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도 책을 읽었다 - 생태주의 작가 최성각의 독서잡설
최성각 지음 / 동녘 / 2010년 8월
장바구니담기


문학은 가끔 유약함과 자기혐오, 반도덕적 광기, 퇴폐적인 자기부정을 통해 의도했든 안 했든, 맑은 순수와 서늘한 도덕을 드러내기도 한다.-52쪽

드러커는 어떻게 자신이 방관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가. 그의 나이 열네 살 때 드러커는 '오스트리아 청년단'의 선봉에 서서 깃발을 들고 거리행진을 한다. 근교의 공업도시에서 출발한 노동자들과 합류하기 전까지의 데모 행렬이었다. 그때 드러커는 갑자기 웅덩이를 만난다. 웅덩이를 드러커는 밟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군중들에 밀려 웅덩이를 밟게 된다. 그 순간, 드러커는 자신이 스스로 원치 않는 일을 타력에 의해 하는 것을 매우 싫어하는 종류의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즉, '타인과 다른 견해를 갖는 것이 자신의 숙명'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드러커는 폴라니 가문을 통해 배운 '인간의 도리'를 평생 동안 잊지 않았으나 공적 인간으로서의 이상이라는 것이 현실에서 얼마나 실현되기 어려운 일인가를 또한 술회한다.-69-70쪽

이 가슴 아프도록 슬픈 기행문(생명에세이)이 발간된 이후 다시 20년여 세월이 흐른 지금,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더 풍요로워졌는가? 그렇다고 치자. 그래서 우리는 과연 더 행복해졌는가? 풍요는 어디에 소용되는 가치인가? 풍요는 단지 풍요를 위한 것인가, 인간의 행복을 위한 것인가? 풍요가 만약 인간의 복된 삶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면, 조국 근대화가 얼추 완수된 이 시점이라면 풍요로 인해 우리는 바랄 데 없이 행복해져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과연 우리는 오늘 행복한가?-154-155쪽

그러나 바라건데, 그분(김대중)을 끝으로 서럽고 슬프고 가슴 아픈 일이 너무나 많은 내 나라에 다시는 큰 인물이 나오지 말았으면 좋겠다. 불완전한 인간이 큰 인물이 되어가는 과정 동안에 보잘것없는 이들이 치러야 하는 희생이 너무 크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보통사람들이 역사를 끌고 가고 그 내용을 채워야 하기 때문이다.-196쪽

풍요로운 나라의 행복도 지수가 높지 않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저자는 끔찍한 성장의 대가를 나열하면서 바로 풍요롭기 때문에 불행한 것이 아닐까? 묻고 있다. 무한 성장의 신앙을 바탕으로 인간을 행복하게 할 여러 조건들을 희생시켜 얻은 풍요는 인간을 행복하게 하기는커녕 만악의 근본이라는 것이다. -201쪽

"가난이 불행의 절대조건이 아니다"라는 이야기와 "풍요가 행복을 결정하지 않는다"는 쉽게 꺼내기 힘든 이야기는 섬세한 주변 살피기와 냉정하고 무서운 자기비판이 동시에 수반되지 않으면 자칫 불필요한 오해나 거부감을 촉발하거나 공허한 이야기기 되기 쉬울 것이다.-211-212쪽

이 책(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은 또한 끝없는 성장론과 발전론이 허구에 바탕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환상이라는 것을 담백한 어조로 펼치고 있다. 지구가 스무 여남은 개 되면 모를까, 하나밖에 없는 지구로는 완전한 발전의 실현이 불가능한 노릇임을 밝히고 있다. 성장 이데올로기는 세계 어딘가에 아직 개발되지 않은 삼림이 남아 있는 한, 그 임무를 완수하지 않았다는 신념에 불타고 있기 때문이다. 발전 이데올로기는 아직 파괴되지 않은, 아직 매립되지 않은 갯벌이나 산호초가 어딘가에 있는 한 발전은 끝나지 않았다고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215쪽

