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제노사이드
다카노 가즈아키 / 황금가지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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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으로 열등한 남자일수록 성적인 면에서 우위에 서려 하는 것이 확연하게 드러났다. - 242쪽

루벤스가 보기에 사회에서 볼 수 있는 모든 경쟁의 원동력은 단 두 가지 욕망으로 환원되는 듯 했다. 식욕과 성욕. 인간은 타인보다 많이 먹거나 혹은 저장하고, 보다 매력적인 이성을 획득하기 위해 타인을 깎아 내리고 발로 차서 떨어뜨리려 했다. 짐승의 본성을 유지한 인간일수록 공갈이나 협박 같은 수단을 쓰며 ‘조직’이란 무리의 보스로 올라가려 안달했다. 자본주의가 보장하는 자유 경쟁이야말로 이러한 폭력성을 경제 활동의 에너지로 전환하는 교묘한 시스템이었다. 법으로 규제하고 복지국가를 지향하지 않는 한, 자본주의가 내포하는 짐승의 욕망을 억누르기는 불가능했다. 어찌되었건 인간이라는 동물은 원시적인 욕구를 지성으로 장식해서 은폐하고 자기 정당화를 꾀하려는 거짓으로 가득한 존재였다. - 243쪽

"남은 90퍼센트의 병사를 살인자로 만드는 것도 사실 간단하다는 사실이 알려졌어. 일단은 권위자에 대한 복종이나 소속 집단에 대한 동일화 등으로 개개인의 주체성을 빼앗았지. 그리고 또 하나, 죽일 상대의 거리를 멀리 두는 것이 중요해."
"거리?"
"응, 두 가지의 개념으로 이루어져 있어. 심리적 거리와 물리적 거리." - 245쪽

전쟁 당사자 중에서 가장 잔인한 의사(意思)를 가진 인간, 즉 전쟁 개시를 결정하는 최고 권력자만큼 적으로부터 심리적, 물리적 거리가 멀리 떨어진 위치에 있는 사람은 없다는 말이었다. 백악관에서 만찬회에 출석하고 있는 대통령은 적이 흩뿌린 피를 뒤집어쓰지도, 육체를 파괴당한 전우가 내뱉는 단발마의 외침을 듣지도 않는다. 살인에 뒤따르는 정신적 부담을 거의 받지 않는 환경에 있기에 날 때부터 갖고 있는 잔학성을 더 마음껏 풀어놓을 수 있는 것이다. 군대 조직이 이러한 형태로 진화하고 과학 기술 덕에 병기가 개선되고 있는 이상, 근접전에서 살육이 격렬해지는 것이 당연했지만 전쟁의 의사결정자는 아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대규모 공중 폭격을 명령할 수 있는 셈이다. - 247쪽

그가 특히 주시한 점은 국가나 군산복합체 같은 추상적 존재가 아니라 현실에 존재하는 인간이었다. 국가의 인격이란 의사 결정권자의 인격, 바로 그 자체였다. - 250쪽

반대 의견의 문제점은 꼬치꼬치 따지면서 배제하고, 찬성하는 사람들만 주위에 가득하게 채워 가는 것. 민주적인 결정으로 보이는 독재였다. - 267쪽

군산 복합체의 중심에 있다 보면 지배 논리란 것이 굉장히 단순하다는 사실에 놀라고는 했다. ‘공포’였다. 전쟁으로 돈을 벌고 싶은 정책 결정자는 다른 나라의 위협을 과장하여 국민에게 크게 퍼뜨리기만 하면 됐다. 판단의 근거를 국가 기밀이란 벽으로 감춰 버리면 매스컴도 확인 없이 이 위협론에 올라탔다. - 450쪽

번즈 정권 하에서 법률가들의 일이란 대통령의 뜻에 맞도록 법을 왜곡하여 해석해 주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전군 총사령관인 대통령이 직무 때문에 법률을 무시할 수도 있다는 독재 정치의 완성이었다. - 458쪽

인위적인 도태. 그중에서는 진화한 개체도 포함되어 있지 않았을까? 자신과는 다른 이질적인 존재를 없애려는 인간의 습성이 진화의 싹을 솎아내고 있었다는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었다. - 459쪽

