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YZ라는 회사에서 일하는 것이 저의 꿈이며, XYZ라는 회사는 제게 정말 큰 의미가 있습니다.` 내가 그 회사에서 일하고 싶은 마음만 있으면, 그 회사도 당연히 나를 원할 거라고 생각하는 치명적 오류다. 방금 전 스미스가 한 말 기억하는가? 취업을 원한다면 그 회사의 인간애가 아닌 자기애에 호소해야 한다. 그러니 XYZ라는 회사가 나를 채용하면 왜 좋은지 그 이유를 설득력 있게 제시해야 한다. 나아가 내가 XYZ라는 회사가 추구하는 목표에 어떤 도움이 될지도 설명하라. 그러면 XYZ가 추구하는 목표를 잘 알고 있다는 사실까지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 가장 큰 신경을 쓰는 대상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이 사실을 기억해두면, 상대로부터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낼 때 상당한 도움이 된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취업을 준비하는 학생들에게 열정적으로 조언하는 부분이다. 이렇듯 우리는 사는 동안 가끔은, 아니 매우 자주 자신이 우주의 중심인 것처럼 착각한다. - 40, 41쪽
공정한 관찰자란 인간의 상상 속 인물로, 스미스에 따르면 인간의 행동은 이 공정한 관찰자와의 상호작용에 의해 이루어진다. 공정한 관찰자는 우리와 대화를 나누며 우리의 행동이 도덕적인지 확인해주는 공정하고 객관적인 인물이다. 즉, 어떤 행동이 도덕적인지, 어떤 행동이 옳은지 판단해야 할 때 우리는 이 인물과 얘기를 나눈다. 공정한 관찰자는 양심과 아주 비슷해 보이지만, 고맙게도 스미스는 이 둘의 차이점을 친절히 알려준다. 양심은 각자의 가치관이나 종교 등의 원칙이 정한 기준에 어긋났을 때 자극을 받는다. 그런데 이런 기준은 상대적이고 개인적이기 때문에 스미스는 큰 가치를 두지 않았다. 이보다는 어깨 너머로 나를 쳐다보는 사람이 인간 대 인간으로 나를 심판한다고 상상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다. - 45쪽
하지만 우리가 단순히 동정심을 갖고 추상적으로나마 남들을 신경 쓰기 때문에 바른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니다. 이 의견에 대한 스미스의 주장은 이렇다.
우리가 신성한 미덕을 실행하는 것은 이웃과 인류를 사랑해서가 아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이나 인류애보다 더 큰 사랑, 더 강력한 애정 때문이다. 그것은 명예롭고 고상한 것에 대한 사랑, 존엄과 위엄에 대한 사랑, 그리고 탁월한 자신의 인격에 대한 사랑이다. - 47쪽
인간이 이기적인 이유, 나아가 잔인한 이유에 대한 설득력 있는 설명 중 하나는 이렇다. 일부 사람들이 공정한 관찰자를 상상하지 않거나, 상상할 마음조차 없거나, 아니면 사랑스러워지는 데 관심 자체가 없다는 것이다. 그럴듯한 얘기다. 그러나 애덤 스미스의 생각은 달랐다. 공정한 관찰자가 정한 기준, 혹은 주변 사람들의 기준에 왜 부응하지 못하는지, 그 이유에 대해 스미스는 다른 견해를 갖고 있었다. 바로 인간이 자기기만에 빠지기 쉽기 때문이다. 그에 의하면 우리는 "공정한 관찰자가 실은 그렇게 공정하지 않아."라며 스스로를 속인다. 결국 자기애에 취한 나머지 공정한 관찰자이자 `가슴속 그 사람`을 짓눌러버린다는 것이다.