"세상일의 십중팔구는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고, 마음에 드는 일은 한두 가지밖에 없네", 이 시는 남송 시대의 방악의 시다. 지셴린은 그러면서 인생이란 완벽하지 않아서 좋은 것이라고 말한다. 소동파도 좋아하지만, 도연명의 시가 그의 좌우면이다. "선한 일을 하면 기쁘다 하나/ 누가 있어 그대를 알아줄까?/ 깊은 생각은 삶을 다치니/ 마땅이 운명에 맡겨야지/ 커다란 격랑 속에서도/ 기뻐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게나/ 해야 할 일을 다했으니/ 더는 걱정하지 마시게."-252쪽

사실 지셴린이 펼치는 소박한 지혜는 잘 살아낸 다른 노인들한테서 들을 수 있는 이야기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가 제대로 살았기 때문에, 바로 보았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정직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생태위기에 대한 우려가 다른 노인들보다 깊어졌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내 나라에서 노인들이 생태위기에 대해 우려하는 소리를 별로 들어보지 못했다. 노인들은 이 나라를 풍요롭게 만드느라 뼈 빠지게 일했으므로 대접해달라고 한다. 자신들이 흘린 피땀 때문에 너희들이 오늘날 넘치는 풍요를 구가하고 있으니 감사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아직도 쳐부숴야 할 '좌파 집단'이 있다고 기염을 토한다.-253-254쪽

모두 신 들린듯이 경제 타령을 해쌓는 마당에 '자발적 가난'을 잘못 이야기하다간 돌 맞기 십상인 발언이다. 그(김종철)가 말하는 가난에 대해 더러 곡해를 하는 모양인데, 그는 "나는 가난 그 자체를 예찬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문제는 '어떤 가난'이냐 하는 것이다"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시급히 해소되어야 하는 절대적 빈곤을 방치하자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다. 중요한 것은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빈곤'이 뜻하는 것, 즉 "오늘날 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느끼는 가난은 생활에 필요한 물자나 서비스의 절대적 결핍 그 자체로 인한 궁핍감이라기 보다는 '생활의 질(質)'의 열악함에서 오는 고통을 뜻할 가능성이 크다는 이야기다. 물자나 서비스의 결핍이 재앙이 되지 않도록 막아주는 호혜적 인간관계의 그물이 있다면 세상이 이토록 자기파멸적인 자원착취와 환경파괴, 삭막한 탐욕의 전투장이 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게 김종철이 한결같이 토하는 외로운 소리다. 그 그물을 그는 세상이 이제 노골적으로 버리기로 작정한 농촌 공동체에서 찾고 있다.-270쪽

우리는 일찍이 보기로 한 것, 보기로 되어 있는 것, 그리고 보고 싶은 것만을 보면서 살고 있다. 세상은 열려 있는데 우리는 여전히 보고 싶은 것,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감옥 속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으려고 한다. 누가 닫혀 있는가? 인간의 야만에 침묵으로 대응하면서 죽어가고 있는 동물들이 닫혀 있는 존재일까? 기계처럼 자폐적인 사고방식에서 단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갑갑한 우리 인간들이 닫혀 있을까?-295쪽

그(프리먼 하우스)는 여전히 시간이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게 천 년의 시간이 있다고 믿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을뿐더러 다만 사태를 바로잡는 데 걸리는 시간만이 있을 뿐이다"라고 말하고 있다.-305-306쪽

그(스콧 니어링)는 누구도 시키지 않은 '위험 천만한 자신과의 싸움'을 무쇠의 정신으로 실천했다. 실천하려고 노력했으며, 좌절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스콧 니어링 같은 이는 위대한 인물이라고 간주해버리고 곧바로 잊어버리기에는 아까운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자신에게 지나칠 정도로 철저했던 요주의 인물'로서의 스콧 니어링은 애써 분석하고, 음미하고, 다시 재해석하면서, 나중에는 그의 성취와 그 성취가 가능했던 정치 사회적 조건, 그리고 인간적인 한계까지 헤아려 보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누구든 당대의 산물이기 때문이다.-329-330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철학이 필요한 시간 - 강신주의 인문학 카운슬링
강신주 지음 / 사계절 / 2011년 2월
장바구니담기


