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사람, 하정우
하정우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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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일 서점을 방문했다가 가벼운 마음으로 펼쳐본 대목이 마음에 들어 골랐다.


"나는 사람이 그다지 강한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사람은 여러 가지 요인들로 불안정해지기 쉬운 동물이다마치 날씨처럼 매일 다른 사건이 눈앞에 펼쳐지는데우리의 몸과 마음이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기란 쉽지 않다변화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지만작은 물결에 배가 휩쓸려가서는 안 되므로 닻을 단단히 내려둘 필요가 있다."


저자가 전혀 의도하지도 않았을 텐데도 현재의 내 상황에 맞춘듯 깊이 꽂히는 경우가 있다. 이 말이 그랬다. 


스스로 강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내 허세에 지나지 않았고, 직장 동료들이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일에 대하여 나 혼자 온몸으로 충격을 받아내고 시름시름 앓고 있던 요즘이다. 굳건하게 나를 받치고 있다고 여겼던 일에 대한 신념은 너무나도 쉽고 허무하게 무너져내렸고, 내가 받은 내상을 어떻게 치유해야 할지는 생각할 겨를도 없을 정도로 나는 내 속에 가득한 화를 삭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한 배우(이자 화가이자 감독이라는 걸 알았다)가 너무나도 우연히 내게 한 마디를 툭 던졌다. 


걷는다는 것은 생각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다시 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어쩔 수 없는 고민으로 스스로를 괴롭히느니 몸으로 걷는 것을 택한 것이지만, '걷기'가 포함된 그의 철학은 나 또한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을 정도로 단순하고, 바르고, 꾸준하다.


그는 말한다.

"한 발만 떼면 걸어진다"고.

그리고 지금 내 머릿속에 꽉 들어찬 채 나를 괴롭히고 있는, 나도 어쩔 수 없는 고민에도 불구하고, 나는 걸어가야 할 것이라고.


책을 사서 단숨에 읽었다. 수십 군데 밑줄을 쳤다. 공감하고 싶은 생각들이 많았다. 

그의 생각의 근간이 되는 '루틴'에 나도 동참하고 싶어 바로 휴대폰 만보기를 설정했다. 10000만 보는 안 되었지만, 8000보 가까이 걸었다. 앉아서 고민만 하느니 걸으며 잠시 그 고민과 멀어지고, 걷기를 끝낸 후 다시 새로운 시선으로 그것을 바라볼 기회를 만들게 되면 좋겠다. 곧 핏빗을 구매할 지도 모르겠다.  

서울에서 해남까지 장장 577킬로미터를 걷게 된 것은 그놈의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인생살이에서 어떤 기대와 꿈을 품고 살아간다. 나중에는 형편이 나아지겠지, 세월이 지나면 다 괜찮아지겠지, 지금 이 순간을 견디면 지금보다 나은 존재가 되어 있겠지…… 어릴 때는 이런 희망과 꿈이 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굉장히 높지만, 나이들수록 그 폭은 조금씩 줄어든다. 그리고 어느 순간 다 부질없는 생각이었다고 뉘우치며 포기하는 단계까지 간다. - 25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길 끝에서 느낀 거대한 허무가 아니라 길 위의 나를 곱씹어보게 되었다. 그때 내가 왜 하루하루 더 즐겁게 걷지 못했을까. 다시 오지 않을 그 소중한 시간에 나는 왜 사람들과 더 웃고 떠들고 농담하며 신나게 즐기지 못했을까. 어차피 끝에 가서는 결국 아무것도 없을 텐데.
내 삶도 국토대장정처럼 길 끝에는 결국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인생의 끝이 ‘죽음’이라 이름 붙여진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무(無)’라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루하루 좋은 사람들과 웃고 떠들며 즐겁게 보내려고 노력하는 것뿐일 테다. - 26