"모든 생물 중에서 인간만 같은 종끼리 제노사이드를 행하는 유일한 동물이기 때문이네. 이것이 사람이라는 생물의 정의야." - 461쪽

"역사학만은 배우지 말게. 지배욕에 사로잡힌 멍청한 인간이 저지른 살육을 영웅담으로 바꿔서 미화하니까 말이야." - 469쪽

네오나치나 백인 지상주의자 등 자신의 폭력 행동을 정치사상으로 탈바꿈하는 가짜 우익에는 공통적인 심성이 있었다. 비뚤어진 자존심의 발로였다. 그들은 자란 환경 등의 문제로 자신을 직접 긍정하는 일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소속된 집단을 무턱대고 긍정하며 그 집단의 구성원인 스스로가 훌륭하다는 논법을 취했다. 하지만 실제로 그들의 관심은 자기 자신에게밖에 향하지 않는 것이 명백했다. 그 증거로 가짜 우익의 공격은 자신들의 주장에 이의를 다는 동포들, 심지어 그들의 의견에 무턱대고 긍정했던 구성원에게도 향할 수 있다. - 491쪽

"한 가지만 말해 보자면 실패 없는 인생 따위는 있을 수가 없으며, 그 실패를 살리는 것도, 죽이는 것도 하기 나름이라는 말이다. 인간은 실패한 만큼 강해진다. 그것만은 기억해 두렴." - 644, 6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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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처럼 생각하기
로버트 베이트먼 지음, 김연수 옮김 / 자유로운상상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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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샬 맥루한은 누군가 ‘진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면 그 사람의 머리통은 19세기적이라는 걸 알아야한다고 말한 바 있다. 19세기적인 머리통이 너무나 많아서 20세기를 살아온 우리에게는 너무나 많은 문제가 생겨났다. 위대한 생물학자이자 생태학자인 E.O. 윌슨은 지난 세기는 멋진 기술력의 세기가 아니라 다양성이 파괴된 세기로 기억될 것이라고 말했다. 인류는 ‘진보’라는 말에 새로운 정의를 내려야만 한다. 더 우아하고 세련된 개념으로, 자연 유산이든 문화 유산이든 우리 유산의 가치를 인정하는 개념으로. 우리는 다가올 세대의 건강과 삶의 질에 대해 더 사려 깊게 생각해야할 필요가 있다. - 서문

내 삶과 예술을 살찌운 것은 자연의 정교함에 감탄하는 이런 능력이었다. 내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싶은 즐거움도 바로 이것이라 내 아이들도 평생에 걸쳐 관찰자가 되기를, 그리하여 자신들이 물려받은 자연의 유산을 맘껏 즐길 수 있기를 바란다. - 24쪽

미국의 위대한 미생물학자인 르네 듀보는 미래의 인류에게 닥칠 가장 중요한 문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고는 "의미 있는 노동의 상실"이라고 대답했다. 1973년 영국의 생태학자이자 경제학자인 E. F. 슈마허는 기념비적인 저서 <작은 것이 아름답다>에서 다음과 같은 비슷한 얘기를 했다. "가족을 제외하자면 일과, 일을 통해 정립되는 관계망이 사회의 진정한 토대를 이룬다. 이 토대가 건전하지 않은데 어떻게 사회가 건전하겠는가?"- 27쪽

우리가 다른 종(種)에 대한 존중을 잃어버리게 된 까닭에는 그들의 이름조차 모른다는 사실도 한몫한다. 이름은 중요하다. 선생이라면 학생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것이다. 열대 지역에서 사냥과 채집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수천 종에 달하는 동식물을 구분할 수 있지만, 평균적인 북미 지역 사람들은 고작 열 개 남짓 기억할 뿐이다. 하지만 그런 북미 지역 사람들도 상표라면 천 가지도 구분할 수 있다. - 48쪽