자유를 꿈꾸며 사는 사람만이 자신을 옥죄고 있는 담벼락과 조우할 수 있을 뿐이다. 자유로운 것 같지만 갇혀 있다는 사실. 제한된 것만을 하도록 허락된 자유. 자유정신이 어떻게 이런 허구적인 자유를 긍정할 수 있겠는가?-21쪽

그러니까 온갖 억압과 고통을 극복하여 현재 자신의 삶을 긍정적으로 영위해야만 한다. 자신의 삶을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지금 노예의 굴종과 비겁을 감내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노예로 살기를 결정한 셈이고, 지금 주인의 당당함과 자유를 쟁취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주인으로 살기를 결정한 셈이다. 마침내 우리는 자신을 가두어 길들이는 담벼락을 무너뜨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자유롭고 싶은가? 그렇다면 니체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만 한다. "지금 인생을 다시 한 번 완전히 똑같이 살아도 좋다는 마음으로 살아라!"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24-25쪽

'내가 없다'는 주장은 부정적으로 '내가 공하다'고 표현된다. 이 주장을 긍정적으로 표현하면 '나는 수많은 인연들의 마주침으로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당연히 이런 나에게 나의 것이란 존재할 수 없는 법이다. 그것은 모두 인연이 있어서 내게 잠시 머무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움도, 젊음도, 나의 아이도, 그리고 돈까지도 모두 그러하다. 그것들은 모두 인연이 되어서 나에게 왔고, 인연이 다해서 나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철저하게 나 자신이나 내가 가진 것이 공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우리는 부질없는 집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나가르주나의 핵심적인 전언이다.-61쪽

'오래된 뇌'가 행동을 담당하고 '중간 뇌'가 정서를 관장한다면, '새로운 뇌'는 합리적인 사유를 담당하고 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다. 미래에 더 새로운 지층이 생기는 순간, 현재 새로운 지층은 낡은 지층으로 밑에 깔리게 된다는 사실이다.
지층과 마찬가지로 현재의 합리적 사유도 시간이 지나면 정서나 행동의 영역으로 이행한다. 이것이 바로 습관을 설명하는 현대 뇌과학의 방식이다. -78쪽

우리의 동일성identity을 규정하는 제일의 원리가 습관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미 습관이 된 것, 지금 의식적으로 노력하고 있는 것, 그리고 나중에 습관으로 획득하게 될 것, 이것이 바로 삶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살아가는 것이 힘들게 느껴질 때가 있다. 새롭게 펼쳐진 삶의 환경과 우리 내면의 습관이 불일치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이런 불일치에서 우리는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하나는 기존의 습관대로 환경을 바꾸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환경에 맞게 자신의 습관을 새롭게 형성하는 것이다. -80쪽

생각은 오직 기대하지 않았던 사건event과 조우할 때에만 발생하는 것이다. -83쪽

리오타르는 '포스트모던'이 '모던' '뒤에post' 오는 시대라고 보는 통념을 거부한다. 포스트모던이 모던을 낡게 만들고 도래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바로 모던의 핵심, 즉 무한한 새로움을 지향하는 강박증적 운동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포스트모던'이란 말에서 중요한 것은 '모던modern'이 아니라 '포스트post'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마저 낡은 것으로 뒤로 보낼 수 있어야만 '새로움'은 진정으로 새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포스트모던은 진정한 의미의 모던이었던 셈이다. 모던이 모던으로 머물 때, 모던은 새로움의 의미를 잃고 낡아질 수밖에 없다. -231쪽

