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주받으리라, 너희 법률가들이여!
프레드 로델 지음, 이승훈 옮김 / 후마니타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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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 시대에는 주술사가 있었다. 중세에는 성직자가 있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법률가가 있다. 어느 시대에나, 자신들이 갈고닦은 특수한 지식의 권위를 지켜 내기 위해, 기술적 수법에 뻔뻔하고 그럴듯한 말장난을 첨가해, 인간 사회의 우두머리로 군림하던 영특한 무리들이 있었다. 어느 시대에나, 그 직업적 속임수가 문외한들에게 발각되지 않게 숨기고, 당대의 문명사회를 자기들의 방식대로 운영하던, 사이비 지성의 독재 체제가 존재했다. - 21쪽

이 모든 것은 일상적인 사실이지, 허공에 있는 추상 관념이 아니다. 그리고 법이란 단지 이런 수많은 사실들을 어떤 방법으로 다룰 것이냐의 문제일 뿐이다. 요점은 추상적인 법적 관념들은 땅으로 내려오기 전까지는 전혀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단 땅으로 내려와서, 물리적 사실에 적용되면, 관념은 단지 하나의 말(word)이 될 뿐이다. 법률가가 열심히 서술하고, 정당화하며, 밥벌이로 삼는 말 말이다. 법률가는 언제나 그들이 말하고 사용하는 법의 원칙이 간단하고, 구체적이며 비법률적인 문제들을 복잡하게 말하는 방법 이상의 그 무엇이라고 믿기를 원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틀렸다. 그래서 고(故) 올리버 홈스 판사는 다음과 같이 말해 실질적으로 업계의 반역자가 되었다. "일반 개념이 개별 사건을 결정하지는 않는다." - 28, 29쪽

법이란 학문 세계의 `킬리루`새(killy-loo bird)다. 아일랜드 신화에 의하면, 킬리루새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관심이 없고 지나쳐 온 곳에만 흥미가 있는 까닭에 뒤로 날기만을 고집하는 새다. 그리고 법 역시 이와 마찬가지로 앞으로 나갈 때는 어색한 날갯짓으로 머뭇거리며, 그 눈은 지나쳐 온 곳에 변함없이 고정되어 있다. 의학, 수학, 사회학, 심리학과 같은 대다수 학문의 목적은 앞을 내다보고 새로운 진리, 기능, 유용성에 다가서는 데 있다. 오직 법만이, 자신의 오랜 원칙과 선례(precedents)에 끊임없이 집착하며, 구태의연을 덕으로, 혁신을 부덕으로 삼는다. 오직 법만이 시대에 뒤떨어진 방식을 고쳐 변화하는 세계의 필요에 부응하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에 저항하고 분개한다. - 44쪽

그러나 법적 결정을 내리는 법관은 대체로 자신이 결정을 내리는 사건의 결과에 그 어떤 관심(이해관계)도 갖고 있지 않다. 물론, 만약 그들이 관심이 있다면 - 법관이라 해도 정치나 사회적인 감정을 갖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뉴딜이나 노동조합이나 대기업에 대한 나름의 호오를 가지고 있다 - 그들은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부인의 법적 판단 과정(결정을 내리고, 이에 원칙을 끼워 맞추는)을 되풀이할 수 있으며 실제로 자주 그렇게 한다. 다시 말해, 그들은 먼저 판결하고 나중에 정당화한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최소한 사법적이 아닌 실질적인 방법으로 일을 하게 된다(실질적인 것과 사법적인 것은 사오 배타적이다). - 168쪽

법이 엄밀한 과학이 아닐 뿐만 아니라 엄밀한 과학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법이 추상적인 원치에 근거해 특정 사안을 해결하는 한 말이다. 악마가 언제나 자신의 목적을 위해 성서를 인용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사안에서 양쪽 변호사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항상 법을 인용할 수 있다. - 181쪽

