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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상처를 허락하는 것이다 - 공지영 앤솔로지
공지영 지음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2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앤솔로지는 '시나 소설 등의 문학 작품을 하나의 작품집으로 모아놓은 것'이라고 한다. 이름에 걸맞게 이 책에는 그동안 저자가 썼던 소설과 에세이에서 선정한 문구들이 모여있다. 공지영 작가의 책은 거의 다 읽었다고 자부하며 기억을 한번 되살려볼 생각으로 가볍게 책을 펼쳤다. 아직 기억하고 있는 문장들도 있었고, 그 책을 읽었을 때는 그냥 스쳐지나쳤을 법한 낯선 문장들도 있었다.
한 장 한 장 읽다보니, 내 눈 앞으로 그리고 기억 저편에 있던 공지영 작가의 책과 등장인물, 그들이 엮인 상황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고등어>의 엄숙함, <착한 여자>의 우울함, <즐거운 나의 집>의 유쾌함, <도가니>의 분노, <사랑 후에 오는 것들>의 이질감,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의 안타까움. 이 소설 속의 상황들은<수도원 기행>에서 장엄하게 나타나기도 했고, <아주 가벼운 깃털 하나>에서 소소하게 언급되기도 하며,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에서 친근하게 표현되기도 하면서, 보다 구체적인 언어로 내게 전달되었다.
1부터 365까지 숫자를 무시한 채(행여라도 독자들이 하루 한 문단씩 천천히 읽기를 의도한 편집자의 의도가 있었다고 할 지라도) 책 한 권을 단숨에 읽어버렸다. 바로 몇 시간 전에 내가 내뱉은 말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기록에 남겨둘 정도의 가치가 있다고 스스로 여길 수 있는 말이 하루에 한 마디도 안 되는 수준의 나로서는 이렇게 책 한 권으로 엮을 수 있을 정도로 방대한 활동을 한 작가의 역량과, 시대를 함께하는 공감, 수려한 아포리즘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렇기에 저자의 말처럼 이 책은 누구보다도 저자 자신을 위한 책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03 너는 무엇을 바라는가
가끔씩 나는 나 자신에게 묻고 싶어진다. 너는 무엇을 바라는가, 하고. 부신 햇살과 흰 신작로, 멀리서 일렁이는 호수, 파스스 떠는 진초록의 나뭇잎, 그리고 모란이 지는 그와 나와 또 미래 아이들의 뜰, 돌절구와 연못, 그리고 대청마루에 깃드는 서늘한 평화, 그를 만나기 위해 몰래 밤거리로 뛰쳐나갔을 때 어느 집 담장에 핀 월계꽃 향기...... 모든 이들의 가엾음, 모든 부당한 권력에 대한 분노, 모든 여린 것들에 대한 사랑에 점점 무디어져가는 네 자신을 경계하라. 다시금 다시금 경계하라. 깊은 밤과 환한 낮, 제 몸에 달린 천 개의 눈 중 단 한 개는 언제나 감지 않는 용처럼 마지막 한 눈은 언제나 가장 충혈된 채로 그 밤 잠 못 드는 가장 고통스러운 이를 지켜보아야 하리.
<고등어>
- 12쪽
05 그럴 것!
진심으로 직면할 것, 그렇게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할 것! 그리고 남은 시간은 견딜 것, 반드시 그 뒤에는 사랑을 통한 성숙이 온다는 것을 믿을 것!
<인간에 대한 예의>
- 14쪽
12 서두르지 말자
가야 할 것은 분명 가야 하지만 또 다른 한편 와야 할 것들도 분명히 온다. 그러니 서두르지 말자.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
- 23쪽
18 나이가 들면서 깨닫는 것
나이가 들면서 내가 깨달은 것 중의 하나는 젊은 시절 내가 그토록 집착했던 그 거대(巨大)가 실은 언제나 사소하고 작은 것들로 우리에게 체험된다는 사실이었다.
말하자면 고기압은 맑은 햇살과 쨍한 바람으로, 저기압은 눈이나 안개, 구름으로 온다는 것이다.