우리를 지켜주는 자연유산 속에서 모든 것을 적절한 규모로 운영하게 되면 대단히 중요한 부수효과를 얻을 수 있다. 개발 도상국가들은 외부의 원조로는 결코 만들어낼 수 없는 자주적인 경제 체제에 도달할 수 있다. 슈마허도 지적했다시피 선진국들은 이들 국가의 경제에 지나치게 개입해 수많은 달러를 뿌리고 큰 것이 아름답다는 식의 기술력을 강요하는데, 이는 종국에 개발 도상국가들의 주체적인 삶의 방식을 파괴하고 국민들을 전에 없이 절망적이고 비참한 상황 속으로 밀어 넣는다. 전통적인 기술력과 지식을 없애버리고 그들의 자긍심을 깎아내리는 낯선 신기술이 자리잡는다. - 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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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리를 상실한 노동자 비정규직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108
장귀연 지음 / 책세상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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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한편 케인스주의는 국가 경제 정책의 측면을 가리킨다. "모든 것을 자유로운 시장에 맡기고 내버려두라!"고 외쳤던 자유주의는 1920~1930년대 자본주의가 발전된 미국과 유럽을 휩쓴 대공황으로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내버려두었더니 대공황이란 사태가 발생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 후 자본주의의 경제 정책은 국가의 적극적인 경제 개입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전환했다. 케인스주의는 이러한 국가 개입을 추구하는데, 수요 측면에 중점을 두는 것이 핵심이다. 즉 경제가 성장하려면 상품 수요가 많아야 한다는 것이다. 상품이 많이 팔려야 기업이 투자를 더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품은 구가 구입하는가? 현대 사회에서 인구의 대다수는 노동자, 그것도 임금 노동자다. 따라서 노동자들이 잘 살아야 수요가 늘어난다. - 58쪽

이처럼 케인스주의를 따르면 임금 노동자의 고용과 복지에 신경을 쓰게 된다. 기업에게 고용 안정과 고임금을 종요하는 정책을 쓸 수도 있고, 국가 부문을 확대해 정부가 직접 노동자를 고용하기도 한다. 일단 노동자가 안정적으로 고용되어 수입을 확보해야 수요가 늘어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기업도 잘 되고 경제가 활성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흔히 완전고용을 케인스주의 정책의 하나로 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것이 결함된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대기업이 많은 노동자를 고용하여 대량 생산을 한다. 노동자는 노동권을 보장받고 안정적인 고용과 높은 임금을 얻어낸다. 이들은 여러 상품을 소비할 경제적 여유가 있으므로 수요가 늘어난다. 상품이 잘 팔리므로 기업은 투자를 더 많이 한다. 고용은 더 늘어나고 경제는 성장한다. 국가의 경제 정책은 이러한 호순환이 잘 돌아가도록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 59쪽

이 과정에서 노동자는 노동조합이나 법 제정을 통해서 고용주에 대항하여 노동자가 보호받고 이익을 도모할 수 있는 권리를 스스로 추구했다. 포드주의적 기업 전략이나 케인스주의적 경제 정책은 노동권이 인정받기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기도 했다. 케인스주의에 기운 정부가 노동자를 보호하는 법을 제정했기 때문이기는 하지만, 고용주도 노동자가 잘 사는 것이 궁극적으로 모두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인정하고 노동권을 받아들였다. - 60쪽

여기서 말하는 세계화란 경제의 세계화, 자본의 세계화를 의미한다. 즉 상품 시장과 자본 시장이 세계적으로 통합되고 기업이 국경을 넘어서 세계적 차원에서 활동하는 현상 말이다. 사실 이것은 포드주의와 케인스주의의 성공에 뒤따른 결과였다. 포드주의적 방식으로 성공한 대기업은 더 많은 이윤과 자본을 축적하고, 세계를 무대 삼아 활동하려는 욕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자본의 성공은 국내 수요를 촉진시켰던 케인스주의적 국가 개입에 힘입은 것이기도 하지만, 거대해진 자본에게 국가 경계는 이제 너무 작아 맞지 않는 옷이 되어버렸다. 역설적이게도 케인스주의의 성공이 케인스주의를 붕괴시킨 셈이다. - 61쪽

궁극적으로 노동자가 잘 살아야 기업도 잘 되고 국가 경제도 건실해진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세계적 경쟁에 노출된 기업은 그런 장기적이고 전체적인 문제에 더 이상 신경 쓰지 않는다. 지금 당장 내 기업이 살아남아야 하고 더 많은 이윤을 남겨야 한다. 사실 이것이 원래 자본의 속성이기도 하다. 게다가 이러한 자본의 속성을 제어했던 정부가 힘을 잃었다. 케인스주의 정책은 효과가 없어졌고 ‘기업 하기 좋은 나라’를 보장해주지 않으면 떠나버리겠다는 협박 앞에서 자본의 비위를 맞추기에 급급하다. 경제 정책의 기조가 신자유주의로 변하고 기업의 이윤이 가장 우선적인 고려 대상이 되면서, 노동자의 삶은 뒷전에 내팽개쳐지고 노동권을 잠식하는 비정규직이 만연하게 된 것이다. - 62, 63쪽