요점은, 서로 완전히 동일한 두 개의 사실 상황이란 그 언제 그 어느 때고 결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법원은 언제나 두 사실 상황 간의 어떤 사소한 비본질적인 차이점도 `본질적인` 사실 간의 차이점이라고 칭할 수 있다. 그러므로 두 번째 자동차 사고에서, 먼젓번 사고로부터의 사실변화 가운데 아무것이나 선택되어, `본질적` 변동으로 분류될 수 있다. 그리고 무엇이 본질적 변동이냐에 따라 그 사건이 포함되는 사건의 그룹(판례), 그리고 그 사건을 결정하는 법적 원칙이나 원칙들이 달라진다. - 186쪽

그러나 잠시만이라도 생각해 보라. 왜 사람들은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성문법과, 서명해야 하는 사업 문서와, 그 감독 아래 계속 살아야 하는 규칙과 제한을 완전하고 정확하게 이해하는 권리를 가져서는 안 되는 것일까? 모든 법률 용어의 배후에 존재한다고 하는 관념이, 항상 그렇듯이 누군가에게 극히 중요하다면, 법률가 집단의 사적이고 은밀한 소유물이 아닌, 관계된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공유물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 198, 199쪽

그러나 그들은 법의 은어(隱語)를 결코 평범한 일상 언어로 번역할 수 없으며 그렇게 하려 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법적 관념의 전달은 법률가의 특수한 방언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음은 명백해 보인다. 이는 불행히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 201쪽

이는 법이란, 앞서 여러번 말했듯이, 그 모두가 추상적인 일반 원칙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원칙들은 인간사의 구체적 실체와 실질적이고 필연적인 연관이 전혀 없다. 그들은 모두 모호하고 그들 중 대다수는 모순적이므로 법을 구성하는 원칙의 덩어리에서 가장 간단하고 작은 문제에 대한 명쾌하고 확실한 해답을 찾아내는 일조차 말 그대로 불가능하다. 이런 진실이 법률가는 물론이고 비법률가에 의해서도 인식되지 못하는 유일한 이유는, 그 원칙이 표현된 언어가 그 자체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인간사의 구체적 실체와 실질적이고 필연적인 관련이 없는 단어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 201쪽

그러므로 모든 법의 주문(呪文)은 일종의 순환적인 모순의 고리를 맴돈다. 법률 언어는 (제정법과 문서와 판결문에서) 이상하고 생소한 단어를 사용하는데, 그 이유는 그런 단어들이 법을 구성하는 추상 원칙과 한 묶음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원칙과 관련해서 쓰이지 않는 이상, 그 단어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러나 법 원칙은 자신을 표현하는 법률 단어에 의거하지 않고서는 결코 이해될 수 없다. - 201쪽

법이 부자, 보수주의자, 자신이 가진 엄청난 돈과 재산을 유지하고 이를 지속적으로 늘리려는 사람이나 회사들을 정기적으로 편드는 중요한 이유가 또 하나 있다. 그 이유는 법 자체의 본성에 내재한다. 왜냐하면 여러분도 알다시피 법이란 불변하는 관념적 진리의 거대한 몸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시대는 흐르고 삶의 방식은 변하고 인간사의 양상도 변화하지만, 법의 원칙들은 움직이지도 않고 흔들리지도 않은 채 그대로다. 요컨대 법이란, 그 자체의 정의에 의하면, 현상 유지의 과학이다. - 247쪽

인간 분쟁의 질서 있는 처리에서 확실성과 일관성이란 결코 존재할 수 없으므로, 현명한 방책은 구체적인 개별 문제의 해결에서 우직하게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의라는 것 역시 분명히 형태가 없고 불확실한 이념이다. 어떤 사람의 정의가 다른 사람에게는 독약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성문법이 존재한다. 무엇이 공평하고 무엇이 옳으냐에 대해 사람들의 생각이 정면으로 충돌할 때는, 가능하면 민주적 절차에 따라 제정된 성문법이 그 해답을 내려 주어야 한다. - 257쪽

법률 용어가 수행하는 주된 기능은 관념을 명쾌하게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법률적 사고의 혼란 모호 공허함을 은폐함으로서, 법을 이해하고자 애쓰는 보통 사람들을 괴롭히는 난해함이, 관념이 아니라 언어 자체에 기인한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다. 길고 생소한 언어와 끊임없이 반복되는 문장이 그와 같은 책략을 작동시킨다. 그들은 언제나 그렇듯이 엄숙하게 서술되거나 낭독됨으로써 깊고 심각한 인상을 전달한다. 실제로는 아무런 내용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더해, 계속 언급해온 바와 같이, 법률가 본인들 역시 일반인과 마찬가지로 법률 용어의 장중한 거드름에 거의 예외 없이 완전히 사로잡혀 있다. 그들은 위대하고도 놀라운 생각이 법률 용어로 전달된다고 실제로 믿으며 결연히 주장한다. - 200쪽

