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 - 산업도시 거제, 빛과 그림자 질문의 책 22
양승훈 지음 / 오월의봄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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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는 제목에서 풍기는 무거움과는 다르게 대단히 재미있는 책이다. 사회학 학술서처럼 보이고 내용도 그게 맞기는 하지만 서술 방식이 에세이같아 가독성이 매우 뛰어나다. 제공하는 통계들은 저자가 자신의 주장에 객관성을 부여하기 위한 시도일뿐 반드시 독해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이토록 술술 읽히는 사회학 책이 언제 또 있었는가를 돌이켜보면, 글쎄 기억이 나질 않는다. 거의 독보적인 책이다.


저자는 대우조선해양이라는 회사에 5년간 근무하며 경험한 일들을 토대로 산업도시 거제와 대한민국의 조선업을 분석하고 그 미래를 조망한다. 나는 이 시도가 사실상 대한민국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돌아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조선업의 시작과 함께 탄생한 거제의 중산층이, 조선업의 몰락으로 인해 해체될 위기를 그리지만 이를 산업도시 거제와 조선업 종사자들로만 한정해 해석할 이유는 없다. 현재 대한민국이 누리는 부의 대부분은 제조업으로부터 축적된 것이며 우리가 중산층이라 부르는 사람들이 이 산업의 절정과 함께 탄생했기 때문이다. 제조업이 차지하는 경제 비중은 매년 감소하고는 있지만 여전히 30%에 달한다. 이는 OECD 가입국 중 최고이며 세계의 공장이라 불리는 중국보다도(29%) 높은 수치이다. 혹자는 이것이 한국 경제의 문제라 지목하며 여타의 선진국들과 달리 제때에 서비스업으로 방향 전환을 하지 못한 결과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사람들은 자기가 익숙히 접하는 현상과 미디어를 통해 세상을 파악하기 때문에 그 현상을 지탱하는 내부 구조에 대해서는 둔감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이마트나 롯데백화점에 가서 물건을 사지 그 제품을 생산한 공장에서 사지 않는다. 미디어는 연일 4차 산업 혁명을 부르짖고 AI, IoT, 스마트 산업 혁명을 쏟아내며 새롭게 탄생한 유니콘을 조명할뿐 어느 시골 구석에 쳐박힌 알짜 중소기업의 공장에 눈을 돌리진 않는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이 가장 강한 건 아니다. 세상은 마치 이들의 주도로 굴러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제조업이 탄생시킨 중산층과 높은 그들의 소득으로 인한 욕망의 발전이 없었다면 그들이 설 무대는 결코 도래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한민국에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어느 대학을 나오든, 무슨 전공을 했든, 근면과 성실만 있으면 누구나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던 시절 말이다. 이제 그런 유토피아는 사라져갈 위기에 처해 있다. 가장 흔한 분석은 이렇다. 기술로는 선진국을 따라가지 못하고 가격으로는 개발도상국과 경쟁이 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선진국들은 어땠을까? 세계 조선업의 패권은 영국에서 스웨덴, 스웨덴에서 일본 그리고 한국으로 넘어왔다. 이들은 단물이 빠진 제조업을 버리고 제때에 방향을 전환했기 때문에 오늘날처럼 부자 나라가 된걸까? 그 말이 맞다면 제조업은 단순히 미래로 가기 위한 통과의례에 불과할 것이다.