구조 조정의 주요한 방법은 보통 다운사이징이나 슬림화라고 부르는 것으로, 고용 인원을 줄이고 수익성이 덜한 부분을 퇴출하고 조직 구조를 통폐합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물론 많은 노동자들이 해고된다. 외환위기 직후 1998년 노동법이 개정되어 경영상의 이유로 정리 해고가 가능해짐에 따라 해고를 통한 구조 조정은 더욱 쉬워졌다.
그렇다고 이것이 자본 자체의 위축을 뜻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사실 경쟁이 격화되면서 유리한 것은 대자본이다. 이들은 다운사이징으로 몸을 가볍게 해서 새 이윤을 향해 쉽게 뻗어 나갈 수 있도록 조직을 ‘유연하게’ 변화시키려 한다. 상황에 따라 쉽게 몸을 움츠리거나 옮겨 갈 수 있고 한쪽을 축소하면서 다른 쪽을 확장할 수 있는 유연성을 갖추려는 것이다. - 70, 71쪽

공공 서비스에 관한 한 민영화는 신자유주의자들이 정당화하는 것처럼 품질 향상과 가격 인하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럴 리 없다. 낮은 가격으로도 공급을 유지할 수 있는 정부와 달리 기업이야말로 이윤을 내지 않으면 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은 정부’라는 자유주의의 부활에 따라 민영화는 계속 추진된다. - 91쪽

사실 기업의 전체 업무를 조정하는 몇몇 핵심 관리자를 제외하면 모든 업무를 비정규직화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런데도 일정 기간 후 정규직화라는 방식을 비정규직 보호 해법이라고 내놓은 것은 정책입안자들이 변화하는 노동 환경에 대해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계속 노동자를 사용할 거라면 그 기업에서 근속하는 사람이 낫다고 생각할 것이라는 내부 노동 시장의 관념을 여전히 갖고 있다. 그러나 기술 및 정보의 발전과 고등 교육의 대중화 등으로 인해 채용에 드는 비용이 크게 줄어들고 기업 특수적 숙련도 의미가 없어지면서, 기업은 정규직 고용의 책임을 지기보다는 내부 노동 시장을 포기하는 쪽을 선택하는 추세다. 이러한 상황에서 비정규직 사용 기간을 규제하는 것은 정규직화를 유도하기는커녕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더 불안하게 만들기 십상이다. - 1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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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수용소에서 (양장) - 빅터 프랭클의
빅터 프랭클 지음, 이시형 옮김 / 청아출판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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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을 목표로 삼지 말라. 성공을 목표로 삼고, 그것을 표적으로 하면 할수록 그것으로부터 더욱 더 멀어질 뿐이다. 성공은 행복과 마찬가지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찾아오는 것이다. 행복은 반드시 찾아오게 되어 있으며, 성공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에 무관심함으로써 저절로 찾아오도록 해야 한다. 나는 여러분이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이 원하는 대로 확실하게 행동할 것을 권한다. 그러면 언젠가는 - 얘기하건대 언젠가는! - 정말로 성공이 찾아온 것을 보게 될 날이 올 것이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성공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 10쪽

만약 삶에 어떤 목적이 있다면 시련과 죽음에도 반드시 목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 목적이 무엇인지 말해 줄 수는 없다. 각자가 스스로 알아서 이것을 찾아야 하며, 그 해답이 요구하는 책임도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게 해서 만약 그것을 찾아낸다면 그 사람은 어떤 모욕적인 상황에서도 계속 성숙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프랭클 박사는 다음과 같은 니체의 말을 인용한다.
"‘왜(why)’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그 ‘어떤(how)` 상황도 견뎌낼 수 있다." - 19쪽

나는 동료가 괴로워하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깼던 어느 날 밤의 일을 결코 잊을 수 없다. 잠을 자면서 몸부림을 치는 것이 악몽을 꾸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평소에도 악몽이나 황홀경에 시달리는 사람을 딱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나는 그 불쌍한 사람을 깨우려고 했다. 그러다 갑자기 내가 무슨 짓을 하려고 했지 놀라면서 그를 흔들어 깨우려던 손을 거두어들였다. 그 순간 나는 꿈을 꾸지 않는다는 것은, 비록 나쁜 꿈일지라도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수용소의 현실만큼이나 끔찍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런 끔찍한 곳으로 그를 다시 불러들이려고 했다니… - 65, 66쪽

