대로 캄캄한 것을 두려워하고, 어른들의 경우에는 무엇보다도 자신이 모르는 것, 못 보는 것, 모호한 것이라는 어둠을 겁낸다. 그러나 무언가를 구별하고 규정하기 힘든 밤이란 한편으로는 우리가 사랑을 나누는 시간이다. 사물들이 합쳐지고, 변화하고, 매료되고, 흥분하고, 충만해지고, 사로잡히고, 풀려나고, 재생되는 시간이다. - 123쪽

이 글을 쓰기 시작할 무렵, 나는 아생에서의 생존법을 가르쳐주는 로런스 곤잘러스(Laurence Gonzales)의 책을 접었다가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문장을 발견했다. "계획은, 즉 미래의 기억은 현실이 자신에게 맞는지 시험 삼아 걸쳐본다." 무슨 뜻인가 하면, 그 두가지가 합치하지 않는 듯할 때 사람들은 현실이 주는 경고를 무시한 채 계획에 매달림으로써 위험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르는 것의 어둠, 희미하게만 보이는 공간을 겁낸 나머지 종종 감은 눈의 어둠, 자각하지 못함의 어둠을 선택한다. - 123쪽


손택 또한 우리에게 어둠을, 미지를, 불가지(不可知)를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홍수처럼 쏟아지는 이미지에 현혹되어 다 이해한다고 믿어버리거나 스스로가 고통에 무감각해지도록 내버려두지 말라고 말한다. 그녀는 앎이 감정을 일깨우기도 하지만 마비시키기도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녀는 우리가 그 모순을 해소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는 그저 우리에게 계속 사진을 봐도 좋다고 허락하고, 사진 속 피사체들에게는 그들이 겪는 경험의 불가지성을 타인들로부터 인정받을 권리를 허락한다. 그리고 스스로도 인정한다. 우리가 비록 완전히 헤아리진 못해도 여전히 마음을 쓸 수 있다는 것을. - 129쪽


‘해석에 반대한다’(Against Interpretation)라는 제목의 글로 공적인 경력을 시작한 손택은 불확정성을 찬양하는 사제였다. 손택은 그 글의 첫머리에서 "예술에 대한 최조의 경험은 틀림없이 주술적이고 마술적이었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뒤에서는 "오늘날 해석은 대체로 반동적이고 억압적인 작업이 되었다. 해석은 지성이 세상에 가하는 복수다. 해석하는 것은 빈약하게 만드는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그리고 물론 그녀는 이후 해석하는 삶을 살았으며, 최고의 순간에는 무조건적인 분류와 지나친 단순화와 손쉬운 결론에 저항하는 데 있어서 울프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 130쪽

내게 희망의 근거는 단순하다. 우리는 다음에 벌어질 일을 모른다는 것, 세상에는 있을 법하지 않은 일과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 꽤 자주 벌어진다는 것. 비공식적인 세계사가 이미 보여주었듯이, 헌신하는 개인들과 대중운동들이 역사를 만들 수 있으며 만들고 있다는 것. 우리가 언제 어떻게 이길지, 얼마나 걸릴지는 예측할 수 없지만 말이다.
절망은 확실성의 한 형태다. 미래가 현재와 거의 같거나 현재보다 쇠락하리라고 믿는 확실성이다. 곤잘러스의 공감되는 표현을 빌려서 말하자면, 절망은 미래에 대한 확실한 기억이다. 마찬가지로 낙관도 앞으로 벌어질 일을 확신한다. 절망과 낙관은 둘 다 행동하지 않을 근거로 작용한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그런 기억이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 현실이 반드시 우리 계획과 일치하진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야말로 희망일 수가 있다. 창조력과 마찬가지로, 희망은 낭만파 시인 존 키츠(John Keats)가 말한 이른바 소극적 능력(negative capability)에서 생겨날 수 있다. - 134쪽

언젠가 하와이의 어느 식물학자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새로운 종을 찾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었는데, 그가 밝힌 요령은 밀림에서 길을 잃는 것, 자신이 아는 지식과 방법을 넘어서는 것, 경험이 지식을 압도하도록 허락하는 것, 계획이 아니라 현실을 택하는 것이라고 했다. - 136쪽

