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
파울로 코엘료 지음, 오진영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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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만족보다는 실망을 더 자주하기 시작했지만, 코엘료의 책은 여전히 내 구매목록에 포함되어 있다. 처음 이 책의 제목을 접하고 나서는 아마도 <승자는 혼자다>와 유사한 류의 소설일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제목과 같은 흥미진진한 첩보물류 소설은 아니었다. 이 소설은 마타 하리(마르하레타 젤러)라는 실존 여성에 대한 사실에 근거로 한 소설이다. 내가 보기에는 한 인물을 둘러싼 은폐된 사실을 다시 재조명하고자, 관련된 사건들을 '주관적으로' 엮어 놓은 책으로 보인다. 굳이 주관적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이 책이 서간(書簡)의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사실'이라는 명사를 수식하는 것은 '객관적'이라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지만, 사실 자체가 왜곡되어 버린 상황에서 객관성을 찾는 것처럼 무모한 일도 없을 것이다. 오히려 이 경우는 은폐된 것을 밝히고 더 세밀하고 구체적인 부분을 드러내기 위한 '주관적'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이다.

 

이 책은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제외하면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프롤로그에서는 마타 하리의 처형장면을 기사로 건조하게 서술하였고, 이후에는 마타 하리가 자신의 변호사에게 이 사회의 부조리 앞에 선 자신의 삶을 회고하는 서간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1부에서는 불운한 유년기를 벗어난 그가 군인 장교를 만나 결혼을 하고 인도네시아에서 생활하던 때를, 2부에서는 자신을 갉아먹던 결혼생활에서 벗어나 파리로 이동해 전위적인 무용수로 성공하던 때를 각각 회고하고 있다. 2부 후반부에는 전쟁이 발발하자 프랑스를 벗어나 네덜란드로 탈출하며 첩보활동을 제안받는 부분이 간략하게 제시되어 있기는 하다. 다만, 그가 지금까지 전해오는 명성대로 대단위의 첩보활동을 한 이중간첩인지, 혹은 불확실하고 모호한 시대상황과 무책임하고 비도덕적인 남성들에 의한 희생양이 된 것인지는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지는 않다.

 

저자는 변호사의 글을 빌려 3부에서 당시 사법부의 무지와 무능에 대해서 절망하며, 마타 하리가 썼던 1부와 2부의 글에 심정적인 동의를 보내고 있다. 억울하지만 당당하게 그려진 마타 하리의 목소리와 변호사의 한탄과 자괴가 뒤섞여 마타 하리의 안타까운 최후에 대한 죄책을 부조리한 사회에, 그것을 유지하려는 그릇된 권위에, 그것에 부역하는 이들에게, 비겁한 남성들에게 묻고 있다. (남성일 것으로 추정되는) 변호사의 울분에 찬 문체는 나에게 거대한 부조리 앞의 체념을 전하였지만, 마타 하리의 차분한 해명과 서술은 체념이 아닌 극복의 느낌을 연상시켜주었다.

 

작가는 왜 이 책을 썼을까. 한 때 최고의 무용수였던 그녀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할 수 밖에 없었던 부조리에 대한 분노였을까, 왜곡된 역사적 사실을 바로 잡고 싶다는 의지였을까, 과거의 사실에 빗대어 현재에도 계속 반복되고 있는 이러한 문제들을 극복해보자는 암시였을까. 그가 작품 초기부터 집중하고 있는 은유 - 여성성과 신비("죄 없이 잉태하신 성모마리아") - 에 대한 일반인들의 무지를 비웃기 위함이었을까.

나는 그 씨앗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해바라기 씨앗이란다. 하지만 해바라기 씨앗 그 이상의, 네가 배워야 할 가치가 담겨 있단다. 이 씨앗들은 네가 다른 꽃시와 구별하지 못할 때라도 언제나 해바라기로 피어날 거야. 아무리 원한대도 장미나 우리 나라의 상징인 튤립으로 변할 수는 없어. 타고난 자신의 존재를 부정한다면 죽을 때까지 고통스러운 삶을 보내게 된단다.
그러니까 그게 무엇이든 너의 운명을 기쁜 마음으로 따르도록 해라. 꽃들이 피어나면 자신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모두의 사랑을 받게 되지. 그러다 시들면 씨앗을 남겨 다른 존재들이 신이 하시는 일을 이어가게 한단다." - 32, 33쪽

"꽃들은 우리에게 가르쳐주지. 영원한 건 아무것도 없다고. 아름다움도 시듦도 지나가고 새로운 씨앗을 남길 거야. 네가 기쁠 때나 아플 때, 슬플 때에도 그 사실을 기억하면 좋겠어. 모든 것은 지나가고 늙고 죽고 새로 태어난다는 것을." - 33쪽

삶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지 모를 때는 길을 잃는 법도 없습니다. - 86쪽

내가 유일하게 알고 있는 것은, 아무리 공포스럽다 해도 이 숲에는 끝이 있다는 것이고, 나는 저편에 다다르려 한다는 것이지요. 승리가 왔을 때 나는 관대할 것이고 나에 대해 온갖 거짓말을 한 이들을 비난하지 않을 것입니다. - 126쪽

"내가 어릴 적에 우리 부모님은 내게 피아노를 배우게 하였어요. 나는 그게 너무 싫었고 집을 떠나자마자 다 잊어버렸습니다. 한 가지만 제외하고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멜로디도 조율이 안 된 채로 연주하면 흉물스럽게 변한다는 것이죠." - 130쪽

"죄악은 신이 창조한 게 아니고, 우리가 절대적인 것을 어떤 상대적인 것으로 변형시키려 할 때 만들어졌어요. 우리는 전체를 보지 못하고 일부만 보게 된 겁니다. 그리고 그 일부가 죄와 규칙, 악에 맞서 싸우는 선을 결정하다보니 결국은 각자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죠." - 133, 134쪽

여자라는 죄로, 자유로운 영혼이었다는 더 큰 죄로, 대중 앞에서 옷을 벗었다는 막중한 죄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평판을 유지해야 하는 남자들과 관계를 가졌다는 위험한 죄로, 당신은 부당하게 희생되었습니다. 그들의 평판은 당신이 프랑스 혹은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질 경우에만 유지될 수 있겠지요. - 196, 1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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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1-02 20: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마타 하리의 일대기를 자세히 알아본 후에 코엘료의 소설을 읽으려고 했어요. 그런데 마타 하리를 소개한 책을 찾기가 힘들었어요. ^^;;

붉은눈 2017-01-02 20:25   좋아요 1 | URL
책 뒷면에 ‘작가 노트‘에 보니까 코엘료가 참고했던 책들이 나와 있네요. 팻 시프먼 <팜므파탈: 마타 하리의 사랑과 거짓말, 그리고 알려지지 않은 삶> (하퍼콜린스, 2007), 필리프 콜라스 <마타 하리, 그녀의 진짜 이야기> (플롱, 2003). 그런데 두 권 모두 국내에 소개되어 있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이 소설을 읽고 나니 저 역시도 보다 자세한 역사적 사실이 궁금해지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