인간은 맹렬하고도 부당하기 짝이 없는 이기적인 욕망에 압도당한 나머지, `가슴속 그 사람`, 즉 공정한 관찰자의 얘기를 제대로 듣지 못한다. 그리고 누가 봐도 옳지 않은 일들을 저지른다. - 91쪽
인간의 삶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지녔던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Richard Feynman)은 이렇게 말했다. "첫 번째 원칙은 자기 자신을 속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자기 자신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속이기 쉬운 사람이다." 나는 누구인가? 가끔 나는 나를 가장 속이기 쉬운 사람이 된다. 나 자신이 얼마나 쉽게 속는가는 얼마든지 증명해낼 수 있다. 다른 사람들도 물론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 `나는 아니다.`라고 착각한다. 그것도 절대 아니라고 생각하며 이렇게 되뇐다. `나는 나의 민낯을 정직하게 본다.` 하지만 이런 믿음이야말로 가장 심각한 자기기만이다. - 94쪽
개인의 이익이 걸려 있으면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하기 어렵다고 스미스는 말한다. 반면 순전히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일하면서 옳은 일을 한다고 스스로를 납득시키기는 쉽다. 그러한 상황에서 스스로를 지키는 한 가지 방법은 멘토와 같은 현실에서의 공정한 관찰자를 찾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눈을 자주 멀게 하는 자기기만이란 짙은 안개를 걷어줄 것이다. 자기기만에 대한 스미스의 통찰력을 오늘날 확증 편향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따. 확증 편향은 이의를 제기하거나 반박하는 증거를 무시하고 내 믿음을 확인시켜주는 증거만을 열렬히 받아들이는 성향을 말한다. 자신이 사랑스럽다고 믿고 싶은 사람들은, 자신에 대한 좋지 않은 평가는 잊거나 잘 기억하지 못한다. 반대로 자신의 사랑스러운 이미지를 확인시켜주는 기억은 지나치게 잘 받아들인다. 이런 오류는 대인관계를 넘어서는 영역까지 확대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스미스도 인생에서 겪는 혼란의 절반이 자기기만에서 비롯된다고 했을 것이다. 사실 어쩌면 절반을 넘어설지도 모르겠다. - 105쪽
`우주는 수많은 점들로 가득 차 있다. 그 중의 몇 개를 잘 이으면 무엇이든 그릴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당신이 선택한 점들이 왜 그 지점에 있는지가 아니다. 왜 당신이 나머지 점들을 선택하지 않았는지, 그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너무나도 자주 이런 오류에 빠진다. 자신이 선택한 점들만으로 그림을 그리고는, 자신이 예쁜 그림을 그렸다며 크게 기뻐한다. 나머지 점들로도 멋진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사실은 안중에도 없다. - 105, 106쪽
우리는 밝은 가로등 아래서만 열쇠를 찾는 술꾼과 다름없다. 열쇠가 밝은 가로등 아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술꾼 말이다. 실은 가로등 아래가 다른 곳보다 밝기 때문에 그 주위만 맴돌며 열쇠를 찾고 있는 것뿐이면서. - 107쪽
마지막으로, 키네아스가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겠느냐고 묻자, 왕은 마지막으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내 소중한 친구여, 우리는 편안하게 살 것이다. 그리고 하루 종일 술을 마시고 즐거운 대화를 나눌 것이다." 그러자 키네아스가 왕에게 일격을 가했다. "그럼, 지금 폐하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하시나이까?"