어떤 작품도 일단 포스트모던해야만 모던할 수 있다. 이렇게 이해된 포스트모더니즘은 곤경에 빠진 모더니즘이 아니라 발생 중에 있는 모더니즘이고, 이런 상태는 불변하는 것이다.
- <포스트모던의 조건>,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무엇인가>-232쪽

산업자본과 소비 사회가 추구하는 새로움은 역설적인 성격을 갖는다. 새롭다고 평가되는 어떤 상품도 자신의 존재를 계속 고집할 수 없다. 그렇게 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새로운 것일 수 없기 때문이다. 새로움은 부단히 자신을 극복해야만 새로움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다. 새로움은 일종의 강박증으로 보아야 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이제 우리는 리오타르가 왜 "어떤 작품도 일단 포스트모던해야만 모던할 수 있다"라고 이야기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어떤 작품도 부단히 새로워야만 진정으로 새로울 수 있다'는 의미이다. 리오타르의 지적이 옳다면, 우리는 새로움을 강요하는 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 그렇지만 유한한 삶에 비추어보았을 때, 우리는 도대체 언제까지 새로움의 뒤를 쫓을 수 있는 것일까? 어쩌면 새로움을 강박적으로 추구하다가 지금 더 소중한 것을 잃고 있는 것은 아닐까? 모를 일이다. 가끔은 뒤돌아볼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는 생각보다 오래 사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232쪽

베버에 따르면 프로테스탄티즘은 직업을 일종의 소명, 즉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의무로 간주한다. 이런 생각은 직업을 뜻하는 'vocation'이라는 단어의 의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단어에는 '직업'이라는 의미와 함께 '소명召命', 즉 '신의 부르심'이란 의미가 있다. 그래서 기독교도들에게 있어 직업은 천직天職, 하늘로부터 유래한 임무라는 발상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산업자본조의가 발전하면서 천직은 자본가와 노동자로 양분되었다. 그렇지만 두 계급 사이에는 갈등의 요소가 있을 수 없다. 자본가나 노동자는 모두 자신의 역할을 하나의 소명으로서, 다시 말해 '금욕적'으로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자본가와 노동자의 두 계급이 '소비' 부분을 억제하고 '생산' 부분에만 집중해야 한다는 뜻이다.-234쪽

결국 대중매체가 제공하는 이미지들에 길들여짐에 따라 스펙터클 사회의 거주민들은 점점 현실에 대한 방관자, 혹은 구경꾼으로 변하게 된다. 대중매체를 통해 표현된 설악산과 직접 등정해본 설악산의 차이, 혹은 드라마를 통해 이미지화된 연애와 실제로 겪게 되는 연애의 차이, 뉴스를 통해서 드러난 정치권의 이미지와 실제 우리 삶을 좌지우지하는 정치적 권력의 차이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해 온몸으로 겪어야만 했던 현실 세계는 사라지고 시각적으로 특화된 이미지의 세계만 남게 된 것이다. 기 드보르가 스펙터클 사회에서는 "특권적인 인간 감각을 당연히 시각에서 찾는데, 다른 시대에 그 특권적 인간 감각은 촉각이었다"고 말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250쪽

권력의 입장에서는 좋을 것이다. 현실에 치열하게 참여하는 실천가가 줄어들고 거리를 두고 냉소적으로 구경하는 방관자가 늘어나게 되니까 말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대중매체의 볼거리들이 기본적으로 소비를 촉진하기 위해서 주로 기능한다는 점이다. 볼거리가 선정적이고 자극적일수록, 우리는 대중매체에 쉽게 빠져들게 된다. 자본은 이를 이용해 우리의 내면에 신상품의 유행과 이미지를 각인시킨다. 결국 우리는 여가시간마저 자본의 지배를 받고 있는 셈이다.-250쪽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시간은 두 종류로 분할된다. 하나는 자본에 고용되어 생산 활동에 종사하는 노동 시간이다. 다른 하나는 직장을 떠나서 보내는, 기 드보르가 '비활동'이라고 부르는 여가 시간이다. 여가 시간은 노동을 하지 않는 시간이어서 자유로운 시간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대중매체는 우리의 자유를 가만두지 않는다. 대중매체를 통해 우리는 자신이 노동해서 만든 상품에 대한 소비 욕망을 증폭시키고 있다. 결국 여가 시간의 활동마저도 자본주의는 자유롭게 내버려두지 않는 것이다. "활동의 외부에는 어떤 자유도 있을 수 없으며, 스펙터클의 맥락에서는 모든 활동이 부정된다"는 말의 의미도 바로 여기에 있다.-252쪽