한번 유추를 해보자. 인간의 고통은 기체의 이동과 비슷한 면이 있다. 일정한 양의 기체를 빈 방에 들여보내면 그 방이 아무리 큰 방이라도 기체가 아주 고르게 방 전체를 완전히 채울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고통도 그 고통이 크든 작든 상관없이 인간의 영혼과 의식을 완전하게 채운다. 따라서 고통의 ‘크기’는 완전히 상대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 67쪽

수용소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결정을 내리는 일과, 어떤 일이든지 앞장서서 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이것은 운명이 자기를 지배한다는 생각을 강하게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운명에 영향을 주는 일을 피했고, 대신 운명이 자기에게 정해진 길을 가도록 했다. 게다가 심각한 무감각 현상이 팽배해 있었다. 무감각은 수감자들의 감정에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 107쪽

근본적으로는 어떤 사람이라도, 심지어는 그렇게 척박한 환경에 있는 사람도 자기 자신이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이다. 강제수용소에서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내가 세상에서 한 가지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 고통이 가치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수용소에는 남을 위해 희생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과 친해진 후, 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이 말을 자주 머리 속에 떠올렸다. 수용소에서 그들이 했던 행동, 그들이 겪었던 시련과 죽음은 하나의 사실, 즉 마지막 남은 내면의 자유는 결코 빼앗을 수 없다는 사실을 증언해 주고 있다. 그들의 시련은 가치 있는 것이었고, 그들이 고통을 참고 견뎌낸 것은 순수한 내적 성취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삶을 의미 있고 목적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빼앗기지 않는 영혼의 자유이다. - 121, 122쪽

평범하고 의욕 없는 사람들에게는 비스마르크의 이 말을 들려 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인생이란 치과의사 앞에 있는 것과 같다. 그 앞에 앉을 때마다 최악의 통증이 곧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다 보면 어느새 통증이 끝나 있는 것이다."
강제수용소에 있는 사람들은 무언가를 성취할 수 있는 인생의 진정한 기회는 자기들에게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 그곳에도 기휘가 있고, 도전이 있었다. 삶의 지침을 돌려 놓았던 그런 경험의 승리를 정신적인 승리로 만들 수도 있었고, 그와는 반대로 그런 도전을 무시하고, 다른 대부분의 수감자들처럼 무의미하게 보낼 수도 있었다. - 131쪽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가 아니라 삶이 우리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을 중단하고, 대신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 매일 매시간 마다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은 말이나 명상이 아니라 올바른 행동과 올바른 태도에서 찾아야 했다. 인생이란 궁극적으로 이런 질문에 대한 올바른 해답을 찾고, 개개인 앞에 놓여진 과제를 수행해 나가기 위한 책임을 떠맡는 것을 의미한다. - 138쪽

이런 과제들, 즉 삶의 의미는 사람마다 다르고, 때에 따라 다르다. 따라서 일반적인 방식으로 삶의 의미를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은 포괄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삶’이란 막연한 것이 아니라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삶이 우리에게 던져준 과제가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바로 이것이 개개인마다 다른 인간의 운명을 결정한다. 어떤 사람도, 어떤 운명도, 그와는 다른 사람, 그와는 다른 운명과 비교할 수 없다. 똑같은 상황이 되풀이 되는 경우는 하나도 없으며, 각각의 상황은 서로 다른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때로는 그가 처해 있는 상황이 그에게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행동에 들어갈 것을 요구할 수도 있다. 반면에 어떤 때에는 더 생각할 시간을 갖고,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에게 이롭다고 생각하게 할 수도 있다. 때로는 주어진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가야할 때도 있다. 각각의 상황들은 각각 그 나름대로의 독자성을 갖는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 비롯된 어떤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언제나 가까운 곳에 단 하나만 있는 법이다. - 138, 139쪽

만약 어떤 사람이 시련을 겪는 것이 자기 운명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는 그 시련을 자신의 과제, 다른 것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유일한 과제로 받아들여야 한다. 시련을 당하는 중에도 자신이 이 세상에서 유일한 단 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감사해야 한다. 어느 누구도 그를 시련으로부터 구해낼 수 없고, 대신 고통을 짊어질 수도 없다. 그가 자신의 짐을 짊어지는 방식을 결정하는 것은 그에게만 주어진 독자적인 기회이다. - 139쪽

