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에우리디케를 한 번 더 잃은 뒤에 오르페우스가 (타인들에게나 그 자신에게나 더 ‘치명적인‘ 시인이 되었다는 사실, 게다가 그런 영향력은 그의 노래에 담겨 있는 ‘감정적인‘ 설득력 때문이라는 사실을 존중하지 않을 수 없다. ‘비극적인 것‘과 ‘문학적인 것‘ 사이의 관계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오르페우스 신화가 비극적인 것은 이것이 사랑하는 연인을 제 손으로 한 번 더 죽인 사람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별의 순간에 연인은 나를 떠남으로써 내게서 한 번 죽는다. 그런데 더 사랑하는 사람은 더 사랑하는 사람의 위치에 서있기 때문에 이별의 순간에 상대방을 질리게 만들 수 있다. 죽은 연인을 살리려는 노력이 외려 그를 한 번 더 죽이게 되는 경우다. 이 경우 떠난 것은 너이지만, 네가 돌아올 수 없게 만든 것은 내가 되고 만다. - P75

그녀가 불평해야 할 것이 있다면 오르페우스가 자신을 ‘너무‘ 사랑한다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느 편에서 봐도 이것은 너무 사랑한 자의 비극이다. 여기에 상실과 과실(過)이 함께 있다. 반드시 이 둘이 함께 있어야만 ‘회한‘이라는 감정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나는 회한이야말로 문학의 근본 감정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한다. 내 사랑은 두 번 죽는다. 한 번은 운명에 의해서, 또 한 번은 나에 의해서. 사랑했던 사람을 두 번 죽여본 사람은 시인이 될 수 있다. 마이나스들에게 온몸 찢어져 그 회한마저 찢기기 전에는 그만둘수 없을 것이다. - P86

그런데 너무 오랫동안 울음을 참아온 그는 정작 자신이 그래왔다는 사실을 모른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것 중 하나는 자기 자신이 슬픔이라는 것을 잊어버린 슬픔이다. 보라. 참는 사람은 늘 참는다. - P78

"완벽한 너나 참아"나 "술보다 이게 나아"와 같은 구절들은, 칼을 들고는 있으되 그 누구를 찌를 힘이없어 허우적대다가 그만 제 몸에 상처를 입히고 마는, 그런 사람 같다. 가끔 그는 관객에게 노래를 들려주기 위해서가 아니라자기 자신과 너무 오래 단둘이 있지 않기 위해서 무대에 오르는것처럼 보이는데, 그때 그는 자신의 고통과 함께 무대에 오른다. 그의 고통은 수다스럽지 않다. 진정한 고통은 침묵의 형식으로현존한다. 고통스러운 사람은 고통스럽다고 말할 힘이 없을 것이다. 없는 고통을 불러들여야 할 때 어떤 가수들은 울부짖고 칭얼댄다. 그는 그럴 필요가 너무 없다. - P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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