하위징아는 소중한 교훈을 준다.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이 수단이면서 목적일 때 우리는 기쁨으로 충만한 현재를 살 수 있는 반면 자신의 행동이 무엇인가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면 고단함으로 충만한 현재를 견디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현재'가 두 가지 의미로, 혹은 두 가지 가치로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다는 점이다. 하나는 놀이에서 분명해지는 것처럼 그 자체로 향유되고 긍정되는 현재이고, 다른 하나는 노동의 경우처럼 미래를 위해 소비되어야 하고 견뎌야 하는 현재이다. -303-304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 미국 진보 세력은 왜 선거에서 패배하는가
조지 레이코프 지음, 유나영 옮김 / 삼인 / 2006년 4월
구판절판


프레임을 이해하는 것의 중요한 측면은 30초 안에 가치 있는 교훈 하나를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최소한 우리 모두가 '코끼리를 생각하지마'라는 - 경쟁자의 프레임을 공격하는 것은 그들의 메시지를 더욱 강화해 줄 뿐이라는 - 교훈을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는 한발짝 전진할 수 있다. 우리가 할 일은 우리 자신의 가치관, 소망, 사명을 담은 프레임을 구성하되, 상대방의 프레임을 공격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순간, 그들의 생각이 바로 공론의 중심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14-15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보노보 혁명 - 제4섹터, 사회적 기업가의 아름다운 반란
유병선 지음 / 부키 / 2007년 12월
장바구니담기


"부단히 움직여라. 두려움이 밀려들고 실패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생각될 때조차도 멈추지 마라. 어떠한 역경이 닥치더라도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한 활동을 지속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66쪽

호로위츠의 프리랜서 노조는 기존의 노동조합과는 그 활동이 판이하게 다르다. 노동자들의 이해를 대변한다는 기본 틀만 같을 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특성상 단체 행동권과 단체 교섭권을 주장하진 않는다. 그럼다면 일부 정통파 노동 운동가들이 얘기하듯, 프리랜서 노조는 사이비 노동조합일까?
미국의 저명한 사회학자 리처드 세네트(Richard Sennett)는 <새로운 자본주의 문화(The Culture of the New Capitalism> (2006)에서 프리랜서 노조를 새로운 자본주의에서 진화한 '병렬 조직'으로 규정하고, 기존의 노동조합이 끌어안지 못하는 노동자 문제를 해결하는 대안적인 형태의 노동자 조직이라고 설명했다. 다시 말해 병렬 조직은 근속 연수가 짧아지고 고용이 불안정해지면서 노동자들에게 잃어버린 연속성과 지속성을 제공하는 새로운 조직들이다. 이러한 조직들은 노동조합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고, 조직원들이 연금과 의료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기존의 노동조합 일을 대행해 주거나 탁아소와 토론회, 사교 모임 등을 조직해 일터에서 사라져 가는 공동체를 제공해 주기도 한다.-93-94쪽