각각의 개인을 구별하고,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는 이런 독자성과 유일성은 인간에 대한 사랑처럼 창조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일단 깨닫게 되면, 생존에 대한 책임과 그것을 계속 지켜야 한다는 책임이 아주 중요한 의미로 부각된다. 사랑으로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아이나, 혹은 아직 완성하지 못한 일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게 된 사람은 자기 삶을 던져버리지 못할 것이다. 그는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알고 있고, 그래서 그 ‘어떤’ 어려움도 견뎌낼 수 있다. - 142쪽

인간의 실존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추상적인 삶의 의미를 추구해서는 안 된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구체적인 과제를 수행할 특정한 일과 사명이 있다. 이 점에 있어서 그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그의 삶 역시 반복될 수 없다. 따라서 각 개인에게 부과된 임무는 거기에 부가되어 찾아오는 특정한 기회만큼이나 유일한 것이다.
삶에서 마주치게 되는 각각의 상황이 한 인간에게는 도전이며, 그것이 그가 해결해야 할 문제를 제시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이 바뀔 수도 있다. 궁극적으로 인간은 자기 삶의 의미가 무엇이냐를 물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는 사람이 바로 ‘자기’라는 것을 인식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인간은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으며, 그 자신의 삶에 대해 ‘책임을 짊으로써’만 삶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는 말이다. 오로지 책임감을 갖는 것을 통해서만 삶에 응답할 수 있다. 따라서 로고테라피에서는 책임감을 인간존재의 본질로 보고 있다. - 181쪽

로고테라피에서 이렇게 책임감을 강조한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로고테라피의 행동강령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인생을 두 번째로 살고 있는 것처럼 살아라. 그리고 지금 당신이 막 하려고 하는 행동이 첫 번째 인생에서 이미 그릇되게 했던 바로 그 행동이라고 생각하라."
이 말처럼 인간의 책임감을 자극하기에 좋은 말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 말을 듣는 사람은 첫째 현재가 지나간 과거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고, 둘째, 그 지나간 과거가 아직도 변경되고 수정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이런 교훈은 인간으로 하여금 삶의 ‘유한성’은 물론 그가 자신과 자신의 삶으로부터 성취해낸 성과의 ‘궁극성’과도 대면하게 만든다. - 181, 182쪽

소위 자아실현이라는 목표는 실현시킬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자아실현을 갈구하면 할수록 더욱 더 그 목표에 이르지 못하게 된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자아실현은 자아초월의 부수적인 결과로서만 얻어진다는 말이다.
이제 우리는 삶의 의미란 끊임없이 변하지만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로고테라피에 의하면 우리는 삶의 의미를 세 가지 방식으로 찾을 수 있다. 1) 무엇인가를 창조하거나 어떤 일을 함으로써 2) 어떤 일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써 그리고 3) 피할 수 없는 시련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삶의 의미에 다가갈 수 있다. - 183, 184쪽

인간의 존재가 본질적으로 일회적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는 로고테라피는 염세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인 것이다. 이것을 비유를 들어 설명해 보자. 염세주의자는 매일같이 벽에 걸린 달력을 찢어내면서 날이 갈수록 그것이 얇아지는 것을 두려움과 슬픔으로 바라보는 사람과 비슷하다. 반면에 삶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사람은 떼어낸 달력의 뒷장에다 중요한 일과를 적어 놓은 다음 그것을 순서대로 깔끔하게 차곡차곡 쌓아 놓는 사람과 같다. 그는 거기에 적혀 있는 그 풍부한 내용들, 그 동안 충실하게 살아온 삶의 기록들을 자부심을 가지고 즐겁게 반추해 볼 수 있다. - 198쪽

자신이 늙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것이 그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될까? 젊은이들을 보면서 부러워하거나 잃어버린 자신의 청춘에 대해 향수를 가질 이유가 있을까? 무엇 때문에 그가 젊은이들을 부러워하겠는가? 그 젊은이에게 놓여 있는 잠재 가능성 때문에? 아니면 그가 가지고 있는 미래 때문에? "천만의 말씀" 그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가능성 대신에 나는 내 과거 속에 어떤 실체를 갖고 있어. 내가 했던 일, 내가 했던 사랑뿐만 아니라 내가 용감하게 견뎌냈던 시련이라는 실체까지도 말이야. 이 고통들은 내가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이지. 비록 남들이 부럽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지만 말이야." - 198, 199쪽