공장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우리 머리 속에 무엇이 떠오르는지 생각해보자. 쉼없이 돌아가는 기계, 소음, 먼지, 재해, 기름에 쩐 작업복,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나 가는 곳. 산업과 직군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대기업 제조 공장을 한번이라도 찾아본 사람은 이것이 얼마나 큰 편견인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나는 제조업이 구시대의 산물이라는 생각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특히 '부의 평등'을 고려하는 사람들이라면 절대로 제조업에서 눈을 돌려선 안된다. 1980년대, 대한민국의 구석에서 시작한 조선업은 수십만 명의 사무직과 생산직을 고용하며 그들에게 크고 안정적인 소득을 안겨줬다. 그들은 용접 기술이나, 지게차 운전 면허증이나, 도색 기술 하나만 가지고 있어도 그런 부를 거머쥘 수 있었다. 5조 5천억이 넘는 매출에 20%에 육박하는 영업이익을 내는 우리나라 최고의 IT 기업 네이버는 9천 명 정도의 인원을 고용하지만 고작 2~3%의 영업이익을 내는 한심한 LG전자는 7만 명이 넘는 사람을 고용한다. 최저시급이나 받는 생산직들이 많은 탓 아니냐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지금 당장 인터넷에 대기업 생산직 평균 연봉을 검색해 보기 바란다. 앞으로 대한민국에 수백개의 IT 유니콘 기업이 탄생한다 하더라도 제조업 절정기만큼 두터운 중산층을 만들어내지는 못할 것이다. 고용 창출 능력과 다양성 측면에서 제조업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대한민국도 올라올 만큼 올라왔으니 이제 공단으로 대표되는 제조업은 전부 개발도상국에 맡기고 제약, 반도체 같은 최첨단 공장과 금융, 관광, IT 서비스를 중심으로 경제를 재편해야 할까? 아니. 문제가 있으면 고치면 되지 버릴 필요는 없다.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는 정확히 이런 의견을 견지하며 세계 1등의 조선업을 해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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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텐 국가를 말하다 - 국가라면 꼭 해야 할 것, 절대 해서는 안 될 것!
이중텐 지음, 심규호 옮김 / 라의눈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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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톈은 중국의 르네상스인으로 불리는 학자로 그 별명에서 알 수 있듯 다양한 분야에 통달한 지식인이다. 본업은 미학이지만 이름을 얻은 건 CCTV에서 진행했던 <삼국지 강의> 덕분이었다. 나는 방송이 아니라 책으로 접했는데 우리 세대가 공유하는 삼국지에 대한 열광을 감안하더라도 엄청난 책이었다. 두꺼운 책 두 권을 눈깜짝할 새에 읽었던 기억이다.


이중톈 선생의 가장 큰 특징은 가독성이다. 아무리 어려운 개념이라도 그의 손을 거치고 나면 엉켰던 실타래가 술술 풀리는 것처럼 시원하게 설명이 된다.


그런데 이 책은 좀 다르다. 그 자신이 선언하듯 <국가를 말하다>는 학술서다. 한자어 특유의 모호한 뜻풀이가 반복되는가 하면 내용 자체가 친숙하지 않아 그것이 학계에 널리 통용되는 정의인지 아니면 이중톈 선생의 독자적 해석인지 구분할 길이 없다. 이러한 모호함 때문에 독자는 똑같은 말이 반복된다고 느낄 수도 있고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처럼 지나치게 사변적인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다음은 '악'에 대한 선생의 설명이다.


악은 음악의 뜻이자 쾌락의 뜻이기도 하다. '덕으로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음악처럼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데, 예로 상하의 질서를 정연하게 만들고 악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화창하게 만든다(p. 189).


이는 서주 시대의 덕치 제도를 설명하면서 주공이 왜 '예악'을 덕치의 실행 방법으로 고안했는지를 말하는 대목이다. 얼핏보면 어려울 게 없는 문장이지만 하나하나 세세히 뜯어보면 모호한 구석이 많다. 우선 '악이 쾌락의 뜻' 이라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악이 사람들의 마음 속에 즐거움을 불러일으킨다는 말일까? '덕으로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서' '음악처럼 조화를 이뤄' 야 한다는 건 그렇다치고 '예로 상하의 질서를 정연' 하게 하는 걸 납득해도 '악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화창하게 만든다' 는 건 뭘까? 딱딱한 위계질서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마음을 악으로 치유해줘야 한다는 말일까? 다음은 이 단락의 결론으로 오묘한 동어반복의 미로에 빠지는 기분이 든다.


물론 여기서 중심이란 덕이고 두 개의 기본점은 예와 악이다. 예는 차이를 변별하고 악은 조화로운 통일을 추구한다. 예는 질서를 중시하고 악은 화해를 강조한다. 예와 악은 모두 덕치를 위한 것이다. 덕치가 근본이 되어 예악을 실시하는 것, 이것이 바로 '예악 제도' 이다(p. 189).