만약 정부와 기업과 개인의 사적인 활동이 어떤 논리적인 규칙에 따라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마 혼란에 빠지거나, 폭력이 분쟁 중재자로 재등장하는 것을 지켜보게 될 것이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핵심을 놓쳤다. 그 핵심은 법률가들이 우리의 규칙을 만들고, 전체 문명사회는 그들을 따르며, 그렇지 않으면 대가를 치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명사회를 구성하는 절대다수의, 법률가가 아닌 보통 사람들은, 규칙이 어떻게 그리고 왜 만들어지는지에 대해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들은 결코 어떤 규칙이 좋은 규칙인지 혹은 나쁜 규칙인지, 도움이 되는 규칙인지 혹은 방해만 되는 규칙인지, 사회에 이로운 규칙인지 아니면 법률가에게만 유리한 규칙인지 묻거나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들은 두 눈을 감은 채 자신들의 삶의 대부분을 법률가가 운영하도록 방치하고 있다. - 22,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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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스테이트 오브 더 유니언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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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보기에는 바로 그 점이 현실적이라는 거야. `인간은 왜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인생에서 벗어나기 위한 탈출구로 사랑을 선택하는가`라는 게 <보바리 부인>이 던지는 메시지니까." - 9쪽

"플로베르는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얽매는 감옥과 맞싸워야 한다는 사실을 최초로 깨달은 소설가야."
"아빠에게도 스스로 자신을 얽매는 감옥이 있어요?"
"누구에게나 자신을 얽매는 감옥이 있지. 나 역시 가끔 삶이 지겹다고 느낀단다." - 10쪽

양면적인 건 나쁘지 않아. 프랑스에 이런 말이 있어. `Tout le monde a un jardin secret. 누구에게나 비밀의 정원이 있다.`" - 20쪽

우리는 스스로 덫을 놓는다.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그 상황을 피하려 하지 않는다. - 53쪽

"네가 엄마의 세계에 들어온 걸 환영해. 내 경험상 아직 고난은 시작되지도 않았어. 제프리를 키우느라 21년 동안 애쓰고 나면 결국 넌 그 아이에게 미움을 받게 될 거야." - 58쪽

"쉰 살만 넘어봐. 시간이 그냥 증발해버리는 것 같아. 눈 한 번 깜박하면 크리스마스고, 또 한 번 깜박하면 여름이지. 그러다보면 인생이란 뭘까 생각하게 돼." - 85쪽

"조셉 콘래드가 말했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만이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다.`라고요." - 114쪽.

왜 사람들은 가진 것과 갖고 싶은 것들을 이야기하는데 이처럼 많은 시간을 쏟아 부을까? - 177쪽

NPR에서 브람스의 <저먼 레퀴엠>이 흘러나왔다. 진행자가 인간의 삶은 유한하고 짧다는 깨달음을 주는 곡이라고 설명했다. 브람스 음악이 나를 뒤흔들었다. 온갖 걱정 속에서 가느다란 희망의 빛이 반짝였다. 마치 브람스가 내 마음을 알고 위로하는 듯했다. 좋든 싫든 우리는 인생에서 벌어지는 일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 208쪽

사람들은 마치 삶이 영원할 것처럼 살아간다. 언젠가 죽는다는 걸 알면서도 삶이 유한하다는 것, 즉 우리가 어느 날 세살에서 사라져야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살아간다. 우리에게 벌어지는 모든 일이 그저 지나가는 과정일 뿐이라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한다. 우리가 걸어온 발자취와 애써 이루어놓은 성취들이 죽음과 함께 모두 사라진다는 걸 깨닫는 순간마다 우리는 몸서리치며 자기 자신과 타인에게 상처를 주게 되는 건 아닐까? - 208쪽