자기 전에 침대에 누워 아까 무슨 고민을 했었는지 떠올려보는데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물론 고민의 주제는 선명한데, 낮에 느꼈던 것만큼 중대하고 어려운 상황처럼 다가오지 않는다. 분명히 심각했었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그렇게까지 엄청난 위기 같지는 않다. 그런 생각들을 하다가 나는 금방 곯아떨어진다. 단순하게도 인간은 몸을 움직이는 만큼 수면의 질이 높아지는 것 같다. - 32

기분에 짓눌려서 문제를 키우고 고민을 부풀린 것은 결국 나 자신이었음을 깨닫는다. - 32

내 갈 길을 스스로 선택해서 걷는 것, 내 보폭을 알고 무리하지 않는 것, 내 숨으로 걷는 것, 걷기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묘하게도 인생과 이토록 닮았다. - 41

정작 일은 너무나 열심히 하는데 휴식 시간에는 아무런 계획도 노력도 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그대로 던져두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지치고 피로한 자신을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곧 휴식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방기’는 결과적으로 휴식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누적된 피로를 잠시 방에 풀어두었다가 그대로 짊어지고 나가는 꼴이 되는 경우가 많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과 휴식을 취하는 것은 다르다. 나는 휴식을 취하는 데도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배웠다. 적어도 일할 때처럼 공들여서, 내 몸과 마음을 돌봐야 하지 않을까? - 58

고통보다 사람을 더 쉽게 무너뜨리는 건, 어쩌면 귀찮다는 생각인지도 모른다. 고통은 다 견뎌내면 의미가 있으리라는 한주의 기대가 있지만, 귀찮다는 건 내가 하고 있는 모든 행동이 하찮게 느껴진다는 거니까. 이 모든 게 헛짓이라는 생각이 머리에 차오른다는 거니까. - 78

어쩌면 고통의 한복판에 서 있던 그때, 우리가 어렴풋하게 찾아헤맨 건 ‘이 길의 의미’가 아니라 그냥 ‘포기해도 되는 이유’가 아니었을까?
애초부터 모든 것이 잘못되어 있었다고, 이 길은 본래 내 것이 아니었다고, 그렇게 스스로 세운 목표를 부정하며 ‘포기할 만하니까 포기하는 것’이라고 합리화하고 싶었던 거다. - 79

장거리를 걸을 때는 지치기 쉽다. 판단력도 흐려진다. 그러므로 걷는 시간보다 더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때가 있다. 바로 ‘쉬는 시간’이다. - 79

"좋은 작품은 예술가가 안정적이고 반듯한 길에서 벗어나서 일탈하거나 방황할 때 나오지 않나요?"
사람들이 던지는 이런 질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안다. 좋은 예술과 안정적인 삶은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단호하게 말할 수 잇따. 내가 아는 한 좋은 작품은 좋은 삶에서 나온다. - 118

요리가 좋은 건 이번 한끼를 애매하게 실패했다 해도, 반드시 만회할 다음 끼니가 돌아온다는 거니까. - 145

한 발만 떼면 걸어진다.
그러니 도무지 꼼짝도 하고 싶지 않은 날 아침엔 일단 일어나 한 발, 딱 한 발만 떼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 한 걸음이 가장 무겁고 어렵게 느껴지겠지만, 이내 깨닫게 될 것이다. 머릿속에 굴러다니는 온갖 고민과 핑계가 나를 주저앉히는 힘보다 내 몸이 앞으로 가고자 하는 힘이 더 강하다는 것을. - 160

나는 사람이 그다지 강한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여러 가지 요인들로 불안정해지기 쉬운 동물이다. 마치 날씨처럼 매일 다른 사건이 눈앞에 펼쳐지는데, 우리의 몸과 마음이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기란 쉽지 않다. 변화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작은 물결에 배가 휩쓸려가서는 안 되므로 닻을 단단히 내려둘 필요가 있다. - 164

나에겐 일상의 루틴이 닻의 기능을 한다. 위기상황에서도 매일 꾸준히 지켜온 루틴을 반복하면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희미하게나마 보인다. - 165