또한 병렬 조직들은 새로운 형태의 고용자로서 기존의 경직된 노동조합에 맞선다. 예컨대 기존의 노동조합이 조합원의 임금이나 물질적 개선을 위해 역량을 집중했다면, 보스턴의 비서직 노동조합과 같은 병렬 조직은 미혼모나 여성들의 공동체적 필요에 중점을 둔다. 또 다른 예로 전통적인 노동조합이 예전의 사회 자본주의적 관행을 좇아 조합원들의 고용 안정성 유지에 힘을 쏟았다면, 대안적인 병렬 조직은 은퇴하기에는 아직 이른 나이에 직업을 잃은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알선하는 등 노동자들의 직업적 이력이 단절되지 않도록 하는 데 역점을 둔다.-94쪽

존슨은 사회적 혁신에서 고령자의 이점을 이렇게 말한다.
"나는 젊은이들보다 세상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으며, 바로 그 점에서 현명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젊은 시절이었다면 흥분하거나 좌절했을 법한 일에 지금은 보다 침착하게 대응한다. 일희일비하지 않고 올바른 방향으로 제대로 움직이는지에만 집중하는 것이다."-147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를 바꾸는 글쓰기 공작소 - 한두 줄만 쓰다 지친 당신을 위한 필살기 이만교의 글쓰기 공작소
이만교 지음 / 그린비 / 2009년 5월
장바구니담기


그러나 인간이 언어로서 존재하는 한, 한 문장 한 문장 열심히 갈고닦으면 반드시 그만큼의 자기 변신 역시도 자신의 문장 변화와 더불어 그 순간 그 순간 일어나고 있는 것 또한 분명하다. 글쓰기로써 남이 나를 알아줄 만큼 변하기까지는 무척 오랜 분투와 시간이 필요한 것이 틀림없지만, 자기가 노력한 만큼 자신이 변하는 것은 매 순간순간에 그 즉시로 가능하다는 것 또한 자명하다. -7-8쪽

우리가 다른 것에 대해서는 무지할지라도 자신에 대해서는, 그것도 자신이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뻔할 정도로 명백히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알고 보면 인간은, 자신이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며, 또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이 자신이나 주변 사람에게 정말로 도움 되는 일인지를 알지 못하는 존재다.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자기 소원이 자기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니, 이 얼마나 놀랍고 끔찍한 노릇인가.-19쪽

나는 종종 나를 소설가라고 소개하면,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으니 행복하겠다고 부러워하는 회사원이나 주부들을 자주 만난다. 그때마다 나는 심히 의심스럽다. '당신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지 않고 있단 말인가? 어떻게 원하는 것을 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이지? 당신이 무의식 중에 정말로 원하는 것은, 회사원이나 주부로서 안정된 삶을 살면서 소설가나 화가를 보면,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으니 행복하겠어요!"라고 말하는 바로 그 삶이 아닐까?'-19쪽

타르코프스키가 <잠입자>의 '금지구역' 및 '비밀의 방'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을 결국, 세계원리와 인간본성 모두가 심연이자 미로라는 사실이다. 고슴도치 자신은 동생의 완치를 소원했지만 그의 보다 강렬한 소원은 자신이 벼락부자가 되는 것이었듯이, 우리 인간이란 자신이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존재다.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는 이렇듯 언제나 크고 작고 견고한 간극이 놓여 있다. <잠입자>의 '고슴도치 일화'는 우리에게 '내가 의식적으로 꾸는 꿈과 무의식적으로 욕망하는 실질적 내용이 전혀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20쪽

이렇게 의식적 꿈과 무의식적 욕망이 불일치한다면, 이것은 마치 다른 방향으로 달리는 두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와 같다. 쉽게 그 목표가 성취될 리가 없다. 따라서 우리는 수시로 자기 자신이 의식적으로 표방하는 꿈과 무의식적으로 욕망하는 실질적 내용이 같은지 다른지를 점검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스스로 속고 속이는 기만을 자연스러운 일상으로 여기며 살게 된다.-21쪽