우리는 우리의 삶을 만족시킬 도구들을 이미 모두 갖고 있다. 삶의 기본적인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 이탈리아 반도를 정복할 필요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 내면의 인간다움을 유지하고 마음속 비열한 생쥐를 짓눌러야 한다. 인생은 경주가 아니라 음미하고 즐기는 기나긴 여정이다. 더 많은 것을 가지려는 끈질긴 욕구, 즉 야심이 우리를 삼켜버릴 수 있다. <플루타르크 영웅전>은 지금으로부터 약 2,000년 전에 집필되었다. 플루타르크는 자신이 살던 시대보다도 300년 전 얘기를 책에 녹여냈다. 이처럼 돈과 권력이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지 못한다는 사실은 실로 오래된 진리다. - 129쪽
인간의 삶이 비참하고 혼란스러운 가장 큰 이유는 소유물이 곧 나 자신이라 착각하기 때문이다. - 140쪽
스미스는 우리가 단순히 돈 많고 유명한 사람들을 부러워하는게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그들이 우리보다 더 나은 운명을 맞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어떤 면에서 죽음은 그들에게 걸맞지 않는 옷이다. 그들의 죽음은 우리가 갈망했던 완벽한 결론에서 벗어난 암울한 잔혹 동화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사람들은 유명인의 죽음에 평균 이상으로 과하게 슬퍼한다. - 151쪽
스미스에게 야심, 즉 부자가 되거나 유명해지거나 아니면 둘 다가 되려는 욕망은 인생에 있어 반드시 피해야 할 독약이다. 페달에 일단 발을 올리고 나면, 멈추지 않고 계속 밟아야 하니까.
궁정에서의 화려한 노예 생활을 과감히 버리고, 자유롭고 두려움 없이 독립적으로 살겠다고 진지하게 결심했는가? 그 고결한 결심을 지킬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 있다. 아니, 오로지 이 방법 밖에 없다. 한 번 들어가면 되돌아 나온 사람이 거의 없는 그곳, 야심의 소굴로 절대 들어가면 안 된다. 그리고 세상 거의 모든 사람들의 관심을 사로잡은 지배자들과 자신을 절대 비교해서도 안 된다. - 158,159쪽
사랑받는 사람이 되기 위한 더 훌륭한 방법으로, 스미스는 미덕을 갖춘 삶을 권했다. 미덕, 이 애매한 단어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일까? 스미스가 생각하는 미덕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그중 그가 가장 강조한 세 가지가 있으니, 바로 신중, 정의, 선행이다. 이를 갖춘 인간은 사랑스러운 존재가 되어 주위 사람들에게 존경과 칭찬을 받게 된다. 즉, 이 세 가지는 사랑받는 사람이 되기 위한 자격요건인 셈이다. 신중 = 자기 자신을 돌본다 정의 =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 선행 = 다른 사람을 선한 마음으로 대한다 - 199쪽
<도덕감정론>에서도 밝혔지만 스미스가 가장 경멸한 사람은 `시스템에 갇힌 사람`이었다. 시스템에 갇힌 사람이란, 특정 설계나 비전에 따라 사회를 다시 세우려 하는 지도자를 뜻한다. 그런 사람들은 이상적인 사회를 그리기 위한 비전에 너무 빠져든 나머지, 그것이 이상적 상태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는 생각을 못 한다. 자신이 만든 비전에 파묻힌 그들은, 그로인해 자칫 피해를 입게 될 사람들이나 계획의 실행 과정에서 피해를 입는 사람들 역시 보지 못한다. 시스템에 갇힌 몽상가는 그 일에 몰두해버린 채, 계획을 제대로 실행하지 못하고 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들며 의도치 않은 결과를 만들어 낸다. 뿐만 아니라 그 계획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는 힘이 도사린다는 사실도 잊어버린다. 스미스에 따르면, 시스템에 갇힌 사람은 체스판의 말을 움직이듯 사람들도 쉽게 움직일 수 있다고 착각한다. 그러면서 정작 본인은 체스의 규칙을 무시해버리곤 한다. 시스템에 갇힌 사람은 게임의 규칙 안에서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말의 이동을 무시하고, 자기 멋대로 여기저기에 말을 갖다 놓는다. - 265, 266쪽