조사에 따르면, 많은 경우 강간의 동기는 남자가 여자의 욕망과는 무관하게 자신이 그녀와 섹스할 권리가 있다고 믿는 마음이었다. 한마디로 남자의 권리가 여자의 권리에 앞선다는 생각, 혹은 여자에게는 권리가 없다는 생각이다. 이렇듯 여자가 남자에게 섹스를 빚지고 있다는 생각은 어디에나 퍼져 있다. 내가 어렸을 때처럼 요즘도 여자들은 우리의 어떤 행동이, 어떤 말이, 옷차림이, 우리의 모습 자체가, 우리가 여성이라는 사실 자체가 남자에게 욕망을 불러 일으켰으므로 응당 그 욕구를 만족시켜주어야 한다는 말을 듣는다. 우리가 그들에게 빚을 졌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우리에 대한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 1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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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있는 시간의 힘 - 기대를 현실로 바꾸는 혼자 있는 시간의 힘
사이토 다카시 지음, 장은주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그러나 고독을 극복하면서 단독자임을 자각할 수 있었고, 오로지 혼자서만 도달할 수 있는 지점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 27쪽

무리 지어 다니면서 성공한 사람은 없다.
뭔가를 배우거나 공부할 때는 먼저 홀로서기를 해야 한다. 머리의 좋고 나쁨이나, 독서의 양보다는 단독자(單獨者, 현대인은 자신의 자유와 주체성을 버리고 집단 속에 묻혀 자기를 잃어간다. 그 전체, 즉 집단의 반대편에 서는 존재를 키에르케고르는 ‘단독자’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의 자질이 필요하다. - 31쪽

이때 중요한 것이 자기 객관화다. 세상이 나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세상에서 바라보는 나는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지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주관적인 평가는 달콤할 수 있다. 스스로에게 점수를 후하게 주면서 ‘지금의 나는 진짜 내가 아니야’라고 속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래서는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없다. 자신을 성장시키는 톱니바퀴가 멈추게 되어 겨우 생긴 에너지가 세상과 맞물리지 못하고 공회전만 할 뿐이다. - 40, 41쪽

사람은 일단 쓰면서 자연스럽게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그 과정을 끝내고 타인을 대하면 훨씬 내실 있게 이야기할 수 있다. 자기의 생각을 정리하고 토론에 들어왔을때와 그렇지 않을 때는 크게 다르다.
쓰는 작업은 내면을 파고드는 드릴이 된다. 내관의 대체법이 되어주는 것이다. - 68쪽

마음은 말과 이미지에 영향을 받는다. 물론 이미지는 중요하지만 자신의 신념을 키워나갈 때는 말의 힘이 더 크다. 말을 주문처럼 몇 번이고 반복하여 중얼거리면 효과가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효과가 있는 것은 쓰는 것이다. ‘이렇게 되고 싶다’는 글을 쓰다 보면 꿈에 대한 열정이 더욱 강해진다. 나 역시 내 안의 답답함을 일기에 주절거리듯 쓰면서 생각이 정리되어 점점 명확한 가치관을 세울 수 있었다. 사람의 사고방식은 웬만해선 바뀌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일정한 시기에 그 밑바탕이 정해진다. 그때 반복적으로 쓰면서 생각을 정리하면, 명확해진 꿈과 생각이 자기 안에 깊이 뿌리내린다. 일기에는 그런 힘이 있다.
쓰기는 고독의 힘을 키우는 방법 중 하나다. 고독하지 않으면 글을 쓸 수가 없다. - 73, 74쪽

하이데거는 "죽음을 외면하고 있는 동안에는 자신의 존재에 마음을 쓸 수 없다. 죽음이라는 것을 자각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자신의 가능성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삶의 방식에 영향을 준다"고 주장했다.
인간은 죽음을 피할 수 없고, 죽음이 언제 다가올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라틴어 ‘메멘토모리(죽음을 기억하라)’라는 말처럼 나도 언젠가 죽을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면 우리가 제한된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며, 삶은 한정된 시간 속에서 벌어지는 진검승부의 장이라는 것을 의식할 수 있다. 자신이라는 존재에 대해 더욱 깊이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현재’의 의미를 새롭게 받아들이고 지금을 충실하게 살아나갈 수 있다(나중에 하이데거는 이 생각을 바꾸지만 나는 이때의 주장에 큰 용기를 얻었다). - 169, 170쪽