루틴의 힘은 복잡한 생각이 머리를 잠식하거나 의지력이 약해질 때, 우선 행동하게 하는 데 있다. 내 삶에 결정적인 문제가 닥친 때일수록 생각의 덩치를 키우지 말고 멈출 줄 알아야 한다. 살다보면 그냥 놔둬야 풀리는 문제들이 있다. 어쩌면 인생에는 내가 굳이 휘젓지 말고 가만 두고 봐야 할 문제가 80퍼센트 이상인지도 모른다. 조바심이 나더라도 참아야 한다. - 166

나는 별 뜻 없이 한 말도, 일단 입 밖으로 흘러나오면 별 뜻이 생긴다고 믿는 편이다.
말에는 힘이 있다. 이는 혼잣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 같지만 결국 내 귀로 다시 들어온다. 세상에 아무도 듣지 않는 말은 없다. 말로 내뱉어져 공중에 퍼지는 순간 그 말은 영향력을 발휘한다. - 186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하면서 자신이 믿고 기댈 수 있는 시간을 쌓아가는 거뿐이다. 나는 내가 지나온 여정과 시간에 자신감을 가지고 일을 해나가지만, 결코 나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는 확신하지 않는다. 어쩌면 확신은 나 자신이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오만과 교만의 다른 말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 226

삶의 주도권이 자신에게 없다면 언제든 위태로워질 수밖에 없다. - 274

보통 ‘노력’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가능한 한 많은 시간과 자원을 들여서 그 안에서 최선의 결과를 뽑아내는 모습이 상상된다. 하지만 노력은 그 방향과 방법을 정확히 아는 것으로부터 다른 차원으로 확장될 수 있다. - 282, 283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위기와 절망 속에 있을 때 많은 이들이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나는 때로 내가 생각하는 최선의 노력이 최선이 아닐 수도 있다고 의심한다. 어쩌면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도 모른 채 힘든 시간을 그저 견디고만 있는 것을 노력이라 착각하진 않는지 가늠해본다. - 285

지금 고통받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내가 곧 노력하고 있는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혹시 내가 정류장이 아닌 곳에서 오지 않을 버스를 기다리는 건 아닌지 수시로 주변을 돌아봐야 한다. - 286

비단 신을 믿지는 않더라도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우연이나 예상치 못한 변수 등 외부에서 오는 절대적인 힘을 경험한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 내 마음을 다 이해할 것이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자 나에게 남은 것은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일과 기도뿐이라는 사실을. - 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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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코믹스 상.하 영화판 특별 세트 - 전2권
키리하라 이즈미 지음, 양윤옥 옮김, 스미노 요루 / ㈜소미미디어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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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봐도 전개가 어느 정도 예상되는 전형적인 스토리이다: 시한부 인생, 조숙한 소녀, 어리숙하고 관계에 적응 못하는 소년, 그리고 관계를 통해 점점 열리는 마음의 문, 고조된 관계, 불안한 행복, 갑작스러운 죽음, 부재가 남기고 간 감정... 그런데 이렇게 머릿속에서 줄줄 예상되는 뻔한 스토리 앞에서 나는 또 왜 눈물을 훔치고 있는가. 


옆에 있는 사람이 나보고 갱년기라고...

"우연이 아니야. 우리는 모두 스스로 선택해서 여기까지 온 거야. 네가 여태껏 해온 선택과 내가 여태껏 해온 선택이 우리를 만나게 했어. 너하고 내가 같은 반인 것도, 그날 병원에 있었던 것도 우연이 아니야. 운명 같은 것도 아니야. 각자 자신의 의지에 따라 만난 거야." - 34, 35

"벚꽃이 왜 봄에 피는지 알아?"
"왜 그래 갑자기? 원래 그런 종류의 꽃이라서 그런 거 아냐?"
"좋아, 말해주지. 사실 벚꽃은 꽃이 지고 그 석 달쯤 뒤에 다음 꽃의 싹이 생겨나. 하지만 그 싹은 일단 잠이 들어. 날이 따뜻해지기를 기다렸다가 한꺼번에 피어나려고. 벚꽃은 자신이 피어날 때를 지그시 기다리는 거야." - 65, 66