시스템에 갇힌 사람은 이 거대한 사회의 구성원들을 자기 멋대로 쉽게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마치 체스판의 말들을 손으로 배열하는 것처럼 말이다. 체스판의 말들은 오직 사람의 손에 의해서만 움직인다. 그러나 인간 사회라는 거대한 체스판에서는 모든 말 하나하나가 자율성을 갖고 있다. 즉 입법 기관이라는 외부적 힘에 의해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자율성과 외부적 힘, 그 두 가지가 서로 일치하고 같은 방향으로 작용한다면, 인간 사회라는 게임은 편안하고 조화롭게 진행될 것이다. 게임의 결과 또한 행복하고 성공적일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 두 가지가 서로 반대되거나 다르다면 인간 사회라는 게임은 순조롭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인간 사회는 최악의 무질서 상태에 처할 것이다. - 266, 267쪽
복잡한 이 세상에서 사람들의 행동을 법률로 제정하려는 사람이라면, 인간이 태생적으로 각자 특정한 욕구와 꿈이 있음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각자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어 한다. - 267쪽
우리는 체스판의 말들을 마음대로 옮길 수 있다고 착각한다. 또한 나 자신에게 무엇이 가장 좋은지 스스로 잘 안다고 착각한다. 설사 자신과 타인에게 무엇이 가장 좋은지 잘 알고 있어도, 가끔은 그냥 내버려두라고 스미스는 조언한다. 그것이 때로 가장 좋을 수 있다고 덧붙이면서. 우리의 노력이란 실패의 가능성을 항상 품고 있다. 또 때로는 남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다. 그러니 국가와 사회라는 무대에서 멀리 떨어져 나올 필요도 있다. 국가와 사회라는 체스판보다 더 작지만 더 훌륭한 일상을, 그 소소한 목표를 생각하는 것이 가장 좋을 수도 있다. - 277, 278쪽
<도덕감정론>은 <국부론>과 단지 초점이 다를 뿐이다. <도덕감정론>은 인간의 본성이나 행동 방식에 대한 색다른 이론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리고 인간성에 대해 낙관적인 시각도 제시하지 않는다. 이 책은 인간의 관계 맺기에 대한 색다른 영역을 다루고 있다. <도덕감정론>과 <국부론>의 저자 애덤 스미스는 실제 사람들의 행동 방식 그 자체에 관심을 두었다. 이렇게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인간 행동을 다뤘기에, 두 책에서 말하는 인간의 성향이 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 가까운 사람간의 관계를 다룬 <도덕감정론>과 상품의 생산과 교역을 다룬 <국부론>에 나타난 사람들의 행동방식은 완전히 다르다. 결론적으로 이 두 책에서 말하는 영역은 삶에서 서로 아주 다른 범위에 있다. - 293쪽
우리 삶에는 이렇게 두 개의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두 세계의 차이를 받아들일 준비를 미리 하지 않는다. F.A. 하이에크가 자신의 저서 <치명적 자만(The Fatal Conceit)>에서 지적했듯이,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동시에 두 세계에서 살아야 한다. 하이에크에 따르면, 사람들은 사회생활을 가족생활처럼 만들고 싶어 한다. 가족의 평등한 문화를 사회 전체로 확대함으로써, 사회와 경제를 또 다른 버전의 가족으로 만들려고 한다는 주장이다. 하이에크는 그러면서 사회를 가족처럼 만들려는 시점에 바로 독재가 탄생한다고 경고했다. 스미스가 하이에크의 경고에 동의했을지는 잘 모르겠다. 1759년에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가 없던 시대였으니까. 그러나 스미스는 인간이 가까운 관계를 넘어서 자신의 사랑과 관심을 확대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 298, 299쪽
스미스가 하이에크와 생각을 같이 한 부분도 있다. 인간이 유력한 지도자들을 우러러보고 존경하며, 자신의 운명을 맡기고자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붙, 그리고 가족의 울타리를 벗어나면서부터 부모 같은 존재와 안전을 갈망한다. 문제는 히틀러나 스탈린 같은 사람들이 절대 우리의 부모가 될 수 없다는 데 있다. 그런 사람들은 우리를 자식처럼 사랑해주지 못한다. 오히려 우리의 그런 열망을 악용한다. 스미스와 하이에크는 바로 이 점을 경고했던 것이다. 정치적 유력자를 향한 우리의 열망이 얼마나 위험한지 말이다. - 2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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