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바꾸면 마르크스주의는 인간의 역사를 신성한 정의를 찾아서 점점 더 정의를 향해 가깝게 (혹은 일거에) 걸어온 인간 정신의 험난한 도정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지배계급의 경제적 이해관계에 맞춰 그것을 강요하는 억압도구 혹은 포장하는 이데올로기로 생각한 것이다.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변하는 ‘정의의 역사’를 보면서 정의를 마르크스주의와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대안이 있을까? - 46쪽
켈젠은 살인자가 살인자로 되는 것은 법이 그를 살인자로 규정하기 때문이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우리는 법이 내린 규정을 벗어나기가 너무나 힘들다. (...) 우리는, 극단적이긴 하지만, 법정이 판단한 진실은 모두 법정의 진실일 뿐 진정한 사실관계는 아무도 모른다는 의미에서 켈젠 주장의 근거를 발견할 수는 있다. - 80쪽
마르크스가 주장했듯이 "사람들이 한 개인을 그 자신이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판단하지 않는 것처럼" 자신이 갇혀 있는 내부의 시선으로 내부를 보는 것으로는 절대로 내부현실의 한계를 인식할 수 없다. (...) 마르크스는 법을 정치, 이데올로기와 같은 ‘상부구조’로 은유했다. 도식적으로 말하자면 그 상부구조를 결정하는 것은 물질적 경제구조다. 법은 경제구조의 산물인 것이다. 그리고 그 법은 경제구조를 지배하는 ‘지배계급의 의지’가 결정적으로 반영된 것이다. 그러므로 마르크스가 보기에 자본주의 법은 중세를 무너뜨리고 자본주의 세상을 건설했던 자연법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신이 내린 인간의 순수한 ‘이성’이 발현된 관념의 산물도 아니고, 그렇다고 안정된 자본주의 질서를 지키려는 법실증주의자들이 몸을 사리면서 변명하는 것처럼 법 그 자체만을 순수하게 연구하더라도 충분히 그 뜻을 올바르게 해석․적용할 수 있는 진공상태의 중립적인 규범도 아닌 것이다. - 90, 91, 92쪽
마르크스는 공산사회가 오면 법이 ‘고사’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세상을 생각하면 법이 사라질 것이라는 주장을 곧이곧대로 믿기는 힘들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법의 고사’는 사회의 모든 규범이 사라질 것이라는 말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계급을 옭아매는 계급적 ‘강제규범’이 사라질 것이라는 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마르크스가 예언한 대로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공산사회가 실제로 온다면 굳이 사적 소유를 지키기 위한 법제도도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런 사회가 가능하다면 당연히 공산주의 공동체를 위한 모든 규범도 자발적으로 실천될 수 있을 것이다. 자발적으로 실천되는 순간, 기존의 공산주의 규범은 이미 마르크스가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던 그런 법이 아니다. 한마디로 마르크스의 실현되지 못한 예언은, 자본주의적 강제법은 사라지고 공산주의적 도덕규범이 역사를 대체할 것이라는 꿈같은 이상이었다. - 92쪽
법은 언제나 자신이 규정한 규범의 힘으로 세상이 완벽하게 그렇게 규제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탁상공론을 좋아하는 권력자일수록 법만 만들어놓으면 세상이 법대로 될 것으로 상상한다. 그들이 세상을 향해 "유토피아가 있으라!"는 법을 만들이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다. 그러나 막상 세상에 태어난 법규범은 아주 혹독하게 자신을 검증해 가야만 한다. 모든 법규범은 세상에 스스로 존재하는 별개의 힘과 맞서 그 ‘모순’을 이겨내는 힘이 있어야만 비로소 규범력을 가진 법이 된다. 그 힘이 없으면 동성동본금혼법처럼 주기적인 한시법으로 위반자를 인정해주는 굴욕을 겪다가 결국 법으로서 수명을 다하고 퇴출될 수밖에 없다. -214쪽
어쨌든 주목해야 할 문제는 이런 것이다. 위법이 전혀, 완벽하게 없다는 것은 사실상 법과 현실이 모순 없이 완전히 일치한다는 의미이고, 이는 규범적 의식작용을 통해 세상을 더욱 진보시키기 위한 노력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우리가 법을 개정하는 것은 위법을 예상하면서도 규범적으로 사회의 진보를 위해 적극적으로 무엇인가를 의도하는 경우이거나, 아니면 위법을 통해 현실의 변화를 인식하고 이에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경우다. 즉 적극적 의미든 소극적 의미든 위법은 법개정의 추동력이다. - 219, 220쪽
폭력에 대한 문화는 어떤 한 부분만을 따로 떼어 분석하기가 대단히 힘들다. 폭력에 대한 관념은 역사이면서 문화이고 문화이면서 또 법이 된다. 만약 경찰이 역사 속에서 민주화 운동을 탄압한 부끄러운 역사가 없었다면 민주경찰을 상대로 술주정 폭행을 하는 비정상적인 법문화도 생겨나기 힘들었을 것이다. 재벌을 쉽게 풀어주는 비상식적인 법문화가 없다면 강간범을 솜방망이로 처벌하는 관대한 법문화도 없을 것이다. 이런 현상들은 서로 무관해보이지만 결코 무관한 것이 아니다. - 245쪽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의 법이 하늘의 의지가 아니라 부르주아의 의지일 뿐이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그 법은 인간의 관념적 의지로 폐지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시대적 한계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담지하고 있는 물질적 생산관계의 반영이다. 그러므로 간통한 여인이 내적 성찰 속에서 자기반성을 하여 율법을 지키듯이 노동자가 내적 성찰에 의해 자본주의 법을 지키는 것이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법은 그 자체가 투쟁의 대상이다. 설령 법을 노동자에게 유리하게 만드는 입법투쟁이 성공한다하더라도 법 자체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을 꿈꿀 수는 없다. 법은 공산혁명 후에는 궁극적으로 말라 죽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 251쪽
어떻게 그런 ‘법의 고사’가 가능한가? 법이 국가의 강제력을 사용해 계급적 착취를 실현코자 하는 ‘지배계급의 의지’라면 그 계급적 지배관계가 사라지는 날, 법이 사라질 것은 자명한 일이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사회"가 법이라는 강제력을 통해 지켜야 할 이해관계가 무엇이겠는가? 공산사회에서 우리가 정의내린 그런 법의 존재는 무의미해질 수밖에 없다. 다만 다시 한 번 강조해야 할 사실은 마르크스가 말한 ‘법’은 부르주아적 착취를 위한 강제규범이라는 점이다. 모든 자발적 규범, 즉 레닌이 강조했듯 ‘가까운 사람들이 아닌 먼 사람들’을 사랑하는 공산주의적 도덕규범은 오히려 공산사회의 전제가 된다. - 2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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