우리는 누구나 자기가 누리지 못하는 걸 갖고 싶어 한다. 자기 자신에게는 없는 걸 바란다. 아무리 성공적인 삶을 살았더라도 자기 자신이 걸어온 발자취를 돌이켜보며 후회한다. 작금의 현실에, 자기 자신이 이루어놓은 것에 대해 결코 만족할 수 없기 때문이다. - 212쪽

"우리는 가장 가꾸운 사람들을 끊임없이 괴롭히며 살아가지. 82년이란 긴 세월을 살아오면서 배운 게 있다면 용서하고 용서받는 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거야." - 220쪽

인생이란 일상의 사이사이로 섬광처럼 번쩍이다가 지나가는 순간에 불과했다. 불행한 인생을 살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설레는 기분으로 잠에서 깨어나 오늘 하루를 또 즐겁게 살아야지 하는 생각을 가져본 적도 없었다. 하루하루 그저 순탄하게 지낼 수 있기만 바랐다. 물론 나는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어느 정도 간직해 왔고, 긍정적으로 생활하려고 애써왔다. 그렇지만 나는 `내가 스스로 행복해질 수 있는 일을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 - 281쪽

"희망은 모호한 거야. 어떤 일이든 가능하고, 어떤 일이든 불확실하니까." - 448쪽

"어떤 일도 가능하고, 어떤 일도 불확실하다." - 4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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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을 위하여 - 우리 인문학의 자긍심
강신주 지음 / 천년의상상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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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그동안 시인을 이해할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시를 이해하려고 했을까. 김수영의 삶과 그 삶속에 뒤엉킨 언어로 표현된 그의 시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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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을 위하여 - 우리 인문학의 자긍심
강신주 지음 / 천년의상상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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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방법을 가진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이성복 시인의 멋진 말이다. 하긴 어떻게 어떤 사람을 사랑하기도 전에 미리 사랑하는 방법을 가질 수 있겠는가? 만약 가능하다면 그것은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와 무관하게 결정된 사랑하는 방법을 그에게 실험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불행히도 바로 이때 사랑은 폭력으로 변질되고 마는 것 아닐까. 사랑만이 그런 것은 아니다. 삶도 예술도 마찬가지니까. 방법을 가진 삶은 삶이 아니다. 미래의 삶을 현재에만 타당한 방법으로 통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방법을 가진 삶은 박제된 삶일 수밖에 없다. 이런 삶에서는 새로운 타자와 바주쳐서 자신이 변화되는 일은 생길 수 없다. 마찬가지로 방법을 가진 예술도 예술이라고 할 수 없다. 왜냐고? 미리 정해진 방법이 있다면, 예술은 창조성을 잃고 단순한 기술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 머리말

우리에 갇힌 동물보다 자연공원에 방목된 동물이 더 자유로운가. 겉으로는 자유로워 보이지만, 자세히 생각해 보면 본질적으로 다른 점은 하나도 없다. 허용된 자유는 언제든 허락한 측에서 철회할 수도 있는 불완전한 자유, 아니 정확히 말해 자유를 표방한 기묘한 억압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자연농원의 동물들은 자신을 가두는 사방의 벽 쪽으로 가기보다는 본능적으로 가운데로 모인다. 하긴 벽에 직면하는 순간, 자신이 갇혀 있다는 사실을 알 테니 얼마나 불쾌한 일이겠는가. "한계를 넘지 않는다면, 너희들 마음대로 해도 좋다." 이것이 바로 허용된 자유의 논리이다. 허용된 자유를 자유라고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자신의 행동을 검열하게 된다. - 21쪽

나만의 삶, 나만의 감성, 나만의 욕망을 되찾는 방법은 없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내면으로 침잠하면 안 된다. 오히려 외부로 과감하게 나아가야 한다. 외부는 어떤 식으로든지 마음을 격동시킬 테니까 말이다. 자신의 사유로 예측하지 못한 미묘한 감정이 출현할 때, 우리는 드디어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얻는다. "생각하지 말고, 느껴라!" 단독성을 회복하려는 사람에게 이보다 좋은 행동 강령도 없을 것이다. - 153쪽

