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채색 삶이라고 생각했지만
김동식 지음 / 요다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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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가 닿지 않아 소설 읽기를 미루고 있었는데, 소설보다 에세이를 먼저 읽었다. 김동식이라는 작가의 탄생기를 엿본 느낌이다. 그의 평범함, 솔직함, 겸손함, 관대함이 많은 이들로 하여금 그가 작가가 되는 극적인 모습을 꿈꾸게 했는지 모른다. 누군가의 바람이 될 수 있는 사람이라니,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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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역사 - '공무도하가'에서 '사랑의 발명'까지
신형철 지음 / 난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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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은 ‘시‘를 읽었지만, 나는 ‘그‘를 읽었다. 그를 읽느라 시에는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가 쓴 한 단어, 한 문장, 한 페이지를 읽는 내내 나는 설랬고, 그를 시샘했고, 결국 그의 시선과 사색에 감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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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케의 눈물 - 대한검국에 맞선 조국의 호소
조국 지음 / 다산북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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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개인으로서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은 멸문지화를 입고도 잃지 않는 저 품격에 대해 감동할 수밖에 없다. 그 ‘화‘가 결국 그를 정치계로 끓어들였다는 아이러니는 별론으로 하고, 정치와 법치에 관한 그의 생각과 구상이 이미 오래전부터 그를 준비된 정치인으로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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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법치‘, 즉 ‘법의 지배 rule of law‘는 ‘법을 이용한 지배 rule by law‘가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법치‘는 단지 권력자가 법을 통해서 통치 또는 지배한다거나, 국민은 그 법을 무조건 준수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법을 이용한 지배‘에서 법은 통치의 도구이자 수단일 뿐이다. ‘법을 이용한 지배‘는 조선시대에도 일제강점기에도, 권위주의 정권 · 군사독재 정권하에서도 이루어졌다. 권위주의 정권, 군사독재 정권하에서 제정된 각종 ‘반민주악법‘에 대한 예는 생략하기로 하자. 당시 ‘법치는 (노동자 시인 백무산 씨의 시 구절을 빌려 말하자면) 국가권력이 "법대로 테러"하는 것에 불과했다. - P124

남아공 헌법재판관 알비 삭스Albie Sachs의 말처럼 우리는 "법의 가식에 대해서는 항상 회의적인 태도를 취해야" 하지만 "법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결코 냉소적인 태도를 취해서는 안 된다." - P135

선출되지 않은 권력은 언제나 선출된 권력의 통제 아래 놓여야 한다. - P142

이상에서 확인되듯이 법 공부를 잘하려면, 제일 먼저 사람과 세상을 보는 눈을 정립해야 한다. 법학은 ‘가치지향적 학문‘이지‘가치중립적 학문‘이 아니다. 어떠한 가치를 중심에 놓을 것인가를 스스로 분명히 하고, 다른 가치와의 소통과 타협을 추구해야 한다.  - P146

‘공감‘과 ‘연대‘가 약화되고 개인이 처한 사회·경제적 배경을 무시하는 ‘능력주의能力主義, meritocracy‘가 사회에 자리 잡으면 공동선common good은 무너진다.  - P268

여전히 많은 사람이 야근과 특근을 밥 먹듯이 하고, 법적 권리인 연차휴가도 제대로 쓰지 못하며, ‘신성한 노동‘을 계속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믿고 산다. 버트런드 러셀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 사회에서는 "경제적 두려움이 사람들의 사고를 지배하고 밤에는 꿈까지 지배한다." - P271

그는 러셀 자서전에서 자신이 세 가지 열정에 사로잡혀 떠돈 나그네라고 말했다.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이 세 가지 열정에 대해 공감할 것이다.
"단순하지만 누를 길 없이 강렬한 세 가지 열정이 내 인생을 지배해 왔으니, 사랑에 대한 갈망, 지식에 대한 탐구욕, 인류의 고통에 대한 참기 힘든 연민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열정들이 나를 이리저리 제멋대로 몰고 다니며 깊은 고뇌의 대양 위로, 절망의 벼랑 끝으로 떠돌게 했다." - P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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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에우리디케를 한 번 더 잃은 뒤에 오르페우스가 (타인들에게나 그 자신에게나 더 ‘치명적인‘ 시인이 되었다는 사실, 게다가 그런 영향력은 그의 노래에 담겨 있는 ‘감정적인‘ 설득력 때문이라는 사실을 존중하지 않을 수 없다. ‘비극적인 것‘과 ‘문학적인 것‘ 사이의 관계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오르페우스 신화가 비극적인 것은 이것이 사랑하는 연인을 제 손으로 한 번 더 죽인 사람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별의 순간에 연인은 나를 떠남으로써 내게서 한 번 죽는다. 그런데 더 사랑하는 사람은 더 사랑하는 사람의 위치에 서있기 때문에 이별의 순간에 상대방을 질리게 만들 수 있다. 죽은 연인을 살리려는 노력이 외려 그를 한 번 더 죽이게 되는 경우다. 이 경우 떠난 것은 너이지만, 네가 돌아올 수 없게 만든 것은 내가 되고 만다. - P75

그녀가 불평해야 할 것이 있다면 오르페우스가 자신을 ‘너무‘ 사랑한다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느 편에서 봐도 이것은 너무 사랑한 자의 비극이다. 여기에 상실과 과실(過)이 함께 있다. 반드시 이 둘이 함께 있어야만 ‘회한‘이라는 감정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나는 회한이야말로 문학의 근본 감정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한다. 내 사랑은 두 번 죽는다. 한 번은 운명에 의해서, 또 한 번은 나에 의해서. 사랑했던 사람을 두 번 죽여본 사람은 시인이 될 수 있다. 마이나스들에게 온몸 찢어져 그 회한마저 찢기기 전에는 그만둘수 없을 것이다. - P86

그런데 너무 오랫동안 울음을 참아온 그는 정작 자신이 그래왔다는 사실을 모른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것 중 하나는 자기 자신이 슬픔이라는 것을 잊어버린 슬픔이다. 보라. 참는 사람은 늘 참는다. - P78

"완벽한 너나 참아"나 "술보다 이게 나아"와 같은 구절들은, 칼을 들고는 있으되 그 누구를 찌를 힘이없어 허우적대다가 그만 제 몸에 상처를 입히고 마는, 그런 사람 같다. 가끔 그는 관객에게 노래를 들려주기 위해서가 아니라자기 자신과 너무 오래 단둘이 있지 않기 위해서 무대에 오르는것처럼 보이는데, 그때 그는 자신의 고통과 함께 무대에 오른다. 그의 고통은 수다스럽지 않다. 진정한 고통은 침묵의 형식으로현존한다. 고통스러운 사람은 고통스럽다고 말할 힘이 없을 것이다. 없는 고통을 불러들여야 할 때 어떤 가수들은 울부짖고 칭얼댄다. 그는 그럴 필요가 너무 없다. - P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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