<국가를 말하다>는 역사, 그 중에서도 제국의 제도에 집중한다. 시황제의 천하 통일 이후 수 많은 왕조가 중원 제패와 멸망을 반복하며 대륙의 주인으로 거쳐갔지만 '제도' 만큼은 큰 변화없이 이천년 넘게 중국을 지배해왔다는 게 이 책의 요지다. 선생은 2천년간 이어져온 제국의 제도에 '공화'는 없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공화'란 무엇인가? 왕이 없다는 것이며 국가의 주인인 백성에게 권력이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대륙에 공화의 전통이 없었기 때문에' 라는 말에 숨은 진짜 의미가 무엇일까? 힌트를 주자면 중국 당국이 이 책의 출판을 막으려 했다는 것이다.


사실 공화의 전통을 가진 나라는 전 세계의 역사를 통털어도 손에 꼽을 정도이다. 시민 혁명이 일어난 프랑스에는 공화의 전통이 있었는가? 영국은? 독일은? 비슷한 제도를 공유했던 한국은 어땠을까? 대한민국은 이중톈 선생이 중화에 크게 미치지 못하는 소국이라 칭할만한 나라지만 공화의 전통없이도 그 장점을 발견하고 수많은 사람이 피땀을 흘려 제도로 확립한 나라다. 12억 인민도 못해낸 일을 그 10분의 1도 안된 시민들이 이뤄낸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은 선생의 진의를 확인하고나서야 올바른 가치를 지닐 수 있다. '공화의 전통이 없다' 라는 선생의 말은 사실상 전제국가로 나아가는 자국의 상황을 변명하기 위함이었을까? 아니면 국가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에둘러 표현한 풍자일까? 나는 어느정도 판단이 섰지만 독자들을 위해 그 답은 보류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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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예측 - 세계 석학 8인에게 인류의 미래를 묻다
유발 하라리 외 지음, 오노 가즈모토 엮음, 정현옥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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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대한 그나마 의미있는 평가는 '<사피엔스>와 <호모데우스>와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의 괜찮은 요약본' 일 것이다. 책에는 세계에서 인정받는 석학들과의 대담이 담겨 있지만 유발 하라리에게 배정된 분량이 제일 많다. '초예측'이라는 거시적 명제에 가장 어울리는 대담을 보여준 것도 그가 거의 유일하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문제가 아니라 출판사의 의도된 책략때문에 발생한 오류다. 애초에 이 책은 편집자에 의해 끼워 맞춰진 책이다. 일본의 한 저널리스트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지식인들과 인터뷰한 내용을 '초예측'이라는 의도에 짜집기 했으니 당연히 그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저널리스트는 인류의 미래나 한국의 미래가 아니라 일본의 안녕을 위해 인터뷰를 기획했다. 그의 의도로 보면 유발 하라리나 제러드 다이아몬드 같은 거시적 질문에서 시작해 윌리엄 페리 같은 정치, 지정학적 문제로(북핵 문제가 일본에 미치는 영향을 탐구한다) 흐르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역시 '초예측'이란 관점에선 뭔가 어색한 면이 있는 게 사실이다. 일본이라는 나라가 한국과 비슷한 문제를 겪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출판사가 이 대범한 기획을 엄두나 낼 수 있었을까? 아무튼 유발 하라리의 책 내용을 다시 한 번 정리한 건 유익했으나 그 이후로는 영 별로였다. 서점에서 책을 고르는 건 역시 이런 문제점이 있다. 꼼꼼히 따지기 보단 매대에 놓인 책의 위치와 겉모양의 번지르르함에 눈을 뺏기게 된다.


그건 그렇고 사람들은 왜 미래를 예측하고 싶어할까? 예측 하면 대비를 할 수 있고 대비 하면 이득을 얻거나 손실을 최소화 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뿐만아니라 '나만 알고 있는 비밀'이란 어딘지 모르게 심리적, 지적 우월감을 자아낸다. 음모설 광신자들이 거기에 빠져드는 이유도 비슷하다. 예측에는 아이러니가 있어서 모든 사람이 그 내용을 100% 신뢰하고 대비하면 오히려 예측이 어긋나는 결과가 발생한다. 예컨대 내일 갑작스런 비가 내려 전국민이 젖을 것이라는 예언이 공개되면 많은 사람들이 우산을 챙길 것이고 따라서 '전국민이 젖을 것' 이라는 예언은 틀린 것이 되버리고 만다. 그래서 예측은 소수만 알고 있어야 의미가 있다. 독서라는, 이제는 매우 희귀한 행위를 통해 '초예측' 을 읽는데에는 아마도 이런 이유도 얽혀 있을 것이다.


