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만에 신혼여행
장강명 지음 / 한겨레출판 / 201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좋아하는 소설가들의 에세이가 출간되면, 대체적으로는 구입해서 읽는 편이다. 작가 자체를 좋아해 그가 쓴 책이면 일단 읽어보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에세이를 통하여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거나, 그의 생각을 소설에서보다 명료하고 정확하게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장강명 작가의 에세이가 나왔다는 것을 알고 책을 선택하는데 별로 주저하는 마음은 없었다. 다만, 제목이 제목이니만큼 너무 신변잡기적인 글이 아니기만을 바랬을 뿐이다. (개인적으로는 남의 연애사에 별로 관심이 없는 편이라서...) 다행히(?) 우려했던 만큼은 아니었다.


차례를 보면 소제목들이 무척 독특하다. 제목만 보았을 때는 일부러 특이한 제목을 지으려고 고심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어쩌면 하루키를 흉내내어 독자들에게 익숙치 않거나 다소 생뚱맞은 표현들을 일부러 만든 것은 아닐지도 상상했었다. 책의 제목인 '신혼여행'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제목들 때문이었다. 예를 들면, '섭식장애가 있는 듯한 커플과 바보 같은 눈물', '이 불공평한 세계와 자기파괴적인 봉사 활동', '캘리포니아 드리밍과 수확체감의 법칙', '승합차의 최종 도착지와 유황 지옥에 빠지는 기분' 같은 것들이다. 

그런데 제목에 드러난 소재들은 모두 내용에 녹아있다. '더블린에 있는 것과 사장님들이 정하는 것'이라는 제목과 내용을 연결해보면, 여행을 가기 전 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이라는 책을 빌렸는데, 너무도 지루한 이 책이 자신이 어디에 있건 더블린에 있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을 준다는 것과 지하철역 옆에 있는 파리바게트 매장에 들렀는데 빵 가격이 자기 동네에 비해 너무 저렴해서 물어보았더니, 매장마다 빵 종류와 가격이 다른데 그것은 사장이 정하기 나름이라는 것이다. 그리 주목할 것 같지 않은 소재에서 제목을 뽑아내는 저자의 표현력에 탄복하고 말았다.


내용 자체가 흥미 있고, 작가의 글빨도 좋기 때문에 책은 술술 잘 읽힌다. 게다가 에세이의 최대 장점이라 할 수 있는 저자의 구체적인 생각을 직접적인 표현으로 접할 수도 있다. 글 곳곳에는 그의 결혼관, 직업관, 행복관 같은 것들이 일정 부분 녹아있다. 물론 이러한 생각들은 삶의 방식의 문제이므로 (당연히) 그 중에는 공감가는 부분도 있고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기 마련이다. 저자가 이 책에서 자신의 삶의 방식이나 주의(主義)를 옹호하기 위하여 할애한 주제들은, 부모와 자식의 대립, 결혼에 대한 생각과 같은 것들이다.


예를 들면, 저자는 부모와 자식 간의 언쟁이 있다면, 이는 부모가 잘못하는 것이라고 한다. 자식도 자기의 인생이 있는데, 부모 뜻대로 살지 않는다고 자식의 의사에 반대하거나 그것을 모욕할 권리가 없다는 주장이다. (여기까지는 좋다.) 그는 자신이 부모의 뜻대로 취업을 하거나 결혼 상대를 구하지 않은 논거로 이 주장을 활용한다. 그러면서 부모 뜻대로 취직하고 결혼하고 애 낳고 살았어도 시시하거나 안전하지 않은 삶이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 이유가 자신이 (기자가 되기 전에) 다니던 건설회사가 비리 의혹에 휘말렸는데 자신도 거기에서 자유롭지 못했을 것이며, 건설경기 추락으로 결국 옷을 벗게 되었을 것이고, 아내가 바람을 피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란다.