물론 현실적인 여러 가지 이유와 사정이 발목을 잡는다. 최소한의 사회활동, 집안 형편과 경제적 현실, 체력적 한계 등과 같은 어쩔 수 없는 사정들로 인해 더 이상은 어쩔 수가 없다고 포기하고 싶어지곤 한다. 그러나 그렇다면, 그 사람은 '현실의 어쩔 수 없는 여러 사정이 발목을 잡으면 포기할', 그야말로 더는 '어쩔 수 없는' 사람임이 틀림없다. 정말로 무엇인가를 꿈꾸는 사람은 말 그대로 꿈이라도 꾸지 않을 수 없다. 현실적 형편이 하락하지 않을 경우, 하다못해 꿈속에서라도 그 무엇인가를 하는 꿈을 꾸게 된다. 꿈은 말 그대로 꿈이어서 현실 조건에 얽매여 멈추지 않는 법이다. 멈추는 법을 모른다. 오늘 그려 보는 내일의 자기 모습은 그 모습 그대로 자신이 바라는 미래상이겠지만, 그러나 오늘의 내 모습은 어제의 내가 실제로 바란 그 모습이다. -41-42쪽

꿈꾸는 사람은 반드시 변하기 마련이다. 만약 우리가 정말로 무엇인가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우리는 미미하게라도 자신이 꿈꾸는 방향으로 변하지 않을 수 없다. 의식뿐 아니라 의식과 무의식 전체로 꿈꾸는 사람은 반드시 자기 삶에 변화를 불러일으킨다. 자신의 내면세계 전체로 변화를 꿈꾸는데 어떻게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변화는 당연히, 반드시,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것도 현실에서 가능한 가장 빠른 속도로 일어나게 되어 있다.-43쪽

의식뿐 아니라 의식과 무의식 전체로 꿈꾸는 사람이 되자. 의식과 무의식 전체로 꿈꾸는 '전념'을 실천하자. 전념을 실천해서 이루어지지 않을 꿈이란 없다. 하다못해 식당 서빙을 하거나 김밥집을 시작해도 10년 내로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모든 천재들이란 자기 일에 '전념'한 사람들일 뿐이다. 천재란, 자기 일이 좋아서 하루 열 시간씩 십 년쯤 일한 사람에 다름 아니다.-43쪽

마찬가지로 '씨앗 도서' 혹은 '씨앗 문장'을 만나게 되면 그 씨앗을 내 몸과 마음에 잘 심어 두는 일이, 독서행위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읽은 권수가 문제가 아니라 씨앗을 내 몸과 마음에 심었느냐 그러지 못했느냐가 독서의 가장 중요한 바로미터다. 그런데 대개의 아마추어 독서가들은 이 과정을 생략해 버린다. 그 바람에 씨앗을 발견하고도 장차 열매는 맺지 못한다.-96쪽

첫째, 일상 수다 수준의 문장을 구사하면 애매하거나 과장되게 느껴지고 독자들은 화자에 대한 신뢰감을 잃는다.
둘째, 일상에서 아무렇게나 즐겨 사용하는 간투사, 관용구, 관습어, 상투적 문장을 그대로 사용하면 의미의 명료성과 진실성이 떨어지면서 효율적 의미 전달도 불가능해지며 독자들은 긴장감을 잃는다.
셋째, 아무렇게나 대충 넘어가 버리면 그만큼 의미가 불충분해지고 독자들 역시 초점 흐린 렌즈로 찍은 사진을 보듯이 읽게 된다.
넷째, 화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내용을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하면, 문장은 그만큼 거칠어지거나 꼬이거나 불필요하게 복잡한 구조를 갖게 된다.
다섯째, 보다 정확하고 세밀한 언어 문장을 구사하려고 노력하면, 언어 문장은 이러한 노력에 대한 답례로서 보다 명확하고 풍요로운 형상이 가능하도록 도와준다.
여섯째, 자신의 경험을 그대로 옮겨 놓기보다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주제에 맞게 경험과 기억을 재편집하고 허구화해야만 리얼리티가 더 강렬해진다.-168-169쪽