기획 의도에 맞게 꽉 짜인 책은 아니지만 등장하는 면면이 나쁜 것은 아니다. 새로운 사상가를 소개받는다는 측면에선 나름 유익한 면이 있고, 특히 그들의 책을 찾아볼 수 있다는 점에선 의미있는 확장성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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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넨도nendo의 문제해결연구소 - 세계적인 브랜드의 "문제해결사" 사토 오오키의 번뜩이는 디자인 사고법!
사토 오오키 지음, 정영희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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넨도는 디자인을 리서치하는 과정에서 만난 일본의 프로덕 디자인 에이전시다. 젓가락(http://bitly.kr/wAraH)에서 우산(http://bitly.kr/GA61yH), 가구(http://bitly.kr/OSqWTQ)까지 분야를 넘나드는 창의력에 한때 많은 영감을 받았다. 우리 나라에선 후가사와 나오토나 하라 켄야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만들어내는 결과물은 두 사람 못지 않게 훌륭하다.


일본 특유의 젠하고 군더더기 없는 디자인은 세 사람의 공통점이지만 확실한 차이도 존재한다. 하라 켄야와 후가사와 나오토가 어포던스를 기반으로 형태 자체가 기능을 포함하는 계산된 디자인을 하는 반면 넨도는 보는 재미가 훨씬 더 강한 제품을 만들어낸다. 넨도의 작품들은 어딘지 모르게 다른 뭔가를 연상하게 만드는 특징이 있다. 그 이유는 아마도 넨도 디자인 연구소가 메타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백번 설명하는 것보다는 한 번 보는 게 더 나으므로 아래 링크를 확인해보라. 이 작품은 넨도 디자인 연구소가 <곰돌이 푸>를 이용해 만든 '가구'다. 우선 링크를 누르기 전 당신의 머리 속에 곰돌이 푸와 그의 친구들이 등장하는 가구의 모습을 떠올려보기 바란다. 다 됐는가? 그렇다면 넨도의 답을 확인해 보자.


http://bitly.kr/QOBQsj


이 디자인이 대단한 이유는 그 어디에도 캐릭터가 등장하지 않지만 사람들의 머리 속엔 이미 그들이 들어와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은유의 힘이다. 잘 사용하기만 하면 은유는 직접적 명시보다 더 강한 힘을 갖는다.


<넨도의 문제해결연구소>는(참고로 넨도는 회사명이지 사람의 이름이 아니다) 그들의 작업 과정과 창조의 비법을 기술한 책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별 내용이 없는 것들도 많고 결국엔 방법을 아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걸 어떻게 해내느냐가 문제라는 걸 깨닫게 되지만 건질 게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그의 결과물과 당신이 해결해야 할 일을 일대일로 놓고 하나씩 하나씩 요소를 맞춰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그 중에서 공통점을 뽑아내고 넨도의 해결 과정을 그대로 적용해본다.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라 이런 작업 방식은 별로 도움이 될 게 없다고 생각한다면 이런 건 어떨까?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을 하나 골라 캐릭터들을 모두 꺼낸 뒤 그들을 과거 혹은 미래, 아니면 우주나 다른 장소로 보내보는 것이다. 성별이나 직업을 바꿔 보는 것도 좋다. 만약에 곰돌이 푸가 회사원이라면 어떨까? 치열한 경쟁 사회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면의 목소리(꿀을 줘요!)를 쫓는 그의 모습에서 치유를 얻는 소설이 될까? 아니면 그 비현실적인 행동에서 자신의 현재 모습을 반성하는 계기가 될까? 모르겠다. 하지만 뭐가 됐든 재미있을 것 같다. 사람들은 당신이 쓴 그 소설이 곰돌이 푸라는 것도 모르고 재미있게 읽을 것이다. 어딘지 모르게 기시감을 느끼면서. 이 대목에서 우리는 아주 충격적인 진실을 깨달아야 한다. 지금껏 우리가 보고 느끼고 즐겼던 것들이 사실은 이미 존재했던 그 무엇의 은유는 아니었을까? 하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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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고독한 시월의 밤
로저 젤라즈니 지음, 이수현 옮김 / 시공사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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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의 바치는 장미> 이후 근 10년 만에 다시 든 로저 젤라즈니다. SF 대가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 책은 엄연히 판타지에 속하는 마법 활극이다. SF 순혈론자들에겐 더러운 작품이라 불릴만하지만 나는 정말 순식간에 읽어치웠다.