한편, 그는 스스로를 '실용주의자'라고 칭하는데, 언제나 가격 대비 성능을 따지기 때문에 불필요한 지출이나 허세를 부리지 않는다. 그래서 결혼식은 하지 않고 혼인신고만 올린 후 5년이 지나서야 신혼여행다운 신혼여행을 가게 된다. 하지만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를 거부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해방이라는 이름의 억압'이라며 비난한다. 그러면서 인위적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하려면 옷을 다 벗고 다녀야 한다거나 '사과'를 '자갈'로 불러야 한다는 등 억지스런 설명을 덧붙이기도 한다. (이런 식의 억지라면, 존재는 모름지기 살아가야 한다는 당위 자체도 억압이라는 논리가 된다). 자신의 선택과 그로 말미암은 현재를 긍정하려는 태도야 말릴 생각이 없지만, 스스로를 긍정하기 위한 논거들이 (미안한 얘기지만) 다소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몇몇 동의할 수 없는 생각과 표현, 나와는 썩 어울리지 않는 여행 스타일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관념들을 엿보며 그와 그의 아내가 함께하는 여행을 따라가는 일은 그래도 즐겁다. 남들은 이왕 한번 가는 신혼여행에 다소 무리를 해서라도 즐기고 올테지만, 실용주의자들인 이들 부부는 가격 대비 성능을 따져가며 하나하나를 선택한다. 그런데 그렇게 고민해서 선택한 저가항공이 연착되어 출발부터 피곤해지기 시작한다. 리조트로 들어가기 위해 불안한 구조의 승합차에 몸을 싣고, 힘들고 지치는 중에도 검색했던 맛집을 찾아 헤매는 여정은 안타까울 정도이다. 그러나 불필요한 환상과 작위적 우연으로 얼기설기 포장한 다른 여행서보다 (비록 결혼한지 5년이 지난 후의 신혼여행이라고는 하지만) 장강명이라는 작가에 대한 인간적인 면모와 풋풋한 신혼의 느낌, 그리고 소소한 재미가 어우러진 이 어설픈 커플의 솔직한 여행기가 더 낫다는 생각이다.

인격자, 리더, 세계사의 위인들, 일일드라마의 주인공들이라면, 그런 상황에서도 스스로를 믿고 ‘난 할 수 있다’며 결의를 다지겠지. 나는 그런 훌륭한 인간이 못 되었으므로 끊임없이 번민했다.
내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내가 옳은 선택을 한 걸까?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걸까?
마흔이 되어서까지 그런 걸 고민한다는 게 이상했다. - 21쪽

양쪽이 똑같이 잘못했나? 그렇지 않다. 언쟁을 벌이는 과정에서부터 부모님의 잘못이다. 자식이 자기가 생각하는 방향으로 살지 않을 때, 거기에 부모가 반대할 권리는 없다. 반대는 할 수 있어도, 모욕할 권리는 없다. 왜냐하면 그건 부모 인생이 아니라 자식 인생이기 때문이다.
우리 부모님이 특별히 나쁜 분들은 아니다. 사실 이건 대부분의 한국 부모들이 공통으로 갖는 문제다. 자식들의 인생에 과도하게 간섭하는 것. 자식이 타인임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 자식들의 인생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정신적인 폭력을 서슴지 않는 것. 그리고 나는 그 부모들을 이해한다.
그런 폭력이 원인은 대부분 사랑 때문이다. 이이러니하게도. 그들은 자식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자식이 위험에 빠지는 광경을 두고 볼 수가 없다. 그들은 안락한 감옥을 만들어 자식을 그 안에 가두고 싶어 한다. 과보호.
그리고 그 감옥 안에 갇혀 있는 한 자식은 영원히 성인이 될 수 없다. 인간은 자기 인생을 걸고 도박을 하는 순간부터 어른이 된다. 그러지 못하는 인간은 영원히 애완동물이다. - 37쪽

왜 이런 미친 짓거리가 사라지지 않을까?
내 생각에 그 이유는, 모든 사람들이 이 미친 짓거리에 협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세대가 미친 짓거리의 뼈대를 세우고, 신세대가 거기에 살을 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 미친 짓거리에 협조하지 않는 자들을 "걔 원래 좀 특이하잖아"라며 이단자 취급하기 때문이다. 그 미친 짓거리를 성대하게, 무의미하게 치러낼수록 찬탄을 사고 그 사실을 자랑스러워하기 때문이다.
미친 짓거리는 온 사회 구성원이 거기에 협조하는 한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점점 더 강화될 뿐이다. 사교육이나 학벌 같은 문제가 그렇다. 언제나 더 똑똑하고 더 진보적인 다음 세대가 자신들의 앞 세대보다 더 미쳐 있었다. 그들은 새로운 관습과 새로운 문화와 새로운 편견과 새로운 속박을 만들어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명문대와 똥통대’라는 기준을 세웠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거기에 ‘인서울’, ‘수도권’, ‘지방대’라는 기준을 추가했다. 손자 손녀들은 ‘서연고 서성한 중경외시 건동홍 국숭세단 광명상가’ 어쩌고 하는 긴 디테일을 만든다.
결혼도 똑같다. 부모들의 허영과 위선에 자식들이 적극적으로 협조한다. - 48, 49쪽