"산다는 것은 말이지. 아마도 누군가와 마음을 통하게 하는 것. 그걸 가리켜 산다는 것이라고 하지." - 74, 75

"나 혼자서는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없어. 누군가를 좋아하는데 누군가는 싫어하는 나, 누군가와 함께하면 즐거운데 누군가와 함께하면 짜증 난다고 생각하는 나. 그런 사람들과 나의 관계가,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산다는 것이라고 생각해. 내 마음이 있는 것은 다른 모두가 있기 때문이고 내 몸이 있는 것은 다른 모두가 잡아주기 때문이야.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나는 지금 살아 있어. 아직 이곳에 살아 있어." - 76, 77

"줄곧 나 자신을 풀잎 배라고 생각했었다. 흘러가는 대로, 하라는 대로, 아무런 의지도 없이 휩쓸리는 풀잎 배. 하지만, 아니었다. 다른 선택도 가능했을텐데. 나 자신의 의지에 따라 선택해서 지금 이곳에 와 있다. 모두 다 내가 선택한 것이다." - 114

"하지만 너는 너만은 항상 너 자신이었어. 너는 타인과의 관계가 아니라 너 자신을 응시하며 스스로 매력을 갖고 있었어." - 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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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닉 -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는 마음
배명훈 지음 / 북하우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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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한 마디로 평하기 어려운 색다른 소설이다. 사실적인 배경, 은유를 통한 상징과 실재가 뒤섞인 표현, 예상을 살짝 빗겨가는 전개로 인하여 몰입해서 읽었다. 조직(연방)과 개인, 동료(친구) 사이의 관계를 둘러싼 첩보물의 흥미진진함과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순정적 감성, 악마라는 새로운 병기를 둘러싼 거대한 스케일로의 확장, 다시 개인으로 수렴되는 본연의 문제들... 꽤 색다르고 다양한 재미를 맛볼 수 있는 소설이다.

11년을 일하면 1년은 휴가다.

"어떤 악마는 스스로 악마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평생을 살아간다. 그래서 어떤 천사는 혹시 자신이 바로 그 악마가 아닐까 평생을 고뇌한다."

세분화된 공정 어딘가에서 나사 하나를 조이는 일만 하루 종일 한 사람은 감히 자기가 만든 게 비행기라고 말하지 않는다. - 13

그때는 그게 사랑인 줄 알았다. 좋은 건 다 사랑인 줄 아는 나이였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람에 대해서 느낄 수 있는 수많은 감정들 중에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좋은 걸 발견하면 그저 이런 게 사랑인가 싶었다. 하지만 그건 사랑이 아니었다. 그런 감정이 아니었다. 소유할 수 없는, 어느 선 이상은 다가가서는 안 되는 무언가. 욕심을 내는 순간 그만 사라져버리고 마는 어떤 것. 가만히 두어도 조금씩 닳아 없어지는 은경이. - 28, 29

한 5도쯤. 경사가 느껴졌다. 땅 전체가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평평하게 놓여 있지 않은 땅. 아직은 마찰력을 충분히 유지하고 있어서 그 위에 있는 것들이 모두 와르르 쏟아져 내릴 정도는 아니지만, 이리저리 그 위를 자유롭게 오가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면 자기도 모르는 새 조금씩 아래쪽으로 옮겨가고 있을,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애매한 경사로. - 70