로고테라피에서 말하듯이 사람이 삶의 의미에 도달하는 데에는 세 가지 길이 있다. 첫째는 일을 하거나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을 통해서이다. 두 번째는 어떤 것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나는 것을 통해서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의미는 일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사랑을 통해서도 찾을 수 있다는 얘기다.
에디트 바이스코프 요엘슨은 이런 상황을 보면서 ‘무엇을 경험하는 것이 무엇을 성취하는 것만큼 가치 있는 것이라는 로고테라피 치료 상의 개념’이 정말로 치료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것이 내적인 경험의 세계를 희생시키면서 외적인 성취의 세계에만 지나치게 편중되는 것을 보완해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가장 중요한 것은 삶의 의미로 들어가는 세 번재 길이다. 자기 힘으로 바꿀 수 없는 운명에 처한, 절망적인 상황에 놓인 무력한 희생양도 그 자신을 뛰어넘고, 그 자신을 초월할 수 있다. 인간은 개인적인 비극을 승리로 바꾸어 놓을 수 있다. - 230, 231쪽

이 말이 곧 삶의 의미를 찾는 데 시련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일까? 물론 아니다. 2장에서도 얘기했지만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시련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그 시련에서 여전히 유용한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피할 수 있는 시련이라면 그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더 의미 있는 행동이다. 왜냐하면 불필요한 시련을 견디는 것은 영웅적인 행동이 아니라 자학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시련을 가져다 주는 상황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 하지만 그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수는 있다. - 2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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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을 보는 법 - 법치주의의 겉과 속
김욱 지음 / 개마고원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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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말을 바꾸면 마르크스주의는 인간의 역사를 신성한 정의를 찾아서 점점 더 정의를 향해 가깝게 (혹은 일거에) 걸어온 인간 정신의 험난한 도정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지배계급의 경제적 이해관계에 맞춰 그것을 강요하는 억압도구 혹은 포장하는 이데올로기로 생각한 것이다.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변하는 ‘정의의 역사’를 보면서 정의를 마르크스주의와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대안이 있을까? - 46쪽

켈젠은 살인자가 살인자로 되는 것은 법이 그를 살인자로 규정하기 때문이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우리는 법이 내린 규정을 벗어나기가 너무나 힘들다.
(...)
우리는, 극단적이긴 하지만, 법정이 판단한 진실은 모두 법정의 진실일 뿐 진정한 사실관계는 아무도 모른다는 의미에서 켈젠 주장의 근거를 발견할 수는 있다. - 80쪽

마르크스가 주장했듯이 "사람들이 한 개인을 그 자신이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판단하지 않는 것처럼" 자신이 갇혀 있는 내부의 시선으로 내부를 보는 것으로는 절대로 내부현실의 한계를 인식할 수 없다.
(...)
마르크스는 법을 정치, 이데올로기와 같은 ‘상부구조’로 은유했다. 도식적으로 말하자면 그 상부구조를 결정하는 것은 물질적 경제구조다. 법은 경제구조의 산물인 것이다. 그리고 그 법은 경제구조를 지배하는 ‘지배계급의 의지’가 결정적으로 반영된 것이다.
그러므로 마르크스가 보기에 자본주의 법은 중세를 무너뜨리고 자본주의 세상을 건설했던 자연법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신이 내린 인간의 순수한 ‘이성’이 발현된 관념의 산물도 아니고, 그렇다고 안정된 자본주의 질서를 지키려는 법실증주의자들이 몸을 사리면서 변명하는 것처럼 법 그 자체만을 순수하게 연구하더라도 충분히 그 뜻을 올바르게 해석․적용할 수 있는 진공상태의 중립적인 규범도 아닌 것이다. - 90, 91, 92쪽