글쓰기 역시 마찬가지다. 감상적 도식적 윤리적 일상적 상투적 통념적 언어질서에 복종하는 글쓰기는 약자의 글쓰기다. 반면 스스로의 감각과 사유와 상상을 생성해 내고 즐기며 기성문법을 넘어서는 새롭고 낯선 소수언어를 만드는 자가 바로소 작가고 예술가다. 그런 점에서 글쓰기란 언제나 소수언어로서의 창작언어를 탄생시키는 일이다. 창작언어를 탄생시키는 일이란, 기성질서와 언어에 저항하고, 기성질서와 언어를 전복하고, 무엇보다 기성질서와 언어보다 더 강해지고 넉넉해진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창작언어는 자연스레 글쓴이의 개성이 묻어나는 언어이고 저항의 언어이고 전복의 언어이고 강자의 언어이고 난장(亂場)의 언어다.-238쪽

문제는 천천히 운전하는 것과 여유있게 운전하는 것, 신속하게 운전하는 것과 조급하게 운전하는 것, 열심히 읽는 것과 초조하게 읽는 것, 깐깐하게 공부하는 것과 소심하게 공부하는 것, 치열하게 쓰는 것과 욕심을 부려 쓰는 것,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과 고지식하게 고민하는 것, 자부심을 갖고 행동하는 것과 자만심을 갖고 행동하는 것, 게으르게 시간을 지체하는 것과 여유롭게 때를 기다리는 것... 등을 나누어 분별하기가 좀체 만만치 않다는 사실이다.
호흡지간(呼吸之間)에 생사가 갈린다고 했다. 숨 한 번 돌리자 사랑이 욕정으로 바뀌는가 하면 욕심이 노력으로 바뀌기도 한다. 숨 한 번 돌리는 사이에 무욕이 게으름으로 변하는가 하면 순정이 맹목으로 변하기도 한다. 딴엔 의식적으로 치열하게 열심히 읽고 썼지만, 그것이 다만 조급한 욕심에 불과한 것일 수가 있어서, 마치 <잠칩자>의 '고슴도치'처럼, 스스로 속는 경우가 얼마든지 가능하다.-365쪽

글쓰기 공부는 언제나 몸 전체로 걸어가야 하는 환유동물의 걸음만큼이나 느리고 더딘 과정으로 진행되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여전히 읽고 쓰고 생각하며 걸음을 내딛어야 하는 이유는, 언제나 우리 자신의 가장 내밀하고도 절박한, (제도의 문제 이전에) 자기 내면의 자유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는 때문이다. 또한 다시금 읽고 쓰고 공부하는 글쓰기를 통해 우리 스스로가 곧바로 얻을 수 있는 혜택 역시도 바로 이러한 지점일 것이다. 돈, 경제력, 학벌, 외모, 직급, 아파트 평수나 자동차 배기량 등과 같은 특정 가치에만 고착되는, 고착되어 쉼없이 제자리걸음하고 있는, 혹은 고착되어 있지 않은 척하느라 자기 기만에 시달리고 있는 스스로를 들여다보고, 다시금 새소리를 새소리로 즐기고 구름을 구름으로 바라보는 한편으로 자기 안의 실질적인 욕망을 발견하기 위해 어떤 형태로든 읽고 쓰고 생각하는 공부는 긴요하다.-377쪽

무엇보다 한순간 한순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다 해서 그 다음 순간이 되면 축적적으로 이어지는 것만은 아니어서 노력한 과정이 노력한 결과로 반드시 이어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단일한 연속선이 아니라 단속적 순간순간으로 세상이 존재한다 할지라도, 아니 그렇다면 더욱더 우리는 우리 노력을 주저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 이 순간 '노력하는 사람', 혹은 '시인과 같은 감성', 혹은 '자기 에너지를 치열하게 만끽하는 상태'에 놓여 있다면, 그 자체로 우리는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그러한 상태에 놓인 사람으로 영원토록 존재하는 것이다.-381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