혼자 있는 시간을 잘못 보낸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가까이 하지 않거나 배제하고 싶어 하는 상태를 말한다. 반대로 혼자 있는 시간을 잘 보낸다는 것은 자신의 세계에 침잠하여 자아를 확립한 후에 다른 사람들과 유연하게 관계를 맺고 감정을 자유롭게 교환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다른 사람’은 그저 취미가 맞는 사람이 아닌, 자신이 지향하는 가치를 공유하는 사람이다. 베토벤이나 톨스토이의 작품을 접한 후에, 주변 사람들로부터는 도저히 채울 수 없는 정신세계에 대해 알고 싶다는 욕구를 느끼거나 그러한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다시 대가의 작품에 몰입한다면 그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열정이나 관심이 물건과 같은 물질로 완전히 가버리면 거기에 양질의 타자는 있을 수가 없다. 물체와 마주할 뿐이다. - 1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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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를 부탁해 - 권석천의 시각
권석천 지음 / 동아시아 / 2015년 11월
평점 :
절판


눈앞의 이런 일들이 세월호 문제를 넘어서지 못한 업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세월호는 한국 사회의 부끄러운 민낯을 드러냈다. 국가의 무능과 자본의 탐욕을 자각하고, 반성하고, 개혁해야 할 시점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계기를 날려버렸다. 바닷속 객실에 갇혔던 아이들을 `사고 희생자`의 틀에 또 한 번 가뒀고, 세월호를 사회 갈등의 먹잇감으로 던졌다.
2015년의 사건들은 세월호와 인과(因果)의 끈으로 묶여 있진 않더라도 최소한 겹쳐져 있다. 부끄러움의 자정(自淨) 능력을 상실한 사회에서 항용 나타나는 현상이요, 징후들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일은 자기기만의 시스템을 더 높이 쌓아올리는 것인지 모른다.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서정시를 쓸 수 있느냐"는 철학자의 물음은 세월호 이후의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유효하다. 살아남은 자들은 하루하루 비관론과 마주칠 수밖에 없다. 세월호를 다시 대면하고 극복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이 언저리를 맴돌 뿐이라고, 나는 믿는다. - 24, 25면

시스템은 중요하다. 다만 시스템이 우릴 구조해줄 것이라 믿는 건 오산이다. 착각이다. 우리를, 우리 아이들을 위기에서 구해줄 수 있는 건 선장, 해경, 장관, 총리, 대통령 같은 사람들이다. 그들이 몸과 마음을 바쳐 움직여줘야 생명을 건질 수 있다. 스펙이 화려하고, 신망이 높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진정성과 용기, 열정과 의지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 28쪽

그해 6월 우린 서둘러 돌아오지 말았어야 했다. 자기 자리로의 복귀를 조금 미루고 한국 사회, 한국 정치의 미래를 놓고 토론을 벌였어야 했다. 민주주의를 어떻게 발전시킬지 묻고 답하면서 새로운 시대의 상식과 일상을 만들어가야 했다. 권력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도 있다는 것을, 어떤 이유로도 국가기관이 시민들의 여론에 검은 손을 뻗으려 해선 안 된다는 것을 서로의 가슴에 새겨 넣어야 했다.
입으론 노동자 농민을 말하면서도 다들 자기 앞의 생(生)에 초조해했다. 구호 소리만 높았을 뿐 생각을 나누지 않았다. 어쩌면 그저하지 못함에 보복당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 52쪽

공권력이란 무엇일까. 법률용어사전을 찾아봤다. `국가나 공공단체가 국민에 대하여 우월한 주체로서 명령하거나 강제하는 권력.` 국가기관을 위에, 국민을 아래에 두는 개념이다. 옛날 기사들을 검색해보면 공권력이 부쩍 많이 쓰인 때는 80년대였다. - 73, 74쪽

공권력이란 말은 착시 현상을 일으킨다. 법 원칙과 혼용되면서 어떤 방식이든 문제가 없는 듯한 착각에 빠뜨린다. 그 결과 강경 대응으로 치닫기 일쑤다. - 74쪽

나는 공권력이라는 말이 되도록 쓰이지 않았으면 한다. 국민이 정부에 위임한 건 권력이 아니다. 권한이다. 권한(權限)은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공(公)이란 수식어도 부적절하다. 공이 무조건 사(私) 위에 있다는 발상은 권위주의 체제에서나 가능하다. 또 하나 잊지 말아야 할 건 이른바 공권력이 과거만큼 `유능`하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요즘 판사 검사 경찰은 87년 민주화의 세례를 받은 세대들이다. 그들의 손발은 영화 <변호인>의 시대처럼 착착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진짜 공권력이란 것이 있다면, 아니 있어야 한다면 다른 노력을 다한 다음에, 신중하게 등장하길 바란다. 먼저 투입돼야 할 것은 소통의 정신이다. 정부의 소통은 듣고 또 듣는 것이다. 작고 잊혀진 이들의 이름을 불러주고 그 존재를 증명해주는 것이다. - 75, 76쪽