남녀차별이나 성희롱, 음주운전, 공공장소 흡연과 같은 문제에 대해서는 맹렬히 저항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 결과 좀 더 살기 좋은 세상이 되었다. 그런데 왜 학벌이나 결혼 문제는, 그 부조리에 대해 "X이나 까세요"라고 말하지 못하는 걸까.
그 이유는 아마 정체성 문제에 관한 한, 한국인들이 정신적으로 허약해서라고 생각한다. 자기 삶의 가치에 대해 뚜렷한 믿음이 없기에 정체성을 사회적 지위에서 찾는 것이다. 사회적 지위는 대학 간판이나 자식 결혼식장에 모인 하객 수로 구체화된다. 그래서 다들 거기에 집착한다. - 50쪽

예를 들어 내가 내일 갑자기 뇌종양으로 난독증에 걸린다 치자. 이 난독증은 아주 중증으로, 읽고 쓰는 능력이 완전히 사라지고 도저히 개선의 여지가 없다고 치자. 그러나 일상생활에서의 다른 능력은 전혀 피해를 보지 않는다고 가정하자. 즉, 소설가로서의 미래는 끝장이 났지만 다른 방식으로는 얼마든지 살 수 있는 상태다. HJ도 건강히 살아서 내 옆에 있다. 이때 나는 자살해야 할 것인가?
그럴 생각은 전혀 없다. 나는 목공이나 전기 기술 같은 걸 배워서 육체노동을 하며 살 것이다. 그것도 아주 즐겁게 잘 살 수 있을 것 같다. 솔직히 말하면 더는 글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데 대해 얼마간 안도감과 해방감마저 느낄 것 같다.
이 얼마나 모순인가? 마치 세상의 모든 작은 즐거움들이 상황에 따라 논리를 바꿔가며 나를 살리려 애쓰는 것 같다. HJ의 힘이 부칠 때는 글쓰기가, 글쓰기의 힘이 모자랄 때는 HJ가, 그리고 치킨이라든가 맥주라든가 자전거라든가 재미있는 책이라든가 초여름의 산들바람이라든가 잘생긴 개 같은 것들이.
실제로도 많은 사람이 그런 이유로 죽지 않고 사는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왜 사는가’라는 질문에 명확히 답하지도 못하면서. - 8

선글라스를 쓴 채로 점점 붉게 물들어가는 해를 바라보고 있으니 정신이 다시 멍해졌다. 그리고 나는 그 순간 깨달았다. 왜 사람들이 아름다운 풍경을 찾아다니는지, 왜 자전거를 타고, 왜 수십 킬로미터를 달리며 러닝하이를 느끼려 하는지.
사람들은 멍해지려고 그런 일들을 하는 것이다. 무슨 생각을 하건,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의 마음을 피로하게 만든다. 생각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대신 괴로움에 빠뜨린다. 이것이 선악과(善惡果)의 정체다. - 122, 123쪽

배로 다시 올라왔을 때 우리를 포함한 한국인 관광객들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물 뮈로 올라오고 나니 몸이 상당히 놀라고 지쳐 있다는 걸 깨닫게 됐고, 또 다들 어휘력이 빈곤해 조금 전에 본 별세계를 묘사하거나 그에 대해 토의할 실력이 되지 않았다.
에스키모들에게는 눈을 묘사하는 단어가 수십 가지라고 한다. 그런 단어들을 알기 때문에 그들은 땅에 눈이 쌓인 정도와 습도를 세밀히 분간하고 어제 내린 눈과 오늘 내린 눈의 다른 점에 대해 의견을 나눌 수 있다. 바닷속 풍경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하려면 그런 단어들을 알아야 했다. 그러나 그 배에 있던 한국인 관광객들이 해저에 대해 아는 단어라고는 열대어, 불가사리, 니모, 산호 정도가 고작이었다. - 153쪽

더 나아가서는, 신세계를 발견하는 일에 우리 사회가 과도한 찬탄을 보내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인생의 특정 시기에 신세계를 탐색하는 것은 권장할 만한 일이다. 마흔이나 쉰에 라도 종교나 마약의 대용품이 될 만한 분야를 찾는다면 좋은 일이다. 그리스 요리나 사도마조히즘이라도 좋다. 그러나 신세계를 찾는 것 자체가 목표가 될 수 있을까? 끊임없이 직업을 바꾸고, 분기마다 새 취미에 열정적으로 도전하며, 어딘지 모를 이상향을 찾아 쉴 새 없이 떠돌아다니는 삶이 바람직한 걸까? 그걸 낭만이라고 포장하는 건 시시한 사기 아닐까. 그것은 기실 그 사람의 세계가 그만큼 황량하고 별 볼 일 없음을 폭로할 따름이지 않은가. 어느 정도 날씨가 괜찮고 마실 물과 식량이 있는 평평한 땅을 찾으면 방랑을 멈추는 게 정상이다. 거기에 건물을 짓고 사람을 불러 모아야 한다. - 156, 157쪽