내리막 쪽으로 굴러떨어지는 느낌. 과속이 아니어도, 커브길이 나타나지 않아도, 자꾸만 브레이크 위에 발을 올려놓는 마음. - 171

정확히 말하면, 누군가에게 나를 빼앗긴 것은 아니었다. 내 일부를 빼앗긴 게 아니라, 어차피 내가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고 있던 나의 숨겨진 부분을 누군가가 보다 효율적으로 점령해준 것뿐이었다. 내가 아는 나는 거의 그대로였다. 다만 나 자신도 모르고 있던 나의 영역이 누군가에 의해 새로 발견되었을 뿐. 그런데 그 부분이 그렇게 넓을 줄은 나도 몰랐다. 내 의식이 평생을 장악해온 부분보다 훨씬 더 깊고 넓고 거대한 나. 그리고 그 깊고 거대한 나는 시간을 거슬러 공간을 초월해 결국 자연의 영역으로까지 이어져 있었다. 대자연의 일부, 우주의 질서를 그대로 간직한 나. - 242

그것은 발명이 아니라 발견이었다. 없던 악마를 만들어내는 과정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잠재해 있던 악마를 일깨우는 과정이었다. 내 안에 잠재해 있던 악마가 아니라, 나라는 개념이 발생하기 훨씬 전, 생명의 보다 근원적인 부분에 잠재해 있던 악마를 불러내는 일. 중추신경계 어딘가에 남겨진 기억이 아니라 유전자 안에 새겨진 기억들. - 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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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 세 번의 탈출 - 한나 아렌트의 삶과 사상을 그래픽노블로 만나다
켄 크림슈타인 지음, 최지원 옮김, 김선욱 감수 / 더숲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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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마음만 먹고 포기하기를 반복했던 한나 아렌트에게 다가가 봐도 되겠다는 용기를 주는 책. 한나 아렌트의 개인사를 중심으로 그 사유의 핵심적인 영향을 주었던 역사적 사건과 사회적 배경을 보여준다. 아렌트뿐만 아니라 벤야민 등 동시대를 살았던 수많은 천재들의 등장도 볼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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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느라기 - 며느리의, 며느리에 의한, 며느리를 위한
수신지 지음 / 귤프레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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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이후의 인간 관계 변화는 매우 복잡하다. 한국사회에서 결혼은 개인 대 개인이 아닌, 가정 대 가정(집단 대 집단)의 결합이 분명하다. 단순히 남녀에 따른 이분적 구조만이 아니라, 시댁과 친정, 같은 여자라도 그 안에서의 차별이 존재하는데, 둘이 좋아 연애할 때는 상상할 수 없었던 시댁이라는 거대한 구조가 결혼 이후에야 비로소 드러나게 되고, 연애할 때는 그렇게 잘 대해주던 남자친구가 남편이 되어서야 비로서 가부장적 남성성을 드러나게 되니, '며느리'로 그 거대한 구조 속에 뛰어든 사람의 혼란이야 얼마나 클 것인가. '누구나 다 그렇다', '예전에는 더 했다'며 그냥 흘려보낼 것은 아니다. 너무나도 답답하고 안타까운 민사린의 이야기는 우리 삶에 구체화 되어 이미 스며들어 있다. 


요즘 추세에 맞추어 속 시원하게 시댁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드는 며느리의 이야기로 진행해도 재미있었겠지만, 어느 한편만을 조명하지 않고, 민사린과 관계를 맺은 다른 이들도 꼼꼼하게 다루었다. 민사린으로 대변되는 며느리들의 현실적인 이야기에 공감하도록 하면서, 서로의 입장에 대한 이해를 넓히려는 작가의 의도가 돋보인다.

"괜찮아요. 저 사과 안 좋아해요."
"그래도 여기 남은 거는 먹어라. 아깝잖아. 너랑 나랑 한 개씩 먹어치우자." - 61

"돕는다고? 나를?"
응... 왜?
"구영아 나는 할아버지 얼굴도 본 적 없거든. 내가 너를 돕는거라고 생각되지 않니?" - 187, 188

혜리 씨는 설거지를 했을까?
"고민이 설거지라니, 시시하다." - 233

내가 나를 지키지 못한 순간들이 자꾸자꾸 떠오르는걸. 어떡하지? - 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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