대권은 과연 용어만의 문제일까. 정치권과 언론계, 나아가 우리 사회의 의식 수준을 반영하는 건 아닐까. 대통령이 되면 법의 울타리를 넘어 어마어마한 권력을 휘두를 수 있다고들 여긴다. 수퍼울트라 갑(甲)의 이미지다. 그 뒤를 검찰 권력, 국세청 권력, 공정위 권력이 따른다. 신문사 방송사도 언론 권력으로 행사해왔던 게 사실이다.
권력(權力)이란 말이 온당한지부터 보자. 권력은 개인이나 집단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힘이다. 이 단어는 헌법 1조에 단 한 번 등장한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반면에 권리가 미치는 범위 내지 한계를 뜻하는 권한(權限)은 헌법에 열한 번 되풀이된다. 권한 행사, 대통령 권한 대행, 정부의 권한, 행정 각부 간의 권한...
총구에선 권력이 나오지만 투표함에선 권한이 나올 뿐이다. 민주공화국이라면 대통령이라도 공식적으론 권한이라고 해야 맞다. 그럼에도 우리는 권력을 인격화하고 우상으로 받들며 그 앞에 대(大)라는 수식어까지 붙여주고 있다. - 177, 178쪽

대권의 마력(魔力)에 중독된 한국의 대통령들은 권좌에 안자 자기 뜻대로 세상을 바꾸려다 실패를 반복했다. `실세` 완장을 찬 측근들만 단물을 빨았다. 미국 대통령을 보라. 의회에서 법안 한 건을 통과시키기 위해, 의원들의 협력을 끌어내기 위해 전화기를 손에서 놓지 않는다. 그 옆을 지키는 건 측근이 아니라 참모다. 그래서 권력엔 부패가 따르지만 권한엔 책임이 따른다. 이것이 권력과 권한의 차이다. - 178, 179쪽

야당 의원으로 사는 게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 여당 의원을 하면 청와대나 정부를 비판하기 어렵다. 속 시원하게 말 한마디 하기도 쉽지 않다. 검찰 수사가 들어오면 꼼짝없이 조사를 받아야 한다. 그러느니 차라리 야당 의원을 하면 자유롭게 발언도 할 수 있ㄷ고, 비판도 할 수 있다. 검찰 수사에 대해선 `정치 탄압`이라고 반발하면 된다.
어젠다(Agenda)설정도 힘들지 않다. 새로운 정책을 내놓기보다 정부여당 정책을 비판하고, 실책을 물고 늘어지는 게 얼마나 편한가. 이런 상황에서 총선에서 이겨 과반을 확보하든가 대선에서 승리해 집권을 하게 된다면 부담감만 커지는 느낌이겠지. 그들 스스로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 187, 188쪽

사실 비주류 의식은 나쁜 게 아니다. 소외받는 약자, 소수자들의 목소리를 대신 외치는 것이다. 아랫목에 안주하는 주류와 달리 찬바람 부는 광야에서 변혁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비주류 의식이 매너리즘에 빠지면 책임지지 않는 습관이 생기고, 하나의 목적을 위해 뭉치기보다 작은 차이를 이유로 나뉘고, 전략을 놓고 싸우기보다 전술을 두고 다투게 된다. - 188쪽

간통죄 위헌이 진정 역사적 사건이라면 시대를 꿰뚫는 재판관들의 고민과 통찰력을 보여줘야 했다. 그것이 우리의 법치주의를 풍요롭게 하고 성숙시키는 길 아닐까. 철학이 빠진 결정문은 간통죄 위헌에 콘돔 제조사 주가가 급등했다는 소식만큼이나 씁쓸할 뿐이다. - 252쪽

진실은 저마다 다를 수 있다. 한 사회가 진실을 끝까지 가리지 않고 `편한 진실`을 추구하는 것은 정의에 반한다. 판사는 여론에 휘둘려서도, 재판 원칙 뒤에 숨어서도 안 된다. 끊임없이 불편해야 하고, 그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그것이 헌법이 판사의 신분을 보장해주는 이유다. - 257쪽