마르크스는 공산사회가 오면 법이 ‘고사’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세상을 생각하면 법이 사라질 것이라는 주장을 곧이곧대로 믿기는 힘들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법의 고사’는 사회의 모든 규범이 사라질 것이라는 말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계급을 옭아매는 계급적 ‘강제규범’이 사라질 것이라는 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마르크스가 예언한 대로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공산사회가 실제로 온다면 굳이 사적 소유를 지키기 위한 법제도도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런 사회가 가능하다면 당연히 공산주의 공동체를 위한 모든 규범도 자발적으로 실천될 수 있을 것이다.
자발적으로 실천되는 순간, 기존의 공산주의 규범은 이미 마르크스가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던 그런 법이 아니다. 한마디로 마르크스의 실현되지 못한 예언은, 자본주의적 강제법은 사라지고 공산주의적 도덕규범이 역사를 대체할 것이라는 꿈같은 이상이었다. - 92쪽

법은 언제나 자신이 규정한 규범의 힘으로 세상이 완벽하게 그렇게 규제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탁상공론을 좋아하는 권력자일수록 법만 만들어놓으면 세상이 법대로 될 것으로 상상한다. 그들이 세상을 향해 "유토피아가 있으라!"는 법을 만들이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다.
그러나 막상 세상에 태어난 법규범은 아주 혹독하게 자신을 검증해 가야만 한다. 모든 법규범은 세상에 스스로 존재하는 별개의 힘과 맞서 그 ‘모순’을 이겨내는 힘이 있어야만 비로소 규범력을 가진 법이 된다. 그 힘이 없으면 동성동본금혼법처럼 주기적인 한시법으로 위반자를 인정해주는 굴욕을 겪다가 결국 법으로서 수명을 다하고 퇴출될 수밖에 없다. -214쪽

어쨌든 주목해야 할 문제는 이런 것이다. 위법이 전혀, 완벽하게 없다는 것은 사실상 법과 현실이 모순 없이 완전히 일치한다는 의미이고, 이는 규범적 의식작용을 통해 세상을 더욱 진보시키기 위한 노력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우리가 법을 개정하는 것은 위법을 예상하면서도 규범적으로 사회의 진보를 위해 적극적으로 무엇인가를 의도하는 경우이거나, 아니면 위법을 통해 현실의 변화를 인식하고 이에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경우다. 즉 적극적 의미든 소극적 의미든 위법은 법개정의 추동력이다. - 219, 220쪽

폭력에 대한 문화는 어떤 한 부분만을 따로 떼어 분석하기가 대단히 힘들다. 폭력에 대한 관념은 역사이면서 문화이고 문화이면서 또 법이 된다. 만약 경찰이 역사 속에서 민주화 운동을 탄압한 부끄러운 역사가 없었다면 민주경찰을 상대로 술주정 폭행을 하는 비정상적인 법문화도 생겨나기 힘들었을 것이다. 재벌을 쉽게 풀어주는 비상식적인 법문화가 없다면 강간범을 솜방망이로 처벌하는 관대한 법문화도 없을 것이다. 이런 현상들은 서로 무관해보이지만 결코 무관한 것이 아니다. - 245쪽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의 법이 하늘의 의지가 아니라 부르주아의 의지일 뿐이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그 법은 인간의 관념적 의지로 폐지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시대적 한계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담지하고 있는 물질적 생산관계의 반영이다.
그러므로 간통한 여인이 내적 성찰 속에서 자기반성을 하여 율법을 지키듯이 노동자가 내적 성찰에 의해 자본주의 법을 지키는 것이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법은 그 자체가 투쟁의 대상이다. 설령 법을 노동자에게 유리하게 만드는 입법투쟁이 성공한다하더라도 법 자체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을 꿈꿀 수는 없다. 법은 공산혁명 후에는 궁극적으로 말라 죽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 251쪽

어떻게 그런 ‘법의 고사’가 가능한가? 법이 국가의 강제력을 사용해 계급적 착취를 실현코자 하는 ‘지배계급의 의지’라면 그 계급적 지배관계가 사라지는 날, 법이 사라질 것은 자명한 일이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사회"가 법이라는 강제력을 통해 지켜야 할 이해관계가 무엇이겠는가? 공산사회에서 우리가 정의내린 그런 법의 존재는 무의미해질 수밖에 없다.
다만 다시 한 번 강조해야 할 사실은 마르크스가 말한 ‘법’은 부르주아적 착취를 위한 강제규범이라는 점이다. 모든 자발적 규범, 즉 레닌이 강조했듯 ‘가까운 사람들이 아닌 먼 사람들’을 사랑하는 공산주의적 도덕규범은 오히려 공산사회의 전제가 된다. - 2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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