나는 생각했다. 이곳에 뭐가 낯선 게 있을까. 왜 도시에서는 이렇게 감동하지 못했을까.
‘도시에서는 이렇게 석양을 기다려서 천천히 본 적이 없었으니까. 저녁 무렵에는 늘 할 일이 있었으니까. 해는 매일 지는 거라고, 구태여 기다릴 필요가 없다고, 석양 따위는 한가할 때 보면 된다고 여겼으니까.’ - 174쪽

인간은 가치를 좇는 존재다. 그리고 가치를 좇는 행위 자체가 세상에 폭력적인 질서를 부여한다. 제멋대로 세계를 가치 있는 것, 가치가 덜 한 것, 가치 없는 것으로 분류하기 때문이다. 그런 질서는 필연적으로 구속과 억압을 만들어낸다. 모든 광명은 반드시 그림자를 만든다. 아니, 이건 적절치 않은 비유인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종이에 데생을 할 때 펜으로 어둠을 그려서 빛을 표현하듯, 그림자가 광명을 만들어낸다는 말이 옳겠다. 왜냐하면, 그 모든 가치는 결국 허구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구속과 억압을 통해 겨우 그 허구가 현실 세계에 모습을 갖추는 것이다. - 187쪽

가톨릭 사제의 삶이 왜 고귀한가? 하느님이 그 삶에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인가? 신을 믿지 않는 나는, 사제들의 삶에 가치를 부여한 것은 사제들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지키기 어려운 구속을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하고, 사제 서품을 통해 그 약속을 지키겠다고 선언하고, 사제복을 입고 자신이 선언자임을 언제나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기 때문이다. 허구와, 허구가 만들어 내는 구속을 받아들일 때 의미 있는 삶이 시작된다. 그것이 내가 이해하는 ‘2 더하기 2는 4’다. 이 수식은 넘어설 수 없는 한계지만, 동시에 많은 가치를 가능하게 하는 출발선이기도 하다. 공리 없이는 수학도 없다. 때로는 멍해지는 것이 좋지만, 언제까지나 선셋 세일링을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우리의 삶은 바다가 아닌 물 위에 있다. - 188, 189쪽

그러자 나는 이 여행이 인상에 대한 비유와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정의 중반을 넘기고서야 어떻게 하면 시간을 의미 있고 즐겁게 보낼 수 있는지 알게 된다. 다시 한번 처음부터 시작하면 진짜 잘할 수 있는데, 생각하면서.
유년기에는 ‘둘째 날’부터 잘 놀 수 있게 몸을 다져놔야 한다. 오전이나 젊은 시기에 맥주를 너무 많이 마시면 안 된다. 만약 그러면 남은 시간을 짜증이나 내다가 흘려보내게 된다. 스스로 즐거워지는 법을 찾아내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여행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수도 없이 계획을 변경하다 겨우 즐기는 법을 깨달았을 때, 그때 집에 돌아가야 한다. ‘아, 딱 이틀만 더 놀다 가면 좋겠는데’라고 아쉬워하면서. - 197쪽

행복을 얻기 위해 투입해야 하는 생산요소가 한 종류가 아니라 여러 종류인 거지. 거기에는 성숙한 인격도 필요하고, 돈도 필요해. 그리고 거기에도 수확체감의 법칙이 작동해서, 그런 요소 중 어느 것 하나만 잔뜩 넣는다고 해서 쉽게 행복감이 높아지지 않는 거야. - 207쪽

"응, 돈으로 사소하게 사서 해결할 수 있는 건 돈으로 해결하는 게 옳아. 일본 가고 싶은데 방에다 일본 그림 그려놓고 만족하는 것보다 그냥 일본 가는 게 나아. 그게 훨씬 더 싸게 먹히는 거야. 그런데 아직은 건강은 돈으로 살 수 없으니 평소에 운동을 해야지. 그리고 정신력도 진짜 중요해. 이게 나의 행복 철학이다. 정신, 육체, 돈의 삼각형 이론." - 208쪽


댓글(2)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16-12-30 16: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붉은눈님은 올해 동안 리뷰를 꾸준히 남기신 회원들 중 한 분입니다. 붉은눈님 같은 분들이 서재의 달인, 북플마니아 혜택을 받아야 합니다. 내년에도 좋은 글들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올해 마지막 주말 잘 보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붉은눈 2016-12-30 17:13   좋아요 1 | URL
아이고 아닙니다. 하반기에는 다른 일정으로 리뷰를 많이 남기지 못했습니다. 제 나름의 기억을 위해 긁적이는 수준이지만, cyrus님이 포스팅 하셨던 선정 기준의 문제점과 이 공간에 대한 애정에는 깊이 공감합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cyrus님의 폭넓고 전문적인 글에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내년에도 좋은 글 기대하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