원세훈 판결만이 아니다. 쌍용차 정리해고, 전교조 법외노조, 과거사 국가배상... 사회적 이슈가 됐던 주요 사건 결론이 대법원에서 뒤집히고 있다. 20년차 이상인 고등법원 부장판사들 판단이 틀렸다는 얘기인데, 그러면 어떤 부분들이 문제인지 명쾌하게 지적하고 설득하려는 자세를 보이는 게 하급심에 대한 예의다. 최고법원의 존재감이 아무리 크다 해도 "그런 줄 알고 따르라"며 `판사동일체`를 요구하는 식이어선 곤란하다.
"우리가 정의를 실현하는 것만큼이나 사회구성원들이 정의가 실현되고 있다고 믿을 수 있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23일(2015년 7월) `성공보수 무효` 판결문에 대법관들이 덧붙인 말이다. 대법원에 묻는다. 정녕 `정의가 실현되고 있다고 믿을 수 있게` 재판을 하고 있는가. 보이는 것은 보이는 대로 보아야 하는 것 아닌가. - 268, 269쪽

제가 생각하는 민주적 기본질서의 또 다른 이름은 `설득`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상대편을 설득하려는 노력입니다. 앞으로 여러분의 결정문에 담길 말들이 국민들을 설득하고 정당이 왜 존재하는지 일깨워주는 민주주의의 시금석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 277쪽

강력범죄만큼은 보수 진보의 진영 논리와 분리해야 한다. 권위주의 시대 인권 탄압에 대한 반작용으로 범죄자 인권이 과잉 보호돼온 게 사실이다. 이젠 피해자 인권과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 등교하던 여자아이가 시신으로 돌아오고, 주부가 집 안에서 무참하게 살해되는 상황을 계속 방치할 수 없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들 한다. 어디까지나 죄는 죄로 미워해야 한다. 그러려면 소외된 이들을 뒷받침하는 노력 못지않게 범죄에 대한 엄정한 법 집행이 병행돼야 한다. 이 사회의 악인들에게 죗값은 반드시 치르게 하겠다는 신호를 보낼 때다. 사형수가 자전 소설을 출간하겠다고 하는 나라는 정상이 아니다. 누가 그런 나라에 살고 싶겠는가. - 310쪽

정의와 취향은 반대쪽에 있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진정 정의로운 사회는 다른 이의 취향을 철저히 존중해주는 곳일 것이다. `감자의 친구들은 연애를 하지`처럼 자신의 취향을 마음껏 드러낼 수 있는 공간과 <달콤한 악마가 내 안으로 들어왔다> 같은 도발적인 책이 많이 나올 때 정의가 강물처럼 흐를 수 있다는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청교도적인 사회처럼 위험한 사회는 없다. - 345쪽

새로운 방향에서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자신을 오롯이 그 앞에 세우고, 원점에서부터 고민을 다시 시작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어제의 나, 어제의 우리를 버릴 수 있다는 결기로 당면 과제를 직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정치인의 배신은 배신 그 자체를 문제 삼을 게 아니라 무엇을 위한 배신인지, 무엇을 향한 배신인지를 따져야 한다.
대통령이 "배신의 정치를 심판해야 한다"고 말하자 여당 원내대표가 "진심으로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였다. 나는 두 살마이 전화기로 주고받아야 할 말을 왜 TV 카메라 앞에서 마이크 잡고 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아직도 대통령의 감정(배신감), 원내대표의 감정(미안함)이 국정의 최대 이슈가 되는 시대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 - 370, 371쪽

만델라와 ANC가 승리했던 원인은 `원칙이 우릴 삼킬지라도 그 원칙을 지킨다`는 정신의 힘에 있었던 것 아닐까요. 삭스는 재판관 취임 후 과거 폭탄 테러에 연루됐던 퇴역 군인에게 악수를 청합니다. 그가 진상 규명에 협조했기 때문입니다. 민주화와 정의를 향한 여정은 오른팔을 없앤 자에게 왼손을 내미는 과정인지도 모릅니다. 오직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서. - 382, 383쪽

`정의가 이기는 게 아니다. 이기는 게 정의다.` 이 지랄 같은 상식을 깨는 건 슈퍼 히어로 한두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저마다 서 있는 자리에서 한 걸음씩 나아가면서 같은 세상을 꿈꾸는 이들의 어깨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우린 결국 서로에게 정의를 부탁해야 하는 존재다. - 4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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