<아주 가벼운 깃털 하나>
- 29쪽
21 오늘을 만끽해라
그래 가끔 눈을 들어 창밖을 보고 이 날씨를 만끽해라. 왜냐하면 오늘이 너에게 주어진 전부의 시간이니까. 오늘만이 네 것이다. 어제에 관해 너는 모든 것을 알았다 해도 하나도 고칠 수도 되돌릴 수도 없으니 그것은 이미 너의 것은 아니고, 내일 또한 너는 그것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단다. 그러니 오늘 지금 이순간만이 네가 사는 삶의 전부, 그러니 온몸으로 그것을 살아라.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
- 33쪽
59 살아 있는 것들은 쓸모없는 걸 가지고 있다
살아 있는 것과 살아 있지 않은 것의 차이 중 가장 뚜렷한 것은 살아 있는 것들은 대개 쓸모없는 것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그게 화분이라면 필요 없는 누런 이파리나, 그게 꽃이라면 시들거나 모양이 약간 이상한 꽃 이파리들을 달고 있다는 거다. 반대로 죽어 있는 것들, 그러니까 모조품들은 완벽하게 싱싱하고, 완벽하게 꽃이라고 생각되는 모양들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아주 가벼운 깃털 하나>
- 73쪽
69 네가 원하는 것을 해라
네가 원하는 것을 해라. 괜찮아. 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하는 자유는 인내라는 것을 지불하지 않고는 얻어지지 않는다.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자유롭게 피아노를 칠 때까지 인내하면서 건반을 연습해야 하는 나날이 있듯이, 훌륭한 무용가가 자연스러운 춤을 추기 위해 자신의 팔다리를 정확한 동작으로 억제해야 하는 나날이 있듯이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그것을 포기해야 하는 과정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즐거운 나의 집>
- 81쪽
70 네 속에 없는 것을 남에게 줄 수 없다.
무엇인가에 표상을 투사하는 너의 배후는 무엇이니? 네 속에 없는 것을 네가 남에게 줄 수는 없다. 네 속에 미움이 있다면 너는 남에게 미움을 줄 것이고, 네 속에 사랑이 있다면 너는 남에게 사랑을 줄 것이다. 네 속에 상처가 있다면 너는 남에게 상처를 줄 것이고, 네 속에 비꼬임이 있다면 너는 남에게 비꼬임을 줄 것이다.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어떤 의미든 너와 닮은 사람일 것이다. 자기 속에 있는 것을 알아보고 사랑하게 된 것일 테니까. 만일 네가 미워하거나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너와 어떤 의미든 닮은 사람일 것이다. 네 속에 없는 것을 그에게서 알아볼 수는 없을 테니까 말이야. 하지만 네가 남에게 사랑을 주든, 미움을 주든, 어떤 마음을 주든 사실, 그 결과는 고스란히 네 것이 된다.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
- 84쪽
99 가진 자의 공포
가진 자가 가진 것을 빼앗길까 두려워하는 에너지는, 가지지 못한 자가 그것을 빼앗고 싶어하는 에너지의 두 배라고 한다. 가진 자는 가진 것의 쾌락과 가지지 못한 것의 공포를 둘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가진 자들이 가진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거짓말의 합창은 그러니까 엄청난 양의 에너지를 포함하고 있어서 맑은 하늘에 천둥과 번개를 부를 정도의 힘을 충분히 가진 것이었다.
<도가니>
- 118쪽
116 내가 맞다로 생각하는 삶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대로 내 삶을 사는 것, 그건 이기적인 것이 아닙니다.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대로 남에게 살도록 요구하는 것, 그것이 이기적인 것입니다. 부인은 내가 나의 행복을 희생하여 당신을 사랑하기를 원하시겠습니까? 부인은 부인의 행복을 희생하여 나를 사랑하고 나는 나의 행복을 희생하여 당신을 사랑하겠고, 그래서 불행한 사람 둘이 생겨나겠지만, 사랑 만세! - 안소니 드 멜로 신부의 <깨어나십시오> 중에서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
- 136쪽
133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
세상은 수도원이 아닌 것이다. 나 역시 다시 젊어지고 싶지는 않다. 젊다는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형벌이라고 나는 아직도 주관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너무나 많은 가능성이 있다는 원칙과,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능성일 뿐 우리가 택할 길은 몇 개 안 된다는 현실과의 괴리가 괴로운 것이다. ...... 하느님 품에 안기는 날까지 우리는 방황하리라, 라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노트에 적어가지고 다니던 내 사춘기가 떠올랐다. 아니 한술 더 떠 괴테는 "모은 인간은 그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고 <파우스트>에서 쓰기도 했다.
<공지영의 수도원 기행>
- 154쪽
184 금빛 열쇠를 줄게
돌이켜 생각해보면, 네 아빠는 엄마를 사랑했었단다. 네 외할아버지도 엄마를 사랑했었지. 몸시도 사랑했단다. 하지만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그랬던 거야. 다른 것이 틀린 것이라고 믿었던 거야. 성모마리아가 존경을 받는 이유는 그녀가 구세주를 낳았기 때문이 아니란 걸 엄마는 그제야 깨달아버렸다. 달빛 아래서 엄마는 거실 바닥에 엎디었지. 그녀가 존경을 받는 이유는 그녀가 그 아들을 죽음에 이르도록 그냥 놔두었다는 거라는 걸 알게 된 거야. 모성의 완성은 품었던 자식을 보내주는 데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거실에 엎디어서 엄마는 깨달았다. 이 고통스러운 순간이 은총이라는 것을 말이야. 사랑하는 딸, 너의 길을 가거라. 엄마는 여기 남아 있을게. 너의 스물은 엄마의 스물과 다르고 달라야 하겠지. 엄마의 기도를 믿고 앞으로 가거라. 고통이 너의 스승이라는 것을 잊지 마라. 네 앞에 있는 많은 시간의 결들을 촘촘히 살아내라. 그리고 엄마의 사랑으로 너에게 금빛 열쇠를 줄게. 그것으로 세상을 열어라. 오직 너만의 세상을.