이야기는 크툴루 신화에 기반한다. 크툴루 신화는 호러 소설의 거장 러브크래프트가 창안한 이야기로 우주의 시작부터 존재한 태초의 신들, 이 세상을 공포와 광기로 지배한 괴물들이 주인공인 이야기다. 서양인들은 촉수를 굉장히 사악하고 불길할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는데 그래서인지 이 신들도 대개 촉수를 가진 심해어처럼 묘사되곤 한다. <워크래프트> 연대기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티탄이 우주에 질서를 부여하기 전 아제로스를 지배하던 고대신 요그사론, 느조스, 이샤라즈, 크툰을 떠올리면 된다.


당연하게도 소설 속의 등장인물들은 두 패로 갈려 싸움을 벌인다. 하나는 봉인된 고대신들을 다시 세상 밖으로 꺼내려는 개방자와 계속해서 가둬두려는 폐쇄자. 이 두 패는 각자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마법 재료를 모으다 할로윈 날 강림 장소에 모여 싸움을 벌인다. 여기서 진쪽은 응당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데, 그게 무엇인지 자세히 묘사되지는 않는다.


<고독한 시월의 밤>은 빈틈없는 설정으로 꽉 짜여진 소설은 아니다. 어이없을 정도로 화려한 등장인물들만 봐도 그렇다. 우선 19세기 말 영국의 유명한 연쇄살인마 잭 더 리퍼가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그런가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괴물의 이름으로 착각하는 천재 박사 프랑켄슈타인도 등장한다. 드라큘라 백작은 당연하고, 늑대인간, 드루이드, 마녀, 미치광이 목사 그리고 저 위대한 탐정 셜록 홈즈까지 이 소동에 개입한다. 싸움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저마다 조력자를 하나씩 데리고 있으며 개, 고양이, 뱀, 올빼미, 들쥐, 다람쥐 등의 동물들이 그 역할을 맡는다. 그들은 일반 동물들과는 달리 마법을 이해하고 서로 정보를 주고받으며 곧 닥쳐올 싸움에 대비한다. 소설은 이 동물들의 관점에서 진행되며 심지어 이들의 활약이 그 주인을 압도한다는 측면에서 실질적 주인공이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쯤 얘기하면 이미 이 책을 읽어야 할 사람과 읽지 말아야 할 사람이 정해졌을 것이다. 정통 SF만을 즐기는 사람이 로저 젤라즈니라는 이름을 듣고 집어들었다면 애들 장난 같은 설정에 일종의 모욕을 느낄 수도 있다. 설령 판타지에 익숙한 사람이라도 셜록 홈즈가 늑대인간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보면 무슨 이런 잡탕이 다 있나 하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10월 한 달 동안 벌어지는 일을 차곡차곡 쌓아가며 미스터리와 액션, 추리를 덧대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로저 젤라즈니가 왜 대가인지, 왜 그가 이 세계를 풍미한 위대한 소설가인지 고개를 절로 끄떡이게 한다. 장르를 떠나 이 소설은 대단히 잘 쓰였다. 재미라는 측면에선, 더할 나위가 없다.


비록 원했던 SF는 아니었지만 로저 젤라즈니의 새로운 면을 발견한 것은 커다란 수확이었다. 무엇보다 믿고 집어 들 수 있는 작가가 하나 늘었다는 차원에선 대단히 즐거운 결과였다. 길지도 않은 소설, 잠깐이면 후다닥 읽어치울 수 있으니 직접 확인하고 판단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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