1950년대 김수영은 인간의 치명적인 단독성을 서럽게 통찰했다. 어찌 서럽지 않겠는가. 그의 통찰이 옳다면 인간은 결코 타인과 하나가 될 수 없으니 말이다. 사람은 모두 타인의 삶을 흉내 내지 않고 자신만의 삶을 살아 내야만 한다. 그러므로 누군가 자신의 스타일을 나에게 강요한다면, 당연히 목숨을 걸고서 저항해야만 한다. 타율적이든 자율적이든 그의 스타일을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스스로 돌기를 그친 것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 비록 살아 있다고 해도 죽은 것에 다름없다. 김수영이 평생 독재에 대해 그토록 치열하게 저항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독재는 거대한 팽이가 자기의 회전 스타일을 모든 팽이에게 강요하는 정치 체제이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이것이 정치 체제에만 해당되는 것일까? 그것은 유일신과 그의 가르침을 모든 인간에게 강요하는 초월 종교에도, 자본을 유일한 가치로 떠받드는 자본주의에도 통용된다. - 186, 187쪽

어떤 점에서 혁명가는 시인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새로운 스타일의 글을 창조하는 시인처럼 혁명가도 강인한 고독을 기반으로 새로운 사회의 스타일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혁명가는 시인과 구별될 수밖에 없다. 아직 노예근성을 버리지 못한 사람들이 존재한다면, 혁명가각 제안한 새로운 스타일의 사회, 즉 `자유로운 공동체`라는 이념은 실현되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혁명가는 완성되었지만, 혁명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셈이다. 반면 자신만의 스타일로 글을 쓰는 데 성공했다면, 시인은 자신의 자유를 충분히 달성한 셈이다. 김수영이 "혁명가과 시인은 구제를 받을지 모르지만, 혁명은 없다"고 말했던 것도 이런 까닭이다. 분명 혁명가 자신이나 시인 자신은 자유를 구가하는 데 성공한 사람이다. 그렇지만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이 아직 자유를 구가 하지 못한다면, 혁명은 성공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래서 김수영의 말대로 "혁명은 상대적 완전을, 그러나 시는 절대적 완전을 수행"한다고 할 수 있다. - 276, 277쪽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방인에게 낯선 사람과 사물, 언어는 `의미의 결핍`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항상 `의미의 과잉`으로 다가온다는 점이다. 낯선 곳에서의 모든 것은 이런 의미도 혹은 저런 의미도 가질 수 있는 것으로 보일 테니까 말이다. - 292쪽

누누이 강조하지만 시가 어려워 보이는 이유는 시인 탓이 아니라 우리 탓이다. 앵무새처럼 말을 하는 우리가 자기만[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의 말을 어떻게 쉽게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쯤 시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가 지기만의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때다. 1964년 <시인의 정신은 미지>라는 산문에서 김수영이 "시인의 자격은 시인을 발견하는 데 있다"고 이야기 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사랑을 온몸으로 겪어 낸 사람, 다시 말해 남의 사랑을 모방하지 않고 자신만의 사랑을 하는 데 성공한 사람만이 괴테의 사랑 이야기를 읽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 시인은 "온몸으로 온몸을 밀고"갈 뿐이다. 이것이 시인의 최고 긍지인 자유다. 물론 그러려면 스스로 살지 못하게 하는 현실과의 불화는 불가피하다. 그래서 시인의 시에는 자유에의 의지와 동시에 그가 부딪히는 현실에 대한 감각이 묻어 있는 법이다. - 341쪽.

그렇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는 4.19 혁명의 좌절을 민주주의에 대한 자신의 통찰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계기로 삼는다. 민주주의는 외적인 제도나 형식이 아니라 사람들의 자유정신이 확보되어야 하는 문제라는 통찰이다. 모든 사람들이 투철한 자유정신을 가진다면, 그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는 민주적인 공동체, 그러니까 자유로운 개인들의 공동체일 수밖에 없다. 어떻게 자유로운 개인들의 공동체에서 모든 사람을 자기 뜻대로 통제하겠다는 독재자나 소수의 지배자들이 등장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 민주주의는 인문주의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미사여구에 지나지 않는 이념이다. - 3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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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해줘
임경선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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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사람들은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 주는 운명을 떠안고 살아가는지도 몰라.˝ -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언제라도 기꺼이 상처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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