<즐거운 나의 집>
- 209쪽
194 축복
홍이야, 나이가 들면 자신이 바라던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때로는 축복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단다.
<사랑 후에 오는 것들>
- 220쪽
209 사람들은 제 나름대로 불행하다.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결코 행복하지 않다는 걸 명수는 안다. 그건 불행한 사람이 불행하다고 말을 꺼낼 수 있는 용기와는 다른 일이었다. 행복은 말해질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행복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사람들이 행복이라는 실체가 어딘가에 살고 있고 자신만이 거기서 제외되었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제 나름대로 불행한 것이다.
<착한 여자>
- 236쪽
243 딜레마, 딜레마들
내 생이 결코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내 인생은 나의 것이어야 한다는 이 딜레마. 우리 삶에 상처 입힌 사람들을 용서할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리면서 바로 그 순간에도 나는 또한 남에게 잊지 못할 상처를 주고 있다는 딜레마...... 그렇게 살았거든 후회하지 말고 후회하려거든 그렇게 살지 말아야 했다고, 까뮈가 그렇게 말했다. 내가 만일 내 인생의 전환기를 느낀다면 그것은 내가 얻은 바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가 잃은 그 무엇 때문이라고. 지난 세월 동안 나는 노력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는 터무니 없는 자신감을 잃었고, 누군가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줄 거라는 기대를 잃었다. 그러니 이제 또 무엇을 더 잃고 서울로 돌아가야 하는지, 새벽이 올 때까지 그렇게 혼자 뒤척이며 나는 깨어 있었다.
<공지영의 수도원 기행>
- 272쪽
265 비극
인간에게 늙음이 맨 마지막에 온다는 것은 얼마나 저주인가, 그 저자는 말했다. 신은 실수를 했다. 기어다니는 벌레였다가 스스로 자기를 가두어두는 번데기였다가 드디어 천상으로 날아오르는 나비처럼 인간의 절정도 생의 맨 마지막에 와야 한다고 인간은 푸르른 청춘을 너무 일찍 겪어버린다고.
<존재는 눈물을 흘린다 / 고독>
- 296쪽
274 삶은 언제나 지나간 다음에야
... 삶은 언제나 지나간 다음에야 생생해지는 거라는 걸 나는 이제 알 것 같아요.
<존재는 눈물을 흘린다 / 길>
- 305쪽
277 그는 다시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을까
나는 그의 호주머니 속에 들어가 살고 싶었다. 그의 호주머니 속에 들어가 그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 따라가고 싶었다. 가끔 그의 손이 내가 살고 있는 호주머니 속으로 들어오면 그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잠들고 싶었다. 나는 그와 잠시도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았다. 그의 모든 것을 알고 싶었고 참견하고 싶었고 그래서 내가 그의 일부가 되고 싶었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사랑을 하면 그냥 그렇게 해도 되는 줄 알았다. 사랑하는 마음만으로 충분하다고 믿는 나는 내 감정에 충실한 이기주의자였다.
<사랑 후에 오는 것들>
- 311쪽
281 앉아 있을 때 앉아 있고
스님,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습니까? 그랬더니 그 스님이 대답하더구나. 앉아 있을 때 앉아 있고, 일어설 때 일어서며 걸어갈 때 걸어가면 됩니다. 하는 거야. 아저씨가 다시 물었지. 그건 누구나 다 하는 일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은 앉아 있을 때 일어날 것을 생각하고 일어설 때 이미 걸어가고 있습니다.
<즐거운 나의 집>
- 316쪽
288 나이가 든다는 것
인생이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진보하거나 추락하거나 둘 중 하나밖에 없는 것 같더라고요. 앞으로 나아가거나 추락하거나. 제자리에 머무는 것도 힘든 것 같아요. 그런 게 무섭죠. 가장 좋은 방법은 좋은 책 읽고, 기도하고 그런 것 같아요. 내 힘으로 안 되는 일이 참 많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자체가 사람을 참 편안하게 해주는 것 같아요.
<괜찮다, 다 괜찮다>
- 323쪽
309 너의 꿈
네가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꿈을 꾸는 것과 그것 외에는 어떤 가능성도 차단하는 것과는 다른 거야. 꿈이 네 속에 있어야지 네가 그 꿈속으로 빠져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
-3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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